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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4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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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4장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우린 아직도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 넘버 원, 첫 번째 문제를 아직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었으나 이 문제를 극복하고 문제를 넘어서서 마침내 성숙 할 수 있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던 첫 번째 문제는 소위 분열의 문제, 혹은 분쟁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이 됩니다. 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나뉘어졌느냐? 첫째는 그 사람에 대한 소속, 지도자에 대한 소속, 누구를 따라가야 되느냐? 바울을 따라가느냐? 베드로를 따라가느냐? 이런 사람에 대한 소위 소속감의 문제였고 둘째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그런 경향들, 어떤 지도자가 더 똑똑하냐 누가 더 많이 아느냐? 사람의 지혜를 높이려고 하는 경향,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사람의 역할의 몰이해 특별히 지도자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누구의 역할이 더 중요하냐? 안 중요하냐 이런 문제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 결국 누가 더 나은 지도자냐 이 사람에 대한 판단, 이런 판단의 경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 다양한 그룹들을 그룹핑을 분파의식을 촉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4장에서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경향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도대체 누구냐?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 4장에서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 가 누구냐는 것은 이 세 가지 이미지를 온전히 우리가 종합할 때 영적 지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미지란 첫째는 노예의 이미지입니다. 노예.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사형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검투사,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많이 존재했던 원형 경기장에서 이 야수들과 더불어 싸움을 하고 있었던 이 검투사들, 사형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검투사들, 세 번째 이미지는 아버지. 이 세 가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소개한 이 세 가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첫째는 노예입니다. 노예, 그들은 종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결국 어떤 역할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들이 결국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냐, 우리가 1절을 다같이 읽겠어요,1절과 2절입니다, 1절과2절 다같이 시작,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자들 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네,1절과2절에 그 영적 지도자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한 표현은 뭐냐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표현입니다, 일꾼, 또 하나는 맡은자 라는 표현입니다, 맡은자. 먼저 일꾼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겠어요. 여기서 일꾼이라는 것은 본래 로마시대에 군함, 싸우는 전투함 같은 큰 배 들이 있으면 배 밑창에는 노예들이 노를 젖습니다. 노를 젖는 사람, 이걸 휘패레테스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이 단어가 나온 거예요, 일꾼이라는 말이, 영어로는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이다. 언더로얼, 그래서 아래에서,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 혹시 과거에 벤허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벤허가 일시적으로 노예가 되어서 배 밑창에 들어가서 열심히 그 노예틍에 섞여서 노를 젖고있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일꾼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거기 이제 감독이 있습니다. 네 감독이 있고 제일 높은 사람은 선장이고 그 다음에 또 감독이 있어요, 감독이 뭐 신호를 주면 시작 그러면 노를 막 젖기 시작해요, 중지 그러면 스톱하고, 오른쪽 하면 오른쪽으로 노를 젖고 왼쪽 그러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젖는 그 노예들, 그 노예들 가운데 그 노예들 가지고 누가 더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노예들은 그냥 노를 젖고 있는 사람, 감독이나 배 위의 캡틴인 선장의 명령에 따라서 단순히 노를 젖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노예들을 가지고 누가 높으냐, 낮으냐, 누가 나으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오직 그들에 있어서 역할이라는 것은 뭐냐면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예요. 결국 영적 지도자들은 누구냐? 그것은 그리스도가 부른 사람들이고 주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다, 일꾼들이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맡은 자 라는 표현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뭐예요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절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맡은 자들, 오이코노모스, 히랍어로 오이코노모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을 한다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하우스 매니저, 혹은 하우스 키퍼,집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혹은 스튜어드라는 낱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청지기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스튜어드가 있어요, 스튜어드, 스튜어디스가 있는데 그 분들은 거기서 열심히 손님들을 섬기고 서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단어가 본래 히랍어 단어로 씌어졌을 때 그 뜻은 뭐냐면, 특별히 가장 중요한 역할이 뭐냐면 부지런히 집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건 다 주인의 양식이지만 주인이 맡겨준, 주인이 분배하는 배급하는 양식을 잘 받아 가지고 제 때에 양식을 부지런히 공급하는 사람, 그게 맡은 자 라는 것이다, 맡은 자. 결국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긴 것, 맡겨주신 그것을, 맡겨주신 것이 뭐냐? 여기 계속 죽 보면, 우리가 여기서 맡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비밀,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 에서 이 비밀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지만 와도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말씀을 맡은 자.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배고프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렇게 공급하는 사람, 그것이 맡은 자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특별히 뭐 자기가 양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니예요. 그냥 주인이 맡겨주신 그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나누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이 두 가지 표현을 썼어요. 어떤 표현입니까? 일꾼이고, 맡은 자다. 일꾼이고 맡은 자. 일꾼과 맡은 자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경쟁은 있을 수 있어요. 