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책
1) 힘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2절에 「그 손에 펴 놓인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라고 하였다. 그것은 영계의 영물에 의하여 사도 요한에게 보여졌다. 그 내용이 공개되어 있는 책이었다. 펴 놓인 책이었다.
2) 우주적 관계를 맺고 있는 책이었다. 다시 요한계시록 10장 2절은 말하기를 그 작은 책을 가진 힘센 천사는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았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전 우주를 관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은 책은 온 세계 인류와 관계하고 있는 내용의 책인 것이다.
3) 그 작은 책은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한 복음이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하였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구약의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전하여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믿는 자에게는 그 내용이 보여지고,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즐거워지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에게는 개인의 종말이나, 우주적 종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나, 영생과 영벌의 진리가 전혀 열려져 있지 않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보기는 보아도 그 내용을 모른다. 실로 그러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과 하는 일을 보고도 저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예수를 미친 자라고 하였다. 귀신들렸다고 하였다. 핍박했고, 배척했고, 십자가에 죽였다. 주님의 복음운동의 최종사건이 요한계시록에서 전개된다. 이것은 공개적이다. 역사적인 사건의 사실로 전개된다. 그것은 펴 놓인 작은 책대로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신자들은 그 내막의 오묘나 중대함을 모른다. 세계의 종말에 일어나는 환난의 성질이나 교회운동의 성질을 전혀 모른다. 그것은 공개적인 비밀이다. 그렇다면 작은 책은 종말의 복음을 의미한다. 끝날에 관한 진리이다.
2. 작은 책과 사도 요한
1) 사도 요한이 소유해야 될 책이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0장 8절에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라고 하였다. 여기서, ‘가지라’는 말은 ‘취한다’, ‘참다’, ‘가지다’, ‘영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헬라어 ‘람바노’(lambavnw)에서 온 제2과거 명령형이다. 단순하게, 이유 없이 그 책을 취하라, 소유하라는 뜻이다. 이는 자기의 소유로 힘 있게, 자신 있게, 확실히 소유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센 천사가 그 손에 작은 책을 들고 있는 것은 그 천사의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의 것이 되기 위해서 갖고 있는 전달의 사명 중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우선적으로 그 작은 책이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의 영예요, 자랑이다. 사도 요한에게 작은 책이 주어짐은 지상의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책인 것이 확실하다. 이유는 사도 요한이 우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으로 인도받고 있기 때문이다(계 1:9). 그렇다면 바로 작은 책은 교회의 소유가 아닌가? 복음의 비밀은 주께서 교회에 주신 축복의 비전(Vision)이 아닌가?
2) 사도 요한이 가지러 나아가야 할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9절에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늘에서 들려 온 그 영음에 대한 사도 요한의 신종이다(계 10:8). 그는 그 천사 앞에 나아갔다. 하나님의 비밀, 곧 복음의 계시를 받기 위하여 그 앞에 나아갔다. 그는 천사의 손에 있는 책 앞으로 나아갔다. 열려진 책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작은 책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얼마나 복된 장면인가? 계시의 영광 앞에 나아가 손을 내밀고 그 계시에 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이 아닌가?
