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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의 4대 권세

요한계시 석원태 목사............... 조회 수 2146 추천 수 0 2009.12.21 21:26:06
.........
성경본문 : 계11:3~6 
설교자 : 석원태 목사 
참고 : 경향교회 http://www.ghpc.or.kr/ 
2007' 경향의 강단 요한계시록강해(70)

"두 증인(참된 교회)"
요한계시록 11:1-14
석원태 목사

Ⅶ. 두 증인(참된 교회) 요한계시록 11:1-14

척량 운동(계 11:1~2) 
 두 증인(계 11:3~4) 
 두 증인의 4대 권세(계 11:3~6)

  권세란 무슨 뜻인가?
  먼저 이 부분에서 ‘권세’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는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았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서 또 말하기를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 ‘권세’(evxousi,a)는 마태복음 10장 1절에 열두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권능을 말함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닌 세상에서의 특권이다. 합법적인 권리, 힘, 능력을 의미한다. 공개적인 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세이다.
  성경에 이 권세는 세 가지 내용으로 형성된다.

  그 하나는 이적이다.
  이 이적(테라스, te,raj)은 깜짝 놀랄 일, 호흡이 멈출 지경에 이르도록 놀라움에 빠지는 환희를 의미한다(눅 13:12, 행 2:19, 2:22, 43, 4:30).
  또 하나의 경우는 표적이다.
  이것은 세메이온(shmei/on)인데 이적의 결과, 의미를 새기는 것을 뜻함(Sign)이다. 예컨대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풀고 물 위에 걸으신 결과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새겨 놓고 말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결과 예수는 해방과 생명의 사역자임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요 2:1~11, 6:14, 마 14:33).
  셋째의 경우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두나미스(du,namij)인데, 폭발, 힘을 의미한다(행 1:8, 8:10, 10:38, 2:22, 마 11:20, 막 6:14, 눅 10:13, 고후 13:10, 살후 2:9).
  이적과 표적은 능력의 결과를 나타낸다. 모든 사람의 죄악의 마음을 폭발시켜 놓고 마는 것이다.
  바로 ‘깜짝 놀람’(이적)+‘표적’(새겨짐)+‘능력’(폭발)=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 자체를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과 교회 창설과 재림 사건 자체가 이적이요, 표적이요, 능력이다. 깜짝 놀랄 사건이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사건이다.
  두 증인(교회)은 이런 권세를 받은 것이다. 교회는 이런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
  어떤 권세인가? 무슨 권세를 받아 행사할 것인가?

  1. 첫째는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권세이다(회개권세).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였다.

  1) 굵은 베옷은 무엇을 뜻함인가?
  굵은 베옷(삭코스, sa,kkoj)은 심한 통회와 비애를 상징한다.
  구약 시대의 경우 한 국가나, 민족이나, 사회나, 가정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마다 사죄를 구하는 의식과 절차가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거기에 앉아, 티끌을 날리면서 회개하는 것이었다.
  (1) 개인적인 경우
  예컨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후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다. 그때 그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을 하고, 재에 누운 일이 있다(왕상 21:27).
  (2) 민족적인 경우
  유대인의 포로 생활 어간에 본국에 남은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방 여자를 취하여 결혼하므로 혼혈을 이룬 일이 있다.
  그 후에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자들 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스라와 그의 동지들은 기가 막혀 속옷과 겉옷을 찢고, 수염을 뜯고, 무릎을 꿇었다. 이로 인하여 수문 앞 광장에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스 10:1).
  (3) 국가적인 경우
  니느웨 백성들과 왕은 40일 후에 니느웨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망한다고 하는 요나의 전도를 받았다. 그때 왕과 온 백성이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는 운동을 하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긍휼의 잔을 베푼 일이 있다(욘 3:5).
  이렇게 굵은 베옷을 입는 일은 중하고 급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는 길이요, 소망의 길이었다. 이 굵은 베옷을 입는 자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인용하고, 긍정하고, 자신이 주장하였다. 마태복음 11장 21절에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내가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죄에 대한 비통과 회개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권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받은 특권이요, 능력이다. ‘회개’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의 은총을 입는 일이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다이너마이트에 맞아 깨어지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회개는 바로 이적이요, 기적이요, 표적이다.
  죄의 삯인 사망을 받은 자가 그 사망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오는 일이야말로 이적이요, 표적이요, 권능이 아니고 무엇인가?
  회개야말로 위대한 권세 행사이다. 육신이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작은 이적이다. 영이 사망의 진토에서 부활 생명을 받는 회개야말로 이적 중의 이적이 아닌가? 택자가 받는 특권이 아닌가?

