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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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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37: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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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저는 인터넷을 통하여 주간지 커버스토리를 봅니다. 한 시대의 세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주간지에 나온 커버스토리의 내용을 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뉴스메이커의 커버스토리는 "2002 월드컵 특수는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최 1년 앞둔 '축구축제’적자 못 면할 상황, 정부·지자체 쉬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빛좋은 개살구고 일본은 흑자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뉴스피플의 커버스토리는 수구세력의 선전포고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재벌의 역공이 시작되었고“정치권 개혁 세력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사저널의 커버스토리는 "DJ 정권 마녀 사냥에 모든 것 잃었다" 장은증권 노조원들이 파렴치범으로 억울하게 몰려 '인생 파탄'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간동아는 "압구정 오렌지 10년 "을 다루며 압구정은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라고 썼습니다. 주간조선은 "여권의 차기 딜렙마" 주간 한국은 '밀실 요정' 정치에서 '필드'정치로 중심이동을 다루었습니다. 우리세대를 보는 언론인의 눈이 아주 부정적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언론의 비판 기능의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기사를 읽다보면 "나라가 망했으면..."라는 바람이 언론에 실려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언론은 마땅히 아주 높은 수준의 윤리성, 책임성, 공익성이 있어야 하고 한 사회의 파수꾼, 발언자,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역할도 무시해서는 아니됩니다. 편집권의 자유를 남용하면 안됩니다. 만약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기자들에게 다루라면 어떤 테마로 커버스토리를 쓸까요?
1. 죽은 사람들-절망적인 세상(1-3)
주전 586년에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게 유다 나라는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세상가는 줄 모르고 살았고 통치자는 부패와 무능력으로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은 백성은 노예처럼 살았고 일부는 애굽으로 도망가 망명 생활을 하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생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 성도님이 기자라면 어떻게 기사화하겠습니까?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30세쯤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 해골이 쌓인 골짜기를 보여줍니다. 골짜기 가운데 섰는데 그 곳에는 뼈가 가득하였습니다.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가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끝이 나버린 것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우리 인생도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경제의 파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이제는 살 소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바라 볼 때 도대체 미래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메일 상담이 왔는데 원치않은 결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남편도 교회를 다니는데 두 자녀를 낳아 살다가 여인이 자신의 마음에 맞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다보니까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인생 살다 보면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마약 중독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정에서 고통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소망없는 해골같은 인생, 깊은 수렁에 빠져 해어나오지 못하는 나라를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2. 살아야 할 사람들-새사회의 건설자들(3)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성경을 통하여 보십시오. 이미 해골같이 되어버린 사회, 희망이 없는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들을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죽은 인간들은 스스로 도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 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수 없으면 사람들은 방치해 버립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골 같은 인간들을 새 사회의 건설자로 보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추하고 냄세 나는 해골로 보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 하나님의 나라 사명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해골을 보여 주고 하나님은 질문합니다. 3절 읽겠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 때 에스겔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주께서 아시나이다." 살 수 없다고도 살 수 있다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정직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낙관론도 비관론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근거있는 낙관론입니다.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처지 어떤 웅덩이에 있던지 우리를 바라볼 때 살아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군대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시대 새나라의 일꾼이 되어야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일지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였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실패했습니다. 광야로 찾아가십니다. 아브라함, 야곱, 사울, 다윗이 실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살리십니다.
새 사회를 저해하는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비관주의입니다. 인생을 희망차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비관주의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바르게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만 바르게 가지만 일의 반절 이상은 끝이 난 것입니다.
원수들이 와서 성벽을 헐고 성전 불사름, 여자들 겁탈, 남자들 죽임, 남은 백성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비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탄 소리(11)를 들어 보십시오. 비관주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합니까?(12-14) 하나님은 희망을 줍니다. 소망을 줍니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비관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안될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바꿀 수 없은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고 시간낭비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면 새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닏. 교인이 줄어 가족밖에 안 남아 풀이 죽은 개척교회 목사님을 방문했답니다. "김목사님은 참 희망적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젠 더 줄어들 리는 없잖아요. 늘어날 일만 남았잖아요."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무술을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비관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관주의가자 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7)"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첩을 보내어 보니 적들이 너무 기골이 장대합니다.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은 비관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죽었다고 통곡합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비관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8-9)"
이게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나는 못한다하여도 우리 하나님이 할 수 있으므로 비관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집니다. 소망을 가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인간을 살립니까?
