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자(교회)와 큰 붉은 용의 전쟁(계 12:4~17)
1) 제1차 전쟁 - 용의 1차 패배(계 12:4~6)
(1) 용의 1차 도전 요한계시록 12장 4절 중에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하였다. 이 본문은 분명히 창세기 3장 15절을 생각나게 한다.
A. 구약 교회와 용
① 여인의 후손과 용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였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이다. 창세기 3장의 ‘여인의 씨’는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이 해산할 아들, 곧 남자 아이이다. 또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한 「여인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때부터 여인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와 뱀의 원수 관계가 시작되었다. 벌써 그는 아담과 하와를 도전했고, 아담과 하와의 구원을 위한 교회 운동의 약속에 도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② 셋으로부터 노아 시대의 교회(여자)와 용 아담의 후손 가인은 경건한 아벨을 죽였다. 그 후에 셋이 태어났다. 그 셋의 가문을 통하여 메시야(아이, 남자)가 탄생될 것을 마귀는 알았다. 셋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그 셋의 후손 가운데서 여호와를 경외한 노아 가정이 메시야를 약속 받은 가정이다. 그것이 방주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사단은 경건한 하나님의 자손들을 유혹해서 타협하게 하므로, 죄악의 거인(장부) 네피림을 출생시켰다. 그러나 사단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의 가정을 통한 방주 운동(교회)이 승리하였기 때문이다(창 6~8장).
③ 노아 시대부터 족장 시대 교회(여자)와 용 오실 메시야의 약속은 노아의 후손 중에 아브라함 가정의 선택을 통하여 약속되었다(창 12:1~3). 그러나 사단은 아브람이 약속을 받은 지 10년 만에 사라와 아브람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하였다. 그 결과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이 출생하였다(창 1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신실하신 약속대로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과 사라를 권념하사(창 17장), 약속을 재확인하시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기한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적자 이삭을 출생시켰다(창 21:1~3). 그리고 뱀의 머리를 진멸할 씨를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을 통하여 출생케 하였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이삭을 헌제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모리아 산경에서 칼을 들고, 이삭을 쪼개어 번제물로 드리려고 하였다. 이때 사단(뱀)은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수풀에 걸려 있는 한 마리 수양을 계시함으로 메시야 출생의 표징을 확증시켜 주었다(창 22장). 뱀의 머리를 진멸할 씨는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출생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리브가는 잉태치 못하였다(창 25:21). 그러나 하나님이 권고하사 그들의 적자 야곱을 통하여 메시야의 조상이 계승되었다. 야곱의 인간적인 불신앙의 처사 때문에 그는 죽음의 위협을 크게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사단은 기뻐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에서의 칼에서 구원하시므로 적자 운동을 계승케 하였다.
④ 광야 교회 시대와 용 용은 야곱의 후손들에게 밀어닥친 흉모(兇謀)를 통하여 여인의 씨를 낳을 교회(야곱의 후손)를 진멸하기로 하였다(출 1장).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자 모세를 통하여 메시야 구원 운동의 확실성과 승리성을 보여 주었다. 광야 교회는 불신앙과 원망, 애굽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결정적인 진노를 초래하였다. 이때 뱀(용)은 좋아서 춤을 추었다. 그럼에도 조부와의 언약에 의한 모세의 중재 기도를 통하여, 광야 교회는 가나안까지 정착하는데 성공했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 의해 거룩한 교회 운동이 계승되었다.
⑤ 왕정 시대의 교회와 용 사울 왕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왕정 국가는 솔로몬 왕의 사후 여로보암의 반란으로 위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유다 지파의 한 가정인 다윗의 가정을 통하여 메시야 출생은 예언되었다(삼하 7:12, 시 89:28, 35, 36, 렘 23:5, 행 2:30). 그래서 마귀(용)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사울의 칼날에서, 다윗 자신의 범죄에서 마땅히 죽을 자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다윗에게 긍휼을 입게 하였다. 솔로몬으로 다윗의 정통 왕가는 이어졌고, 용은 참패하였다. 그래서 예수(아이)는 유다 혈통 다윗의 가정으로 그 계보가 이어졌다. 그러나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할 때, 다윗의 적자 왕손이 멸종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떼죽음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죽음을 당치 않게 하였다(왕하 11:1~2). 우리는 나중에 요아스가 왕이 되고 다윗의 왕통을 계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용은 또 참패한 것이다.