누가 더 잘 하냐, 거기에 판단이라는 분위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로 이 판단이라는 것은 두 가지 소스로 판단이 야기 될 수 초래될 수가 있습니다. 우선 내가 나를 판단해 보고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런 판단이 있을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될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꾼이다, 농땡이 치는 일꾼이다. 이런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판단 때문에 일꾼들 나름대로 어떤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고 아파할 수도 있고 괴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첫 번째 부분에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일꾼들이 경험하고 있는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거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판단자는 자기 자신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유일한 판단자, 그리고 절대적인 판단자가 계시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분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꾼들이 그 분을 바라보고 나를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그 분, 그 분을 바라보고 묵묵히 충성을 다 하는 것이 일꾼들의 자세다.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자꾸만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일꾼들 가지고 자꾸만 판단하게 되면 그 일꾼들 힘만 뺀다는 얘기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때에 저 분들이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세워 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변 사람들, 영적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이 두 가지 잘못된 판단,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려는 경향, 또 이웃들에 의해서 매우 객관적이지 못한, 혹은 정확하지 못한 판단을 받을 때 이것을 어떻데 극복해 나갈 수가 있느냐? 3절4절의 교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근데 이런 말씀을 읽고 나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반성이나 평가의 무용론을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꾼들이 서로 모여서 교육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평가한다는 것, 이것은 자기발전과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판단, 그것이 궁극적인 판단이거나 그것은 완전한 판단일 수는 없다. 우리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너무나 판단하려고 할 경우에 자학의 경향에 빠져 들어갈 수가 있어요. 내가 왜 이래, 왜 이래 그러다가 난 아무 것도 못해, 이런 자학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작은 일이다. 나도 되도록 나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4절에 그 이유는 내가 자책 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굉장히 잘해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잘 한거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완벽한 판단자가 나를 판단해 주시는 그 날 비로서 나의 모든 사역의 마지막 결과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4절에서 나를 정말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분은 누구라고 그랬어요? 주님이시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다. 5절 다같이 읽겠어요, 시작,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을 어떻게 우리가 바라봐야 되느냐? 첫 번째 이미지 그것은 종이다, 노예다. 누구의 종 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를 부르신 분, 나를 고용한신 그 분, 그러니까 영적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누구를 바라봐야 되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지도자들 자꾸만 나만 바라보면 내가 자격있나? 내가 목자 자격있나? 아 자꾸 생각하다가 아! 자격없지, 그래 나는 못해 그래 두 손들고 항복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주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노예 된 사람들의 사역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불러 주셨고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니까 노 젖기 시작 그러면 젖는 거예요, 그냥 오른쪽, 왼쪽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 분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을 공급해서 섬기는 거예요. 묵묵히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충성스럽게 감당한다면 주님 오시는 그 날, 주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실 것인 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칭찬이 없어도, 그래서 내가 실망되는 순간이 있어도, 실망하지 말 것은 그 분이 마지막 날 나에게 칭찬을 주실 것을 우리는 모두 믿을 수가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요, 두 번째 이미지, 영적 지도자들의 두 번째 이미지는 이것은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고난의 측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고난,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반드시 겪어야할 어떤 고난의 이미지를 우린 두 번째 이미지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9절과 10절에서 볼 수가 있어요. 우리 9절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 여기서 9절에 보시면요,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맨 마지막에 두셨다. 이건 이런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면 되요. 로마 사람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승리한 사람이 되어서, 개선의 퍼레이드, 개선의 행진을 지금 열면서 축제를 열고, 개선 군인이 되어서 입성을 합니다. 장군부터 좍 서서 들어오겠죠. 맨 뒤에 누가 끌려오냐면 포로된 사람들이 끌려와요. 포로된 자들이 맨 마지막에 끌려와요.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포로 중에서 쓸만한 건강한 포로들을 데려다가 로마는 그 당시에 검투사로 많이 써먹었어요, 검투사. 그래서 이제 콜로세움, 유명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이런 경기장에 들어가서 검투사로 싸우는 자로 양성시켜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경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수, 야생 동물들, 사자 같은 동물들을 튀어나오게 하고 그 사자와 더불어 사람이 싸우게 만듭니다. 그때 원형경기장, 그 주변에 둘러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예요? 구경거리다. 마치 영적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이다. 그런 꼴이다. 바울이 자기자신을 때때로는 그렇게 느낀 것이다. 이것이 뭐 영적 지도자들의 모든 삶의 현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때때로는 그렇게 구경꾼이 되는 인생을 살아간다.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복음 전하다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 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밤낮 쳐다보기도 하고, 뭐 감옥에 안 가도 영적 지도자가 되면 감시하는 자가 많아요. 