3) 사도 요한이 먹어 버려야 할 책이었다. 요한계시록 10장 9절 중에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고 하였다. 보관하라 하지 않고 먹어 버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먹어 버려야 될 책이다. 먹어 버리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1) 양식을 삼으라는 말이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하였다. 에스겔 3장 1절에는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라고 하였다. 에스겔 3장 2~3절에는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하였다. 그 작은 책을 네 양식으로 삼아 힘을 얻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주식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유는 그 말씀 속에서 떡이 나왔기 때문이다(마 4:4).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천지를 호출하지 않았던가? (2) 죽지 말고 살라는 뜻이겠다. ‘먹으라’는 말은 산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이다(요 6:53~58).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는 자는 인자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다. 그것은 인격적 체험을 의미한다. 계시를 먹을 줄 아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환난 날에 죽지 않고 살게 된다. 이유는 그 말씀(계시)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운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때문이다(히 4:12). (3) 그 내용대로 신종하라는 뜻이겠다. ‘먹어버리라’는 말은 무조건 그 내용을 영접하라는 의미이다. 영접한다는 말은 그 펼쳐진 책의 내용을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먹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행동적인 강령을 요구하는 말이다. 결과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소화시키라는 말이다. 과연 그러하다. 하나님의 계시(말씀)는 언제든지 결과를 요구하고 있다. 말씀했으면 그 말씀대로 행동과 사건이 있을 뿐이다. 양식을 먹었으면 그 결과는 움직이는 힘이 되어 나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계시를 믿음으로 바로 깨닫고, 알고, 이해하여 그 신종이 바로 그 말씀의 성취(결과)를 나타냄은 중대하다. 바로 그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것이 승리의 삶이다.
4) 특유한 맛을 가진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9절이 또 말하기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쓰고, 단맛을 갖고 있다.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하였다. 양극의 반응을 나타내는 책이다. ‘달다’는 말은 기쁨과 만족이 한없다는 말이다. 이유는 그 책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parousiva)과 성도들의 최후 승리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 엄청난 승리의 영광은 기독신자들에게 한결같이 빛나는 찬란한 소망이다. 그리고 성경(작은 책) 안에 약속된 무수한 축복들과 영광은 꿀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다. ‘쓰다’는 말은 헬라어로 ‘피크라이노’(pikraivnw)라고 하는데, 이 말은 ‘괴롭히다’, ‘쓰라리게 하다’, ‘고통이 더하다’라는 말이다. 이는 그 복음대로 생활하는 일과 전파하는 일로 인하여 오는 이 세상의 핍박과 박해, 고난, 고통, 투옥, 추방, 심지어 죽음(순교)까지 당케 되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현재의 고난, 장차의 영광의 양면을 나타내는 말이다(롬 8:18). 복음은 국가적인 박해(마 10:18), 종교적인 박해(마 10:17), 가족적인 박해(마 10:21), 온 우주적인 박해(마 10:22)를 내포하고 있다.
5) 사도 요한의 체험이다.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그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렸다’고 하였다. 이는 자기의 소유로 완전히, 영원히 먹어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입에는 꿀같이 달다고 하였다. 배에는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양면으로 성도에게 역사한다. 구원의 복음, 사죄의 복음, 축복의 복음, 영생의 복음은 우리에게 꿀맛과 같다(시 19:10, 겔 2:8). 그러나 그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며, 생활로 옮기며, 나누어 줌(전도)에는 죽음의 고통이 따른다. 이것은 기쁨과 슬픔의 양면이다.
6) 사도 요한의 예언 사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에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였다. 바로 여기에 작은 책을 먹어 버리라는 영음의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작은 책을 먹은 자의 사명은 예언 사명, 곧 전파 사명이다. (1) 예언 사명이다. 본문에 예언하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계 1:7).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영생과 영벌의 사건이다. (2) 필연적인 사명이다.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은 반드시 수행해야 될 것을 나타내는 강세형이다. 그것은 마치 ‘먹어 버리는’ 작용과 같은 것이다. 식음 작용은 생명운동에 필연적인 작업이다. 예언 사명은 그렇게도 중대하고 필요하다. 죽고 사는 관계이다. (3) 반복적인 예언 사명이다. 우리 본문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였다. 이는 반복적인 전파 사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은 그 본질적인 내용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교회의 최후 승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끝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다시 예언하고, 또 다시 예언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음식을 반복하여 다시 먹음과 같다. 이것은 또한 계속적인 증거 사명을 의미한다. 한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모든 지상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하여 준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전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새롭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책의 복음(성경)을 다시 증거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선교사 끝넬넬은 기도하던 중에 세계 지도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지도 위에 수많은 인종들이 복음을 달라고 애원하고 아우성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자기 선교 사명의 중대성을 깨닫고 세계 선교 사명에 불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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