3. 죽은 자를 살리는 수단-새 사회의 창설 수단(4-10)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새 사회의 건설자로 만드는 수단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말씀과 성령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로 만드십니다.
1)말씀으로 살리십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말들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흩어진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뼈들이 들어 맞습니다. 그리고 힘줄이 생깁니다. 생기가 살아납니다. 가죽이 덮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용기가 생깁니다. 결단력이 생깁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인생이 살아납니다. 가정이 살아납니다. 사회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범죄치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해 줍니다. 등불이 되어 줍니다.
말씀은 위로와 희락과 소망을 줍니다. 환난 많은 세상에서 슬피 울 때 말씀이 위로해 줍니다. 즐거움을 줍니다. 삶의 소망을 줍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시 119:50)"
느헤매야서 8장에 보십시오. 학사 에스라라 말씀을 전할 때 온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회개합니다. 즐거움이 가득찼습니다. 소망이 생겼습니다(12,17).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신 로마서 1:17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교회 역사가 나아갈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구의 실업가로서 체신부장관을 지낸 이태선 씨는 대구의 섬유산업의 왕으로 불린답니다. 이태선씨는 가난한 소년시절 말씀을 읽고 꿈을 키웠답니다. 그가 교회학교 부장으로 일할 때였답니다. 한 어린이가 교회학교 부장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늘나라의 전화번호가 몇 번이에요?" 이 때 "얘야,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는 66-3927번이란다." 어린이는 부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장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이다. 구약성경이 39권이고 신약성경이 27권이지. 그 속에 하늘나라의 진리가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란다."라고 대답하자, 다른 학생이 다시 한 질문을 던졌답니다. "부장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지. 그때 나는 2,500원을 주고 성경 한 권을 샀단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지.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2)성령으로 살리십니다.
5절 보십시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생기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 신입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살리십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하면 미친 짓일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른 뼈들을 살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는데 그것은 오직 말씀과 성령입니다. 9절 읽겠습니다. 생기를 향한 대언(9)을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10절 읽겠습니다. 살아납니다. 군대가 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라마 나욧으로 도망을 갑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1대 2대 3대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다윗을 잡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옵니다. 그도 성령에 사로잡힙니다. 다윗을 잡을 생각을 버리고 예언할 정도로 마음이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권능입니다(삼상19:18-24).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악독한 사울의 마음이 변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태산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 4:7)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행6:10). 무능력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니까 완전히 변하여 기적의 사람이 됩니다.
