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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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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8.6.22. 주일 4부 설교 원고 |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상관없이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이 땅에서 사는가? 또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는 데는 바른 길도 있고 잘못된 길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 한길만 있지 아니하고 길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그 여러 개가 다 올바른 길은 아닌 것입니다. 올바른 길도 있고, 잘못된 길도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내가 어디서부터 길을 잃어 버렸는지 원래 잃어버린 곳으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길을 찾을 수가 있지 자꾸 방황하고 헤매면 점점 길을 더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턱 대놓고 방황한다고 길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등질 때 모든 것을 등진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의와 거룩, 건강과 기쁨, 평안과 행복과 생명,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해를 등지면 어둠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해를 등지고 어둠을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둠을 없애려면 해를 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질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흑암 가운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 것에 싫증이 나서 결국 이기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고 탕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탕자가 길을 잃은 이유
첫째로, 탕자가 왜 인생의 길을 잃어 버렸습니까?
탕자가 길을 잃은 것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정한 시간에 아침에 일어나야 되고, 함께 식당에서 식사해야 되고 또 아버지가 정한 밭에 가서 일을 해야 되고 아버지가 정한 시간에 집에 들어와서 함께 목욕을 하고 식사를 같이 대해야 되고 하는 반복된 생활에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아버지의 권위 하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내 권위 하에 내 멋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주의적인 생각이 들어오자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 것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분에 넘치는 탐욕과 욕심이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세상 뜨면은 이 모든 재산을 형님과 나에게 나누어 주실 터인데 아버지 세상 뜰 때까지 기다릴게 뭐냐. 지금부터 재산 달라고 요구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와서 "아버지, 결국 아버지는 세상 뜨면 이 재산 다 자식들에게 나누어줘야 될 건데 아버지 세상 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살아 있을 동안에 미리 재산을 형에게 줄 재산을 주고 제게 줄 재산을 나누어 주십시오." 분에 넘치게 탐욕을 가지고 아버지께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장차 네가 성장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면 재산을 나누어 줄 테니까 기다려라!" "못 기다려요. 아버지 죽을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얼마나 오래 살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실제로 못난 자식은 부모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와서 아버지께 강청을 하니까 아버지가 견디지 못해서 아직 죽을 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과 세상의 쾌락이 너무 좋아서 아버지 재산을 어찌하든지 얻어가지고서 세상 쾌락을 취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 젊은이의 소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단 아버지를 떠나자 이기주의와 탐욕에 끌린 삶을 삽니다. 사람은 목적이 끌고 가는데 거기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있을 때는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살았는데 아버지를 떠나 이기주의와 탐심을 가졌을 때는 이기주의와 탐욕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유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이 생활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 생활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이기주의요, 탐욕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어 아버지의 근처에도 있기 싫기 때문에 재산을 다 정리해서 이기주의와 탐욕이 이끄는 대로 먼 나라로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세상의 방탕한 생활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자 돈이 있겠다. 이제는 허랑방탕한 생활이 그를 이끄는 대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가 기르는 우리 친자식들도 가출하려고 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최근 일간지를 보면 청소년 가출이 무척 늘어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서울 YMCA 청소년 사업부에서 서울 시내 중고등 학생 2천 374명을 대상으로 가출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 학생이 76.4%였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부모를 떠나서 가출하고 싶다는 마음의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실제로 가출 경험을 한 경우는 남학생이 15.6%, 여학생 9%, 중학생이 8.6%로 나타났습니다. 왜 가출했느냐고 물으니까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부모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모 시키는 것이 싫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게임하고 놀고 밤늦게 들어오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좋은데 부모가 일찍이 들어오너라. 공부하라. 올바르게 살아라. 하는 간섭을 하니까 싫답니다. 그래서 탕자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가출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나가는 것입니다. 20% 정도는 '그냥 답답해서 가출하고 싶다'고 말하고 결국 가출의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제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가출한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친구 집에서 놀았다는 대답이 1/3정도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유흥업소 출입, 노래방이나 비디오 방, 만화방에 있었다고 대답했으며 심지어 길거리를 배회했다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결국 성경에 나타난 탕자와 같이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아버지 집을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오늘날도 청년들이 유혹을 당하고 있는 것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탐욕을 따라 인생을 살게 되니까 미로와 같은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하고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길을 잃으면 기근과 가난과 버림받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서 방황하는데 흥하고 잘되고 축복 받을 리가 있습니까?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기근과 가난과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아버지 떠나서 허랑방탕하고 쾌락을 쫓아 사니까 영원히 그렇게 살줄 알았는데 있는 재산 다 탕진하고 기근이 다가오고 기근 다가와서 없으니 따라오던 친구들도 다 떠나고 여자들도 다 떠나고 있던 집도 다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비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비로소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데 누가 변변한 직장을 줍니까? 직장을 얻었다는 것이 돼지 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나라에서는 돼지 치는 사람이 가장 천한 직업인 것입니다. 가장 천한 직업이라도 구복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극한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돼지 치는 들판에 들어갔는데 집이 있습니까? 들에서 돼지 움막에서 같이 살고 충분히 음식이 없으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같이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려 가지고서 상처투성이입니다. 짐승이라는 것은 아무리 친해도 음식 갖다 놓은면 싸웁니다. 개가 얼마나 친하게 같이 지내도 밥 먹을 때는 옆에 개가 들어오면 어엉! 칵! 개는 보면은 밥먹을 때는 남편도 아내도 없고 부모도 자식도 없습니다. 밥 다 먹을 때까지는 곁에 가면 반드시 덤벼드는 것입니다. 사람도 여러분, 이 세상에 가난하게 되고 헐벗게 되고 굶주리게 되면은 악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악만 남는 것입니다. 극심한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과 절망이 다가오면 사람이 돼지처럼 낮아져서 돼지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돼지하고 싸우다가 돼지에게 물려서 입, 얼굴도 물리고 허벅지도 물리고 옆구리도 물리고 온몸에 돼지 냄새가 나고 사람인지 돼지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세상 탐욕을 따라 가다가 술주정뱅이가 되고 마약중독자가 되고 도박꾼이 되고 있는 것 다 팔아 먹고 거지가 되면 눈에 혈기가 돋아 오르고 사람 아닌 짐승처럼 변화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사람이 옳은 길을 걷지 못하고 길 잃어 버려서 방탕하게 되면은 사람은 자기 인격도 자신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6절로 17절에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배가 고파 주려 죽게 되니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을 때, 잘나갈 때는 아버지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우리가 길러 보면 알지 않습니까? 잘 나갈 때는 부모에게 별로 전화도 안하고 이메일도 안보내고 연락도 없습니다만 어려워지면 "건강하십니까? 편안하게 지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연락이 자꾸 오는 것입니다. 좋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려워지니까 부탁을 하려고 연락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탕자도 이제 배가 고파 죽게 되니까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얼마나 평안하고 잘산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지도하에서 아버지의 권위 하에서 살게 될 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에 대한 것은 아버지가 다 책임져 주었지 자기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자기가 스스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기 시작하니까 일이 마음대로 안 되니까 탕자가 되고 고통과 괴로움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2.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모두 탕자
