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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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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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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89 |
2006. 3.19.
성전정화사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금 우리의 교회당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당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한 군데만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당과 같은 건물과 조직은 이스라엘의 회당입니다. 그 회당은 이스라엘 땅에도 여러 곳에 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당이 유대인들의 종교 행위 장소이긴 하지만 종교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일 년에 서너 차례 씩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가 곧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에는 과월절로 번역된 절기입니다. 과월이나 유월 모두 지나갔다(pass over)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만 그 죽음의 재앙이 지나갔다는 전승에 따른 절기입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유월절 예루살렘 방문을 공생애 마지막 시기로 잡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초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소동을 일으킨 사건을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건 이 사건이 매우 확실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쫓아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전에 왜 장사꾼들이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었는지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예루살렘 순례객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소와 양과 비둘기 중의 하나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먼 곳에서 그런 동물을 끌고 올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야훼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지금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순례객들을 위해서 제사 드리기에 알맞은 동물을 준비했습니다. 환전상들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려면 외환은행에서 우리의 원을 일본의 엔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파는 것이나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해 주는 것은 성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폭력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절). 마가복음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막 11:17).
성전정화 이유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성전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셨을까요?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예수님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더구나 이 사건을 공생애 후기로 잡고 있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유대교 고위층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이 성전정화 문제가 심각했을까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동물 판매와 환전은 따지고 보면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온몸을 던질만한 사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일단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제사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할 종교의 본질을 훼손시킬 염려가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에 얼마나 투철한지 늘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동기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머리는 늘 ‘장사하는’ 쪽으로 회전되기 때문에 기도가 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런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구조를 비판한 것인지 모릅니다. 동물을 팔고 돈을 바꿔줄 때 반드시 이윤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 이윤의 상당 부분은 결국 제사장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밑에서 실제로 장사하는, 소위 민중들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선으로 위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구조화하고 일상화하려는 제사장 계급에게 분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 사건 뒤에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리고 다짐했다는 공관복음서의 기록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이유는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교회가 인간들의 이윤추구, 친목도모, 자기만족 등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제사장처럼 교권을 이용하는 교회 권력구조가 더 이상 재생산될 수 없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옳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본문이 이런 정도의 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성전정화 사건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예수님보다는 세례요한에게 어울립니다. 양심을 회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며, 성전을 정화하는 일은 광야에서 불을 토하듯 설교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2의 요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한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개혁, 사회개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은 성전의 구조개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혹은 그것이 부단히 돌아가야 할 영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얼까요?
성전정화의 권한
공관복음서는 별로 말이 없지만 요한복음서는 성전청결 이후에 전개된 사연을 부연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18절).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기적이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해와 달이 멈춘다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예수님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뿌리를 둔 것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주장입니다. 이 질문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당면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유대인들에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이며 종말의 심판자인지 그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대답하겠지만 이 세상은 그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교회를 향한 이런 도전은 매우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지, 왜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개혁해나가야 하는지, 왜 청소년들이 입시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 제도를 바꿔나가야 하는지, 왜 빈익빈부익부 경제구조를 평등의 구조로 개혁해야하는지,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요구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전을 개혁할 권한이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유대인들의 요구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거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이 사회를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진 것처럼 그런 능력을 보이라고 다그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증거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반문했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20절). 이 대화는 옆에서 듣기에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원래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의 재건축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46년 동안 재건축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듣더라도 말이 안 되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도 고지식하게 보입니다. 이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기적이냐 부활이냐?
이 대화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미처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스올, 혹은 게헨나에 갈 뿐이지 부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신학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런 진술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이며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할 것을 확신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근본주의자들처럼 복음서에 진술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불거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완치될 게 분명한 큰 수술을 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에게 전혀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완성인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새롭게 이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연법칙이 깨지는 기적을 요구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연법칙의 완성이라 할 부활에 집중했습니다. 부활이 자연법칙의 완성이라는 말은 곧 자연은 궁극적인 생명을 향해서 나가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성전정화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열정적인 투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그런 근원이 없으면 모든 인간의 행위는 허무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인간 기술과 영감의 집대성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님의 부활이 그 대답입니다.