시작한 일을 마치게 합니다(슥4:9).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령 충만하여야 합니다. 오락충만하면 안됩니다. 저희 아들이 지난 주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기도를 시키니까 "하나님 아버지 아빠가 설교시간에 내 이야기 하지 말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하게되었습니다. 얼마전 집에 저녁에 들어가니까 컴퓨터에 앉아 오락을 하면서 죽여! 죽여! 하면서 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려다 야단을 쳤습니다. 오락충만하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가 있습니다. 주식 충만, 골프 충만, 바둑 충만, 텔레비전 충만, 난정이 충만, 왕건 충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식의 노예, 골프의 노예, 바둑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려면 구하여야 합니다(눅11:13, 행1:14; 행4:23-31; 행8:15-17). 회개해야 합니다(행2:38-39).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행5:32).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아는 분입니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습니다. 기복이 위로는 세 형과 세 누나가 있었는데, 철이 들면서 자신이 배다른 형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매여 끌려가야 하는가?" 어른들이 원통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일본의 무자비한 통치아래 노예생활을 하는 망국의 한을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혹시 구원받을 길일까 하여 더러는 동학 편에서고, 더러는 천주교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일손을 놓고 몰려다니며 진탕 마신 후 울분을 쏟아놓으며 절망하는 젊은이들도 많았습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습니다. 형의 전도를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기복은 춘원 이광수의 강연을 듣고 오산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실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금주금연을 선언하신 뒤에 청결하게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강 이승훈을 전도한 사람이 바로 유영모 선생입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1915년, 기철이 오산학교 3학년 때 남강 선생은 감옥에서 풀려 나셨다. "…내가 하도 바쁘게 동분서주하다 보니 성경을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었는데, 감옥에서 하루 종일 마음놓고 성경을 읽었지요, 구약을 수십 번 읽고 신약을 100독은 했을 게요, 아마 오산 학교 젊은이들한테 내가 좀 부족한 데가 있어서 성경말씀을 읽고 좀더 성숙하라고 감옥엘 보내셨던 게요." 그분은 변소청소도 손수하셨습니다. 더러 학생들이 빗자루를 빼앗으려 하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게 이 일뿐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는가?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여러분을 가르칠 힘이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 자리를 깨끗하게 치워드리는 것이 내 기쁨이요."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습니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 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 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석하고 청년집회에도 부지런히 나가서 봉사했습니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던 큰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습니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 무렵 마산 문창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습니다. '가자, 가자! 문창교회로!'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매어 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습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김익두는 막대기요, 김익두는 없소! 마음이 가난한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습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야아, 우리는 살았어! 우리는 정말 새 생명을 얻었어!" 갈급해하던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모두 눈물 범벅이 되어 서로 얼싸 안고 뒹굴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 진정한 도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4. 하나님이 살려서 이루고자 하는 것-새 사회와 새 생활
하나님이 해골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새로운 연합(19), 남북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남북이 하나되고 동서가 하나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2) 예배와 헌신의 대상 백성들이 정결케 됨(23),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들로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의식 새로워짐(24-28)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새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해골 골짜기같은 삶이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통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살아야 할 사람, 살려야 할 사람/에스겔 37:1-10/김필곤 목사
뉴스메이커의 커버스토리는 "2002 월드컵 특수는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최 1년 앞둔 '축구축제’적자 못 면할 상황, 정부·지자체 쉬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빛좋은 개살구고 일본은 흑자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뉴스피플의 커버스토리는 수구세력의 선전포고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재벌의 역공이 시작되었고“정치권 개혁 세력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사저널의 커버스토리는 "DJ 정권 마녀 사냥에 모든 것 잃었다" 장은증권 노조원들이 파렴치범으로 억울하게 몰려 '인생 파탄'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간동아는 "압구정 오렌지 10년 "을 다루며 압구정은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라고 썼습니다. 주간조선은 "여권의 차기 딜렙마" 주간 한국은 '밀실 요정' 정치에서 '필드'정치로 중심이동을 다루었습니다. 우리세대를 보는 언론인의 눈이 아주 부정적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언론의 비판 기능의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기사를 읽다보면 "나라가 망했으면..."라는 바람이 언론에 실려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언론은 마땅히 아주 높은 수준의 윤리성, 책임성, 공익성이 있어야 하고 한 사회의 파수꾼, 발언자,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역할도 무시해서는 아니됩니다. 편집권의 자유를 남용하면 안됩니다. 만약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기자들에게 다루라면 어떤 테마로 커버스토리를 쓸까요?