  2) 굵은 베옷을 누가 입는가?

  (1) 선지자가 입었다.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 아래 살던 진리의 투사 엘리야가 입었다.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영적으로 병들어 만신창이 되어 버린 웃시야 왕정 시대에 궁중 선지자 이사야가 입었다. 저 중간시대의 암흑기에 살던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이 입었다. 그래서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자였다. 마지막 환난기에 주님의 참된 증인들이 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2) 죄 중에 있던 자들이 입었다.
  느헤미야 9장 1절에 「그 달 이십사 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라고 하였다.
  죄로 인하여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이 회개할 때 입는 것이다.
  (3) 고난 중에 있던 자가 입었다.
  욥기 16장 15절에 「내가 굵은 베를 꿰어 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고 하였다. 욥은 환난의 연단 중에서 자기 죄를 찾아 회개하면서 이 옷을 입었다.

  3) 굵은 베옷을 어디에서 입었던가?

  (1) 길거리에서 입었다.
  이사야 15장 3절에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라고 하였다.
  (2) 소돔과 고모라, 애굽의 거리에서 입었다(계 11:8).
  두 증인들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소돔과 애굽의 거리를 이 굵은 베옷을 입고 왕래하면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혔다(계 11:10).
  역사의 대로에서 입었다. 수많은 영웅과 호걸과 가인과 걸사와 재사, 모사, 대가들이 왕래하는 역사의 광장에서 하나님의 참된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살아간다. 이 일로 인하여 핍박과 조소와 냉대를 받는다. 시편 69편 11절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3)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도 입어야 한다(계 11:1).
  그렇다면 참된 증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도 부단한 회개 운동을 계속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교회(두 증인)는 타(他)의 죄에 대한 연대적인 책임 때문에 역사의 거리에서도 굵은 베옷을 입어야 하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 자체 안의 어두움 때문에도 굵은 베옷을 입어야 한다는 진리이다.

  4) 굵은 베옷은 언제 입느냐?

  (1) 장례식 때 입었다.
  구약의 경우 사람이 죽어 장사지낼 때 그 슬픔을 굵은 베옷으로 나타내었다. 신약적 의미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장사지낼 때 회개 은총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갈 5:24). 바울은 날마다,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고전 15:31). 그렇다면 그는 날마다, 날마다 베옷을 입고 사는 자가 아니었던가?
  (2) 범죄했을 때 입었다.
  이것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진리이다(계 22:14).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는 자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계 7:14).
  그렇다면 굵은 베옷을 입는 일이야말로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는 일이다.

  5) 굵은 베옷을 왜 입느냐?

 (1) 교회는 세상 죄에 대하여 연대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 3장 17~18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으로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핏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라고 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무리를 대신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저들의 빚진 것을 계산해야 한다(히 13:17).
  (2) 환난 중에 승리를 위하여 입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장 7절에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라고 하였다.
  그 짐승의 정체는 큰 붉은 용(계 12장)이요,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다(계 13장). 이 짐승과의 접전에서 굵은 베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증인들은 승리한다고 한 것이다.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비결은 굵은 베옷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은 사람들은 항상 능력의 주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자기를 이긴다. 회개하면 마귀를 이긴다. 회개하면 세상을 이긴다. 회개하면 사망을 이긴다. 회개하면 적기독(짐승)을 이긴다.
  회개만 하면 산다.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산다. 교회가 살고 국가와 민족이 산다. 할렐루야!
  회개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그 민족을 대적할 자 없다. 송사할 자 없다. 정죄할 자 없다. 핍박하고 죽이려 하지만 끊을 이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넉넉한 승리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6) 굵은 베옷을 어떤 태도로 입느냐?

