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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6: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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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오늘 공부하게 이 될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부디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음행의 죄, 그 음행의 죄에 대한 극복의 처방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우리는 이미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음행의 범죄의 정체를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에 들어와서 6장 1절 이하에서 소위 법정 고소의 문제, 법정 송사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들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법정 고소의 문제가 무엇을 둘러싼 교인들 상호간의 고소였는지 그 정확한 내용을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문맥상으로 볼 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처하고 있었던 부도덕의 문제, 음행의 문제를 두고 파생된 법정 고소의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자 법정 고소의 문제에 이어서 소위 불의한 자들에 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9절을 다시 한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여기 음란 하는 자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음란이라는 단어는 본래 일체의 모든 성적인 부도덕을 통칭하는 그런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우상 숭배가 나옵니다. 이 우상 숭배도 저는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성적인 부도덕, 음행과 관련된 우상숭배를 바울이 지적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소위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고린도 도시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에,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리스에도 지진의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마는 고린도 도시, 옛 고린도 터전에 가면 지금도 산성 아주 높은 곳에 신전의 터가 아주 웅장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도시의 시민들을 바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바라보면서 그 아래 타운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무려 천명의 창기들이, 공창 창기들이 고용되어서 종교적인 그런 미명 아래서 도덕적인 매우 그 불륜의 범죄들이 공식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던 모습들을 역사의 기록은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이것도 성적인 부도덕과 매우 관련된 우상숭배였음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서 간음하는 자, 여기서 간음이라는 것은 특별히 혼외정사, 기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 간음자들…. 그 다음에 탐색하는 자, 이것은 아마도 미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지적하는 단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남색, 학자들은 아마도 이것은 동성애와 관련된 범죄에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지적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10절에 가면 그밖에, 직접적으로 성적인 범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그 밖에 여러 가지 범죄들의 리스트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고린도 도시가 처하고 있었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바깥의 사회의 부도덕성이 오히려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었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켜야할 교회가 오히려 사회에 의해서 거꾸로 영향을 받아 교회 마저도 부패하고 있었던 모습,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현장이었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도 마치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부도덕 그리고 음행의 범죄 속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음행의 범죄를 지적했습니다마는 이제 고린도 전서 6장 9절 이하에서 바로 이런 음행의 범죄를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한다고, 또 극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극복해야 할 이유, 극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 고린도전서 6장 9절 이하를 통해서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이 음행의 범죄를 마땅히 극복해야 할 이유, 또 극복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둘째는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셋째는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둘째로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셋째로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우리는 이 부도덕의 범죄, 특별히 음행의 범죄를 극복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이리 9절을 읽었습니다만,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10절에도 되풀이됩니다. 다같이 10절 시작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단순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주인이신 왕이신 하나님 그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통치하는 완성된 이 천국의 본질이야말로 거룩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자 사도 요한이 천국의 커텐을 살짝 열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천국, 영원한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때 이 나라에 누가 들어오고 있는가? 또 누가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한번 요한 계시록 21장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21장 성격의 마지막 책 마지막 부분인 21장 27절에 보시면, 요한계시록 21장 마지막 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27절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26절하고 대조를 이루고 있어요. 26절은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그 영원한 나라로 들어오겠고" 그리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천국은 이 세상의 좋은 것이 거기 다 있어요. 이 세상의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저 영원한 나라에 어떤 연속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귀한 것, 깨끗한 것,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 그것은 저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될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고 의로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보존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나 또 천국은 어떤 곳이냐?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모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땅의 모든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모든 추한 것들 더러운 것들, 무가치한 것, 부도덕한 것, 27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누가 들어갈 수 있겠어요? 나도 거짓말 한 적이 있는데, 어떤 목사님이 아이들이 노는 곁을 지나가고 있었대요. 막 게임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러면서 제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자기들이 제일 큰 상을 주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목사님이 "니들 뭐하고 있니?" 