둘째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이처럼 다 탕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담의 후손된 우리가 한 사람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길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이 왜 길을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중심으로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원래 사람을 지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양이요, 우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구와 같이 태양을 떠나면 떠돌이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써 지음을 받았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립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중심으로 살겠다고 마귀의 꼬임을 받아 반역했을 때부터 벌써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덴에서 나오자 삶의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인데 하나님을 떠나면 생수의 근원을 떠난 것입니다. 자기가 웅덩이를 파도 성경은 말하기를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돈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고, 권력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입니다. 물이 고인 것 같으나 얼마 안 지나서 다 빠져 버리고 말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생이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당분간 물이 있다고 큰소리 하나 터진 웅덩이요, 오래가는 것 아무도 없습니다.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영화도 쾌락도 단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곳을 따라가는 사람이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혼돈에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인본주의를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무슨 사람이면 사람으로 살아야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버린 것 아닙니까?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서 선악을 분별하며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 사람이 자기 신분과 처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신분과 처지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정신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탐욕이 들어오니까 자기 신분과 처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탐욕을 따라서 욕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21절에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종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주인 중심으로 살고, 종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삽니다. 종이 자기중심으로 고집을 부리고 주인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버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인의 생각을 따르고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주인의 의지를 따르며 자기를 섬기지 않고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살면 주인이 종을 위해서 친히 모든 것을 돌보아 주고 예비해 주고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지음 받았는데 자기가 종의 탈을 벗어 버리고 주인이 되겠다고 반역을 고함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정말로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에덴을 떠나서 길을 잃은 결과에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람이 길을 잃으면 죄에 빠지고 세상의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고 심신이 병들고 저주에 빠지게 되고 가난하게 되고 고난에 처하게 되고 죽음에서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이 모든 인생의 그림자는 태양을 등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이 망하고 난 다음 그가 한말이 있습니다. 소련이 언제부터 망했느냐. 소련이 교회의 문을 닫았을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닫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닫고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을 할 때 하나님은 소련에 대한 축복의 문을 닫아 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등지면 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진 인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과 죽음이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취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여름 장마가 지나고 난 다음에 거적 대기를 들추면 그 밑에서 온갖 벌레들이 햇빛을 두려워해서 무섭게 도망을 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햇빛이 없으니까 더러운 벌레들이 와글거리지 햇빛이 비취면 다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면 어둠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저주가 떠나갑니다. 죄악이 물러갑니다. 죽음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가난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빛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했을 때 삼대재앙이 다가온 것입니다. 첫째 재앙이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 없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길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고, 둘째 저주가 땅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고통이 다가오고 저주와 가난이 다가오고 셋째, 재앙이 육신이 병들어 죽고 영원이 버림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대재앙을 아담과 하와가 우리에게 물러준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뱃속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재앙을 걸머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재앙, 길 잃어버린 것으로 태어나고 저주를 받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림과 싸워야 될 일생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육신이 병들고 젊으나 늙으나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 할 것 없이 죽어서 본업으로 들어가고 영혼은 버림받는 비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에 살면서 이 삼대재앙을 벗어 버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3. 길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
셋째로, 우리가 보면 길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탕자가 살길은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지나요? 회개를 해야지 돌아가야지. 회개 없이 돌아가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갈 때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뻔뻔스럽게 일어나서 "아버지는 나 돌아왔습니다." 한다고 아버지가 반겨줄 리가 있습니까? 깨어지고 변화된 것을 봐야 아버지가 반겨 주겠지요. 그래서 이 탕자는 말하기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여러분 종의 하나로 보라고도 아니고 품꾼의 하나로 보라고 했습니다. 품꾼은 종보다 더 못합니다. 종은 정식으로 취직된 종입니다.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주고 옷을 주고 살 것은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품꾼은 하루하루 고용살이입니다. 그냥 고용하고 그 이튿날 고용해 준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정식 고용을 받지 아니하고 날품팔이로 고용 받는 것입니다. "나는 정식으로 아버지의 자식의 종으로써 일할 자격도 없습니다. 날품팔이로 고용해 주시옵소서." 배가 고프니 깨어졌어요. 사람이 등에 걸치는 것이 있을 때는 큰소리해도 등이 벗겨지면 큰소리 못합니다. 배가 먹을 것이 꽉 들어찼을 때는 큰소리해도 꼬르륵 소리 나면 큰소리 못합니다. 사람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힘없게 되면은 깨어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으면 하나님께서 양식을 끊어버리시고 의복을 끊어 버리시고 건강을 빼앗아 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에 처하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있을 곳을 잃어버리면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 되어야 문화도 예술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절망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설교한다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복을 안 받으면 어디 가서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 받고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거워 살수가 있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돌보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섬겨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회개하고 깨어져서 품꾼의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낮아져서 아버지께 오니까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시고 뛰어 나와서 탕자를 얼싸안고 환영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나고, 지혜 있고 총명하더라도 얼마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지혜와 총명은 어두워지고 청춘은 사라지고 인생은 절망에 처하고 죽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의지할 것이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젊은 청춘이 영원히 갑니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젊었어요. 