괜히 째려보죠 다 이렇게, 사 생활이 없어지고 자기의 모든 삶이 드러나고 노출되고 또 구경거리가 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복음 때문에 받아야만 하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쿼바디스 같은 과거의 명화, 영화를 봐도 거기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겪어야 했던 그 무수한 고난의 상은 고나의 발자취, 고난의 걸음걸음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사도인 내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자같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야수의 동물처럼 그렇게 죽어서 피투성이가 되서 삶을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데 이런 고난의 삶을 지도자들이 살고있는데 그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삶은 어떠했느냐 바울이 그것을 대조하고 있어요, 비교하고 있습니다. 8절 한번 읽어보세요. 바울이 굉장히 섭섭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4장 8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며 우리가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자,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고 역경 속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바울이 봤을 때 어떻게 느꼈냐면, 너희들은 이미 배부르다, 너희들은 이미 부요하다, 너희들은 왕 노릇 하려고 한다, 모여서 밤낮 뭐 하냐면 영적 지도자들을 판단이나 하고 앉아 있단 말이죠. 바울이 나으냐, 베드로가 나으냐, 그리고 나는 바울 따라가겠다, 누구는 베드로 따라가겠다, 바울과 베드로는 그런 생각도 안 하는데 교인들 스스로가 말이죠 나누어서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고 말이죠, 배부른 모습처럼 앉아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나가서 전도하고, 사람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고 그 일 하기도 바쁜데 말이죠 그런 일 안하고 지도자들 앉아서 판단하고 그것이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없죠, 옛날에만 있어요, 그런 일은, 네, 저는 반드시 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고난을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어떤 고난에 대한 각오와 결단은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 우리 주님보다 나을 것이 없잖아요. 우리 주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는데, 그러나 고난으로 끝난 것은 아니예요, 고난 건너편에 영광이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영광에 앞서서 그 분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 그리고 그 후에 예비된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영광은 원하지만 뭘 원하지 않아요? 고난은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가 되시는 그 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면 복음을 위해서 수호하기를 원하는 모든 종류의 영적 지도자들은 어떤 고난을 반드시 각오해야 됩니다. 피할 수 없이 우리가 각오해야 되는 어떤 고난이 있어요. 이게 그냥 뭐 구경거리 정도가 아니라 바울이 어떻게 느꼈냐면, 더 아주 극단적인 언어를 여기 13절에서 쓰고 있는데요,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절 다같이 시작,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두 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뭐냐면 먼지고 또 하나는 때, 목욕탕에 가서 밀리는 때, 그런데 그 표현을 썼어요.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 취급을 받고 먼지 취급을 받고, 만물의 지꺼기 같이 되었다. 그런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단 말 이예요, 비방을 당한즉, 그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권면 하고, 네, 12절에는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면서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견디고 참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 이예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보면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빌리 선데이 라는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는데요 이 전도자가 사역 초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이 분이 아주 말을 잘하는 그런 전도자였어요. 그러나 좀 야성적인 스타일에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틀이 잡히지 않은 그런 설교자로서, 젊은 목회자로서, 어떤 개척교회 비슷한 어떤 작은 교회에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초기 경험이었는데, 한 번은 아주 열렬하게 자기 깐에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설교를 끝냈는데 저 뒤에 나와서 이제 교인들과 인사를 건네는데 어떤 교인들은 와서 "아! 목사님 그런 열렬하고 뜨거운 설교를 처음 들었습니다" 아 칭찬을 맡아 하는 거예요, 그 옆에 이제 아주 나이 많은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옆에서 쿡쿡 찌르면서 "기도해!" 그러더래요 "뭐라고 기도할까요?"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래서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 다음에 어떤 교인이 오더니 "목사님! 무슨 설교를 그렇게 무례하게 하십니까? 시험 들게 하십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니까 목사님이 또 "기도해!" 그러더래요, 그래서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러니까 "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네, 사역을 하다보면 칭찬을 받을 때고 있고, 격려를 받을 때도 있고, 낙심할 때도 있고, 이 목사만이 아니예요, 여러 이 목자들도 마찬 가지예요, 영적 지도자들의 반열에 서서 사역을 하다보면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또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나고, 언젠가 제가 얘기했지만 제가 성경인물 중에서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인물은 요나 입니다, 요나. 그 이유가 왜 그래요? 요나 같아서 그래요. 나하고 비슷해요. 어떤 때는 막 도망가고 싶어요. 내가 왜 목사를 해 가지고 목사 안 하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여러분도 그럴거에요. 목장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섬기다 보면, 이따금씩 가슴 아픈 일도 경험 하다보면 내가 이거 괜히 목자를 해 가지고 고생한다. 생각될 때가 있어요,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고, 그러나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면, 내가 그의 제자라면 우리가 나중에 얻을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만한 고통과 고난쯤이야 견딜 수가 있어야 한다. 고통을 통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 저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 일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 세기의 아주 유대나라의 이스라엘에 이단자가 한 사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말씀도 잘하고, 자기를 다시온 메시야 라고 부르짖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어요. 그러나 그의 삶이 너무 호사스럽고 왕과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근데 한번은 어떤 젊은 그리스도인 이 그에게 도전을 했어요, 도전을 "나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 왜 그대는 못 믿는가?" 그랬더니 이 젊은 청년이 이단자에게 유명한 말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선생이여! 