1. 죽은 사람들-절망적인 세상(1-3)
주전 586년에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게 유다 나라는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세상가는 줄 모르고 살았고 통치자는 부패와 무능력으로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은 백성은 노예처럼 살았고 일부는 애굽으로 도망가 망명 생활을 하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생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 성도님이 기자라면 어떻게 기사화하겠습니까?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30세쯤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 해골이 쌓인 골짜기를 보여줍니다. 골짜기 가운데 섰는데 그 곳에는 뼈가 가득하였습니다.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가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끝이 나버린 것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우리 인생도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경제의 파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이제는 살 소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바라 볼 때 도대체 미래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메일 상담이 왔는데 원치않은 결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남편도 교회를 다니는데 두 자녀를 낳아 살다가 여인이 자신의 마음에 맞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다보니까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인생 살다 보면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마약 중독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정에서 고통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소망없는 해골같은 인생, 깊은 수렁에 빠져 해어나오지 못하는 나라를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2. 살아야 할 사람들-새사회의 건설자들(3)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성경을 통하여 보십시오. 이미 해골같이 되어버린 사회, 희망이 없는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들을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죽은 인간들은 스스로 도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 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수 없으면 사람들은 방치해 버립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골 같은 인간들을 새 사회의 건설자로 보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추하고 냄세 나는 해골로 보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 하나님의 나라 사명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해골을 보여 주고 하나님은 질문합니다. 3절 읽겠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 때 에스겔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주께서 아시나이다." 살 수 없다고도 살 수 있다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정직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낙관론도 비관론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근거있는 낙관론입니다.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처지 어떤 웅덩이에 있던지 우리를 바라볼 때 살아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군대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시대 새나라의 일꾼이 되어야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일지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였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실패했습니다. 광야로 찾아가십니다. 아브라함, 야곱, 사울, 다윗이 실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살리십니다.
새 사회를 저해하는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비관주의입니다. 인생을 희망차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비관주의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바르게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만 바르게 가지만 일의 반절 이상은 끝이 난 것입니다.
원수들이 와서 성벽을 헐고 성전 불사름, 여자들 겁탈, 남자들 죽임, 남은 백성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비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탄 소리(11)를 들어 보십시오. 비관주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합니까?(12-14) 하나님은 희망을 줍니다. 소망을 줍니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비관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안될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바꿀 수 없은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고 시간낭비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면 새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닏. 교인이 줄어 가족밖에 안 남아 풀이 죽은 개척교회 목사님을 방문했답니다. "김목사님은 참 희망적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젠 더 줄어들 리는 없잖아요. 늘어날 일만 남았잖아요."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무술을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비관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관주의가자 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7)"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첩을 보내어 보니 적들이 너무 기골이 장대합니다.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은 비관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죽었다고 통곡합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비관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8-9)"
이게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나는 못한다하여도 우리 하나님이 할 수 있으므로 비관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집니다. 소망을 가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인간을 살립니까?
3. 죽은 자를 살리는 수단-새 사회의 창설 수단(4-10)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새 사회의 건설자로 만드는 수단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말씀과 성령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로 만드십니다.
1)말씀으로 살리십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말들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흩어진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뼈들이 들어 맞습니다. 그리고 힘줄이 생깁니다. 생기가 살아납니다. 가죽이 덮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용기가 생깁니다. 결단력이 생깁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인생이 살아납니다. 가정이 살아납니다. 사회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범죄치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해 줍니다. 등불이 되어 줍니다.
말씀은 위로와 희락과 소망을 줍니다. 환난 많은 세상에서 슬피 울 때 말씀이 위로해 줍니다. 즐거움을 줍니다. 삶의 소망을 줍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시 119:50)"
느헤매야서 8장에 보십시오. 학사 에스라라 말씀을 전할 때 온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회개합니다. 즐거움이 가득찼습니다. 소망이 생겼습니다(12,17).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신 로마서 1:17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교회 역사가 나아갈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구의 실업가로서 체신부장관을 지낸 이태선 씨는 대구의 섬유산업의 왕으로 불린답니다. 이태선씨는 가난한 소년시절 말씀을 읽고 꿈을 키웠답니다. 그가 교회학교 부장으로 일할 때였답니다. 한 어린이가 교회학교 부장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늘나라의 전화번호가 몇 번이에요?" 이 때 "얘야,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는 66-3927번이란다." 어린이는 부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장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이다. 구약성경이 39권이고 신약성경이 27권이지. 그 속에 하늘나라의 진리가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란다."라고 대답하자, 다른 학생이 다시 한 질문을 던졌답니다. "부장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지. 그때 나는 2,500원을 주고 성경 한 권을 샀단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지.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2)성령으로 살리십니다.