자기들이 거짓말 제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그러니까. "그런 게임 하면 안돼, 그런 게임 하면 못써."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그분에게 멀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거짓말 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나 한적 없어" 그러니까 옆에 있던 아이가 "저 사람에게 상 주자!" 그러더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아무도 결코 범죄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크리스찬은 결코 범죄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죠. 그러나 그 죄를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고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때 우리는 죄사함 받은 자로 용서함 받은 자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받은 자로서 아직도 죄를 포기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못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런 죄를 떠나야 할 이유, 그런 죄를 포기해야 할 이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나라, 그러므로 만약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이것은 일찍 포기될수록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예요.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음행의 죄를 포기하고 극복하고 주 앞에 서야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행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11절의 말씀이예요. 다 같이 1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거기 중요한 동사 세 단어가 나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씻음, 거룩함, 의롭다하심. 그것이 이미 얻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얻을 것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 희랍어의 부정과거라는 독특한 시제가 쓰여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예요.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미 씻음과 '죄 씻음을 얻었다' 이미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도덕적 개념보다도 이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이미 구별돼 있다. 죄는 우리를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죄와 더불어 동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죄로부터 혹은 죄 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별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는 한번 우리를 떠난 이후에도 계속 사단은 이 죄를 이용해서 우리를 정죄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에게 Guilt complex를 주고 죄책감을 주고, 마치 용서받은 후에도 아직도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지 못한 존재인양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고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의지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미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예요. 우리는 씻음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가졌단 말이예요. 우리는 성도가 되었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런 새로운 신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위치를 인식할 때, 우리는 새 사람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한가? 바로 그런 얘기예요. 바울의 얘기는. 그렇다면 새 사람답게 살아야 되잖아요. 새 사람이된 내가 아직도 옛사람이 범하는 죄 가운데 계속 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에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후에 길을 가다가 옛날에 사귀던 여자를 만났어요. 그래 어거스틴이 모른척하고 지나갔던 모양이예요. 그러니까 막 이 여자가 따라오면서, '나예요. 나 나 나'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어거스틴이 돌아서서 이런 말을 햇다고 해요. '너는 너지만, 나는 나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당신이 알던 내가 아니다.' '나는 이제 변화되었다. 새로워졌다.' 우리 한국 교회 야사에 남긴 유명한 스토리 가운데, 우리 김익두 목사님이 예수 믿고 깡패 같은 분이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면, 부고장을 돌렸대요. 살아 있는데 부고장을 돌렸어요. '김익두 죽었다.' '옛 사람은 죽었다' 이 말이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내 옛사람은 죽었고,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성도로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으로 새로워졌다면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함이 마땅치 아니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씻어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역을 무효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구원받은 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죄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세 번째로, 첫째는 뭐예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두번째로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세 번째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 이 음행의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로서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13절 이하의 말씀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다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새로운 존재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 성령의 통치하에 들어간 우리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소유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하니님의 주권 우리 1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성경학자들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 이것이 그 당시 그 희랍사회 Greek Society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고 그래요. 유행하던 말. 사람들이 막 탐식을 하면서, 요즘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 탐식의 죄를 극복하기 위한 놀라운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데요. 아주, 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만. 목하 3키로 뺐습니다.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다시 쪘어요. 김기태 목사님은 7키로를 빼셨답니다. 그들이 탐식을 하면서 변명하던, 자주 인용하던, 거의 속담처럼 사용되는 말이 뭐냐면, '식물은 배를 위하여, 배는 식물을 위하여' 왜 식물이 존재하느냐, 내 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배는 왜 존재하느냐, 배는 먹으라고 존재한다. 그러면서 막 먹었다는 거예요. 똑 같은 원리를 그들의 성욕에 간주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성적인 욕구가 존재하는 이유. 몸이 존재하는 이유, 몸은 왜 존재하는가? 몸은 Sex를 위해서, Sex는 몸을 위하여. 이런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자기의 삶을 죄 속에 던지고 있었던, 심지어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13절 마지막 부분에 몸은 뭐예요. 몸은 주를 위해 존재한다. 그 논리가 우리 안간의 육체에는 통하지 않는다. 