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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8: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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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28 |
2006. 6.11.
육체적인 삶
어느 정도 신앙적인 연륜이 오래된 분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며, 그렇지 못한 분들은 낯설게 느껴지실 겁니다.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 뜻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앙적인 용어들을 대충 간추려 볼 테니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들어보십시오. 육체의 빚, 성령의 힘, 하나님의 자녀, 노예, 아빠 아버지(아빠 파테르), 상속자, 고난, 영광. 어떻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는 이 용어들의 문자적인 의미는 알아듣겠지만 그것의 영적인 의미는 약간 어렵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일단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과 이 편지를 쓴 바울의 영적인 깊이가 우리에 비해서 훨씬 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철학자가 쓴 편지를 초등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편지를 읽을 때는 옆에서 어른이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어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바울의 이 진술을 알아듣기 좋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이지만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으며, 그렇게 살다가는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우선 육체에 빚을 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육체를 한자로는 육체, 우리말로는 몸이라고 보는데 반해서, 헬라인들은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사르크스와 소마입니다. 비슷한 의미인데, 사르크스는 생물학적 부분을 강조한다면 소마는 영과 구별된 전체 몸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사르크스입니다. 사르크스를 따라 살 의무가 없다거나, 그렇게 살면 죽는다는 바울의 말은 인간이 자기의 육체적인 본능만을 추구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물론 그런 육체 지향적인 삶에 대한 경고가 그의 가르침에 담겨 있기는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율법적인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바울의 진술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죽는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의 앞 대목에서부터 천천히 살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휴머니즘으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했다시피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정신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자학에 빠지든지 아니면 교만에 빠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정기적으로 잘 드리고, 기도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신앙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은 결코 영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에서 경쟁이 생기고, 교회봉사에도 경쟁이 생깁니다. 신앙적으로도 우리는 아주 쉽게 열등감에 빠지든지 자만심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거나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곧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정신적인 황폐화는 죽음이니까요.
악의 극복
위에서 인용한 3절 말씀은 이제 인간의 율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연히 불가능한 율법이나 도덕성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말은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단지 독단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죄와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자책감에 시달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대목을 훨씬 진지하게 파헤쳤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 같은 이들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인간 현실을 너무 나이브하게 접근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세계 현실의 어두운 구석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가 죄를 해체시켰다는 주장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의 열광주의적인 자기 망상이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삶에 악이 얼마나 강력하게 준동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악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이미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것을 인식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그런 신앙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표면적으로는 악이 횡행하지만 그 중심 세력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율법과 도덕성과 휴머니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
율법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따라서 살아야할까요?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입니다. 이 말을 쉽게 바꿔볼까요? “모범적으로 사는 것에, 남에게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영에 따라서 육체에 관한 일들을 초월하면, 삽니다.” 무슨 뜻인가요? 생명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사르크스에 관한 일들로부터 영적인 일들로 삶의 관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조금 과격하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범생 콤플렉스에서 우선 벗어나야 합니다. 좋은 딸, 좋은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은 목사, 좋은 선생,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르크스에 관한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죽여야 여러분이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부도덕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책임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그런 우리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일에 우리의 운명을 건다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대로 알아들을 수 있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산다는 말은 무언가 막연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율법적인 삶은 어떤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성령으로 사는 것은 모호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으로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시간에 성령론을 강의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여러분의 눈에 보이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대로 성서 텍스트를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합니다. 14-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흡사 서로 몰랐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게 되면 “자기야!”하고 부를 수 있듯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호칭인 “아빠, 파테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호칭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로 정의를 세우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에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빠 호 파테르이십니다.