당신의 손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손에 만약 못 자국이 있다면 당신이 나의 구세주라고 나도 고백을 할 것이요" 우리는 우리의 손에 있는 못 자국 그것을 오히려 훈장처럼 생각하고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받는 고난, 저는 이 것이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는데, 나는 구경거리처럼 취급을 당한다, 죽이기로 작정된 사람처럼, 사형수처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축복하겠다, 나는 참겠다, 견디겠다 복음을 위해서,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들이고 영적인 사역자들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자, 우리가 두 가지 이미지를 봤어요, 첫째는 노예, 두 번째는 검투사, 혹은 사형수, 마지막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사이에 있어서 스스로를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14절과 15절에 나와 있어요. 같이 읽겠습니다. 14절15절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에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무슨 말이냐 하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죠,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나에게 깨우침을 주고 도움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선생님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들과 나와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고,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관계는 그냥 영향을 미치는 선생님들과의 관계 정도가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일종의 내가 영적인 아비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비로서 바울이 그들에게 존경받고 싶어서 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책망 할 수가 있다는거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이 말이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많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충고나, 이 따끔한 교훈을 그들이 제대로 수용 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비라면 내 책망을 받아달라 이 말입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이예요. 마지막 절 한번 보세요.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1절 다같이 시작,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말만 그냥 많이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능력에 있다, 여기서 능력이란 의미는 삶이라는 의미예요. 너희들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삶을 바꾼 흔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말만 많단 말 이예요. 말만 많다고, 이따금씩 진정한 성숙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판단만 하고, 비판만 하고, 이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교인들이 종종 있어요, 종종 있어요.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은 바울은 그것이 교만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만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18절에서 그것을 지적합니다. 18절 같이 읽습니다. 19절 시작,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우리가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아주 여러번, 이 교만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절에도 나와요 19절에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게 속히 나아가서 뭐예요 교만한 너희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이 얼마나 말 잘 하느냐 올바른 소리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말 잘 하냐,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 달라 이 말이에요. 정말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제대로 전도하고 있는지 뭐 전도도 안 하고 영혼도 사랑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면서 말만 하고 파벌만 만들고 말이지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교인들이 있었단 말이죠. 바울이 가슴 아파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아버지로 안다면 내가 복음을 전해서 너희들이 예수님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냐, 내 말을 들어다오 이 말입니다, 내 말을 들어다오. 한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버지하고의 좋은 관계, 특별히 성장과정에 있어서 부모의 충고와 교훈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싫은 소리여도 부모가 하는 잔소리, 부모의 교훈을 좀 받고 고치고 이게 성숙이란 말 이예요. 바울이 그런 뜻에서 내가 아비와 같은 심정에서 말한다. 듣겠느냐 이 말이죠. 교만하지 말고 말만 너무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삶을 보여달라. 바울이 가슴아파서 하는 소리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기보다도 바울이 설교 더 잘 해, 베드로가 설교 더 잘 해, 앉아서 말이지 영적 지도자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따지고 앉아있다 말이죠. 이게 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현장이었어요. 그것이 현장이었어요. 이런 현장은 어느 교회, 어느 역사 속에나 있을 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머리가, 신앙적인 지식이 축적될 때 우리가 이 판단의 유혹, 또 교만한 자리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위대한 설교를 들었느냐가 중요함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붙들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단 말 이예요, 어떻게 사느냐. 오늘 설교 잘했다, 오늘 설교 그렇지 뭐, 오늘은, 겨우 반응이 그거란 말이지. 설교의 판단을 위해 설교가 선포됩니까? 선포된 말씀, 그 말씀 붙들고 어떻게 내 삶 속에 적용하느냐, 살아가느냐 이것이 중요한거란 말이죠.
헨리 나우엔의 책방에 가도 이 나우엔의 많은 책들이 있는데 요즘 그 영성 운동에 큰 별처럼 많은 감동처럼 글을 남기신 분 이예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은,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이 분이 테레사 머더, 테레사 수녀를 인도로 방문했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이 그렇게 성안 스러운, 성자같은, 예수님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은, 비결은 뭡니까?" 그 때 나우엔이 들었던 대답은 아주 평범한 대답이었어요, 아주 평범한 대답,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해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하더래요 "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냥 주님 말씀 따르려고 노력을 했죠, 그리고 주님의 종들의 말씀, 주님의 종들의 말씀을 주님 따르려고 애썼고, 주님의 종들이 준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단순한 삶, 그게 크리스찬 라이프예요, 뭐 별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는게 많은지 그냥 핏대 올리고 떠들고 소리지르고 말이죠, 앉아서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삶이 없어요 삶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첫 시간부터 계속 강조했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이 말을 잘 받아들였어요. 반항하지 않았어요, 반발하지 반항하지 않았어요, 잘 받아들이고, 고쳤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교회가 되었어요. 저는 우리교회도,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런 성숙한 교회가 되고 성숙한 교인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성경 지식이 얼마나 증가하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얼마나 좋은 설교를 듣느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능력의 현장에 어떻게 사느냐, 하나님이 내게 찾아온 증거가 있느냐,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린 증거가 있느냐, 그것이 능력이예요.