⑥ 포로 시대 교회와 용 앗수르, 애굽, 바벨론의 세력은 확실히 붉은 용들의 독무대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여인(교회)의 씨, 곧 여인의 아들을 멸절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다(사 6:13). 그 그루터기가 그 땅의 거룩한 씨 운동을 하였다. 70년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도 유대 선민의 씨가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주전 5세기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 시대에 유대 민족은 악한 하만에 의하여 완전 멸종의 위기를 맞았다(에 3:13).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왕에게 나아가 탄원했던 에스더의 강청을 통하여, 하나님은 유대인을 살게 하였다. 이때 용은 또다시 참패를 당하였다.
⑦ 베들레헴 교회와 용 이제 용의 발악은 최악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용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낳은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불신앙을 일으켜, 벙어리가 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눅 1:20~22). 그러나 결국 세례 요한은 출생했고 용은 실패하였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초림의 예수를 영접하였다. 또한 용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 탄생 예고에 불신앙을 일으켰다(눅 1:34). 그러나 주의 성령은 마리아에게 믿음을 일으켜 순종케 하였다(마 1:19). 용은 요셉에게도 불신앙과 고민을 일으켰다(마 1:19). 그러나 주의 영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깨닫게 하고 순종케 하였다(마 1:24~25). 그리하여 드디어 마태복음 2장 1절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길고 긴 싸움이며, 또 얼마나 길고 긴 승리인가?
(2) 여인(교회)의 1차 승리(계 12:5~6)
요한계시록 12장 5절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하였다. 어떤 승리일까?
① 여자가 아들을 낳음이라(계 12:5).
예수 탄생이다. 여기 ‘아들’은 한 아들, 한 남성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이다. 이것은 수다한 시대의 예언 성취이다. 특별히 이사야는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하였다. 용은 이 예언의 성취를 거듭 방해하여 왔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으로 그는 참패하였다.
② 그 여자의 아들은 심판의 주 예수시다(계 12:5).
우리 본문은 그 아이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하였다. 여기 ‘철장’은 ‘철로 만든 막대기 안에서’, 혹은 ‘철장에 의하여’라는 뜻이다. ‘다스린다’함은 ‘먹이다’, ‘치다’, ‘사육하다’, ‘돌보다’, ‘양육하다’, ‘감독하다’ 등의 뜻이겠다. 이는 시편 2편 9절의 예언 성취이다. 「네가 철장으로 너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장 27절에는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에는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권세를 철장 권세라고 하였다. 승리하는 교회도 이 세상에서 이런 권세를 행사하고 살아가야 한다. 문제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왕이시라는 것이다. 사망의 철장을 권능으로 깨뜨리신 왕이시다.
③ 그 여자의 아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시다(계 12:5).
우리 본문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하였다. ‘올려가더라’함은 ‘잡다’, ‘끌어가다’, ‘빼앗다’, ‘채어가다’의 제1수동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그 후에 승천하신 사실을 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대로 탄생하시고,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언대로 부활하시고, 예언대로 승천하셨다. 사단(용)은 하늘의 별 ⅓을 동원해서 예수의 탄생을 방해하였다. 그의 재세 기간의 성역 활동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방해하고 부인하려고 하였다. 제자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절대로 십자가에 죽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하였다. 주님이 부활했을 때 사단은 대제사장들과 로마의 군병들을 통하여 예수의 시체를 그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말을 유포시켰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 후 40일간 세상의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활을 확증시켜 주었다. 눈으로, 입으로, 귀로, 음성으로, 행동으로,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 개인 혹은 여러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해 주셨다. 그리고 저희 보는 데서 공개적인 승천을 하셨다(행 1:10~11). 용은 참패하였다. 완전히 참패하였다. 사단의 방해는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럼에도 사단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특히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속의 사건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다. 구원론적인 십자가의 신앙보다는 기복적인 신앙, 미신적인 신앙, 우상 숭배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원색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자체를 부인하고, 그것을 신화적인 요소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사건을 기록한 성경은 사람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있고, 비사실적인 것의 기록이라고 하고 있다.