굉장히 청춘이었는데 이제 아무리 봐도 청춘은 아닙니다. 거울을 봐도 청춘이 아니고, 걸음걸이를 봐도 청춘이 아니고 생활하는 것 청춘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별도리 없이 청춘도 가고, 지위도 가고, 명예도 가고, 부귀, 영화도 다 가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데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 품에 안기면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믿음으로 소망 차게 내일을 향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 앞에는 밝은 빛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하나님 앞에는 밝은 환한 빛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길을 찾아 돌아와야 탕자의 신세를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신세를 면한다는 것은 회개가 언제나 앞서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됨과 절망을 깨닫고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아야 돼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육군대위 한 사람이 암에 걸려서 죽어 가는데 그 아내가 하도 사정해서 병원에 심방해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암이 걸려서 말기암에서 죽게 되었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 당신은 길을 찾지 못한다. 어디 갈지 모르지 않느냐. 죽고 난 다음에 어디를 가느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으니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나는 안 믿습니다." "아니 죽음에 처했는데 안 믿느냐?" "나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당당한 군인이요, 군인 정신으로 죽겠습니다." 내가 너무나 기가 막혀서 "군인정신이 천당 보내 줍니까? 당신, 당당한 군인정신을 가진 것은 좋지만 죽음 앞에는 군인도 장사가 아닙니다. 죽음을 당신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지 말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당신은 천국에 들어가십시오." 끝까지 "나는 사관학교 출신으로써, 군인으로써 살다가 군인으로써 죽지 시시하게 예수 믿고 죽지는 않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시시합니까? 용감한 사람만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용감하지 못하고 겁쟁이는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죄책과 절망에 처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허무와 절망을 가진 사람임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도리를 취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 이지 깨닫지 못하고 무조건하고 머리를 처박는 사람은 바보천치요, 외고집쟁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과 절망을 깨닫고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돌아서도 다른 데로 돌아서면 안됩니다. 기생집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옛날 술집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방탕한 친구를 찾아가면 안돼요.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되 주인을 섬기는 품꾼의 하나로 낮아지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아버지가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뛰어나와 목을 얽매고 그 아들에게 입맞추고 환영해 준 것입니다.
4. 우리가 돌아가는 길
넷째로, 우리 아담의 자손들도 돌아가는 길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본주의로 온갖 세상 죄를 짓고 산 삶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름과 같습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태양이 비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구름이 제켜 지고 태양이 비취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내 중심으로 산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내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내 욕심으로 살고, 탐욕으로 산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너는 더 많은 죄를 지었고 나는 덜 지었다.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오십보 소백보라고 원수가 쳐다보는데 다같이 도망을 치는데 한사람은 백보를 도망치고 다른 사람은 오십보 도망치는데 오십보 도망친 사람이 백보 도망친 사람보고 "저 겁쟁이 봐라. 백보나 도망쳤다" 하는데 백보 도망친 것은 달리기를 잘하기 때문에 백보로 도망쳤고 오십보 도망친 것은 못 달렸기 때문에 오십보 도망쳤지 도망간 것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도망가는 길은 같아요. 나는 적은 죄 지었고 너는 많은 죄지었다. 죄는 다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적은 돌멩이도 물에 가라앉고 큰 바위도 물에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저 소리가 다를 따름인 것입니다. 적은 돌멩이는 퐁당하면 가라앉고 큰 돌멩이는 풍덩하고 가라앉는 것입니다. 소리만 다르지 물에 가라앉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적은 죄인도 지옥에 퐁당하고 떨어지고 큰 죄인은 풍덩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똑같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죄, 작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인본주의로 살고 그 결과로 온갖 세상 죄를 짓고 산 삶을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생각이 바꾸어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깨어지고 회개해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생때같은 33세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생살을 찢고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하여 죽음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죄를 청산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섭던지 대신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사람으로 와서 우리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죽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인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몸을 찢어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훌륭한 선생이요, 교사요, 철학자요, 올바른 의인이 많을지라도 길은 없습니다.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 갈 길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을 영접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보내신 아버지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심판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아버지께로 깨어지고 낮아진 마음으로 항복하고 섬기는 삶을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5절 우리가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지만 회개하고 깨어지고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그 마음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회개하고 깨어지는 마음을 하나님이 멸시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존귀 여기사 하나님께서 오셔서 끌어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했으니 우리도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넘쳐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잃었다가 찾고 죽었다가 살아난 삶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 뭐라고 말합니까?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내 자식아.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잃었다가 찾아주셨고 죽었다가 살려주신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사람이요 그도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길을 잃고 죽은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동안 반짝 육체적인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린다고 납작 웃음을 웃고 좋아할지 몰라도 이미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이미 황문이 되어서 어두움에 처하여 어느 짐승에게 물릴지 모르는 처지에 있고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영생도 모르는 비참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사는 것이 아니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고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지 않은 것입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로 24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우리를 잃었다가 찾았다고 즐거워하시고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 아흔 아홉 구원받아 있는 사람이 주님께 계시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 찾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누더기 옷을 탕자가 입고 나왔지 않습니까? 돼지 굴에서 돼지 퇴비냄새가 나던 옷을 입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옷을 아버지가 갖다 입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혈로 값 주고 산 죄를 청산한 의로운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의롭다는 의미는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의복을 입혀 주셔서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가 있고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오면 제일 좋은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그 다음에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 어머니, 형제간 이름을 세우는 가락지를 손에 끼워 주셔서 친자식이 되었다는 보증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집을 나갈 때 가락지를 뽑아서 던져 버리고 나간 것입니다. "나는 이집 자식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따라 나가 살겠다." 