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보겠다. 잘난 척 하지말고, 괜히 돌아다니면서 파벌이나 만들고 싸우고 돌아다니지 말고, 겸손하게 말씀 붙들고 회개하고, 주님 닮아가고, 고린도 교회는 이 첫 번째문제, 첫 번째 문제, 첫 번째 위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사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그러한 자세로 한 평생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이 말씀을 통해 받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역사 하시고 하나님 오늘도 이 말씀 붙들고 날마다 살아가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무더운 여름철, 그러나 오늘도 한 주간을 살면서 이 수요일 주의 말씀 공부하기 위해서 나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주셨던 그 말씀 받았습니다. 말씀처럼, 말씀 붙들고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말씀만 아는 자 그래서 교만한자,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교만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가 변화되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그런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노예입니다. 노예, 그들은 종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결국 어떤 역할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들이 결국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냐, 우리가 1절을 다같이 읽겠어요,1절과 2절입니다, 1절과2절 다같이 시작,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자들 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네,1절과2절에 그 영적 지도자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한 표현은 뭐냐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표현입니다, 일꾼, 또 하나는 맡은자 라는 표현입니다, 맡은자. 먼저 일꾼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겠어요. 여기서 일꾼이라는 것은 본래 로마시대에 군함, 싸우는 전투함 같은 큰 배 들이 있으면 배 밑창에는 노예들이 노를 젖습니다. 노를 젖는 사람, 이걸 휘패레테스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이 단어가 나온 거예요, 일꾼이라는 말이, 영어로는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이다. 언더로얼, 그래서 아래에서,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 혹시 과거에 벤허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벤허가 일시적으로 노예가 되어서 배 밑창에 들어가서 열심히 그 노예틍에 섞여서 노를 젖고있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일꾼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거기 이제 감독이 있습니다. 네 감독이 있고 제일 높은 사람은 선장이고 그 다음에 또 감독이 있어요, 감독이 뭐 신호를 주면 시작 그러면 노를 막 젖기 시작해요, 중지 그러면 스톱하고, 오른쪽 하면 오른쪽으로 노를 젖고 왼쪽 그러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젖는 그 노예들, 그 노예들 가운데 그 노예들 가지고 누가 더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노예들은 그냥 노를 젖고 있는 사람, 감독이나 배 위의 캡틴인 선장의 명령에 따라서 단순히 노를 젖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노예들을 가지고 누가 높으냐, 낮으냐, 누가 나으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오직 그들에 있어서 역할이라는 것은 뭐냐면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예요. 결국 영적 지도자들은 누구냐? 그것은 그리스도가 부른 사람들이고 주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다, 일꾼들이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맡은 자 라는 표현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뭐예요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절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맡은 자들, 오이코노모스, 히랍어로 오이코노모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을 한다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하우스 매니저, 혹은 하우스 키퍼,집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혹은 스튜어드라는 낱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청지기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스튜어드가 있어요, 스튜어드, 스튜어디스가 있는데 그 분들은 거기서 열심히 손님들을 섬기고 서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단어가 본래 히랍어 단어로 씌어졌을 때 그 뜻은 뭐냐면, 특별히 가장 중요한 역할이 뭐냐면 부지런히 집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건 다 주인의 양식이지만 주인이 맡겨준, 주인이 분배하는 배급하는 양식을 잘 받아 가지고 제 때에 양식을 부지런히 공급하는 사람, 그게 맡은 자 라는 것이다, 맡은 자. 결국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긴 것, 맡겨주신 그것을, 맡겨주신 것이 뭐냐? 여기 계속 죽 보면, 우리가 여기서 맡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비밀,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 에서 이 비밀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지만 와도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말씀을 맡은 자.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배고프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렇게 공급하는 사람, 그것이 맡은 자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특별히 뭐 자기가 양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니예요. 그냥 주인이 맡겨주신 그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나누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이 두 가지 표현을 썼어요. 어떤 표현입니까? 일꾼이고, 맡은 자다. 일꾼이고 맡은 자. 일꾼과 맡은 자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경쟁은 있을 수 있어요. 누가 더 잘 하냐, 거기에 판단이라는 분위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로 이 판단이라는 것은 두 가지 소스로 판단이 야기 될 수 초래될 수가 있습니다. 우선 내가 나를 판단해 보고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런 판단이 있을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될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꾼이다, 농땡이 치는 일꾼이다. 이런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판단 때문에 일꾼들 나름대로 어떤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고 아파할 수도 있고 괴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첫 번째 부분에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일꾼들이 경험하고 있는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거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판단자는 자기 자신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유일한 판단자, 그리고 절대적인 판단자가 계시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분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꾼들이 그 분을 바라보고 나를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그 분, 그 분을 바라보고 묵묵히 충성을 다 하는 것이 일꾼들의 자세다.