④ 여자의 안전 보장.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하였다. 아이를 탄생시킨 여자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 여자’(h` gunh)이다.
ⓐ 어디서 안전 보장을 받았는가? 광야이다. 여기 ‘광야’는 ‘그 광야’(h` e;rhmoj)로 막연한 광야가 아니고 특별히 계획되어 지정된 장소를 뜻함이다. ‘도망한다’ 함도 ‘피난하였다’는 말인데, 원수 용이 미치지 못할 안전지대의 피난처를 뜻함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탄생했을 때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하게 함과 같다.
ⓑ 어떻게 보장을 받았는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양육’을 받음으로 보장을 받았다. 여기 ‘양육’의 ‘트레포’(tre,fw)는 ‘먹이다’, ‘양육하다’, ‘키우다’, ‘교육하다’, ‘훈련시키다’ 등의 뜻이다. ‘예비하다’라는 말도 ‘사전에 준비되어 있는 것’을 뜻함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양육을 받고 있다. 그곳이 광야이다.
ⓒ 광야가 어디인가? 우리는 이 광야가 지정학적인 어떤 장소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이 ‘광야’는 바로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곳이다. 여기 ‘양육’은 ‘시련하기 위하여’, ‘연단하기 위하여’, ‘훈련하기 위하여’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바로 가나안 땅의 정착을 위한 연단 장소, 곧 광야 교회였다. 저들은 그곳에서 기적의 삶을 체험하였다(신 8:1 ~20). 그렇다면 그 광야는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지던 장소였다. 신약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광야에서 기적의 떡을 체험하였다(요 6:1~13). 예수께서도 성역 초두에 광야에서 40일간 훈련하였다(눅 4:1~13). 그렇다면 여자의 도피 장소는 곧 ‘이 세상 가운데’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 두고 간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걱정 없다. 주님의 교회는 성령의 보자기 속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보자기 속에 싸여서 영생의 만나인 성경을 먹고, 세상을 이길 힘을 기르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과 말씀의 캡슐 속에서 광야의 환난을 이긴다.
ⓓ 언제까지 연단을 받는가? 우리 본문은 1,260일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미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말한 대로 두 증인(교회)의 증거 기간인 전 신약 교회시대, 곧 복음 증거 시대를 뜻함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는 승리하였다. 용은 참패하였다. 결정적인 참패이다. 예수는 탄생했고, 죽으셨고, 부활하였다. 그리고 그의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세상에서 기적적인 보호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2) 제2차 전쟁 - 용의 2차 패배(계 12:7~12)
(1) 용의 2차 도전(계 12:7)
① 하늘의 전쟁이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라고 하였다. 이제 용과의 전쟁은 그 장소가 땅에서 하늘로 옮겨졌다. 여기 하늘은 ‘그 하늘 안에서’( oujranw=in the heaven)이다. ‘전쟁이 있다’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돌발적인 전쟁을 의미한다. 용과의 제1차 전쟁은 땅이었다. 용은 땅에 오시는 예수의 화육강세,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승리했고 용은 참패를 당하였다. 예수께서 저희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승천) 천사들이 예수를 대동하였다(행 1:11). 이때 큰 붉은 용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도전하면서 승천을 방해하였다. 용이 예수를 잡으려고 그의 악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추격을 하였다. 참으로 무서운 도전이요, 항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된 뚜렷한 진리이다. 그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뜻함이다. 영광의 귀환을 뜻함이다. 성부 하나님께 구속 완성을 바치러 가는 길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의 걸음을 방해하였다. 하늘에까지 예수를 따라 도전하였다.
