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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장윤재 교수............... 조회 수 2156 추천 수 0 2009.12.28 02: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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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1-9 
설교자 : 장윤재 교수 
참고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새길교회 2009.11.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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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 : 1~9]

장윤재 교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귀한 강단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 생태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그리고 한국교회환경연구소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단체 소장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오늘 아침 잠시 ‘물’과 ‘강’과 ‘생명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저의 생각과 신앙고백을 교우님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앞서 부른 찬송가 78장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특히 3절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 듯 하도다.” 잔잔한 시냇물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 작사자는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소유자였을까요. 오늘 우리도 그 작사자처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큰 뜻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물 하니까 미국의 소설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 Thoreau, 1817-1862)의 말이 생각합니다. 그는, “호수를 들여다봄으로써 보는 이는 자기 본성의 깊이를 가늠한다”고 말했습니다. 물은 투명해서 하늘을 비추고 또 우리의 얼굴과 영혼도 비추어줍니다. 히브리어로 기도는 ‘히트파레르’라고 합니다. 원뜻은 ‘맑은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다’입니다. 아마도 고대 히브리인들은 기도가 무엇인지 잔잔한 물을 통해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기도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맑은 거울에 때 묻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행위였습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의 시끄럽고 일방적인 기도와 달리 본래 기도는 이처럼 듣는 것이고, 침묵하는 것이고,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은 이처럼 우리 영혼의 거울이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물의 행성’입니다. 사실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으니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라 해야 더 맞습니다. 이 수구가 가진 물의 97% 이상은 바닷물이며, 태양은 매년 막대한 양 물을 바다로부터 증발시켰다가 비와 눈의 형태로 땅으로 보내줍니다. 바로 이런 강수가 전 세계 모든 민물의 근원이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 현상은 바로 이런 물의 순환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물의 흐름을 통해 생명을 일으키셨습니다. 흐름이 끊기면 생명이라는 하나의 긴 실은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다와 육지 사이의 물의 순환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는 당연히 강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는 어릴 적 강에서 미역 감고 놀던 기억이 생생하신 분들이 계실텐데, 저는 최근 샌드라 포스텔(Sandra Postel)과 브라이언 릭터(Brian Richter)가 지은『생명의 강(Rivers for Life)』이라는 책을 통해 저 자신이 얼마나 강에 대해 무지했던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강에는 항상 일정한 수심 이상의 물이 고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그래야 좋은 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의 강이 죽었는데 그 이유가 “강마다 하상이 높아 비만 오면 홍수가 범람하고, 사계절마다 강물 수위의 차이가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준설을 해서 강의 하상을 낮추고 계절이 변해도 수위의 차이가 없는 강을 만드는 것이 강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강을 진심으로 모르는 일이고 또한 대단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의 저자들은 계절과 기후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강이 사실은 건강한 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에는 홍수기도 필요하고 극단적인 갈수기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강은 어떤 강인가 하면, 홍수기에 많은 물이 흐르고 갈수기에는 모래톱과 얕은 물의 생물서식지가 드러나는 강이라고 합니다. 강의 저수위 기간에는 유속이 느리고 조용합니다. 때문에 각종 수생동물들이 비축해둔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간혹 극단적인 저수위 기간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낙우송과 같은 특정한 수종의 번식에 필수적입니다. 이런 수종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뿌리와 밑동이 물에 잠긴 채 살아가는데, 극심한 가뭄이 들어 범람원 토양이 충분히 건조해질 때에만 비로소 씨앗을 퍼뜨립니다. 강에는 고수위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봄철 고수위는 하천의 생물들에게 생애주기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라고 알려주는 환경의 신호, 혹은 자명종 소리와 같습니다. 강에는 심지어 홍수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홍수기가 있어야 하천의 여러 생물들은 저수위 때 가지 못하던 다양한 서식지로 접근해 생명활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홍수기는 강에서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역동적인 생명이 이루어지는 강의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다시 보면, 우리 하나님은 강물의 높낮이를 통해 복잡한 생명의 과정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지휘하시는 현명하고 부지런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강은 단순히 물이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신비한 생명 활동을 수행하는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 각지에서는 우리 인간이 지난 100여 년 동안 만든 약 80만 개의 크고 작은 댐들이 하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특히 지난 50년 동안 무려 하루 두 개 꼴로 대형댐을 건설했는데, 이 결과 역동적인 생명의 장이던 강들이 균일하고 획일적인 수로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강의 생태적 건강이 깨진 것은 물론, 심지어는 지구의 자전속도까지 바뀐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었습니다. 