그러나 그 가락지를 가지고 계시다가 아버지가 탕자가 들어오매 가락지를 다시 끼워 주어서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 네 형제들의 자식이요, 형제들이 되었다."고 보중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의 인으로 콱 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보이지만 여러분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을 쳐서 이는 내 자식이다.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내 소유물이다. 인을 친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도장을 쳐놓았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여러분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져서 한길로 왔다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은 하나님의 도장이 쳐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영혼 속에 인을 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천사가 보기에도 마귀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을 증거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종들이나 아들의 차이가 없이 다 같이 밭에서 일하는데 누가 아들이고 누가 종인지 알려면 발을 보면 압니다. 종은 맨발 벗었고, 아들은 신을 신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신발을 신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발을 신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신발을 신기느냐? 신발은 하나님이 예비한 평안의 신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예비해 주는 것입니다. 발이라는 것은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꼬 부지런히 뛰어 다니는 행동을 말하는데 거기에 신발을 신겨서 상처입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다 예비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에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을 예비한 신발을 신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맨발 벗겨 놓은 종으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여러분 일생을 책임져 주시는 신발을 신겨 주셔서 더 이상 상처입고 고통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빼빼 마른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병든 송아지,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광우병 들린 송아지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왜 내 아이 아들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우리 즐겨야 되겠다.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면 너무나 기뻐하셔서 하늘나라에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우리와 잔칫상에 초청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살찐 송아지입니다. 전인구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러한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나님 자녀로써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신발을 신겨 주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신다는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패배자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 돌보지도 않는다. 찌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시간에 절망할 바에야 소망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은 다 십자가에서 내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절망한 시간에 소망을 가지십시오. 원망할 시간에 감사를 하십시오. 탄식할 시간에 영광을 돌리십시오. 똑같은 에너지요, 똑같은 시간입니다. 탄식할 시간은 에너지도 똑같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탄식하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성령님께서 종종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때 제가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이 되어서 마음에 낙심한 생각을 해요. 그러면 성령이 뭐라고 말씀하냐면 '야, 낙심할 시간에 감사 혹은 찬송을 해라! 똑같은 시간이다. 똑같은 에너지가 드는데 낙심하고 탄식하는 그 시간에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해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여러번 성령님의 그 음성을 듣고 제가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시간에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탄식하지 말고 감사하고 울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 우리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말미암아 희망의 자녀들이요, 성령이 같이 계셔서 인을 쳐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신발을 예비하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기뻐하는지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늘 나보고 "너는 어릴 때부터 내게 효도를 다했으니까 내가 더 특별한 효도를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시집와서 첫 아들을 안 놓고 첫딸을 낳았다. 그러니까 시아버지, 시어머니 눈길이 곱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그때는 예수도 모르고 신앙을 안 가졌지만 내 마음속으로 둘째는 아들 낳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너를 낳았단다. 너를 낳고 난 다음에 아침에 너를 강보에 쌓아서 누여 놓고 밥을 하다가 갑자기 너에게 젖먹일 생각이 나서 들어 오면은 네가 똥을 싸놓고 오줌을 싸서 범벅을 해놓고 난 다음에 양발과 손을 움직이면서 나를 보고 방실방실 웃을 때 내 마음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천국같이 즐거움이 있더라. 내가 너를 안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로 다할 수 없더라.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행복을 다 주었으므로 더 이상 내가 요구하지 않는다." 그 말을 여러번 해요. 어린 아기가 어머니를 바라보고 사족을 움직이면서 방실방실 웃을 때 어머니의 천부적인 마음의 사랑이 끌어 오르고 귀엽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로써 자식 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우리를 보고 기뻐 어찌할 줄을 모른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시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내가 즐거워한다. 기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아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죄와 허무와 번뇌와 고통과 고난과 환난 죽음을 겪는 것은 아버지 집을 떠나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떠나면 사망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빛을 등지면 어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샘 근원을 떠나면 썩은 물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현명하게 사는 길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영적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길 잃은 삶을 그치고 생명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곳에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끌어안고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고아로 살지 마십시오. 나 혼자 외롭게 손발이 닳도록 고생하며 살지 마십시오. 아버지 집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서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마귀의 꾀임을 받아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탐욕을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후손들이 오늘날 길 잃은 어둠에서 방황하게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수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도와 주시옵시고 아버지 품에 안겨서 울고 웃으며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영원한 아버지의 품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는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상관없이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이 땅에서 사는가? 또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는 데는 바른 길도 있고 잘못된 길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 한길만 있지 아니하고 길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그 여러 개가 다 올바른 길은 아닌 것입니다. 올바른 길도 있고, 잘못된 길도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내가 어디서부터 길을 잃어 버렸는지 원래 잃어버린 곳으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길을 찾을 수가 있지 자꾸 방황하고 헤매면 점점 길을 더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턱 대놓고 방황한다고 길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등질 때 모든 것을 등진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의와 거룩, 건강과 기쁨, 평안과 행복과 생명,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해를 등지면 어둠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해를 등지고 어둠을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둠을 없애려면 해를 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질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흑암 가운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 것에 싫증이 나서 결국 이기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고 탕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탕자가 길을 잃은 이유
첫째로, 탕자가 왜 인생의 길을 잃어 버렸습니까?