② 미가엘과 그 사자 대 용과 그 사자의 싸움이다.
미가엘은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 중의 하나였다(계 8:2).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수호신의 역할을 맡은 주역이었다(단 10:13, 21, 12:1). 그는 모세 시체 때문에 마귀와 더불어 변론하고 전쟁한 천사이다(유 1:9). 그렇다면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수종자(천군들)들이, 하나님 보좌 앞과 승천하시는 예수를 추격해 오는 용과 그의 수종자들과 대결한 것이다. 영계의 싸움이다. 영물과 영물들의 싸움이다.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싸움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영계의 극한 대립과 투쟁을 항상 명심불망해야 한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 선한 천사들은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도 보호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벧전 1:12, 마 18:10).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성도들을 삼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부르짖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주님은 이러한 사단의 침노에서 그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선한 수호천사들을 부리는 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과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인 공중 권세자, 사단, 악령, 악한 천사들을 대함이다(엡 6:12). 그러므로 보이는 현상계의 전쟁은 실상 보이지 않는 실존 세계, 곧 영계의 지령에 속한 것이다. 사단의 지령을 받는 이 바벨론 세상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교회와 그의 백성들의 대결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역사 세계 배후의 실존의 움직임을 중시해야 한다. 보이는 현상 세계의 사건들은 보이지 않는 영계의 움직임에서 나오고 있음을 주시하고 살아가야 한다.
(2) 용의 2차 참패(계 12:8~9)
① 요한계시록 12장 8절에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하였다.
‘이기지 못하여’라고 하였다. 이 말은 ‘강하지 못하여’, ‘할 수 없어서’라는 뜻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였다. ‘다시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하였다.’ 함은 하늘에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단번에, 순간적으로, 저놈은 하늘의 전략 기지를 상실당하고 말았다는 의미이다. 사단은 그 이름이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하는 자」(계 12:9)였다. 참으로 권세가 당당한 자 같았다. 그러나 그는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수종자들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힘이 없었다. 강하지 못하고 무력하였다. 과연 사단은 성도 앞에서 실제로 그러하다. 강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하지만 결국 저놈의 끝은 항상 이렇듯이 참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② 땅으로 내어 쫓기고 말았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쫓기니…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하였다. ‘땅으로’라 함도 ‘땅을 향하여’, ‘땅을 목적하고’라는 뜻이다. ‘쫓긴다’는 말도 ‘발로’(bavllw), 곧 ‘던지다’, ‘뿌리다’, ‘넣다’, ‘몰아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과거 수동형 ‘에블레데’(ejblhvqh)로 ‘던짐을 받았다’, ‘잘림을 당하였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파멸이요, 참패이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참패를 당하였다는 말이다. 손에 붙잡혀 던져 버림을 당할 만큼의 참패였다.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추종자들이, 큰 붉은 용과 그의 수종자들을 여유 있게 잡아 던져 버리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성도는 어떻겠는가? 성도의 수종자인 천사들도 사단 앞에 저렇게 강했거든 성도 자신들이야 어떻겠는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는 구령의 권세를 누가 당하랴! ③ 크게 분을 내면서 쫓겨났다. 요한계시록 12장 12절 하반절에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놈은 이 세상에서 우는 사자처럼 덤비고 있다(벧전 5:8). 사단의 분냄은 그가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사람은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때 분낸다. 애굽의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유대의 헤롯 왕이 모두 그러하였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셨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성경의 큰 진리이다(롬 8:34, 행 7:55, 막 16:19,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계 3:21). 이는 예수의 승리의 영광을 뜻하고 있는 말이다. 그는 지극히 존귀한 자로 오셨다는 뜻이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모든 권세를 보유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약속대로 다시 재림하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세세토록 살아 계신 영광의 왕, 의의 왕, 승리의 왕, 축복의 왕, 재림의 왕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
(3) 하늘의 큰 송가(계 12:10~12)
큰 붉은 용과 여인(교회)과의 전쟁은 벌써 두 번이나 치루었다. 첫 번째는 용이 아이(예수)를 해산하려는 여인을 박해하고, 그 여인이 해산하려는 아이의 출생을 방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예언대로 출생했고, 용은 참패하였다. 또한 두 번째 전쟁은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승천하는 길을 방해하려고, 하늘까지 따라 오르면서 도전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늘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에 의하여 용은 참패당하고, 하늘에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땅으로 내어쫓김을 당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하늘에서 「큰 음성」(계 12:10)이 들려왔다.