몸은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몸이 몸으로 존재하는 이유, 육체가 육체로 존재하는 이유,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로 존재하도록,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존재로 내 육체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성생활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부부의 그 Harmony 안에서 자녀를 낳고, 부부의 즐거움을 갖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서 인간의 육체를 부도덕한 일을 위해서 남용하는 것,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육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내 몸을 지으셨고, 또 내 몸을 새롭게 하실 분, 14절에는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렸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분" 세계 모든 종교 가운데서 인간의 몸을 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취급하는 유일한 종교는 거의 기독교 하나 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하는 종교예요. 육체 없는 영혼만의 불멸을 기독교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는 종교, 끝까지 몸을 포기하지 않는 종교, 마지막에 몸을 다시 새롭게 하실 그 주님, 지금도 그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거룩하신 주님, 이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 십니다. 내 육체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존재합니다. 그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믿습니까? 여기 우리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이유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예요.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성적인 부도덕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사용한다면, 그 순간 그의 몸은 창기와 하나가 된다. 창기와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부인하는 행위가 아니더냐?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이죠? 같이 읽어요. 다 같이 시작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절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어요. 믿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창기와 하나된 존재로 나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통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강조합니다. 자 우리가 잘 아는 말씀 19절 말씀이죠. 19절 말씀 다같이 시작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무슨 값이예요. 피값으로, 예수께서 피흘려 사신 몸, 이 거룩한 몸입니다.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은.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구원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내 몸은 성령을 모시고 있는 Temple이다.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전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다. 성령이 살고 있는 집이다. 성령이 주인 되어 통치하고 있는 집입니다. 그런 내 몸을 더럽힐 수가 있느냐 이말이죠. 그런즉 결론은 이것입니다. 20절에 '몸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 죄를 안 짓겠다는 노력만으로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거나 죄에서 승리를 얻기는 사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죄를 승리하기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죄를 안 지으려고 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죄성은 죄를 안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를 더 죄에 빠지게 하는 그런 사악함의 특성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요. 너희 몸을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피값을 주고 예수의 보혈로 사신 몸, 거룩한 몸, 존귀한 몸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뭐예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는 것, 그 결심도 필요하지만, 보다 적극적인 결단으로 거룩한 목적을 가져야 돼요. 그리고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내 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의 일에 바빠지고. 또 이웃을 돕는 일에 바빠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미켈란 젤로라는 이름은 다 기억하지만, 보톨도 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미켈란 젤로의 스승이예요. 보톨도 지오바니 라는 유명한 미켈란 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 스승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그를 찾아왔습니다. 스승이 테스트 해 보니까 놀라운 Talent를 가지고 있어요. 놀라운 Talent를 갖고 있어요.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네, 그렇습니다. 스승님.'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답했더니 스승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에 관해서 네가 분명한 결정을 해야 된다.' 그리고 자기의 문하생이 된 그날 이 스승은 어린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그의 손을 잡고 두 군데를 구경시켜 주었다고 그래요. 손을 잡고 술집을 갔어요. 술집을, 그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단다.' 이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 젤로의 손을 잡고서 아주 거창한 Cathedral 성전의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씌어진 조각상이 네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졌고, 또 하나는 술마시는 흥행과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단 말이다.' '너는 네 기술과 Talent를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승님,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 Talent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네 Talent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기회, 무엇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내 몸이 드려질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은 적극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그리고 죄를 이기는 승리로운 삶이 우리에게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온 순간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죄 짓는 자유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크리스찬의 자유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이어야 합니다. 내가 자유를 안 짓고 싶을 때 안 지을 수 있어야 자유한 사람이지. 죄에 끌려 다니면 그것은 내가 죄에 노예가 되겠다는 징후하고 할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 늘 죄에 끌려 다니고 부도덕함 속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거룩한 존재로 한평생 살아가게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공동체도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이 어두움의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썩어가고 있습니다.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 한 복판 속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고,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는 존재, 원하신다면 나를 그렇게 써 주시옵소서! 다 같이 우리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한평생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름답게 바쳐져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고 쓰여지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안에서 한 주간을 지내며, 주 앞에 찬양을 드리고 마음의 기도를 주께 바치고 주의 말씀을 받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두운 세상, 또 부패한 냄새를 발하고 있는 세상 한 복판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 하나님 내가 있어 세상이 그 부패를 막을 수 있고, 또 어둠을 쫓을 수 있을지언정, 내가 오히려 세상에 거꾸로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하나님의 공동체에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 주옵소서. 