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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요한복음 이동원 목사............... 조회 수 2395 추천 수 0 2009.12.10 15: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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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8:33-40 
설교자 : 이동원 목사 
참고 : 지구촌 교회 
진리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설교요약
1.진리와 사실은 다르다.
2.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다.
3.진리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으면 진리를 피하게 된다.
4.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개역 요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수년 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유명한 소련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강연은 미국 언론사상 최대의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 지식인을 따뜻하게  영접한 미국은, 이 사람에게서 미국에 대한 칭찬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자유를 억압한 소련이 나의 고향일 수가 없었듯, 자유의 남용으로 정의가 왜곡되고 부도덕이 만연한 이 미국 사회도 나의 고향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에 찬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언론인은 그를 가리켜 “진리의 증언자요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평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되기 직전, 그는 재판석상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공산주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재판관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진리가 무엇이오?』그러나 소련의 재판관이 이 질문을 솔제니친에게 던지기 훨씬 전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예수를 재판하는 자리에서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오늘날처럼 거짓된 가치관과 거짓된 우상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시금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진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어떠해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진리는 거짓의 반대 개념인 “참”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진리라는 말은 단순한 사실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혼자들의 절반 가량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때, 우리는 그 말을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진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혹은 우리를 정의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참된 사실입니다.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이 진리를 “최고의 선”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주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 어떤 것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6절의 유명한 선언을 주목해 보십시오.“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그 무엇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구주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인 요한복음 18장에서 다루어진 이 진리라는 명제는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요 왕이라는 사실에 진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일종의 논쟁으로 시작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본문을 계속 읽어 보면, 주님은 빌라도의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그분이 왕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정치적으로 유대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정 시간이나 지역의 개념을 초월한 인류의 왕이요 영원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36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실존적인 문제가 있다면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 무엇이 나를 다스리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이 질문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거짓이 다스리는 곳에는 거짓된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 그분이 왕이 되어 내 인격과 내 사고와 내 의식과 내 삶을 통치하실 때, 그곳에는 용서와 구원과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중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즉, 그 당시는 황제 숭배가 강요되고 있어서“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 자들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제가 얼마 전에 터키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지역을 여행했는데, 제 마음 가운데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가 위치했던 지역에 가 보면, 희랍이나 로마의 신을 숭배하던 신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규모는 아덴(아테네)이나 희랍의 기타 지역들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초대 교회의 흔적은, 희랍이나 로마의 거대한 신전 근처에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방문해 보면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버가모와 같은 지역에 가 보면, 산꼭대기 한가운데에 제우스의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신전의 규모는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그 도시 전체를 압도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 이런 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계 2:13).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또 이러한 신들을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들의 밑에 자리잡고 있는 보잘것없고 작은 교회의 터전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시이저가 신이십니다. 제우스가 신이십니다”라는 강요된 고백에 승복하지 않고, 대신 “예수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간접적으로 시이저나 제우스가 주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 고백 때문에 생명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경험한 용서와 자유와 풍성한 생명과 하늘나라에 대한 찬란한 비전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도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은 이 하나의 고백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예수만이 내 삶의 유일한 초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재판장을 향해서 이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진리가 무엇이냐?”『내가 왕이다.』빌라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번 장에서는 진리에 접근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진리에 대한 유대인 무리들의 접근 태도

법정의 주변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 그들에게 진리란 다수를 의미했습니다. 또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내 삶을 좀더 편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날, 바로 이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하며 그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인간 예수에게서 정치적 메시야 상(像)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좀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예수는 죄인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법정에 서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그 순간, 무리들은 예수를 아마 별 볼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배신당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강도 바라바를 놓으소서. 그리고 예수를 못박으소서”라고 외쳐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진리의 대상이 자신들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돌연히 진리의 핍박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만이 진리의 이용자라고 생각합니까? 당신 자신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의 교회 출석 동기는 무엇입니까? 주일 아침에 한 번쯤 나와서 좋은 이야기 듣고 가는 것, 그것이 내게 해롭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사람들을 사귀면서 따뜻한 인간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동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출석의 유일한 동기가 된다면, 당신은 조만간 이 진리 앞에서 떠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높이 외치던 유대인의 무리들과 같은 진리에 대한 접근 태도가 바로 당신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진리를 이용하고자 하는 동기로만 그것에 접근 한다면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접근 태도

빌라도는 우리 앞에 진리에서의 도피자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리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아무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고 있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9장 4절에도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예수의 무죄를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빌라도가 그분을 채찍질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물로 자기의 손을 씻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마 27:24).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 그는 이 사건에서 도피하려 했을까요? 사실 빌라도는 어느 정도 자기의 양심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을 변호하고 그분을 석방시킬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동기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민중들로부터 자기의 위치를 인정받음으로써 자기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변화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진리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면, 나 역시 빌라도처럼 어느날엔가는 진리의 도피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당신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나는 길이요 진리요”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분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가치를 두고 추구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를 기억합니까? 다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이요 영광이요 소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으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진리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만일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물질이나 생활의 안정이나 삶의 편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신 역시 빌라도처럼 대야에 피 묻은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사건과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는 진리에서의 도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진리에 대한 제자들의 접근 태도