① 누구의 음성인가?
누구의 송가인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인가? 천사들인가? 24장로들인가? 만물들인가? 아니다. 여기에 들려 온 큰 음성은 순교자들이다(계 6:9~10).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의 송가라고 함이 유력한 것은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로 봐서이다. ‘큰 음성’이라고 쓰므로 그 음성의 내용이 중대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들려져야 할 소리이다.
② 하늘 송가의 주제는 무엇인가?
ⓐ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계 12:10). ‘우리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이다(계 7:10). ⓑ 이제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계 12:10). 여기 ‘능력’은 ‘그 능력’(hJ duvnami")으로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뜻함이다. 구원을 완성하는 일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밖에는 없다는 것이다(계 4:11). ⓒ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계 12:10). 여기 ‘나라’라고 함은 ‘그 나라’(hJ basileiva)로서, 세상이 그 어떤 왕국과도 비교될 수가 없는 영광주의 왕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영역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승천으로 구속 운동이 성취된 후 이룩되는 새 나라요, 곧 교회운동, 천국 운동을 말한다. ⓓ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계 12:10). ‘그리스도의 권세’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 권세’, ‘그 권리’(hJ ejxousiva)가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사망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신 승리의 권세이다. 영원한 권세요, 평화의 권세이다. 그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보유하였다(마 28:18). ⓔ 사단이 쫓겨났다고 하였다(계 12:10). 그놈은 우리 형제들을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던 놈이라고 하였다. ‘참소하던 자’는 ‘그 고소하는 자’, ‘그 고발자’이다. 그놈은 성도 고발을 자기 전문업으로 삼던 놈이다. 이제 그놈들이 쫓겨났다고 하였다. 그 뜻은 내던짐을 당하였다는 의미이다. ⓕ 형제들이 마귀를 이겼다고 하였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 12:11)라고 하였다. 어떻게 이겼는가? 첫째 승리 비결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겼다고 하였다. 우리 본문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라고 되어 있다. 어린양의 피는 곧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다. 그 피가 우리 죄의 값이 되어 지불되었다는 뜻이다(벧전 1:18~19). 그 피는 우리 사죄를 성립시키고, 하나님의 자녀권을 회복 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이겼다고 하였다. 우리 본문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겼다고 하였다. 그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롬 1:16, 고전 1: 18, 2:4~5). 생명이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벧전 1:25).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하였다(히 4:12). 그 말씀은 예수님의 살(皮)이요, 살리는 것이었다(요 6:53). 좌우에 날 선 검이라고 하였다(히 4:12).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할 때, 이 말씀이 능히, 넉넉히 이기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행 20:32). 바로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연약이나, 밖으로부터의 유혹과 핍박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성경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사단이 맥을 쓸 수 없다. 왜냐? 성경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요 5:39). 앞서 간 순교자들은 어린양 예수의 피를 믿고, 그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죽기까지 충성하였다고 하였다.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③ 하늘 송가에 참여한 자들이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저들은 구원받은 천상의 순교자들과 성도들이다. 그리고 영물들, 곧 천사들이다. 여기 즐거워하라는 말은 잔치하라는 말이다. 이제 최상의 행복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④ 하늘 송가에서 제외된 자들이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2장 12절 중에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다. 여기 ‘땅과 바다’는 불신앙의 세상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용이 하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분을 내며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본문의 중요 내용은 하늘의 송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속죄 성취, 능력 성취, 나라 성취, 권세 성취, 사단 축출, 성도의 승리를 가져왔다. 이 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감사와 영광의 송가를 불렀다. 승리가 있는 곳엔 노래가 있다. 그것은 개선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곳엔 찬양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생명의 개선가인 것이다. 오늘날 지상 교회는 생명력이 넘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무궁한 권세이어야 한다. 사단의 패배와 축출, 성도의 승리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교회가 죄를 이길 때 기쁘다. 사단을 이길 때 기쁘다. 세상을 이기고 사망을 이길 때 기쁘다. 그 기쁨의 극치가 생명으로 변하여지는 찬양, 바로 하늘 송가인 것이다.