탕자가 길을 잃은 것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정한 시간에 아침에 일어나야 되고, 함께 식당에서 식사해야 되고 또 아버지가 정한 밭에 가서 일을 해야 되고 아버지가 정한 시간에 집에 들어와서 함께 목욕을 하고 식사를 같이 대해야 되고 하는 반복된 생활에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아버지의 권위 하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내 권위 하에 내 멋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주의적인 생각이 들어오자 아버지를 섬기고 사는 것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분에 넘치는 탐욕과 욕심이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세상 뜨면은 이 모든 재산을 형님과 나에게 나누어 주실 터인데 아버지 세상 뜰 때까지 기다릴게 뭐냐. 지금부터 재산 달라고 요구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와서 "아버지, 결국 아버지는 세상 뜨면 이 재산 다 자식들에게 나누어줘야 될 건데 아버지 세상 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살아 있을 동안에 미리 재산을 형에게 줄 재산을 주고 제게 줄 재산을 나누어 주십시오." 분에 넘치게 탐욕을 가지고 아버지께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장차 네가 성장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면 재산을 나누어 줄 테니까 기다려라!" "못 기다려요. 아버지 죽을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얼마나 오래 살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실제로 못난 자식은 부모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와서 아버지께 강청을 하니까 아버지가 견디지 못해서 아직 죽을 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과 세상의 쾌락이 너무 좋아서 아버지 재산을 어찌하든지 얻어가지고서 세상 쾌락을 취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 젊은이의 소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단 아버지를 떠나자 이기주의와 탐욕에 끌린 삶을 삽니다. 사람은 목적이 끌고 가는데 거기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있을 때는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살았는데 아버지를 떠나 이기주의와 탐심을 가졌을 때는 이기주의와 탐욕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유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이 생활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 생활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이기주의요, 탐욕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어 아버지의 근처에도 있기 싫기 때문에 재산을 다 정리해서 이기주의와 탐욕이 이끄는 대로 먼 나라로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세상의 방탕한 생활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자 돈이 있겠다. 이제는 허랑방탕한 생활이 그를 이끄는 대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가 기르는 우리 친자식들도 가출하려고 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최근 일간지를 보면 청소년 가출이 무척 늘어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서울 YMCA 청소년 사업부에서 서울 시내 중고등 학생 2천 374명을 대상으로 가출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 학생이 76.4%였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부모를 떠나서 가출하고 싶다는 마음의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실제로 가출 경험을 한 경우는 남학생이 15.6%, 여학생 9%, 중학생이 8.6%로 나타났습니다. 왜 가출했느냐고 물으니까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부모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모 시키는 것이 싫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게임하고 놀고 밤늦게 들어오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좋은데 부모가 일찍이 들어오너라. 공부하라. 올바르게 살아라. 하는 간섭을 하니까 싫답니다. 그래서 탕자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가출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나가는 것입니다. 20% 정도는 '그냥 답답해서 가출하고 싶다'고 말하고 결국 가출의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제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가출한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친구 집에서 놀았다는 대답이 1/3정도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유흥업소 출입, 노래방이나 비디오 방, 만화방에 있었다고 대답했으며 심지어 길거리를 배회했다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결국 성경에 나타난 탕자와 같이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아버지 집을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오늘날도 청년들이 유혹을 당하고 있는 것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탐욕을 따라 인생을 살게 되니까 미로와 같은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하고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길을 잃으면 기근과 가난과 버림받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서 방황하는데 흥하고 잘되고 축복 받을 리가 있습니까?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기근과 가난과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아버지 떠나서 허랑방탕하고 쾌락을 쫓아 사니까 영원히 그렇게 살줄 알았는데 있는 재산 다 탕진하고 기근이 다가오고 기근 다가와서 없으니 따라오던 친구들도 다 떠나고 여자들도 다 떠나고 있던 집도 다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비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비로소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데 누가 변변한 직장을 줍니까? 직장을 얻었다는 것이 돼지 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나라에서는 돼지 치는 사람이 가장 천한 직업인 것입니다. 가장 천한 직업이라도 구복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극한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돼지 치는 들판에 들어갔는데 집이 있습니까? 들에서 돼지 움막에서 같이 살고 충분히 음식이 없으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같이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려 가지고서 상처투성이입니다. 짐승이라는 것은 아무리 친해도 음식 갖다 놓은면 싸웁니다. 개가 얼마나 친하게 같이 지내도 밥 먹을 때는 옆에 개가 들어오면 어엉! 칵! 개는 보면은 밥먹을 때는 남편도 아내도 없고 부모도 자식도 없습니다. 밥 다 먹을 때까지는 곁에 가면 반드시 덤벼드는 것입니다. 사람도 여러분, 이 세상에 가난하게 되고 헐벗게 되고 굶주리게 되면은 악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악만 남는 것입니다. 극심한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과 절망이 다가오면 사람이 돼지처럼 낮아져서 돼지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돼지하고 싸우다가 돼지에게 물려서 입, 얼굴도 물리고 허벅지도 물리고 옆구리도 물리고 온몸에 돼지 냄새가 나고 사람인지 돼지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세상 탐욕을 따라 가다가 술주정뱅이가 되고 마약중독자가 되고 도박꾼이 되고 있는 것 다 팔아 먹고 거지가 되면 눈에 혈기가 돋아 오르고 사람 아닌 짐승처럼 변화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사람이 옳은 길을 걷지 못하고 길 잃어 버려서 방탕하게 되면은 사람은 자기 인격도 자신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6절로 17절에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배가 고파 주려 죽게 되니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을 때, 잘나갈 때는 아버지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우리가 길러 보면 알지 않습니까? 잘 나갈 때는 부모에게 별로 전화도 안하고 이메일도 안보내고 연락도 없습니다만 어려워지면 "건강하십니까? 편안하게 지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연락이 자꾸 오는 것입니다. 좋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려워지니까 부탁을 하려고 연락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탕자도 이제 배가 고파 죽게 되니까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얼마나 평안하고 잘산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지도하에서 아버지의 권위 하에서 살게 될 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에 대한 것은 아버지가 다 책임져 주었지 자기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자기가 스스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기 시작하니까 일이 마음대로 안 되니까 탕자가 되고 고통과 괴로움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2.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모두 탕자