성전정화사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금 우리의 교회당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당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한 군데만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당과 같은 건물과 조직은 이스라엘의 회당입니다. 그 회당은 이스라엘 땅에도 여러 곳에 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당이 유대인들의 종교 행위 장소이긴 하지만 종교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일 년에 서너 차례 씩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가 곧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에는 과월절로 번역된 절기입니다. 과월이나 유월 모두 지나갔다(pass over)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만 그 죽음의 재앙이 지나갔다는 전승에 따른 절기입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유월절 예루살렘 방문을 공생애 마지막 시기로 잡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초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소동을 일으킨 사건을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건 이 사건이 매우 확실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쫓아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전에 왜 장사꾼들이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었는지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예루살렘 순례객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소와 양과 비둘기 중의 하나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먼 곳에서 그런 동물을 끌고 올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야훼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지금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순례객들을 위해서 제사 드리기에 알맞은 동물을 준비했습니다. 환전상들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려면 외환은행에서 우리의 원을 일본의 엔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파는 것이나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해 주는 것은 성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폭력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절). 마가복음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막 11:17).
성전정화 이유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성전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셨을까요?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예수님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더구나 이 사건을 공생애 후기로 잡고 있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유대교 고위층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이 성전정화 문제가 심각했을까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동물 판매와 환전은 따지고 보면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온몸을 던질만한 사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일단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제사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할 종교의 본질을 훼손시킬 염려가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에 얼마나 투철한지 늘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동기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머리는 늘 ‘장사하는’ 쪽으로 회전되기 때문에 기도가 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런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구조를 비판한 것인지 모릅니다. 동물을 팔고 돈을 바꿔줄 때 반드시 이윤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 이윤의 상당 부분은 결국 제사장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밑에서 실제로 장사하는, 소위 민중들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선으로 위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구조화하고 일상화하려는 제사장 계급에게 분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 사건 뒤에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리고 다짐했다는 공관복음서의 기록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이유는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교회가 인간들의 이윤추구, 친목도모, 자기만족 등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제사장처럼 교권을 이용하는 교회 권력구조가 더 이상 재생산될 수 없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옳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본문이 이런 정도의 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성전정화 사건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예수님보다는 세례요한에게 어울립니다. 양심을 회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며, 성전을 정화하는 일은 광야에서 불을 토하듯 설교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2의 요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한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개혁, 사회개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은 성전의 구조개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혹은 그것이 부단히 돌아가야 할 영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얼까요?
성전정화의 권한
공관복음서는 별로 말이 없지만 요한복음서는 성전청결 이후에 전개된 사연을 부연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18절).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기적이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해와 달이 멈춘다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예수님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뿌리를 둔 것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주장입니다. 이 질문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당면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유대인들에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이며 종말의 심판자인지 그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대답하겠지만 이 세상은 그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교회를 향한 이런 도전은 매우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지, 왜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개혁해나가야 하는지, 왜 청소년들이 입시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 제도를 바꿔나가야 하는지, 왜 빈익빈부익부 경제구조를 평등의 구조로 개혁해야하는지,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요구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전을 개혁할 권한이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유대인들의 요구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거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이 사회를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진 것처럼 그런 능력을 보이라고 다그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증거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반문했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20절). 이 대화는 옆에서 듣기에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원래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의 재건축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46년 동안 재건축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듣더라도 말이 안 되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도 고지식하게 보입니다. 이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기적이냐 부활이냐?
이 대화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미처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스올, 혹은 게헨나에 갈 뿐이지 부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신학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런 진술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이며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할 것을 확신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근본주의자들처럼 복음서에 진술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불거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완치될 게 분명한 큰 수술을 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에게 전혀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완성인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새롭게 이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연법칙이 깨지는 기적을 요구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연법칙의 완성이라 할 부활에 집중했습니다. 부활이 자연법칙의 완성이라는 말은 곧 자연은 궁극적인 생명을 향해서 나가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성전정화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열정적인 투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그런 근원이 없으면 모든 인간의 행위는 허무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인간 기술과 영감의 집대성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님의 부활이 그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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