3) 제3차 전쟁과 용의 패배(계 12:13~16)
|
용은 예수 강세와 십자가의 사역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였다(계 12:4). 용은 예수 부활과 승천을 방해하였다.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였다(계 12:7~8). 그래서 저놈은 하늘에서 활동 기지를 빼앗기고,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났다. 그 후에 그는 세상 임금 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이제 용은 세 번째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자는 곧 교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용이 얼마나 끔찍하게 진리를 대적하는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1) 어떤 여자(교회)를 핍박하였는가(핍박의 도전)?
요한계시록 12장 13절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고 하였다. 남자를 낳은 여자는 주님의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해산하는 교회이다. 남자를 낳은 여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적 기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과 영생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는 진리의 교회를 핍박한다. 그 핍박의 강도는 대단하다. 왜냐하면 용이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계 12:12). 또한 1차, 2차에서 실패한 결과, 크게 분내고 있기 때문이다(계 12:12). 말하자면 최후 발악의 핍박이다. 남자를 낳지 않은 여자를 핍박하지는 아니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수태, 해산하지 않은 교회는 핍박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이름만 교회지 사실상 사단의 회(會)요, 사단의 소속이기 때문이다. 죽은 송장에게 무슨 시험이 필요한가?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겼는가? 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라고 하였다. 그 여자(교회)는 독수리의 두 날개에 업혀 광야에서 보호를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 독수리의 두 날개가 무엇인가? ① 혹자는 신앙과 계명이라고 하였다. ② 혹자는 신약과 구약이라고 했고, ③ 혹자는 말씀과 성령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해석이다.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권능의 보호’를 비유한 것이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도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것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독수리의 두 날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능의 보호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그 다음 ‘광야 자기 곳’에서 양육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지역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장소야 어디이든 하나님의 장중에서 보호되는 곳이 곧 광야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 길 40년의 행로일 수도 있다. 모세의 경우 애굽 바로 왕의 궁중일 수도 있고, 양 치던 장소인 미디안 땅일 수도 있다. 다윗의 경우엔 십 황무지나 엔게디 황무지 등의 여러 피난 장소일 수도 있으며, 바울의 경우 강, 바다, 감옥, 기타 여러 전도 지역일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의 경우 밧모 섬일 수도 있겠고, 세례 요한의 경우 빈들일 수도 있겠으며, 엘리야의 경우 호렙산 그리고 요나의 경우 고기 뱃속일 수도 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상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두 날개에 업혀, 주님이 지정하신 광야 그곳에서 보호를 받았던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각기 주님의 등에 업혀 피난을 받았다. 로마 10代 황제들 시대에 카타콤(지하 동굴)은 기독 신자들의 피난처 광야였으며,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의 박해 시 위그노당들이나 왈도파 그리고 개혁자들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피난 장소, 광야가 있었다. 그곳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한적한 곳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유력한 숨은 성도들의 저택, 별장, 농장일 수도 있었다. 여하튼 어떤 곳이든지, 주님이 자기 등에 업고 데리고 가는 곳은 기적이 쏟아지는 축복의 광야였다. 성령의 불기둥과 말씀의 떡이 저들을 환난 중에서 살려 주었다. 저들은 거기 광야에서 「…뱀의 낯을 피하여…양육을 받았다」(계 12:14)고 하였다. 여기 ‘양육’은 ‘트렙포’(tre,fw), 곧 ‘교육한다’, ‘훈련한다’에서 나온 ‘트레페타이’(pe,thtai)이다. 그렇다면 그 광야는 성도의 연단의 장소요, 축복의 용광로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장소가 뱀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곳, 즉 노기 띤 뱀이 접근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라고 하였다. 그것을 풀면 42개월, 곧 1,260일로 3년 반과 동일한 것으로 신약 전(全) 복음 운동의 기간을 의미한다.