지구 북반부 고위도에 댐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 가득 저장된 물의 무게로 인해 지구의 축이 약간 기울어 지구의 자전속도가 조금 높아지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지구의 오랜 생명의 역사 가운데 인간이 출현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간은 지난 20세기에 들어서 자연을 개조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편익을 위해 지구 민물의 자연적인 흐름과 리듬을 강제로 변경한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처칠과 레닌과 루즈벨트와 네루와 덩샤오핑 등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수공학적 기술을 총동원하여 중력 법칙에 따른 자연적인 물의 흐름을 바꾸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세계 각지의 대규모 하천 227개 가운데 약 60퍼센트가 인간이 만든 각종 구조물에 의해 “조각조각 잘려”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과 일본 등 선진 공업국가에 있는 대부분의 하천은 이제 자연에 의한 통제보다 인간에 의한 통제를 더 많이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강물은 자연의 리듬을 따라 순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제작된 배관설비 안에서 “인간이 주무르는 대로 흘렀다 멈췄다”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 인류는 지난 20세기에 그 이전 어느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하던 일, 즉 범지구적인 물 순환에 대한 물리적 간섭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후버댐을 지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수리분야 보좌관(W.J. McGee)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의 통제는 인간이 자연의 통제자가 되기 위하여 넘어야 할 마지막 단계이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지금 자연에 대한 최후의 통제자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핵 시대의 신학(Theology for a Nuclear Age)』는 유명한 책에서 오늘날 핵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 천착해야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약 2만 메가톤 (그러니까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약 160만 배) 가량의 핵 폭발물을 소유한 인간은 이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하나님의 힘과 인간의 힘의 관계가 ‘비대칭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상호의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카우프만의 놀라운 통찰력은 이제 핵무기뿐만 아니라 강으로도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의 수문환경을 포함하여 자연을 자기 뜻대로 개조할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지금, 신학자들이 그리고 신앙인들이 천착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라기보다 ‘전능한 인간’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너무 황망해서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한 인간’의 문제가 21세기 기독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수경 스님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오체투지의 순례길을 떠나면서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가는 오체투지 행위는 인간다움의 표상인 직립에 반대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눈으로는 더 넓게 더 멀리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으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반대로 무릎을 굽히고, 팔꿈치를 꺾고, 머리를 숙여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서 가고자 한다.” 그의 말대로 직립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했고, 인간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간이 유일하게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만물의 폭군’이 되었습니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불교의 한 스님도 만물의 폭군이 된 전능한(?) 인간의 문제가 지구촌의 문제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과학사가(科學史家)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는 1967년 Science 지에 기고한 그의 유명한 논문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오늘날 생태계 파괴의 근본원인이 기독교의 ‘지독한 인간중심주의’라고 지목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 모시고 믿는 기독교가 인간중심주의를 확산하는 종교라는 이 비판은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의 논문 이후의 현대 기독교 신학은 한마디로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면 절대로 인간중심주의가 아님을 힘들게 변증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바로 보면 성서는 언제나 인간을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합니다. 즉 창조 세계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온 우주와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로 보지 않고, 인간은 온 우주의 소우주, 혹은 ‘가장 사랑스런 막내’로 이해합니다. 「평화의 기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특별한 찬양시를 지었는데 그 제목은「형제 태양과 자매 달의 찬양시(Canticle of the Brother Sun and Sister Moon)」입니다. 어찌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았던지 별명이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린 이 기독교의 성자는 이 아름다운 찬양시에서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형님’과 ‘누님’으로 호칭합니다. 반복해서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말하는데,