5절 보십시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생기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 신입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살리십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하면 미친 짓일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른 뼈들을 살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는데 그것은 오직 말씀과 성령입니다. 9절 읽겠습니다. 생기를 향한 대언(9)을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10절 읽겠습니다. 살아납니다. 군대가 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라마 나욧으로 도망을 갑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1대 2대 3대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다윗을 잡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옵니다. 그도 성령에 사로잡힙니다. 다윗을 잡을 생각을 버리고 예언할 정도로 마음이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권능입니다(삼상19:18-24).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악독한 사울의 마음이 변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태산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 4:7)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행6:10). 무능력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니까 완전히 변하여 기적의 사람이 됩니다.
시작한 일을 마치게 합니다(슥4:9).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령 충만하여야 합니다. 오락충만하면 안됩니다. 저희 아들이 지난 주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기도를 시키니까 "하나님 아버지 아빠가 설교시간에 내 이야기 하지 말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하게되었습니다. 얼마전 집에 저녁에 들어가니까 컴퓨터에 앉아 오락을 하면서 죽여! 죽여! 하면서 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려다 야단을 쳤습니다. 오락충만하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가 있습니다. 주식 충만, 골프 충만, 바둑 충만, 텔레비전 충만, 난정이 충만, 왕건 충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식의 노예, 골프의 노예, 바둑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려면 구하여야 합니다(눅11:13, 행1:14; 행4:23-31; 행8:15-17). 회개해야 합니다(행2:38-39).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행5:32).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아는 분입니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습니다. 기복이 위로는 세 형과 세 누나가 있었는데, 철이 들면서 자신이 배다른 형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매여 끌려가야 하는가?" 어른들이 원통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일본의 무자비한 통치아래 노예생활을 하는 망국의 한을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혹시 구원받을 길일까 하여 더러는 동학 편에서고, 더러는 천주교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일손을 놓고 몰려다니며 진탕 마신 후 울분을 쏟아놓으며 절망하는 젊은이들도 많았습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습니다. 형의 전도를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기복은 춘원 이광수의 강연을 듣고 오산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실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금주금연을 선언하신 뒤에 청결하게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강 이승훈을 전도한 사람이 바로 유영모 선생입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1915년, 기철이 오산학교 3학년 때 남강 선생은 감옥에서 풀려 나셨다. "…내가 하도 바쁘게 동분서주하다 보니 성경을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었는데, 감옥에서 하루 종일 마음놓고 성경을 읽었지요, 구약을 수십 번 읽고 신약을 100독은 했을 게요, 아마 오산 학교 젊은이들한테 내가 좀 부족한 데가 있어서 성경말씀을 읽고 좀더 성숙하라고 감옥엘 보내셨던 게요." 그분은 변소청소도 손수하셨습니다. 더러 학생들이 빗자루를 빼앗으려 하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게 이 일뿐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는가?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여러분을 가르칠 힘이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 자리를 깨끗하게 치워드리는 것이 내 기쁨이요."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습니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 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 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석하고 청년집회에도 부지런히 나가서 봉사했습니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던 큰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습니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 무렵 마산 문창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습니다. '가자, 가자! 문창교회로!'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매어 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습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김익두는 막대기요, 김익두는 없소! 마음이 가난한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습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야아, 우리는 살았어! 우리는 정말 새 생명을 얻었어!" 갈급해하던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모두 눈물 범벅이 되어 서로 얼싸 안고 뒹굴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 진정한 도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4. 하나님이 살려서 이루고자 하는 것-새 사회와 새 생활
하나님이 해골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새로운 연합(19), 남북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남북이 하나되고 동서가 하나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2) 예배와 헌신의 대상 백성들이 정결케 됨(23),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들로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의식 새로워짐(24-28)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새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해골 골짜기같은 삶이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통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살아야 할 사람, 살려야 할 사람/에스겔 37:1-10/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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