영광과 고난
바울은 우리를 율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모든 인간들은 율법적인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주인과 종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무에서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기쁨에서 행동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무 준수를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를 아빠 파테르로 신뢰하는지 아닌지만 보십니다. 바울은 이런 관계를 로마 시대의 특수한 용어로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상속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전함에서 노를 저어야 할 노예였다가 군 사령관의 생명을 구해준 다음에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곧 그가 유산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 어느 곳을 가든지 로마의 최고위 가문의 상속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17a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상속권은 부모가 죽은 다음에 재산을 물려받는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죽는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 말씀은 상속받는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상속권은 원래 우리에게 주어졌던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상속받을까요? 돈을 생각했다면 꿈을 깨셔야 합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고난과 영광입니다. 17b에에서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설교에 귀를 더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호 파테르”인데 왜 나에게 어려움이 오는가 하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만약 철부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난이 없는 영광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내 운명이 특별히 불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터 인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학적이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난도 다양합니다. 다만 그런 고난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고난은 이 현실에서 우리가 상속받아야 할 것이라면 영광은 종말론적인 상속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그런 영광을 완전히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종말에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신성이기도 하고, 절대적인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참된 세계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런 종말론적 영광, 찬란한 생명까지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십자가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오늘 우리의 실존이며, 부활의 영광은 내일의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내일의 영광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믿는 사람은 오늘의 고난이 영광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삶
어느 정도 신앙적인 연륜이 오래된 분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며, 그렇지 못한 분들은 낯설게 느껴지실 겁니다.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 뜻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앙적인 용어들을 대충 간추려 볼 테니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들어보십시오. 육체의 빚, 성령의 힘, 하나님의 자녀, 노예, 아빠 아버지(아빠 파테르), 상속자, 고난, 영광. 어떻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는 이 용어들의 문자적인 의미는 알아듣겠지만 그것의 영적인 의미는 약간 어렵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일단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과 이 편지를 쓴 바울의 영적인 깊이가 우리에 비해서 훨씬 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철학자가 쓴 편지를 초등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편지를 읽을 때는 옆에서 어른이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어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바울의 이 진술을 알아듣기 좋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이지만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으며, 그렇게 살다가는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우선 육체에 빚을 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육체를 한자로는 육체, 우리말로는 몸이라고 보는데 반해서, 헬라인들은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사르크스와 소마입니다. 비슷한 의미인데, 사르크스는 생물학적 부분을 강조한다면 소마는 영과 구별된 전체 몸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사르크스입니다. 사르크스를 따라 살 의무가 없다거나, 그렇게 살면 죽는다는 바울의 말은 인간이 자기의 육체적인 본능만을 추구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물론 그런 육체 지향적인 삶에 대한 경고가 그의 가르침에 담겨 있기는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율법적인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바울의 진술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죽는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의 앞 대목에서부터 천천히 살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휴머니즘으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했다시피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정신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자학에 빠지든지 아니면 교만에 빠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정기적으로 잘 드리고, 기도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신앙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은 결코 영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에서 경쟁이 생기고, 교회봉사에도 경쟁이 생깁니다. 신앙적으로도 우리는 아주 쉽게 열등감에 빠지든지 자만심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거나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곧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정신적인 황폐화는 죽음이니까요.
악의 극복
위에서 인용한 3절 말씀은 이제 인간의 율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연히 불가능한 율법이나 도덕성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말은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단지 독단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죄와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자책감에 시달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대목을 훨씬 진지하게 파헤쳤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 같은 이들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인간 현실을 너무 나이브하게 접근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세계 현실의 어두운 구석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가 죄를 해체시켰다는 주장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의 열광주의적인 자기 망상이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삶에 악이 얼마나 강력하게 준동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악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이미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것을 인식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그런 신앙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표면적으로는 악이 횡행하지만 그 중심 세력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율법과 도덕성과 휴머니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
율법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따라서 살아야할까요?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입니다. 이 말을 쉽게 바꿔볼까요? “모범적으로 사는 것에, 남에게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영에 따라서 육체에 관한 일들을 초월하면, 삽니다.” 무슨 뜻인가요? 생명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사르크스에 관한 일들로부터 영적인 일들로 삶의 관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조금 과격하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범생 콤플렉스에서 우선 벗어나야 합니다. 좋은 딸, 좋은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은 목사, 좋은 선생,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르크스에 관한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죽여야 여러분이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부도덕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책임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그런 우리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일에 우리의 운명을 건다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대로 알아들을 수 있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산다는 말은 무언가 막연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율법적인 삶은 어떤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성령으로 사는 것은 모호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으로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시간에 성령론을 강의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여러분의 눈에 보이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대로 성서 텍스트를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합니다. 14-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흡사 서로 몰랐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게 되면 “자기야!”하고 부를 수 있듯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호칭인 “아빠, 파테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호칭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로 정의를 세우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에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빠 호 파테르이십니다.
영광과 고난
바울은 우리를 율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모든 인간들은 율법적인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주인과 종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무에서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기쁨에서 행동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무 준수를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를 아빠 파테르로 신뢰하는지 아닌지만 보십니다. 바울은 이런 관계를 로마 시대의 특수한 용어로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상속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전함에서 노를 저어야 할 노예였다가 군 사령관의 생명을 구해준 다음에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곧 그가 유산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 어느 곳을 가든지 로마의 최고위 가문의 상속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17a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상속권은 부모가 죽은 다음에 재산을 물려받는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죽는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 말씀은 상속받는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상속권은 원래 우리에게 주어졌던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상속받을까요? 돈을 생각했다면 꿈을 깨셔야 합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고난과 영광입니다. 17b에에서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설교에 귀를 더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호 파테르”인데 왜 나에게 어려움이 오는가 하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만약 철부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난이 없는 영광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내 운명이 특별히 불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터 인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학적이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난도 다양합니다. 다만 그런 고난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고난은 이 현실에서 우리가 상속받아야 할 것이라면 영광은 종말론적인 상속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그런 영광을 완전히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종말에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신성이기도 하고, 절대적인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참된 세계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런 종말론적 영광, 찬란한 생명까지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십자가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오늘 우리의 실존이며, 부활의 영광은 내일의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내일의 영광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믿는 사람은 오늘의 고난이 영광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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