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자꾸만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일꾼들 가지고 자꾸만 판단하게 되면 그 일꾼들 힘만 뺀다는 얘기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때에 저 분들이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세워 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변 사람들, 영적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이 두 가지 잘못된 판단,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려는 경향, 또 이웃들에 의해서 매우 객관적이지 못한, 혹은 정확하지 못한 판단을 받을 때 이것을 어떻데 극복해 나갈 수가 있느냐? 3절4절의 교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근데 이런 말씀을 읽고 나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반성이나 평가의 무용론을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꾼들이 서로 모여서 교육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평가한다는 것, 이것은 자기발전과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판단, 그것이 궁극적인 판단이거나 그것은 완전한 판단일 수는 없다. 우리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너무나 판단하려고 할 경우에 자학의 경향에 빠져 들어갈 수가 있어요. 내가 왜 이래, 왜 이래 그러다가 난 아무 것도 못해, 이런 자학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작은 일이다. 나도 되도록 나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4절에 그 이유는 내가 자책 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굉장히 잘해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잘 한거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완벽한 판단자가 나를 판단해 주시는 그 날 비로서 나의 모든 사역의 마지막 결과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4절에서 나를 정말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분은 누구라고 그랬어요? 주님이시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다. 5절 다같이 읽겠어요, 시작,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을 어떻게 우리가 바라봐야 되느냐? 첫 번째 이미지 그것은 종이다, 노예다. 누구의 종 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를 부르신 분, 나를 고용한신 그 분, 그러니까 영적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누구를 바라봐야 되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지도자들 자꾸만 나만 바라보면 내가 자격있나? 내가 목자 자격있나? 아 자꾸 생각하다가 아! 자격없지, 그래 나는 못해 그래 두 손들고 항복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주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노예 된 사람들의 사역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불러 주셨고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니까 노 젖기 시작 그러면 젖는 거예요, 그냥 오른쪽, 왼쪽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 분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을 공급해서 섬기는 거예요. 묵묵히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충성스럽게 감당한다면 주님 오시는 그 날, 주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실 것인 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칭찬이 없어도, 그래서 내가 실망되는 순간이 있어도, 실망하지 말 것은 그 분이 마지막 날 나에게 칭찬을 주실 것을 우리는 모두 믿을 수가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요, 두 번째 이미지, 영적 지도자들의 두 번째 이미지는 이것은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고난의 측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고난,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반드시 겪어야할 어떤 고난의 이미지를 우린 두 번째 이미지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9절과 10절에서 볼 수가 있어요. 우리 9절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 여기서 9절에 보시면요,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맨 마지막에 두셨다. 이건 이런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면 되요. 로마 사람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승리한 사람이 되어서, 개선의 퍼레이드, 개선의 행진을 지금 열면서 축제를 열고, 개선 군인이 되어서 입성을 합니다. 장군부터 좍 서서 들어오겠죠. 맨 뒤에 누가 끌려오냐면 포로된 사람들이 끌려와요. 포로된 자들이 맨 마지막에 끌려와요.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포로 중에서 쓸만한 건강한 포로들을 데려다가 로마는 그 당시에 검투사로 많이 써먹었어요, 검투사. 그래서 이제 콜로세움, 유명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이런 경기장에 들어가서 검투사로 싸우는 자로 양성시켜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경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수, 야생 동물들, 사자 같은 동물들을 튀어나오게 하고 그 사자와 더불어 사람이 싸우게 만듭니다. 그때 원형경기장, 그 주변에 둘러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예요? 구경거리다. 마치 영적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이다. 그런 꼴이다. 바울이 자기자신을 때때로는 그렇게 느낀 것이다. 이것이 뭐 영적 지도자들의 모든 삶의 현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때때로는 그렇게 구경꾼이 되는 인생을 살아간다.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복음 전하다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 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밤낮 쳐다보기도 하고, 뭐 감옥에 안 가도 영적 지도자가 되면 감시하는 자가 많아요. 괜히 째려보죠 다 이렇게, 사 생활이 없어지고 자기의 모든 삶이 드러나고 노출되고 또 구경거리가 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복음 때문에 받아야만 하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쿼바디스 같은 과거의 명화, 영화를 봐도 거기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겪어야 했던 그 무수한 고난의 상은 고나의 발자취, 고난의 걸음걸음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사도인 내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자같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야수의 동물처럼 그렇게 죽어서 피투성이가 되서 삶을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데 이런 고난의 삶을 지도자들이 살고있는데 그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삶은 어떠했느냐 바울이 그것을 대조하고 있어요, 비교하고 있습니다. 8절 한번 읽어보세요. 바울이 굉장히 섭섭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4장 8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며 우리가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자,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고 역경 속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바울이 봤을 때 어떻게 느꼈냐면, 너희들은 이미 배부르다, 너희들은 이미 부요하다, 너희들은 왕 노릇 하려고 한다, 모여서 밤낮 뭐 하냐면 영적 지도자들을 판단이나 하고 앉아 있단 말이죠. 