고린도 교회의 범죄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마침내 그 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죄를 극복하고 주 앞에 거룩한 소금으로 아름다운 빛으로 투명한 빛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과 우리로 죄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허다한 유혹이 존재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촉구하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성령님의 거룩한 성도로 교통케 하심이 이제와 영원토록 우리 다시 만남의 순간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 같이 시작,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여기 음란 하는 자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음란이라는 단어는 본래 일체의 모든 성적인 부도덕을 통칭하는 그런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우상 숭배가 나옵니다. 이 우상 숭배도 저는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성적인 부도덕, 음행과 관련된 우상숭배를 바울이 지적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소위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고린도 도시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에,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리스에도 지진의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마는 고린도 도시, 옛 고린도 터전에 가면 지금도 산성 아주 높은 곳에 신전의 터가 아주 웅장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도시의 시민들을 바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바라보면서 그 아래 타운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무려 천명의 창기들이, 공창 창기들이 고용되어서 종교적인 그런 미명 아래서 도덕적인 매우 그 불륜의 범죄들이 공식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던 모습들을 역사의 기록은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이것도 성적인 부도덕과 매우 관련된 우상숭배였음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서 간음하는 자, 여기서 간음이라는 것은 특별히 혼외정사, 기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 간음자들…. 그 다음에 탐색하는 자, 이것은 아마도 미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지적하는 단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남색, 학자들은 아마도 이것은 동성애와 관련된 범죄에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지적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10절에 가면 그밖에, 직접적으로 성적인 범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그 밖에 여러 가지 범죄들의 리스트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고린도 도시가 처하고 있었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바깥의 사회의 부도덕성이 오히려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었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켜야할 교회가 오히려 사회에 의해서 거꾸로 영향을 받아 교회 마저도 부패하고 있었던 모습,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현장이었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도 마치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부도덕 그리고 음행의 범죄 속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음행의 범죄를 지적했습니다마는 이제 고린도 전서 6장 9절 이하에서 바로 이런 음행의 범죄를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한다고, 또 극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극복해야 할 이유, 극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 고린도전서 6장 9절 이하를 통해서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이 음행의 범죄를 마땅히 극복해야 할 이유, 또 극복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둘째는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셋째는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둘째로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셋째로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우리는 이 부도덕의 범죄, 특별히 음행의 범죄를 극복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이리 9절을 읽었습니다만,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10절에도 되풀이됩니다. 다같이 10절 시작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단순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주인이신 왕이신 하나님 그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통치하는 완성된 이 천국의 본질이야말로 거룩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자 사도 요한이 천국의 커텐을 살짝 열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천국, 영원한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때 이 나라에 누가 들어오고 있는가? 또 누가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한번 요한 계시록 21장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21장 성격의 마지막 책 마지막 부분인 21장 27절에 보시면, 요한계시록 21장 마지막 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27절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26절하고 대조를 이루고 있어요. 26절은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그 영원한 나라로 들어오겠고" 그리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천국은 이 세상의 좋은 것이 거기 다 있어요. 이 세상의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저 영원한 나라에 어떤 연속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귀한 것, 깨끗한 것,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 그것은 저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될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고 의로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보존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나 또 천국은 어떤 곳이냐?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모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땅의 모든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모든 추한 것들 더러운 것들, 무가치한 것, 부도덕한 것, 27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누가 들어갈 수 있겠어요? 나도 거짓말 한 적이 있는데, 어떤 목사님이 아이들이 노는 곁을 지나가고 있었대요. 막 게임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러면서 제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자기들이 제일 큰 상을 주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목사님이 "니들 뭐하고 있니?" 자기들이 거짓말 제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그러니까. "그런 게임 하면 안돼, 그런 게임 하면 못써."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그분에게 멀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거짓말 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나 한적 없어" 그러니까 옆에 있던 아이가 "저 사람에게 상 주자!" 그러더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아무도 결코 범죄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크리스찬은 결코 범죄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죠. 