(2) 강 같은 물의 공격
요한계시록 12장 15절에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라고 하였다. 뱀은 입에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피난하고 있는 여자를 수장시키려고 하였다. 여기 용이 토하는 강물은 많은 환난, 극단적인 박해, 고난을 의미한다. 시편 18편 4절에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라고 하였다. 이사야 43장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 물은 사망의 세력, 공포, 환난을 뜻하고 있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물이 ‘강 같다’고 함은 그 환난이나 핍박의 내용이 크고, 많고, 광활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강 같은 물의 정체는 어떤 것인가? ① 무신론적 사상일 수도 있다. ② 유물론적 사상의 도전일 수도 있다. ③ 우상 숭배 사상의 도전일 수도 있다. ④ 불신앙과 반역일 수도 있다. ⑤ 세속적인 유혹일 수도 있다. 즉 육체주의, 향락주의, 쾌락주의의 물결일 수도 있다. ⑥ 기독교 박해 권력의 정권일 수도 있다. ⑦ 인간 이성(理性)을 지주로 삼는 철학일 수도 있다. ⑧ 그것은 과학지상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일 수도 있다. ⑨ 그것은 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은 이단 세력일 수도 있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강물은 실로 무서운 죄악의 홍수이다. 어떻게 이겼던가? 요한계시록 12장 16절에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였다. 땅이 그 입을 벌려 용이 토한 강물을 삼켜 버리게 함으로 이겼다. 참 이상한 표현이다. 땅은 요한계시록이나 다른 성경에서 이 세상을 의미하였다. 그렇다면 세상 국가를 들어 교회를 보호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겠다. 또 땅은 일반 피조물 세계인 자연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보호하는 경우도 되겠다. 광야에서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때, 땅이 입을 벌려 악인들을 삼켜 버린 일이 있다(민 16:31~32). 여기 본문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를 뜻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동원하지 않은 것이 없으시다. 반면에 악인의 심판을 위하여도 모든 것을 동원하셨다. 예컨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열중하던 때, 갑자기 하나님은 블레셋 군으로 하여금 사울을 침략케 하셨다. 이 일로 사울이 다윗을 쫓던 일을 끝내게 하여 다윗이 구원을 받았던 일이 있다. 다메섹에 살던 기독교 신자들은 사울이 도착하면 모두 체포되어 갈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때 주님은 사울을 영광의 빛과 음성으로 사로잡아 그를 회개시킬 뿐 아니라,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구원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박해자 헤롯을, 하나님은 갑자기 충이 먹어 죽게 함으로 교회를 멸절의 위기에서 구원하신 일도 있다. 로마 제국은 300년이 넘도록 기독교 박멸 운동을 기본 정책으로 내세웠던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기독교를 신봉케 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으로 로마제국의 하늘 아래서 마침내 기독교의 십자가가 빛을 보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성 부근에서 막센티우스와 교전하러 나아갈 때였다. 정오가 조금 지났는데, 갑자기 황제의 눈에 태양 속에서 빛나고 있는 십자가가 나타났다. 그날 밤 그는 그 일을 생각하면서 깊이 잠들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낮에 보여 준 그 십자가를 만들라고 하였다. 그러면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대로 행했고, 그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그 전쟁은 그의 제국에 참으로 중대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한국 교회도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극적인 해방을 맞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해 8월 18일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감옥에 있는 전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지령을 이미 내렸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합군에게 승리를 주심으로, 한국 교회를 멸절의 위기에서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땅이 여자를 도와 용이 토한 강물을 삼킨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 결과로 남자를 낳은 여자는 승리하였다. 독수리의 두 날개로 업어서, 그리고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한 강물을 삼키게 하심으로 교회가 승리하였다.