  하나님 앞에서 입는다. 중심에서 입는 것이다. 심령으로 입는 것이다. 요엘 2장 13절에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였다. 바로 마음을 찢는 회개이다. 마치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는 태도이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하는 태도이다.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딤전 1:15)라고 하는 태도이다.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하는 태도로 입는 것이다. 참으로 중심의 회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 생명적인 회개이다. 그것은 결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것과 다른 것이다.

  7) 언제까지 입느냐?

  1,260일 동안을 입는다(마흔두 달). 그것은 복음 운동의 사역이 끝나는 전 교회시대에 계속해서 입는다. 주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교회는 이 굵은 베옷으로 무장해야 한다.
  날수로는 1,260일이다. 달(月)수로는 42개월이다. 연수로는 3년 반이다. 그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 3일 반이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이다.
  곧, 1년과 2년과 반년이다. 어떤 경우든 예수 승천 이후부터 재림하시는 전 신약 시대의 복음 운동의 기간을 의미한다(계 11:3).
  그렇다면 굵은 베옷을 입는 일은 수치가 아니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고운 베옷이다. 아름다운 채색 옷이다. 제일 좋고 값진 옷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이 세상에서 입는 옷이기 때문이다.
  결코 굵은 베옷은 패배자나 망할 자가 입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영광의 백성들이 입는 영광의 갑옷이다. 빛의 옷이다. 환난 날에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 굵은 베옷으로 단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신분이요, 자격이 아닌가?
  굵은 베옷을 입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굵은 베옷을 입는 자만이 주 앞에 설 수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을 기업의 후사가 아닌가? 그러므로 참된 두 증인에게는 이 굵은 베옷이 그의 의상이다.
  그것은 놀라운 권세 행사이다.

  이것은 두 증인들이 받은 첫 번째 권세이다.

2. 둘째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권세이다(성령권세).

  요한계시록 11장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하였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근본적으로 불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감람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감람유(기름)를 촛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성전의 어둠을 제하는 불을 밝힌다.
  스가랴 4장 1~14절에서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 나타났다.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에 의해서 빛을 발하고 있는 환상 계시이다. 여기에 나타난 환상 계시의 초점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에 의하여 성전이 재건되고, 끊어졌던 성전의 등불이 밝혀진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교회 운동, 곧 성령(불) 운동을 이름이다.
 스가랴에 나타난 환상 중에 순금 등대에 공급되는 감람유의 기름은 성령, 곧 나의 신, 하나님의 신을 의미한다(슥 4:6).
  여호수아,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운동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감람유’는 성전의 불을 밝히는 기름이고, ‘두 촛대’는 불을 밝히는 등잔이다. 바로 두 촛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들이요, 그 증인들이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람유는 ① 먼저 감람나무의 열매가 익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② 익은 열매를 틀에 넣어 순결한 기름을 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③ 그 순결한 기름은 아론과 그 자손에 의하여 접시(주발)에 담겨져야 한다. ④ 또 아론과 그 자손에 의하여 점화되어야 하고 ⑤ 그 불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⑥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영영한 규례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전은 언제나 밝아야 하고 어두워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7장 20~21절에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 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하였다(신 8:8, 미 6:1, 5, 학 2:16).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두 촛대와 두 감람나무는 주님의 참된 교회요, 그 교회의 참된 사역자들이다. 주님의 참된 교회는 결코 이 세상 권세를 행사함이 아니고 성령(불) 권세를 행사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경 진리의 표현은 아래와 같은 의미가 있다.

