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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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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영수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2월 20일 |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에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성탄은 어떠하였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많이 변질된 것이기 때문에 성탄의 참 뜻을 되새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성탄은 너무 상업화되어 있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의 참뜻이 퇴색되어 가는 것은 그 만큼 기독교 복음이 많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기독교 신앙의 위기는 예수상이 너무 왜곡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탄의 참된 의미의 상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서 가운데 마태와 누가복음에 최초의 성탄의 정황이 기록되어 있어서, 처음 성탄에 대한 우리의 갈급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 주고 있는 초기 성탄의 소식은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가 전해 주는 성탄은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누가가 전해 주는 처음 성탄에 관한 소식은 목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목가적인 풍경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아기 예수는 국경을 초월한 평화의 왕으로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누가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평화의 왕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탄의 이야기의 묘사가 매우 평화롭고 소박하며 서정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시대의 사회적 상황은 매우 어둡고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탄생 소식을 그 시대 역사적 배경과 관련시켜 비교적 자세히 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세상"에 내렸던 호적 명령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호적 조사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갈릴리 사람 요셉이 그의 약혼녀와 함께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것과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이 호적 명령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전해 주는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탄생의 배경에 대한 설명에 비하면 탄생 자체에 대한 묘사는 훨씬 간단합니다. 누가는 예수 탄생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거기 베들레헴에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게 되자 그 아기를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 이유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마리아가 새로이 태어난 아이를 어느 곳에 두었느냐를 말하는데 더 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소를 부각시키고 있는데는 누가 자신의 특별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밤일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매우 어두운 밤에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같은 지역에서 한 무리의 목자들이 자기들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있는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그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가 구주라는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사건임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자들은 천사가 그들에게 일러준 대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목자들은 표적을 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사는 사가랴와 마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목자들에게 표적을 주었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준 표적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기대 밖의 표적이었습니다. 그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라 입니다.
우리가 성탄 때마다 축하하는 예수는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 예수는 소박하고 가난한 목자들 가운데서 태어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을 때도 불쌍한 죄인들 가운데서 운명했습니다.
누가가 전해 주는 첫 번 성탄의 이야기의 핵심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입니다.
먼저 누가는 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의 사건이 세계사적 사건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아기의 탄생과 함께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도가 있습니다.
참 평화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이 아기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한 평화의 시대라고들 말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럼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심령은 매우 고갈되어 있었고, 도덕적으로 심히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깊어 가는 밤과 함께 역사의 새벽을 목말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직접 찾아 주셨습니다. 그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 예수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소는 구유였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실 때 소박하고 비천한 장소인 구유를 택하셨다는 것에 누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구유'와 관련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3)
누가는 `구유'에 대한 언급을 가지고 이사야의 말씀이 이제 폐지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자들이 구유로 보내졌고 그들은 거기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위한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더 이상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을 발견하는 소중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신의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즈음과 같이 가정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극도로 닫혀진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장소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중한 삶의 부담, 정신적으로 쉼이 없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에 마음의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 사상, 저 사상, 이 그룹, 저 그룹으로 전전하면서 방황하던 한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의 장소를 발견하기까지 마음의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목말라 찾고 있는 안정되고, 쉼이 있는, 평화스러운 장소가 구유입니다. 그 구유가 소박하고 비천한 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천사가 목자들에게 찾아가서 아기 탄생을 전한 때는 목자들이 일상적인 자신의 일들을 하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목자들만이 아니고,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간 때에도, 그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누가는 특별히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상황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많은 삶의 문제가 있는 한 가운데 구유가 있습니다. 구유는 특별한 곳에 있지 않고 일상성이라는 현실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우리의 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밭에 묻혀 있는 보화' `진주 상인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통속적인 평화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 평화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위한 한 새로운 미래입니다. 그러한 미래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 병든 사람에게는 치유로, 소외된 자들에게는 용납으로, 죄인들에게는 용서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이 전해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모든 인류가 갈망하고 있는 희망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부과된 중요한 사명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위한 한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 날입니다. 그것에 대한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입니다.
끝으로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읽어 드립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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