둘째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이처럼 다 탕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담의 후손된 우리가 한 사람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길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이 왜 길을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중심으로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원래 사람을 지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양이요, 우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구와 같이 태양을 떠나면 떠돌이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써 지음을 받았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립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중심으로 살겠다고 마귀의 꼬임을 받아 반역했을 때부터 벌써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덴에서 나오자 삶의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인데 하나님을 떠나면 생수의 근원을 떠난 것입니다. 자기가 웅덩이를 파도 성경은 말하기를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돈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고, 권력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의 웅덩이도 터진 웅덩이입니다. 물이 고인 것 같으나 얼마 안 지나서 다 빠져 버리고 말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생이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당분간 물이 있다고 큰소리 하나 터진 웅덩이요, 오래가는 것 아무도 없습니다.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영화도 쾌락도 단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곳을 따라가는 사람이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혼돈에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인본주의를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무슨 사람이면 사람으로 살아야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버린 것 아닙니까?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서 선악을 분별하며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 사람이 자기 신분과 처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신분과 처지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정신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탐욕이 들어오니까 자기 신분과 처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탐욕을 따라서 욕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21절에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종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주인 중심으로 살고, 종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삽니다. 종이 자기중심으로 고집을 부리고 주인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버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인의 생각을 따르고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주인의 의지를 따르며 자기를 섬기지 않고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살면 주인이 종을 위해서 친히 모든 것을 돌보아 주고 예비해 주고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지음 받았는데 자기가 종의 탈을 벗어 버리고 주인이 되겠다고 반역을 고함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정말로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에덴을 떠나서 길을 잃은 결과에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람이 길을 잃으면 죄에 빠지고 세상의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고 심신이 병들고 저주에 빠지게 되고 가난하게 되고 고난에 처하게 되고 죽음에서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이 모든 인생의 그림자는 태양을 등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이 망하고 난 다음 그가 한말이 있습니다. 소련이 언제부터 망했느냐. 소련이 교회의 문을 닫았을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닫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닫고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을 할 때 하나님은 소련에 대한 축복의 문을 닫아 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등지면 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진 인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과 죽음이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취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여름 장마가 지나고 난 다음에 거적 대기를 들추면 그 밑에서 온갖 벌레들이 햇빛을 두려워해서 무섭게 도망을 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햇빛이 없으니까 더러운 벌레들이 와글거리지 햇빛이 비취면 다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면 어둠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저주가 떠나갑니다. 죄악이 물러갑니다. 죽음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가난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빛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했을 때 삼대재앙이 다가온 것입니다. 첫째 재앙이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 없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길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고, 둘째 저주가 땅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고통이 다가오고 저주와 가난이 다가오고 셋째, 재앙이 육신이 병들어 죽고 영원이 버림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대재앙을 아담과 하와가 우리에게 물러준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뱃속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재앙을 걸머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재앙, 길 잃어버린 것으로 태어나고 저주를 받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림과 싸워야 될 일생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육신이 병들고 젊으나 늙으나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 할 것 없이 죽어서 본업으로 들어가고 영혼은 버림받는 비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에 살면서 이 삼대재앙을 벗어 버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3. 길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
셋째로, 우리가 보면 길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탕자가 살길은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지나요? 회개를 해야지 돌아가야지. 회개 없이 돌아가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갈 때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뻔뻔스럽게 일어나서 "아버지는 나 돌아왔습니다." 한다고 아버지가 반겨줄 리가 있습니까? 깨어지고 변화된 것을 봐야 아버지가 반겨 주겠지요. 그래서 이 탕자는 말하기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여러분 종의 하나로 보라고도 아니고 품꾼의 하나로 보라고 했습니다. 품꾼은 종보다 더 못합니다. 종은 정식으로 취직된 종입니다.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주고 옷을 주고 살 것은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품꾼은 하루하루 고용살이입니다. 그냥 고용하고 그 이튿날 고용해 준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정식 고용을 받지 아니하고 날품팔이로 고용 받는 것입니다. "나는 정식으로 아버지의 자식의 종으로써 일할 자격도 없습니다. 날품팔이로 고용해 주시옵소서." 배가 고프니 깨어졌어요. 사람이 등에 걸치는 것이 있을 때는 큰소리해도 등이 벗겨지면 큰소리 못합니다. 배가 먹을 것이 꽉 들어찼을 때는 큰소리해도 꼬르륵 소리 나면 큰소리 못합니다. 사람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힘없게 되면은 깨어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으면 하나님께서 양식을 끊어버리시고 의복을 끊어 버리시고 건강을 빼앗아 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에 처하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있을 곳을 잃어버리면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 되어야 문화도 예술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절망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설교한다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복을 안 받으면 어디 가서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 받고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거워 살수가 있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돌보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섬겨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회개하고 깨어져서 품꾼의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낮아져서 아버지께 오니까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시고 뛰어 나와서 탕자를 얼싸안고 환영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나고, 지혜 있고 총명하더라도 얼마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지혜와 총명은 어두워지고 청춘은 사라지고 인생은 절망에 처하고 죽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의지할 것이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젊은 청춘이 영원히 갑니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젊었어요. 