  1) 교회 운동은 신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 운동의 산물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요 14:16, 26, 16:7)라고 하였다. 또한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였다(요 15:26, 16:13). 주님이 떠나신 후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주님 대신으로 거할 것이라고 하였다(요 14:16~17). 그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의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요 14:26),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요 16:13), 예수를 증거하게 하고(계 15:26), 장래 일을 알게 하고(계 16:13),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고(요 16:14),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하여 줄 것이라고 하였다(요 16:7~8).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행 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예수 승천 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받기 위하여 기도하였다(행 1:4, 14). 마침내 ① 오순절에 ② 기도하던 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③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 소리가 저희 앉은 집에 가득하고 ④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였다. ⑤ 거기 있던 자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⑥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행 2:1~4). 이것이 본격적인 초대 교회의 시작이다. 초대 교회의 시작은 성령 강림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성령 강림은,
  첫째로 제자들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기도하던 중에 임하였다(행 1:4, 14, 2:1).
  둘째로 초자연적 역사였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 자신의 역사였다. 그것은 실로 불가항력적 역사였다.
  셋째로 성령 강림의 현상을 제자들은 바람 같은 소리처럼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넷째로 성령 강림의 현상을 불처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성령 자체가 바람 그 자체나, 불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바람 같은 소리, 불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다섯째로 각 사람 개인, 개인에게 임하였다.
  여섯째로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을 하였다. 그 방언의 내용은 사도행전 2장 11절에 나타나 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다.’고 함이 중대하다.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앞에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신 것」(행 2:22)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무엇일까?
  그의 오심(화육)과 사심(능력)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이다. 저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하게 하였다. 바로 그 말씀이 방언인데 그 방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다(행 4:8~12).
  성령이 충만한 무리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행 4:31).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에까지 이르렀다(행 6:8, 9, 15, 7:54~60). 성령이 충만한 빌립도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말씀)하였다(행 8:12). 또한 성령의 지시를 받고 가사로 내려가 에티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이사야 성경을 주석해 주었다(행 8:26~39).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였다(행 9:17, 13:2, 고전 1:21~25, 갈 6:14, 17). 그러므로 방언의 중요 임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큐리오스, ku,rioj)라고 증거하는 이것이다(요 14:16~17, 15:26, 16:7, 8~11, 13).
  일곱째로 저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전도하고, 성령으로 구제하고, 성령으로 봉사하였다.
  이러한 권세 있는 성령을 속이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사하였다(행 5:1 ~11).
  성령을 돈 주고 사려고 상업 행위를 시도하던 시몬은 은과 같이 망할 것이라고 책망을 받았다(행 8:18~24).
  이러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주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것이 곧, 성경 말씀이다(딤후 3:16, 벧후 1:20~21). 성령의 최고, 최귀의 선물은 성경 기록에 있다. 성령 충만한 선지와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글(文字)로 기록케 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라」(엡 6:17)고 하였다. 이것을 가진 자는 성령 권세를 행사하는 자이다.
  성령의 요긴한 사명은 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일이다. 그 주님의 뜻을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싸움(신령한 영전)도 결국 영과 영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고 하였다.
  귀신의 영, 곧 더러운 영, 사단의 영과 성령의 대결인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산물이요, 성령의 단체이다. 그러므로 성령 권세를 행사할 때만이 참 교회인 것이다.

  2) 교회 운동은 성령 자신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사람의 힘이나 능력, 곧 인력이 주체 세력이 아니라 영력, 성령의 힘, 그 자체가 주체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생명은 성령 충만함에 있다.

