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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2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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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94 |
2006. 3.26.
이스라엘 민중의 불평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첫 단락은 4,5절입니다. 단 두 절에 불과한 짧은 단락이지만 여기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인류가 감당해야 할 실존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40년 정도의 세월을 광야에서 지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길어야 두 달이면 가나안 땅에 도착하겠거니 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우리의 눈에, 그까짓 40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세월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 마지막 순간을 잘 견디기만 하면 이제 곧 광야생활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걸 전혀 몰랐습니다. 가혹한 시련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체념적으로 생각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광야생활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상황은 몇 가지 점에서 훨씬 불투명했습니다.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이 죽었고(민 20:1), 형인 아론도 죽었습니다.(20:28). 미리암과 아론이 간혹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도 모세의 형제들이고, 그들의 영적인 카리스마도 상당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할 것으로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낙담하지 않았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까지 하나님에게 꾸중을 듣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식수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자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리고 형 아론과 함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려라. 그리하면 네가 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회중과 가축을 먹일 수 있으리라.”(민 20:8). 모세는 늘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면서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습니다. 모세가 성질을 부린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행동을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회중에게 줄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이런 소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퍼졌을 것입니다. 모세까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낙담했을는지는 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또 하나의 어려운 상황은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홍해바다 쪽으로 돌아갔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은 에돔을 통과하는 노선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그곳을 통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에돔은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민 20:14-21).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부녀자와 노약자들도 낀 이 나그네들이, 몇 십, 몇 백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이르는 이 큰 무리가 지름길을 내놓고 크게 우회하는 건 크게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에 지쳐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 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5절). 이들의 불평은 엄살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 광야에서 몰살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바에야 노예 신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집트에 남아있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멀어지고, 가까이 갔다가 멀어지는 일들이 수 없이 반복되었고, 지금도 바로 그렇게 우회하고 있는 순간이니까 그들이 이렇게 불평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진저리 치는 ‘거친 음식’은 아마 만나일지 모르겠습니다. 늘 꽁보리밥만이나 개떡만 먹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우리의 옛일을 생각하면 그들의 하소연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리 뱀 사건
이제 본문은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갑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일 작정이냐, 이 거친 음식에 진저리가 난다는 이들의 불평이 있자, 야훼께서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셨다고 합니다.(6절). 불 뱀(fiery snakes)은 이 뱀에게 물렸을 때 독이 불처럼 타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뱀에 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늘 이렇게 간사합니다. 불평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견딜만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죽냐, 사냐 하는 기로에 섰을 때는 불평이 아니라 기도가 나옵니다. 흡사 흑사병이 돌듯이 사람들이 불 뱀에 의해서 죽어나가자 그들은 용서를 구하고 삶의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드렸습니다. 본문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전합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8절).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일단 이런 이야기가 좀 유치하게 보입니다. 불평 좀 했다고 해서 야훼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서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기둥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면 죽지 않았다는 것도 보기에 따라 우스꽝스럽습니다. 히브리어로, 불(fiery)이라는 단어는 뱀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보통 천사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는 ‘스랍’을 가리키는 명사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본문에는 스랍과 실제 뱀과 구리 뱀이 서로 엇갈려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창세가 3장에 따르면 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는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설명합니다. 성서는 원래 어떤 형상을 만드는 걸 우상숭배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도 역시 구리 뱀 설화는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구리 뱀 설화와 연결해서 가장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구리 뱀 사건이 있은 다음에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고, 그들은 사사 시대를 거쳐 통일왕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러 그 나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남유다에 히스키야라는 왕이 즉위했습니다. 그는 다윗처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 중의 하나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이 구리 뱀을 산산조각 낸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구리 뱀을 “느후스탄”이라고 부르면서 거기에 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왕하 18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구리 뱀에 대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는 구리 뱀을 구원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열왕기서는 그것을 우상으로 해석합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각각의 주장들이 모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리 뱀을 만든 사람은 분명히 모세입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구원의 상징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리 뱀을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일정한 장소에 모셔놓고 분향하고 제물을 드린 것은 잘못입니다. 종교적 상징에 머물러야 했던 구리 뱀이 신앙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스키야는 그것을 없애버렸습니다. 히스키야는 자기 몫을 잘 감당한 것이며, 모세 역시 자기의 소임을 충분히 감당한 것입니다. 구리 뱀이 역사적으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모세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상징
저는 앞에서 오늘 본문이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원래 서로 상황에서 벌어졌던 각각의 사건으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아주 특별한 게 아니라 광야생활 40년 동안 흔하게 일어났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은 이번만이 아니라 40년 광야생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80년 한 평생 그렇게 불평하며 살듯이 말입니다. 이건 생활조건이 바뀐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가깝습니다. 또한 불 뱀의 출현도 사실 일상적인 사건입니다. 광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디 뱀뿐이겠습니까? 독거미에 물려 죽는 사람도 많았겠지요. 성서 기자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을 한데 엮어서 해석했습니다. 불 뱀의 출현은 곧 이스라엘의 불평에 의한 결과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했다고 해서 야훼 하나님이 당장 불 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했다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처럼 보입니다. 이 성서기자의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스라엘의 불평과 하나님의 징벌을 기계적으로 일치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 서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쓰나미를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설교한 목사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는 툭하면 이 역사를 인과응보 차원에서, 권선징악 차원에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이 통할지도 모르죠.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동화처럼 말입니다.
생명의 길
그렇다면 민수기 기자는 지금 어떤 사실이 아니라 동화책을 쓴다는 말일까요? 보기에 따라서 성서에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화도 있고 주술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형식적으로는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의 영적인 깊이는 놀랍습니다. 오늘 민수기 기자가 이 두 이야기를 묶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9b절은 이렇습니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지금 민수기 기자는 광야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죽어야만 할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하필이면 뱀이었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독자들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 동물이었겠지요.
민수기 기자는 이 구리 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과 삶을 직면하라고 요구합니다. 죽음의 길과 삶의 길에서 선택하라고 요청합니다. 광야는 실제로 죽음과 삶의 선택을 일상적으로 요구했습니다. 한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몰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그렇고, 전염병에도 그렇고, 식수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지키셨다는 게 바로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런 신앙고백이 구리 뱀으로 상징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민수기 기자는 이런 신앙고백을 이스라엘의 불평과 연결해서 설명할까요? 다시 한 번 더 그들의 불평이 무엇인지 들어볼까요?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이런 불평은 오늘 우리의 입에서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크게 외치고, 일상이 지루하다고 진저리를 칩니다. 3천4백 년 전 사람들과 오늘 우리의 모습은 붕어빵처럼 닮았습니다.
민수기 기자는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진단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처방했습니다. 일상에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면 불 뱀이라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극을 받아야만 생명에, 즉 살아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 뱀과 구리 뱀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구리 뱀 사건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 3:14,15). 예수가 곧 생명의 충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생명을 주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생명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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