굉장히 청춘이었는데 이제 아무리 봐도 청춘은 아닙니다. 거울을 봐도 청춘이 아니고, 걸음걸이를 봐도 청춘이 아니고 생활하는 것 청춘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별도리 없이 청춘도 가고, 지위도 가고, 명예도 가고, 부귀, 영화도 다 가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데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 품에 안기면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믿음으로 소망 차게 내일을 향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 앞에는 밝은 빛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하나님 앞에는 밝은 환한 빛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길을 찾아 돌아와야 탕자의 신세를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신세를 면한다는 것은 회개가 언제나 앞서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됨과 절망을 깨닫고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아야 돼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육군대위 한 사람이 암에 걸려서 죽어 가는데 그 아내가 하도 사정해서 병원에 심방해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암이 걸려서 말기암에서 죽게 되었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 당신은 길을 찾지 못한다. 어디 갈지 모르지 않느냐. 죽고 난 다음에 어디를 가느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으니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나는 안 믿습니다." "아니 죽음에 처했는데 안 믿느냐?" "나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당당한 군인이요, 군인 정신으로 죽겠습니다." 내가 너무나 기가 막혀서 "군인정신이 천당 보내 줍니까? 당신, 당당한 군인정신을 가진 것은 좋지만 죽음 앞에는 군인도 장사가 아닙니다. 죽음을 당신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지 말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당신은 천국에 들어가십시오." 끝까지 "나는 사관학교 출신으로써, 군인으로써 살다가 군인으로써 죽지 시시하게 예수 믿고 죽지는 않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시시합니까? 용감한 사람만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용감하지 못하고 겁쟁이는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죄책과 절망에 처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허무와 절망을 가진 사람임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도리를 취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 이지 깨닫지 못하고 무조건하고 머리를 처박는 사람은 바보천치요, 외고집쟁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과 절망을 깨닫고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돌아서도 다른 데로 돌아서면 안됩니다. 기생집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옛날 술집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방탕한 친구를 찾아가면 안돼요.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되 주인을 섬기는 품꾼의 하나로 낮아지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아버지가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뛰어나와 목을 얽매고 그 아들에게 입맞추고 환영해 준 것입니다.
4. 우리가 돌아가는 길
넷째로, 우리 아담의 자손들도 돌아가는 길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본주의로 온갖 세상 죄를 짓고 산 삶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름과 같습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태양이 비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구름이 제켜 지고 태양이 비취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내 중심으로 산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내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내 욕심으로 살고, 탐욕으로 산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너는 더 많은 죄를 지었고 나는 덜 지었다.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오십보 소백보라고 원수가 쳐다보는데 다같이 도망을 치는데 한사람은 백보를 도망치고 다른 사람은 오십보 도망치는데 오십보 도망친 사람이 백보 도망친 사람보고 "저 겁쟁이 봐라. 백보나 도망쳤다" 하는데 백보 도망친 것은 달리기를 잘하기 때문에 백보로 도망쳤고 오십보 도망친 것은 못 달렸기 때문에 오십보 도망쳤지 도망간 것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도망가는 길은 같아요. 나는 적은 죄 지었고 너는 많은 죄지었다. 죄는 다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적은 돌멩이도 물에 가라앉고 큰 바위도 물에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저 소리가 다를 따름인 것입니다. 적은 돌멩이는 퐁당하면 가라앉고 큰 돌멩이는 풍덩하고 가라앉는 것입니다. 소리만 다르지 물에 가라앉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적은 죄인도 지옥에 퐁당하고 떨어지고 큰 죄인은 풍덩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똑같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죄, 작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인본주의로 살고 그 결과로 온갖 세상 죄를 짓고 산 삶을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생각이 바꾸어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깨어지고 회개해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생때같은 33세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생살을 찢고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하여 죽음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죄를 청산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섭던지 대신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사람으로 와서 우리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죽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인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몸을 찢어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훌륭한 선생이요, 교사요, 철학자요, 올바른 의인이 많을지라도 길은 없습니다.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 갈 길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을 영접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보내신 아버지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심판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아버지께로 깨어지고 낮아진 마음으로 항복하고 섬기는 삶을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5절 우리가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지만 회개하고 깨어지고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그 마음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회개하고 깨어지는 마음을 하나님이 멸시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존귀 여기사 하나님께서 오셔서 끌어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했으니 우리도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넘쳐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잃었다가 찾고 죽었다가 살아난 삶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 뭐라고 말합니까?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내 자식아.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잃었다가 찾아주셨고 죽었다가 살려주신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사람이요 그도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길을 잃고 죽은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동안 반짝 육체적인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린다고 납작 웃음을 웃고 좋아할지 몰라도 이미 길 잃어버린 사람이요, 이미 황문이 되어서 어두움에 처하여 어느 짐승에게 물릴지 모르는 처지에 있고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영생도 모르는 비참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사는 것이 아니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고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지 않은 것입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로 24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우리를 잃었다가 찾았다고 즐거워하시고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 아흔 아홉 구원받아 있는 사람이 주님께 계시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 찾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누더기 옷을 탕자가 입고 나왔지 않습니까? 