  3) 교회 운동은 빛의 운동, 불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두 감람나무(기름)와 두 촛대(교회)는 곧 어둠을 비추는 빛의단체임을 보여 준다.
  이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닌 성령의 불빛이다. 영계를 비추는 초자연적 불이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사람들의 마음의 부패를 비추고, 밝혀 주고, 태워 주는 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빛인 것이다(마 5:14).
  어떤 경우든 교회가 그 복음 전파 운동에서 권력이나 금력이나 어떤 무력을 행사함은 전혀 불가하다. 역사상에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항상 시대 시대마다 그 시대의 권력과 금력과 무력과 타협할 때 있었다.
  엘리야와 미가야 시대에 시드기야와 그를 추종하던 어용 선지 400명이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이 모두 그러한 자들이었다.
  중세 교회(Roman Catholic)나 일제 말엽에 한국 교회가 그러하였다.
  교회는 어떤 세상의 특정 정당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모든 정당, 모든 사람, 모든 계급들에게 다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빛은 죄악의 암흑을 폭로할 따름이다. 그 빛의 단체는 암흑 중의 인도자가 된다. 그 빛의 단체는 위험 중에 경고하는 예언의 등불이 되고, 안전을 알려 주는 생명의 신호가 된다. 그 빛의 단체는 온갖 죄악의 병균을 살균하는 생명의 열량이 된다. 그 빛의 운동에 가담한 자마다 생명이요, 창조요, 생산이요, 소망이요, 구원이요, 영생이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성령 권세를 행사하는 단체이다. 성령의 빛이 아니고는 어둠을 이길 다른 방도가 없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고 만다. 이것은 진리이다. 역사적인 교훈이었다. 성령의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 그와 그의 단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의 불기둥이 되고 마는 것이다.

3. 셋째는 예언하는 권세이다(말씀 권세).

  요한계시록 11장 5~6절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라고 하였다.
  이 성경의 구약적 배경은 영능의 선지자 모세나 엘리야나 엘리사나 예레미야 같은 사자들의 사역을 두고 한 말로서 신약 교회 운동의 성격을 보여 준다.
  우리 본문에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이 피가 되게도 하고, 권세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재앙을 동원하여 세상(땅)을 요리하였다고 한다. 어떤 권세인가? 이 본문의 경우는 예언, 곧 말씀의 권세이다.
  저들의 예언 권세, 곧 말씀 사역은 어떠했던가?

  1) 그것은 불과 같은 말씀 운동의 사역이다.
  요한계시록 11장 5절에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5장 14절에는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고 하였다.
  열왕기하 1장 10절에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 와서 저와 그 오십 인을 살랐더라」고 했다.
  이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이다. 사마리아의 아하시야 왕이 궁실 난간에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 신하를 에그론신 바알세불에게 가서 자신의 치병 여부를 물어 보라고 보낸 일이 있었다. 저들이 가던 도중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고 불신앙의 아하시야 왕의 죽음을 선언한 일이 있다. 놀라 버린 아하시야 왕이 오십 부장과 그 오십 인을 보냈을 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저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한 사건이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런 경우 엘리야 입에서 나온 그 말씀은 곧 불이 되고 말았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불이요, 불덩이다. 성령의 검이다. 그 말씀이 증인들의 가슴에 던져 불을 질러 주었다. 그 불타오르는 말씀을 받은 증인들이 그 말씀을 저들의 입으로 증거하고 행동으로 증거할 때 그것은 곧 불로 나타나 버린 것이다. 뜨겁게 나타난 것이다. 그 말씀이 불과 같이 역사한 것이다.
  엘리야 선지는 아합의 어용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불로 대결하기로 하였다.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신이라고 설정하기로 하였다(왕상 18:19~24).
  백주의 대결이었다. 영권 투쟁이었다. 제물에 불을 가지고 오는 신만이 살아 계신 참신이 되는 시간이다. 참으로 역사를 판가름하는 시간이요, 장소였다. 메마른 대지에 축복의 비를 받아야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저들의 기도 시간은 길었다. 아침부터 낮까지, 낮에서 저녁 소제를 드리는 시간까지였다. 저들의 기도 대상은 바알이었다. 저들의 기도자 수는 450명이었다(왕상 18:22). 기도의 열심은 순교적이었다. 큰 소리로 부르고 저희의 규례를 좇아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까지 하였다. 그러나 바알신은 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왕상 18:25~29).
  이제 엘리야의 시간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수효를 따라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였다(전통 계승).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였다(신본주의). 돌로 단을 쌓고,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웠다(성별주의). 송아지의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렸다(회개와 언약주의). 그리고 기도하였다.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또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자인 줄로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살아 계셨다.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엘리야의 하나님은 불을 가지고 오셨다. 그 불이 제단의 제물을 태웠다. 또 도랑의 물을 핥아 버렸다. 드디어 모든 백성은 그 불 앞에 엎드리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왕상 18:30~39).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은 바로 불과 같은 역사가 아닌가?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고 예언하였다.
  이런 경우 엘리야의 입의 말은 심판의 불이요, 재앙의 불이 아닌가?
  홍수 심판을 예언하던 노아의 입의 말은 곧 심판의 불이요, 심판의 물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사자들의 입에서 나간 소돔성 멸망의 예언은 곧 심판의 불이 아니었던가?
  확실히 참된 예언자들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역사를 심판하는 불이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히 12:29).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곧 소멸하는 불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그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하는 힘이 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은 신자의 영은 밝고, 뜨겁다. 움직인다. 요진한다. 그러나 불신앙의 영은 그 불 앞에 정죄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저들의 마음이 불타는 중에 부활 신앙을 찾게 되었다(눅 24:32).