19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 찾아나오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장 26절 이하에 보면, 사도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6절). 대부분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기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여기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나와서  주님의 유언을 받들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19장 38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에 끼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은 그 누구에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분을 버릴 수 없었던 이 제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隱諱)하더니...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체포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마침내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앞에 등장합니다. 그 잘난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이 무명의 제자가 등장해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청합니다. 자기가 가진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메시지를 보면, 이번에는 니고데모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39절입니다.“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성경이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붙인 표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왔을까요? 유대인의 관리, 산헤드린의 관원이라는 자기의 신분과 위치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있어도 백주에 등장하기가 꺼려졌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꺼려져서 혼자 슬쩍 기도를 처리해 버리는 어떤 사람처럼 혹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심한 접근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장에서 그는 마침내 변신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이 제자들,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그분과 자기의 삶을 동일시할 때 겪어야 할 그 많은 어려움이나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로 여기게 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들은 진리를 사랑했던 그리고 진리의 증언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는 전파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은 지금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씨시(Assisi=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이탈리아 중부)의 성자 프란시스의 위대한 회심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청년 시절에 위대한 기사(騎士)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하고도 유망한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시스, 그는 유달리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쾌락을 즐겼던 패기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신기하고도 이상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너는 주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종을 따르겠느냐?”이 낯선 목소리 앞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누가 주인입니까?』 잠시 후에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됩니다.『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지금까지 자기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왔던 프란시스는 홀연히 던져진 그 질문 때문에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날 이후로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즐겨 왔던 그 모든 쾌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친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생각으로, 그를 위해 큰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그 파티 순서에 일종의 연극 놀이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그 연극의 어릿광대 역을 프란시스에게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어릿광대의 역할을 하면서 그 연극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친구들과 함께 연극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프란시스가 갑자기 멈춰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이 바로 연극과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운 분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참을 가다가 프란시스가 없는 것을 발견한 친구들은 그를 찾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모습이었습니다.“주님,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그는 소리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일으켜 세우면서 놀려대기 시작합니다.『아무래도 이 친구,  애인이 생긴 모양이야. 프란시스, 너 요즘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 생긴 것 아니니? 애인과의 관계에서 말이야... .』옷을 털면서 일어난 프란시스는 친구들 앞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맞았어. 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내 신부를 만났어. 나의 사랑, 나의 진리이신 주님을 만났단 말이야 그 순간부터 프란시스는 자기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앞에 드려, 진리의 전파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오류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연극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아직도 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오, 하나님.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우리 이웃들의 삶의 場을 보십시오. 본능대로 쾌락대로 움직이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프란시스가 발견한 것처럼 헛되고 헛된 연극일지 모릅니다. 마음에 없는 웃음을 웃고, 마음에 없는 맞장구를 치면서 살아가는 연극 말입니다. 자기를 만나러 찾아오신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삶을 던져 버리고, 이제는 당신만이 나의 사랑이요 나의 진리라고 소리치던 프란시스. 오늘 당신은 그의 기도 앞에 당신의 말로 응답해야 합니다. 인생은 연극처럼 살아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단 한번의 삶입니다. 당신은 여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거짓 속에 안주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인생이 한바탕의 연극이었다고 후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진리,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십니다”주님 앞에 당신 자신의 사랑의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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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5 시편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시42:1-8  이한규 목사  2009-12-12 2232
2484 창세기 방주에서 나오라 창8:15-22  이정원 목사  2009-12-11 1848
2483 창세기 하나님의 권념하심 창8:1-14  이정원 목사  2009-12-11 1930
2482 창세기 홍수심판 창7:6-24  이정원 목사  2009-12-11 1881
2481 창세기 방주로 들어가라 창7:1-5  이정원 목사  2009-12-11 2336
2480 창세기 노아 언약 창6:9-22  이정원 목사  2009-12-11 2491
2479 창세기 홍수 이전의 세상 창6:1-8  이정원 목사  2009-12-11 1963
2478 창세기 아담의 자손들 창5:1-32  이정원 목사  2009-12-11 2105
2477 요한계시 살아 계신 주님 계1:9-20  이정원 목사  2009-12-11 2278
2476 고린도후 죽음이 있는 곳에 영생을 고후5:1-10  이동원 목사  2009-12-10 2648
2475 고린도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고후1:3-11  이동원 목사  2009-12-10 4007
» 요한복음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요18:33-40  이동원 목사  2009-12-10 2395
2473 다니엘 양과 염소에 대한 비전 단8:1-10  이동원 목사  2009-12-10 3151
2472 요한복음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요1:1-14  이동원 목사  2009-12-10 2722
2471 다니엘 기도의 영적인 싸움 [1] 단10  이동원 목사  2009-12-10 3546
2470 다니엘 다니엘의 기도 단9:1-23  이동원 목사  2009-12-10 4890
2469 누가복음 첫번 크리스마스 눅2:1∼14  임영수 목사  2009-12-10 3057
2468 마태복음 기다리는자의 삶 마25:14∼30  임영수 목사  2009-12-10 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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