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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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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자 "진실을 말하는 가정이 되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이후 몇 몇 성도로부터 진실을 말함으로 이웃이 피해를 입을 경우 과연 그 진실이 선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물음과 함께 오히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고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의 거짓말은 언급안하고 그 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한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화요 아침 교역자 모임에서도 치열한 토의가 있었기에 포괄적으로 저의 답변을 전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좋은 질문을 해 주신 성도님들께
먼저 좋은 질문을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실은 제가 설교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질문이 제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호수아 2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1장에서도 산파들이 출생하는 히브리 아기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히브리 산모들은 건강하여 산파가 도착하기전에 아기들을 낳는다고 바로에게 사실이 아닌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2장 라합의 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상황윤리의 케이스로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동안 논쟁을 거듭해온 사건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불과 30분의 짤막한 설교 시간에 상황윤리 논쟁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설교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소개하는 과정을 밟을수 없었던 일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음주의 기독교 윤리의 큰 흐름은 한결같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는 대 전제위에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라합이 히브리 정탐꾼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믿음을 행사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이의없이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취한 모든 행동 예컨대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저 역시 라합의 자리, 혹은 산파의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동일하게 거짓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죄가 아닌 오히려 선이라고 말하는 것과 사후에 어쩔수 없었던 나의 행동을 그것까지 겸허하게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인생의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 같으면 사후에 주님앞에 나아가 주의 용서를 구했을 것이고 저에게 이런 동일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지난주 설교를 하면서 놀리 자매의 결단을 소개하며 그녀의 동기가 결코 죄없는 유대인 하녀를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언급했고, 오히려 그녀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이 사건에 주께서 긍휼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조금은 강하게 융통성 없어 보이는 일관성있는 정직쪽으로 설교를 전개한 중요한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이 너무나 쉽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상황윤리적 거짓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의도였음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거짓말이라는 표면적 현상보다도 그 배후에 있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이 살피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놀리 자매의 마음의 동기도 라합의 동기도 동일하게 선한 동기였음을 살피신 하나님의 주권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악'(lesser evil)인 유대인 하녀에게 입힐수 있었던 상처나 라합의 표면적 거짓말을 기억안하시고 라합의 믿음이나 놀리의 용기를 인정하신다고 믿고 싶습니다.
흥미있는 일은 후일 코리 여사가 2차 대전후 석방되어 동구권에 성경을 갖고 들어 가면서 유고의 국경선에서 자신의 가방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고만합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기 싫으니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서게 되고 마지막이 된 것을 보고 세관원은 마지막이니 가방을 들어 드리지요 하며 질문도 하지 않고 통과시키는 일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상황에서 반드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제3의 해답을 하나님께서 주실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르고 장직하게 살려는 동기가 아닐까요? 이런 동기가 분명하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것을 믿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직과 거짓의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윤리적 결단이라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고 심지어 이런 이슈를 다루는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견해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라합의 사건을 해석하는 주경학자들도 일치된 의견을 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견의 일치 여하를 떠나 우리가 이런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결단 앞에서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는 동안 내내 제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너무 쉽게 고민도 안하고 거짓을 익숙하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시정하려는 열망이 조금은 지나쳐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일방적으로 놀리 자매쪽을 손들어 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못다한 이야기-정직에 고려되어야 할 이웃 배려에 대한 말씀, 더 중요한 이웃사랑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질문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연약한 순례자, 이 동원 드림
좋은 질문을 해 주신 성도님들께
먼저 좋은 질문을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실은 제가 설교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질문이 제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호수아 2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1장에서도 산파들이 출생하는 히브리 아기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히브리 산모들은 건강하여 산파가 도착하기전에 아기들을 낳는다고 바로에게 사실이 아닌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2장 라합의 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상황윤리의 케이스로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동안 논쟁을 거듭해온 사건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불과 30분의 짤막한 설교 시간에 상황윤리 논쟁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설교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소개하는 과정을 밟을수 없었던 일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음주의 기독교 윤리의 큰 흐름은 한결같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는 대 전제위에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라합이 히브리 정탐꾼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믿음을 행사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이의없이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취한 모든 행동 예컨대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저 역시 라합의 자리, 혹은 산파의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동일하게 거짓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죄가 아닌 오히려 선이라고 말하는 것과 사후에 어쩔수 없었던 나의 행동을 그것까지 겸허하게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인생의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 같으면 사후에 주님앞에 나아가 주의 용서를 구했을 것이고 저에게 이런 동일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지난주 설교를 하면서 놀리 자매의 결단을 소개하며 그녀의 동기가 결코 죄없는 유대인 하녀를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언급했고, 오히려 그녀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이 사건에 주께서 긍휼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조금은 강하게 융통성 없어 보이는 일관성있는 정직쪽으로 설교를 전개한 중요한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이 너무나 쉽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상황윤리적 거짓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의도였음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거짓말이라는 표면적 현상보다도 그 배후에 있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이 살피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놀리 자매의 마음의 동기도 라합의 동기도 동일하게 선한 동기였음을 살피신 하나님의 주권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악'(lesser evil)인 유대인 하녀에게 입힐수 있었던 상처나 라합의 표면적 거짓말을 기억안하시고 라합의 믿음이나 놀리의 용기를 인정하신다고 믿고 싶습니다.
흥미있는 일은 후일 코리 여사가 2차 대전후 석방되어 동구권에 성경을 갖고 들어 가면서 유고의 국경선에서 자신의 가방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고만합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기 싫으니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서게 되고 마지막이 된 것을 보고 세관원은 마지막이니 가방을 들어 드리지요 하며 질문도 하지 않고 통과시키는 일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상황에서 반드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제3의 해답을 하나님께서 주실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르고 장직하게 살려는 동기가 아닐까요? 이런 동기가 분명하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것을 믿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직과 거짓의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윤리적 결단이라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고 심지어 이런 이슈를 다루는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견해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라합의 사건을 해석하는 주경학자들도 일치된 의견을 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견의 일치 여하를 떠나 우리가 이런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결단 앞에서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는 동안 내내 제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너무 쉽게 고민도 안하고 거짓을 익숙하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시정하려는 열망이 조금은 지나쳐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일방적으로 놀리 자매쪽을 손들어 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못다한 이야기-정직에 고려되어야 할 이웃 배려에 대한 말씀, 더 중요한 이웃사랑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질문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연약한 순례자, 이 동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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