  2) 심판하는 말씀의 사역이다.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라고 하였다.

  (1) 비 오지 못하게 하는 사역은 구약의 엘리야의 예언 사역이었다.
  열왕기상 17절 1절에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그것은 엘리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 활동의 예언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고 불순종할 때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신 27:23~24)고 하였다. 과연 엘리야의 말과 같이 하늘은 놋이 되어 버렸다. 그 가뭄은 아합의 왕가와 그 추종자들을 징치하는 심판의 도구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심판이었다. 왜냐? 그 말씀 속에는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 속에서 모든 존재의 시작과 진행과 마침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없다 하면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가 있다고 하였을 때 비가 쏟아지고 말았다(왕상 18:1).

  (2) 물이 피 되게 하는 사역이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서 행한 심판 사역이다. 강퍅한 바로를 징치하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바로 앞에서 물이 변하여 피 되게 하였다(출 7:19).
  저들의 예언 활동에 이러한 초자연적 이적이 수반된 것은 저들의 예언이 참이라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입증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참된 증인들을 붙잡아 쓰시고 계신다는 표적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지상의 악도들을 벌하고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가?

  (3) 불가항력적인 사역이다.
  요한계시록 11장 6절은 또 말하기를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라고 하였다.
  저들의 예언 활동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사건의 대소나, 사람의 다소나, 어떤 압력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에 상관이 없이 힘 있는 예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유는 저들이 받은 예언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말씀은 불이요, 불덩이요, 불의 검이다(엡 6:17). 참된 교회는 이러한 말씀의 권세를 정당하게 행사할 때 증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된다.

  4. 넷째는 기도하는 권세이다.

  요한계시록 11장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하였다.

  이미 우리는 이것이 교회가 받은 성령 권세라고 생각하였다.
  그 밝은 성전의 불빛 아래서 향단에 타오르는 향불이 있었다. 바로 그 향단의 향불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하였다(계 8:3~5).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서 또 말하기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비 오지 못하게도 하고, 물이 피 되게도 하고, 아무 일에든지 하나님의 원하는 대로 역사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거 사역 안에는 저들의 강한 기도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을 야고보서 5장 17~18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저 유명한 갈멜산 꼭대기에서 일어났던 엘리야의 기도 운동을 두고 한 말이겠다. 거기 엘리야의 기도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왕상 18:41~46).