형제 태양과 자매 달의 찬양시

류해욱 신부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우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자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게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을 쓸모 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리고 심지어]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
두 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나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프란체스코 생태 영성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시에서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만물의 폭군도 아닙니다. 온 우주의 겸허한 막내일 뿐입니다. 단지 우주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형님과 누님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동등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 시에 나타난 우주관은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인간관입니다.

1632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의 책『대화』에서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당시 교회는 종교 재판을 걸어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이의 지동설의 가장 중요한 인류 정신사적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지구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였습니다. 당시까지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서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고,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이「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교회는 그의 얼굴을 원숭이의 몸 위에 붙인 캐리커처로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다윈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인류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 역시 ‘인간 중심주의’에서의 탈피였습니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사회진화론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의 메시지는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얽혀 살아온 우주의 한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의 정신사적 의미는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 보던 소위 정통적 기독교의 인간관을 거부하고, 인간을 자연 ‘안에’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간관이 사실 본래 성서의 인간관입니다.

갈릴레이와 다윈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서구 문명의 ‘숭고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지동설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추방했으며, 진화론은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연관된 존재임을 이야기했습니다. 둘 다 우리 인간이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와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오히려 성서 본래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은 결코 신앙심을 축소시키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기독교 신앙의 지평을 확대해주고 풍요롭게 해줍니다. 지구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으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임을 깨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우주에서 그리고 아주 오래된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과학적 발견은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도와줍니다.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주 변두리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신의 은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 특히 창세기 1:28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신의 명령 때문에 지구에 대한 인간의 약탈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땅을 ‘정복하고(kabas)’ ‘다스리라(rada)’는 말은 자연을 착취하고 지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원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일하고 봉사하고 지키고 돌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 있는 두 번째의 창조 이야기, 즉 에덴동산의 이야기(창 2:4-3:24)를 보면, 인간은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땅을 경작하는 겸손한 농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담(Adam)’ 즉 인간을 ‘아다마(Adama)’ 곧 흙을 재료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을 ‘농부’로 그리고 아다마를 ‘농토’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농부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스리고 정복하라가 아니라 ‘지키고 경작하라(abad)’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땅에 대한 인간의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땅에 대한 인간의 돌봄입니다. 인간은 생태계의 주인이 아니라 겸손한 참여자요 관리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금지명령을 내렸을까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아담이 그것을 따먹을 줄 몰랐을까요? 어느 주일학교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으라고 ‘덫’을 놓으신 것일까요? 모든 것이 허용되었지만 한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위임되었지만 한 가지 제약이 주어졌습니다. 마치 ‘제왕 같은’ 인간에게 단 한 가지 금기가 주어졌습니다. 그 금기는 동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선을 긋는 선언이었습니다. 뱀의 유혹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였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담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으나 마지막 그 한 가지 제약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동산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산을 자기 맘대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주인이 아닌 것이 주인인 체하려는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요. 하나님은 그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십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성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던진 최초의 질문입니다. 지정학적 장소나 물리적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피해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서야할 ‘신학적 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이 견지하고 유지했어야 하는 ‘관계적 자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지켜야 할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신이, 즉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되고자 했던 탐욕의 인간을 다시금 본래의 겸손한 인간의 자리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명령을 버리고 도시로, 문명의 한복판을 향해 내달리며, 자본축적과 안락과 물질적 풍요만을 좇아 떠나버린 아담(사람)에게, 그것도 모자라 자기만의 편익을 위해 다른 모든 생명의 삶의 권리와 자리를 부인하고 에덴동산의 생명강까지 맘대로 바꾸어버리는 오만한 인간에게 자신의 원래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세계/자연의 지배자요 또 소유주인 줄로 착각하고 끝도 없이 오만해진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지금도 던지고 계십니다.

 저는 지난 20세기 이후 인류의 지성사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자연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또한 자연계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의 손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 들려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아무데나 총구를 겨누고 있습니다. 만물의 폭군이 된 인간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할 축복을 받은 이 땅의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 각자가 무심코 한 일상적 행위 때문에도 다른 생명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에릭 오르세나는『물의 미래』라는 책에서 ‘왜 생선초밥이 아프리카의 물을 고갈시키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초현대식 일본 어선들은 저인망으로 고기를 싹쓸이 합니다. 그러니 아프리카 모리타니 인근 해역에서 고기를 잡는 영세한 어부들은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할 수 없이 직업을 바꾸게 되고, 시장 가판대에서 생선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주민들은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염소나 소 등의 가축을 기르게 되고, 그 가축들은 생선과 달리 많은 담수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생선초밥이 아프리카의 지하수층을 고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고기 때문에 아마존의 밀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현실에 눈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움이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인식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말로만 환경을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환경연구소장을 맡으면서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고기도 생선도 우유도 계란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건강합니다. 보는 분마다 혈색이 좋아졌다고 칭찬합니다.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하는 사람보다 채식을 하는 사람은 물을 반만 소비합니다.

에스겔서 47장 1-12절에는 생명의 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의 중심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죽었던 강을 되살아나게 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 때문에 시들지 않는 나무들이 강둑을 따라 울창하게 자라고 그 열매가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그 잎사귀들이 병자들의 약이 됩니다. 놀랍게도 에스겔이 본 이 생명의 강 환상은 성서의 맨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나타납니다(계 21-22장). 거기서도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고, 강 좌우편 언덕에는 생명나무 열매가 맺고 잎이 무성하여 만국이 소생케 됩니다. 과연 오늘의 교회에서는 이런 생명의 물이 한 줌이라도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태백의 검룡소와 오대산의 우통수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나와 남한강을 이루고, 내금강의 단발령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북한강을 이루듯, 작으나마 우리 속에서, 이 교회에서,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온다면 온 세상에 생명의 강은 유장하게 흐를 것입니다.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신학과 실천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이 인간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왔다면 이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온 생명의 구원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프란츠 알트의 말처럼, 이제 “모든 생명을 위해 이바지 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입니다. 진정한 진보는 ‘모든’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부터 교우님들과 함께 자주 강변을 찾아가 걸어보십시오. 어릴 적 강에서 놀던 추억도 떠올려보시고 강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수변생명체들에게 눈길도 주고 말도 걸어보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실 오늘 제가 다룬 물의 문제는 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문제입니다. 만물의 폭군이 된 ‘전능한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다른 세포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저 혼자 무한히 증식하는 이기적인 세포를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지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우주 안에서 우리 인간이 암세포처럼 되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몸인 이 우주를 아프게 하는 암세포와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 최승호는 ‘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비통하게 노래했나 봅니다. “끙끙 앓는 하나님 /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하략)”

그 끙끙 앓는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이 세계의 지배자요 소유주가 된 줄로 착각하고 끝도 없이 오만해진 우리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지십니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기도합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 지어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빼어난 솜씨로 지으신 이 세상
잘 가꾸고 지키고 섬김으로
모든 만물의 주인 되시는 당신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도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소리 가운데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깊은 생명의 영성도 선물로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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