바울이 나으냐, 베드로가 나으냐, 그리고 나는 바울 따라가겠다, 누구는 베드로 따라가겠다, 바울과 베드로는 그런 생각도 안 하는데 교인들 스스로가 말이죠 나누어서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고 말이죠, 배부른 모습처럼 앉아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나가서 전도하고, 사람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고 그 일 하기도 바쁜데 말이죠 그런 일 안하고 지도자들 앉아서 판단하고 그것이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없죠, 옛날에만 있어요, 그런 일은, 네, 저는 반드시 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고난을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어떤 고난에 대한 각오와 결단은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 우리 주님보다 나을 것이 없잖아요. 우리 주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는데, 그러나 고난으로 끝난 것은 아니예요, 고난 건너편에 영광이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영광에 앞서서 그 분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 그리고 그 후에 예비된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영광은 원하지만 뭘 원하지 않아요? 고난은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가 되시는 그 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면 복음을 위해서 수호하기를 원하는 모든 종류의 영적 지도자들은 어떤 고난을 반드시 각오해야 됩니다. 피할 수 없이 우리가 각오해야 되는 어떤 고난이 있어요. 이게 그냥 뭐 구경거리 정도가 아니라 바울이 어떻게 느꼈냐면, 더 아주 극단적인 언어를 여기 13절에서 쓰고 있는데요,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절 다같이 시작,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두 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뭐냐면 먼지고 또 하나는 때, 목욕탕에 가서 밀리는 때, 그런데 그 표현을 썼어요.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 취급을 받고 먼지 취급을 받고, 만물의 지꺼기 같이 되었다. 그런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단 말 이예요, 비방을 당한즉, 그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권면 하고, 네, 12절에는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면서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견디고 참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 이예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보면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빌리 선데이 라는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는데요 이 전도자가 사역 초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이 분이 아주 말을 잘하는 그런 전도자였어요. 그러나 좀 야성적인 스타일에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틀이 잡히지 않은 그런 설교자로서, 젊은 목회자로서, 어떤 개척교회 비슷한 어떤 작은 교회에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초기 경험이었는데, 한 번은 아주 열렬하게 자기 깐에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설교를 끝냈는데 저 뒤에 나와서 이제 교인들과 인사를 건네는데 어떤 교인들은 와서 "아! 목사님 그런 열렬하고 뜨거운 설교를 처음 들었습니다" 아 칭찬을 맡아 하는 거예요, 그 옆에 이제 아주 나이 많은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옆에서 쿡쿡 찌르면서 "기도해!" 그러더래요 "뭐라고 기도할까요?"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래서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 다음에 어떤 교인이 오더니 "목사님! 무슨 설교를 그렇게 무례하게 하십니까? 시험 들게 하십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니까 목사님이 또 "기도해!" 그러더래요, 그래서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러니까 "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네, 사역을 하다보면 칭찬을 받을 때고 있고, 격려를 받을 때도 있고, 낙심할 때도 있고, 이 목사만이 아니예요, 여러 이 목자들도 마찬 가지예요, 영적 지도자들의 반열에 서서 사역을 하다보면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또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나고, 언젠가 제가 얘기했지만 제가 성경인물 중에서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인물은 요나 입니다, 요나. 그 이유가 왜 그래요? 요나 같아서 그래요. 나하고 비슷해요. 어떤 때는 막 도망가고 싶어요. 내가 왜 목사를 해 가지고 목사 안 하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여러분도 그럴거에요. 목장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섬기다 보면, 이따금씩 가슴 아픈 일도 경험 하다보면 내가 이거 괜히 목자를 해 가지고 고생한다. 생각될 때가 있어요,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고, 그러나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면, 내가 그의 제자라면 우리가 나중에 얻을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만한 고통과 고난쯤이야 견딜 수가 있어야 한다. 고통을 통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 저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 일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 세기의 아주 유대나라의 이스라엘에 이단자가 한 사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말씀도 잘하고, 자기를 다시온 메시야 라고 부르짖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어요. 그러나 그의 삶이 너무 호사스럽고 왕과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근데 한번은 어떤 젊은 그리스도인 이 그에게 도전을 했어요, 도전을 "나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 왜 그대는 못 믿는가?" 그랬더니 이 젊은 청년이 이단자에게 유명한 말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선생이여! 당신의 손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손에 만약 못 자국이 있다면 당신이 나의 구세주라고 나도 고백을 할 것이요" 우리는 우리의 손에 있는 못 자국 그것을 오히려 훈장처럼 생각하고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받는 고난, 저는 이 것이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는데, 나는 구경거리처럼 취급을 당한다, 죽이기로 작정된 사람처럼, 사형수처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축복하겠다, 나는 참겠다, 견디겠다 복음을 위해서,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들이고 영적인 사역자들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자, 우리가 두 가지 이미지를 봤어요, 첫째는 노예, 두 번째는 검투사, 혹은 사형수, 마지막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사이에 있어서 스스로를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14절과 15절에 나와 있어요. 같이 읽겠습니다. 14절15절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에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무슨 말이냐 하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죠,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나에게 깨우침을 주고 도움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선생님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들과 나와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고,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관계는 그냥 영향을 미치는 선생님들과의 관계 정도가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일종의 내가 영적인 아비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비로서 바울이 그들에게 존경받고 싶어서 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책망 할 수가 있다는거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이 말이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많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충고나, 이 따끔한 교훈을 그들이 제대로 수용 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비라면 내 책망을 받아달라 이 말입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이예요. 