  1) 그 기도는 확신에 넘치는 기도였다.
  열왕기상 18장 41절에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불을 본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왕상 18:1). 그는 아직 비를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큰비의 소리를 듣는다고 아합에게 일러줄 만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2) 성별의 기도였다.
  열왕기상 18장 42절 중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라고 하였다.
  큰비의 소리를 들은 엘리야는 따로 갈멜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큰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자가 아니라, 큰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기도하게 한 동인이 된 것이다. 그는 따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의 자리를 잡은 것이다. 따로 높은 산에 기도의 자리를 잡은 엘리야의 모습이야말로 성별의 모습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 교회 운동의 모습이어야 한다(마 17:1~2).

  3) 겸손의 기도였다.
  열왕기상 18장 42절 중에 또 말하기를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라고 하였다. 엎드리고 그 얼굴은 무릎 사이에 넣음은 그의 겸손한 태도를 이름이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태도요, 주님의 도움을 비는 애원자의 태도이다.

  4) 간절한 기도였다.

  열왕기상 18장 42절에, 그 몸을 꿇어 엎드리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음은 그 기도의 간절성을 보여 준다. 결사적인 소원을 보여 주고 있다. 왜 저렇게도 간절하였을까? 큰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5) 인내와 소망의 기도이다.
  열왕기상 18장 43절에는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하였다.
  그의 기도에는 절망이 없었다. 오직 인내와 소망뿐이다. 왜냐? 이미 믿음이 큰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받을 때까지 기도함이 신자들의 기도이다. 바라보고 일곱 번까지 그리하였다.

  6) 응답을 보고 마는 기도였다.
  열왕기상 18장 44절에는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라고 하였다.
  열왕기상 18장 45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 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고 하였다.
  결과를 보는 것은 체험 종교의 특색이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입증이다. 죽은 신은 응답이 없다. 그것은 바알과 아세라의 신들의 특색이었다(왕상 18:29). 저 신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셨다. 저들은 그래서 엘리야 제단의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 버렸다(왕상 18:38).
  이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큰비를 지면에 싣고 오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7) 왕과 백성에게 축복을 나누어 먹이는 기도였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르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왕상 18:44) 하였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몸소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고 하였다(왕상 18:46).
  이렇게 축복의 증인들은 백성에게 소망을 주고 왕에게 거짓 없는 충성을 다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증인의 4대 권세를 생각하였다.
  첫째로 오늘의 증인 단체인 교회는 굵은 베옷을 입는 권세를 받았다. 그것은 회개하는 권세였다.
  둘째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권세, 곧 성령 권능의 행사였다.
  셋째로 예언, 곧 말씀 행사의 권세였다.
  넷째로 기도하는 권세였다.

  이것은 오늘 지상의 교회가 받은 능력이요, 권세요, 특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들의 증거 사역은 결코 저들 자신의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보고, 듣고, 받은 것을 나타내는 증인들이었다. 저들은 그 증거 사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자들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이 저들 삶의 모토(motto)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저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던 불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히 11:38).
  저들은 증거 사역을 위하여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히 11:36~37).
  이러한 일들은 참된 증인들의 어쩔 수 없는 생활 철학의 생리가 되고 말았다. 저들은 그렇게 소명되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바로 이것이 신약에 나타난 수다한 증인들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저들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권을 행사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이요, 존재 의의요, 목적이 된다. 회개운동! 성령운동! 말씀운동! 기도운동! 이것만이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이다.
  이것이 없을 때 이미 교회일 수는 없다. 머리털이 깎인 삼손이요, 눈 뽑힌 삼손일 수밖에 없다. 죽은 교회요, 맛 잃은 소금이요, 빛 없는 등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정당한 교회의 영권 행사만이 사단의 정체를 이긴다. 큰 붉은 용을 이긴다. 바다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이긴다. 666을 받은 다수주의와 바벨론 음녀를 이길 수 있다.
  오, 교회들이여! 주님이 주신 영권을 행사하는 능력을 받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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