4) 여자의 남은 자손과 용의 남은 전쟁(계 12:17) -
|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참으로 무섭고 끔찍한 사단의 도전을 보고 있다. ‘큰 붉은 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단은 여자가 해산하려는 아이(예수)를 삼키려다가 실패하게 되었다. 예수는 탄생하셨고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두 번째로 큰 붉은 용은 하늘에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도전하였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에 의하여 참패를 당하고, 하늘에 있을 기지를 상실한 채 땅으로 내어 쫓겼다. 사단의 2차 실패였다. 세 번째로 큰 붉은 용은 땅으로 내어 쫓겨 아이를 낳은 여자(교회)를,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큰 독수리의 날개에 업혀 광야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용은 여자가 피하고 있는 광야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여자의 뒤에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인을 떠내려가 죽이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용의 입에서 토한 물을 삼키므로 여자는 살게 되었다. 용은 세 번째도 실패하였다. 이제 용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최후 발악을 획책한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본문은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고 하였다. 이것이 용의 네 번째 도전이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기독신자 개개인을 의미한다. 이제 사단은 신자 개인, 개인을 상대하고 전멸 작전 태세를 취한다.
(1) 남은 전쟁은 여자의 자손들을 상대한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어떤 자들인가?
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계 12:17).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의 말씀, 곧 성경이다. 그것은 순결 무흠하여 우리의 눈을 밝혀 주는 것이다(계 1:2, 시 19:8). 그 계명의 본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이다. 그것은 새 계명이다(요 13:34). 그 새 계명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되셨다는 것이다. 새 계명은 곧 속죄의 사랑이다.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이러한 예수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지키는 자들’이다. 곧 파수하고, 유지하고, 간직하고, 준수하는 자들이다. 곧 그것을 전문하는 자들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 곧 그 계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파수하는 자들이다. 그 계명의 본질은 바로 어린양의 피이다(계 12:11).
②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계 12:17). 요한계시록 1장 2절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6장 9절에는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는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증거’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저들은 ‘예수의 증거를 받은’(계 19:10) 자들이다. 곧 신앙의 확증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기독신자들의 특색이다. 기독신자들은 두 가지 특색을 소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예수 자신, 곧 계명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그 진리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니 그것은 바로 구원이다. 또 하나는 그 계명(예수=말씀=구원)을 내 것으로 소유한 확증, 곧 신앙 체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계명=말씀)와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은 진리요, 계명,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바요, 들은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사도 요한은 간증하고 있다(요일 1:1). 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보고 들은 예수(계명)를 말하지(증거) 아니할 수 없다고 사도행전 4장 20절에 고백하였다. 예수(계명=말씀)와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의 증거는 기독 신자들의 생명이다.
(2) 남은 전쟁의 기지는 바다 모래 위다.
우리 본문은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고 하였다. ‘바다’는 세계 열국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하였다. 「모래」(창 13:16)는 수많은 백성들을 상징하였다. 그렇다면 ‘용이 모래 위에 섰다’ 함은 세계 열국과 백성들을 자기 전략 기지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싸우겠다는 말이다. 다수주의(多數主義)가 사단의 전략 기지이다. 사단은 불신앙의 이 세상 국가와 인류를 전투 요새지로 삼고, 그 가운데서 복음 운동을 하는 신자들을 박멸하려고 한다. 이제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큰 붉은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진멸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 화신인 다른 두 마리 짐승을 앞세우게 된다.
| |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