그러나 그 죄를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고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때 우리는 죄사함 받은 자로 용서함 받은 자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받은 자로서 아직도 죄를 포기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못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런 죄를 떠나야 할 이유, 그런 죄를 포기해야 할 이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나라, 그러므로 만약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이것은 일찍 포기될수록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예요.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음행의 죄를 포기하고 극복하고 주 앞에 서야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행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11절의 말씀이예요. 다 같이 1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거기 중요한 동사 세 단어가 나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씻음, 거룩함, 의롭다하심. 그것이 이미 얻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얻을 것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 희랍어의 부정과거라는 독특한 시제가 쓰여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예요.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미 씻음과 '죄 씻음을 얻었다' 이미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도덕적 개념보다도 이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이미 구별돼 있다. 죄는 우리를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죄와 더불어 동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죄로부터 혹은 죄 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별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는 한번 우리를 떠난 이후에도 계속 사단은 이 죄를 이용해서 우리를 정죄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에게 Guilt complex를 주고 죄책감을 주고, 마치 용서받은 후에도 아직도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지 못한 존재인양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고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의지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미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예요. 우리는 씻음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가졌단 말이예요. 우리는 성도가 되었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런 새로운 신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위치를 인식할 때, 우리는 새 사람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한가? 바로 그런 얘기예요. 바울의 얘기는. 그렇다면 새 사람답게 살아야 되잖아요. 새 사람이된 내가 아직도 옛사람이 범하는 죄 가운데 계속 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에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후에 길을 가다가 옛날에 사귀던 여자를 만났어요. 그래 어거스틴이 모른척하고 지나갔던 모양이예요. 그러니까 막 이 여자가 따라오면서, '나예요. 나 나 나'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어거스틴이 돌아서서 이런 말을 햇다고 해요. '너는 너지만, 나는 나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당신이 알던 내가 아니다.' '나는 이제 변화되었다. 새로워졌다.' 우리 한국 교회 야사에 남긴 유명한 스토리 가운데, 우리 김익두 목사님이 예수 믿고 깡패 같은 분이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면, 부고장을 돌렸대요. 살아 있는데 부고장을 돌렸어요. '김익두 죽었다.' '옛 사람은 죽었다' 이 말이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내 옛사람은 죽었고,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성도로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으로 새로워졌다면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함이 마땅치 아니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씻어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역을 무효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구원받은 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죄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세 번째로, 첫째는 뭐예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두번째로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세 번째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 이 음행의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로서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권 때문에.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13절 이하의 말씀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다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새로운 존재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 성령의 통치하에 들어간 우리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소유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하니님의 주권 우리 1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성경학자들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 이것이 그 당시 그 희랍사회 Greek Society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고 그래요. 유행하던 말. 사람들이 막 탐식을 하면서, 요즘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 탐식의 죄를 극복하기 위한 놀라운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데요. 아주, 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만. 목하 3키로 뺐습니다.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다시 쪘어요. 김기태 목사님은 7키로를 빼셨답니다. 그들이 탐식을 하면서 변명하던, 자주 인용하던, 거의 속담처럼 사용되는 말이 뭐냐면, '식물은 배를 위하여, 배는 식물을 위하여' 왜 식물이 존재하느냐, 내 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배는 왜 존재하느냐, 배는 먹으라고 존재한다. 그러면서 막 먹었다는 거예요. 똑 같은 원리를 그들의 성욕에 간주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성적인 욕구가 존재하는 이유. 몸이 존재하는 이유, 몸은 왜 존재하는가? 몸은 Sex를 위해서, Sex는 몸을 위하여. 이런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자기의 삶을 죄 속에 던지고 있었던, 심지어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13절 마지막 부분에 몸은 뭐예요. 몸은 주를 위해 존재한다. 그 논리가 우리 안간의 육체에는 통하지 않는다. 몸은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몸이 몸으로 존재하는 이유, 육체가 육체로 존재하는 이유,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로 존재하도록,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존재로 내 육체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성생활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부부의 그 Harmony 안에서 자녀를 낳고, 부부의 즐거움을 갖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서 인간의 육체를 부도덕한 일을 위해서 남용하는 것,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육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내 몸을 지으셨고, 또 내 몸을 새롭게 하실 분, 14절에는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렸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분" 세계 모든 종교 가운데서 인간의 몸을 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취급하는 유일한 종교는 거의 기독교 하나 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하는 종교예요. 