마지막 절 한번 보세요.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1절 다같이 시작,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말만 그냥 많이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능력에 있다, 여기서 능력이란 의미는 삶이라는 의미예요. 너희들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삶을 바꾼 흔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말만 많단 말 이예요. 말만 많다고, 이따금씩 진정한 성숙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판단만 하고, 비판만 하고, 이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교인들이 종종 있어요, 종종 있어요.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은 바울은 그것이 교만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만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18절에서 그것을 지적합니다. 18절 같이 읽습니다. 19절 시작,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우리가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아주 여러번, 이 교만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절에도 나와요 19절에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게 속히 나아가서 뭐예요 교만한 너희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이 얼마나 말 잘 하느냐 올바른 소리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말 잘 하냐,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 달라 이 말이에요. 정말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제대로 전도하고 있는지 뭐 전도도 안 하고 영혼도 사랑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면서 말만 하고 파벌만 만들고 말이지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교인들이 있었단 말이죠. 바울이 가슴 아파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아버지로 안다면 내가 복음을 전해서 너희들이 예수님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냐, 내 말을 들어다오 이 말입니다, 내 말을 들어다오. 한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버지하고의 좋은 관계, 특별히 성장과정에 있어서 부모의 충고와 교훈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싫은 소리여도 부모가 하는 잔소리, 부모의 교훈을 좀 받고 고치고 이게 성숙이란 말 이예요. 바울이 그런 뜻에서 내가 아비와 같은 심정에서 말한다. 듣겠느냐 이 말이죠. 교만하지 말고 말만 너무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삶을 보여달라. 바울이 가슴아파서 하는 소리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기보다도 바울이 설교 더 잘 해, 베드로가 설교 더 잘 해, 앉아서 말이지 영적 지도자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따지고 앉아있다 말이죠. 이게 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현장이었어요. 그것이 현장이었어요. 이런 현장은 어느 교회, 어느 역사 속에나 있을 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머리가, 신앙적인 지식이 축적될 때 우리가 이 판단의 유혹, 또 교만한 자리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위대한 설교를 들었느냐가 중요함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붙들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단 말 이예요, 어떻게 사느냐. 오늘 설교 잘했다, 오늘 설교 그렇지 뭐, 오늘은, 겨우 반응이 그거란 말이지. 설교의 판단을 위해 설교가 선포됩니까? 선포된 말씀, 그 말씀 붙들고 어떻게 내 삶 속에 적용하느냐, 살아가느냐 이것이 중요한거란 말이죠.
헨리 나우엔의 책방에 가도 이 나우엔의 많은 책들이 있는데 요즘 그 영성 운동에 큰 별처럼 많은 감동처럼 글을 남기신 분 이예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은,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이 분이 테레사 머더, 테레사 수녀를 인도로 방문했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이 그렇게 성안 스러운, 성자같은, 예수님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은, 비결은 뭡니까?" 그 때 나우엔이 들었던 대답은 아주 평범한 대답이었어요, 아주 평범한 대답,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해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하더래요 "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냥 주님 말씀 따르려고 노력을 했죠, 그리고 주님의 종들의 말씀, 주님의 종들의 말씀을 주님 따르려고 애썼고, 주님의 종들이 준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단순한 삶, 그게 크리스찬 라이프예요, 뭐 별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는게 많은지 그냥 핏대 올리고 떠들고 소리지르고 말이죠, 앉아서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삶이 없어요 삶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첫 시간부터 계속 강조했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이 말을 잘 받아들였어요. 반항하지 않았어요, 반발하지 반항하지 않았어요, 잘 받아들이고, 고쳤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교회가 되었어요. 저는 우리교회도,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런 성숙한 교회가 되고 성숙한 교인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성경 지식이 얼마나 증가하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얼마나 좋은 설교를 듣느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능력의 현장에 어떻게 사느냐, 하나님이 내게 찾아온 증거가 있느냐,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린 증거가 있느냐, 그것이 능력이예요.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보겠다. 잘난 척 하지말고, 괜히 돌아다니면서 파벌이나 만들고 싸우고 돌아다니지 말고, 겸손하게 말씀 붙들고 회개하고, 주님 닮아가고, 고린도 교회는 이 첫 번째문제, 첫 번째 문제, 첫 번째 위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사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그러한 자세로 한 평생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이 말씀을 통해 받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역사 하시고 하나님 오늘도 이 말씀 붙들고 날마다 살아가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무더운 여름철, 그러나 오늘도 한 주간을 살면서 이 수요일 주의 말씀 공부하기 위해서 나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주셨던 그 말씀 받았습니다. 말씀처럼, 말씀 붙들고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말씀만 아는 자 그래서 교만한자,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교만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가 변화되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그런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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