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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5: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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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3·04·26
현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령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노인들이 그렇게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해서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할 일도 없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명이 연장되었으나 노년이 행복하질 못하고 오히려 허무하고 비참하고 불행해진 것입니다.
노년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
노년을 보다 보람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너무나 바쁘고 피곤해서 하나님을 맘껏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이 생기면 하나님과 맘껏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경도 많이 읽을 수 있고, 기도도 많이 할 수 있고, 말씀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와 넉넉한 은혜를 가지고 젊은이들을 지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더욱 가까이 볼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성도는 이러한 노년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른들은 날마다 이렇게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장수에 대하여
오늘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수명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900년을 살았습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입니까?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25-27절). 과연 여기 기록된 수명이 사실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조금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 수가 있었을까요?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당시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직후였기 때문에 아직 죄의 영향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매우 훌륭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인데, 당시의 사람들은 죄의 영향을 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노아 홍수 이전에는 기후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입니다. 궁창에 물이 있어서 더위나 추위가 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몸에 해로운 자외선 같은 것을 완전히 차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궁창 위의 물이 다 쏟아져 내렸는데,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단축되어갔습니다. 셋째, 경건한 삶은 장수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살면 장수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설명보다 더욱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사람을 오래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당시의 사람들을 그렇게 오래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에 노인들의 영적인 지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족장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수많은 자손들을 지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왕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형상이란 말은 원본을 가지고 찍어낸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대부분 상실해버렸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아담은 타락한 존재였는데, 아담에게서 태어난 아들 역시 아담처럼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로 오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당하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교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일 뿐만 아니라 철저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원죄 때문에 저절로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아무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아무리 성숙한 신앙인도,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수련을 많이 쌓은 사람도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여기에 인간의 절망과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죽음에 대하여
본문에는 '죽었더라'라는 말이 8번이나 나옵니다. 어떤 부인이 모처럼 남편과 함께 교회에 나왔습니다. 오늘은 설교말씀을 통해서 남편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설교본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창세기 5장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과 '낳았고'와 '죽었더라'라는 말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걱정과 낙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편이 그 날 이후로 진지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죽었더라'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늙지 않으려 해도 늙는 법이고, 죽지 않으려 해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유명한 시조가 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왜 그렇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원치 않지만 죽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까? 죄를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충성함으로써 상급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후회 없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죽음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 있게 될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하여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심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성경은 심판날에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5-1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며, 심판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Charls Finny는 법률을 공부하던 시절에 기도하던 중 그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법률을 공부해서 무엇 하려느냐?" "좋은 직장을 얻어야지요." "좋은 직장을 얻어서 무엇 하려느냐?"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지요."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산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늙어서 죽게 되겠지요?" "늙어서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심판을 받게 되겠지요."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숲 속에 들어가 종일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 50년 동안이나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주님 앞에 서는 날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
모든 사람이 다 죽었으나 여기서 제외된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21-24절). 그렇다고 해서 에녹이 가인처럼 성을 쌓았거나 라멕의 아들들처럼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교제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우리는 뭔가 큰 일을 많이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이 세상 밖에 더 좋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녹은 마치 옆에 있는 다른 나라로 이사간 것처럼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삽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멕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주로 사람들의 이름과 수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당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 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시 사람의 생활과 생각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라멕입니다.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28-29절) 라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의 생활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죄가 너무나 심해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멕은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세상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이제 심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죄악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느라 신음하며 고통하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날을 바라보면서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노아
노아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오늘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보다 더 타락한 시대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죄악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마지막 심판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에녹의 승천은 우리에게 부활과 천국에 대해서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죽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그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두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365세에 승천했습니다. 당시의 수명으로 볼 때 청년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청년기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일찍 죽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사는 것도 축복이요 죽는 것도 축복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마지막 심판날을 잘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현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령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노인들이 그렇게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해서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할 일도 없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명이 연장되었으나 노년이 행복하질 못하고 오히려 허무하고 비참하고 불행해진 것입니다.
노년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
노년을 보다 보람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너무나 바쁘고 피곤해서 하나님을 맘껏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이 생기면 하나님과 맘껏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경도 많이 읽을 수 있고, 기도도 많이 할 수 있고, 말씀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와 넉넉한 은혜를 가지고 젊은이들을 지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더욱 가까이 볼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성도는 이러한 노년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른들은 날마다 이렇게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장수에 대하여
오늘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수명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900년을 살았습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입니까?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25-27절). 과연 여기 기록된 수명이 사실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조금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 수가 있었을까요?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당시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직후였기 때문에 아직 죄의 영향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매우 훌륭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인데, 당시의 사람들은 죄의 영향을 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노아 홍수 이전에는 기후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입니다. 궁창에 물이 있어서 더위나 추위가 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몸에 해로운 자외선 같은 것을 완전히 차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궁창 위의 물이 다 쏟아져 내렸는데,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단축되어갔습니다. 셋째, 경건한 삶은 장수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살면 장수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설명보다 더욱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사람을 오래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당시의 사람들을 그렇게 오래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에 노인들의 영적인 지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족장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수많은 자손들을 지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왕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형상이란 말은 원본을 가지고 찍어낸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대부분 상실해버렸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아담은 타락한 존재였는데, 아담에게서 태어난 아들 역시 아담처럼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로 오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당하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교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일 뿐만 아니라 철저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원죄 때문에 저절로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아무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아무리 성숙한 신앙인도,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수련을 많이 쌓은 사람도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여기에 인간의 절망과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죽음에 대하여
본문에는 '죽었더라'라는 말이 8번이나 나옵니다. 어떤 부인이 모처럼 남편과 함께 교회에 나왔습니다. 오늘은 설교말씀을 통해서 남편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설교본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창세기 5장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과 '낳았고'와 '죽었더라'라는 말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걱정과 낙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편이 그 날 이후로 진지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죽었더라'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늙지 않으려 해도 늙는 법이고, 죽지 않으려 해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유명한 시조가 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왜 그렇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원치 않지만 죽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까? 죄를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충성함으로써 상급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후회 없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죽음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 있게 될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하여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심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성경은 심판날에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5-1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며, 심판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Charls Finny는 법률을 공부하던 시절에 기도하던 중 그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법률을 공부해서 무엇 하려느냐?" "좋은 직장을 얻어야지요." "좋은 직장을 얻어서 무엇 하려느냐?"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지요."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산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늙어서 죽게 되겠지요?" "늙어서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심판을 받게 되겠지요."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숲 속에 들어가 종일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 50년 동안이나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주님 앞에 서는 날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
모든 사람이 다 죽었으나 여기서 제외된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21-24절). 그렇다고 해서 에녹이 가인처럼 성을 쌓았거나 라멕의 아들들처럼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교제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우리는 뭔가 큰 일을 많이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이 세상 밖에 더 좋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녹은 마치 옆에 있는 다른 나라로 이사간 것처럼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삽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멕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주로 사람들의 이름과 수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당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 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시 사람의 생활과 생각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라멕입니다.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28-29절) 라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의 생활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죄가 너무나 심해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멕은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세상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이제 심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죄악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느라 신음하며 고통하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날을 바라보면서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노아
노아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오늘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보다 더 타락한 시대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죄악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마지막 심판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에녹의 승천은 우리에게 부활과 천국에 대해서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죽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그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두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365세에 승천했습니다. 당시의 수명으로 볼 때 청년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청년기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일찍 죽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사는 것도 축복이요 죽는 것도 축복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마지막 심판날을 잘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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