육체 없는 영혼만의 불멸을 기독교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는 종교, 끝까지 몸을 포기하지 않는 종교, 마지막에 몸을 다시 새롭게 하실 그 주님, 지금도 그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거룩하신 주님, 이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 십니다. 내 육체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존재합니다. 그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믿습니까? 여기 우리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이유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예요.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성적인 부도덕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사용한다면, 그 순간 그의 몸은 창기와 하나가 된다. 창기와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부인하는 행위가 아니더냐?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이죠? 같이 읽어요. 다 같이 시작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절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어요. 믿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창기와 하나된 존재로 나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통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강조합니다. 자 우리가 잘 아는 말씀 19절 말씀이죠. 19절 말씀 다같이 시작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무슨 값이예요. 피값으로, 예수께서 피흘려 사신 몸, 이 거룩한 몸입니다.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은.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구원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내 몸은 성령을 모시고 있는 Temple이다.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전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다. 성령이 살고 있는 집이다. 성령이 주인 되어 통치하고 있는 집입니다. 그런 내 몸을 더럽힐 수가 있느냐 이말이죠. 그런즉 결론은 이것입니다. 20절에 '몸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 죄를 안 짓겠다는 노력만으로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거나 죄에서 승리를 얻기는 사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죄를 승리하기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죄를 안 지으려고 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죄성은 죄를 안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를 더 죄에 빠지게 하는 그런 사악함의 특성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요. 너희 몸을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피값을 주고 예수의 보혈로 사신 몸, 거룩한 몸, 존귀한 몸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뭐예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는 것, 그 결심도 필요하지만, 보다 적극적인 결단으로 거룩한 목적을 가져야 돼요. 그리고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내 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의 일에 바빠지고. 또 이웃을 돕는 일에 바빠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미켈란 젤로라는 이름은 다 기억하지만, 보톨도 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미켈란 젤로의 스승이예요. 보톨도 지오바니 라는 유명한 미켈란 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 스승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그를 찾아왔습니다. 스승이 테스트 해 보니까 놀라운 Talent를 가지고 있어요. 놀라운 Talent를 갖고 있어요.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네, 그렇습니다. 스승님.'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답했더니 스승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에 관해서 네가 분명한 결정을 해야 된다.' 그리고 자기의 문하생이 된 그날 이 스승은 어린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그의 손을 잡고 두 군데를 구경시켜 주었다고 그래요. 손을 잡고 술집을 갔어요. 술집을, 그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단다.' 이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 젤로의 손을 잡고서 아주 거창한 Cathedral 성전의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씌어진 조각상이 네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졌고, 또 하나는 술마시는 흥행과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단 말이다.' '너는 네 기술과 Talent를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승님,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 Talent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네 Talent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기회, 무엇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내 몸이 드려질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은 적극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그리고 죄를 이기는 승리로운 삶이 우리에게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온 순간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죄 짓는 자유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크리스찬의 자유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이어야 합니다. 내가 자유를 안 짓고 싶을 때 안 지을 수 있어야 자유한 사람이지. 죄에 끌려 다니면 그것은 내가 죄에 노예가 되겠다는 징후하고 할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 늘 죄에 끌려 다니고 부도덕함 속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거룩한 존재로 한평생 살아가게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공동체도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이 어두움의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썩어가고 있습니다.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 한 복판 속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고,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는 존재, 원하신다면 나를 그렇게 써 주시옵소서! 다 같이 우리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한평생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름답게 바쳐져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고 쓰여지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안에서 한 주간을 지내며, 주 앞에 찬양을 드리고 마음의 기도를 주께 바치고 주의 말씀을 받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두운 세상, 또 부패한 냄새를 발하고 있는 세상 한 복판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 하나님 내가 있어 세상이 그 부패를 막을 수 있고, 또 어둠을 쫓을 수 있을지언정, 내가 오히려 세상에 거꾸로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하나님의 공동체에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 주옵소서. 고린도 교회의 범죄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마침내 그 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죄를 극복하고 주 앞에 거룩한 소금으로 아름다운 빛으로 투명한 빛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과 우리로 죄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허다한 유혹이 존재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촉구하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성령님의 거룩한 성도로 교통케 하심이 이제와 영원토록 우리 다시 만남의 순간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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