돼지 굴에서 돼지 퇴비냄새가 나던 옷을 입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옷을 아버지가 갖다 입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혈로 값 주고 산 죄를 청산한 의로운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의롭다는 의미는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의복을 입혀 주셔서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가 있고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오면 제일 좋은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그 다음에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 어머니, 형제간 이름을 세우는 가락지를 손에 끼워 주셔서 친자식이 되었다는 보증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집을 나갈 때 가락지를 뽑아서 던져 버리고 나간 것입니다. "나는 이집 자식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따라 나가 살겠다." 그러나 그 가락지를 가지고 계시다가 아버지가 탕자가 들어오매 가락지를 다시 끼워 주어서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 네 형제들의 자식이요, 형제들이 되었다."고 보중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의 인으로 콱 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보이지만 여러분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을 쳐서 이는 내 자식이다.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내 소유물이다. 인을 친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도장을 쳐놓았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여러분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져서 한길로 왔다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은 하나님의 도장이 쳐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영혼 속에 인을 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천사가 보기에도 마귀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을 증거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종들이나 아들의 차이가 없이 다 같이 밭에서 일하는데 누가 아들이고 누가 종인지 알려면 발을 보면 압니다. 종은 맨발 벗었고, 아들은 신을 신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신발을 신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발을 신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신발을 신기느냐? 신발은 하나님이 예비한 평안의 신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예비해 주는 것입니다. 발이라는 것은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꼬 부지런히 뛰어 다니는 행동을 말하는데 거기에 신발을 신겨서 상처입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다 예비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에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을 예비한 신발을 신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맨발 벗겨 놓은 종으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여러분 일생을 책임져 주시는 신발을 신겨 주셔서 더 이상 상처입고 고통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빼빼 마른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병든 송아지,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광우병 들린 송아지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왜 내 아이 아들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우리 즐겨야 되겠다.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면 너무나 기뻐하셔서 하늘나라에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우리와 잔칫상에 초청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살찐 송아지입니다. 전인구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러한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나님 자녀로써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신발을 신겨 주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신다는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패배자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 돌보지도 않는다. 찌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시간에 절망할 바에야 소망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은 다 십자가에서 내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절망한 시간에 소망을 가지십시오. 원망할 시간에 감사를 하십시오. 탄식할 시간에 영광을 돌리십시오. 똑같은 에너지요, 똑같은 시간입니다. 탄식할 시간은 에너지도 똑같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탄식하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성령님께서 종종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때 제가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이 되어서 마음에 낙심한 생각을 해요. 그러면 성령이 뭐라고 말씀하냐면 '야, 낙심할 시간에 감사 혹은 찬송을 해라! 똑같은 시간이다. 똑같은 에너지가 드는데 낙심하고 탄식하는 그 시간에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해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여러번 성령님의 그 음성을 듣고 제가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시간에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탄식하지 말고 감사하고 울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 우리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말미암아 희망의 자녀들이요, 성령이 같이 계셔서 인을 쳐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신발을 예비하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기뻐하는지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늘 나보고 "너는 어릴 때부터 내게 효도를 다했으니까 내가 더 특별한 효도를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시집와서 첫 아들을 안 놓고 첫딸을 낳았다. 그러니까 시아버지, 시어머니 눈길이 곱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그때는 예수도 모르고 신앙을 안 가졌지만 내 마음속으로 둘째는 아들 낳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너를 낳았단다. 너를 낳고 난 다음에 아침에 너를 강보에 쌓아서 누여 놓고 밥을 하다가 갑자기 너에게 젖먹일 생각이 나서 들어 오면은 네가 똥을 싸놓고 오줌을 싸서 범벅을 해놓고 난 다음에 양발과 손을 움직이면서 나를 보고 방실방실 웃을 때 내 마음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천국같이 즐거움이 있더라. 내가 너를 안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로 다할 수 없더라.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행복을 다 주었으므로 더 이상 내가 요구하지 않는다." 그 말을 여러번 해요. 어린 아기가 어머니를 바라보고 사족을 움직이면서 방실방실 웃을 때 어머니의 천부적인 마음의 사랑이 끌어 오르고 귀엽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로써 자식 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우리를 보고 기뻐 어찌할 줄을 모른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시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내가 즐거워한다. 기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아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죄와 허무와 번뇌와 고통과 고난과 환난 죽음을 겪는 것은 아버지 집을 떠나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떠나면 사망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빛을 등지면 어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샘 근원을 떠나면 썩은 물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현명하게 사는 길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영적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길 잃은 삶을 그치고 생명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곳에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끌어안고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고아로 살지 마십시오. 나 혼자 외롭게 손발이 닳도록 고생하며 살지 마십시오. 아버지 집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서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마귀의 꾀임을 받아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탐욕을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후손들이 오늘날 길 잃은 어둠에서 방황하게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수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도와 주시옵시고 아버지 품에 안겨서 울고 웃으며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영원한 아버지의 품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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