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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축복을 좌우합니다 (마 1:18-25)
< 진정한 멘토이신 예수님 > 1980년대에 한국 교회에 제자훈련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때 많은 교회들이 여러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몇 단계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지금은 그 열기가 많이 수그러졌습니다. 그리고 요새는 ‘제자’란 용어보다 ‘멘토’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요새 리더십이 중시되면서 멘토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멘토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주전 1200년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딧세이는 트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를 믿는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멘토는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왕자의 선생과 아버지, 그리고 친구 역할을 하면서 왕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키웠습니다. 그 후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10년 만에 돌아와 보니까 자기 아들이 당당하고, 매력적이고, 늠름하고,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역할을 하며 아들을 잘 키웠던 멘토 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멘토란 지혜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이끌어 주는 지도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사람이 성공하는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을 이끌어주고 어려울 때 금방 달려와 줄 멘토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성도에게는 누구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멘토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멘토이신 예수님은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처녀 잉태는 당시에 큰 범죄였지만 남편 요셉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19절). 그 모습에 대해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요새 말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정말 정의를 원하면 사랑하는 마음도 갖춰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남과 자신을 다 무너뜨리지만 사랑을 가진 정의는 남과 자신을 다 세웁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정의를 외쳐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자’라고 하면 목소리가 높은 운동가를 연상하기보다는 정말 존경받는 사람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습니까? 마리아의 파멸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요셉은 마리아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깊이 기도하며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전해주었습니다(20-21절). 얼마나 멋진 주님의 개입하심입니까? 가끔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사건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 너무 성급하게 인생의 성패를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계획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 본문 2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로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말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란 말이고, ‘엘’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현재, 과거, 미래형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임마누엘이란 말은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과거형 뜻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재형 뜻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는 미래형 뜻도 됩니다. 또한 히브리말로 ‘임마켐’이란 ‘당신과 함께’란 뜻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임마켐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또한 히브리말로 ‘임마디’란 ‘나와 함께’란 뜻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임마디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때로 우리의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잠시 침묵하고 지켜보는 일은 있어도 우리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 몇 명이 있고, 더 나아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멘토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실패하고 소망이 없어서 모든 세상 친구들이 다 떠날 때 오히려 더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난이 있어도 그것이 더욱 큰 축복의 방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성도들에게 과거는 미래를 향한 서막입니다. 예수님이 지난 10번의 사고에서 함께 하셨다면 앞으로 있을 11번째 사고에서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그때 감사하고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극적인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1877년 미국의 곡창 미네소타에 3년째 가뭄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메뚜기 떼가 창궐하면서 사람들은 내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미네소타 주지사인 필스베리(Pillsbury)가 절망과 좌절에 빠진 모든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먼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농작물은 거의 죽어가지만 아직은 살아있으니 감사하자는 말에 거의 모든 주민들이 근처의 밭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남은 것이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로 그날 3년 동안 들판을 뒤덮었던 메뚜기 떼들이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처럼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감사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믿음과 기도를 기억하시고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성육신이 주는 교훈 >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어떤 마음의 각오를 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특별히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성도에게 꼭 필요한 2가지 도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사랑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주님의 성육신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삶은 ‘주는 삶’입니다. 잘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는 것과 더불어 받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많이 주면서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지 않는 것도 인색한 삶이지만 지나치게 받지 않으려는 삶도 인색한 삶입니다. 일전에 한 대학교 총장은 교회를 잘 섬기면서도 숨어서 봉사하겠다고 집사 직분을 안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받는 것은 다 거부했습니다. 심지어는 가까운 친척이나 교인이 사과 한 상자를 보내도 뜯지도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청빈하고 강직하다고 했지만 그렇게 강직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분을 어려워해서 결국 교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주고받으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주는 삶은 고상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고받는 삶이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웃과 교회를 살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조건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줄 의무’만 100% 있고, ‘받을 여지’가 100% 없는 영혼이나 단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아도 되고, 베풀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사람이 베풀 것이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것으로도 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누구나 줄 것이 있고 누구나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살기를 힘쓸 때 행복은 결코 그 사람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2.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삶이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합니다. 지금 형편이 초라해도 얼마든지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지금 형편에서 행복을 만들어 가십시오. 주위를 둘러보면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체불만족’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였던 오토다게 히르타다는 날 때부터 손과 발이 10센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개성시대인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개성이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깨와 머리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글을 쓰고, 입과 어깨로 가위질을 합니다. 또한 양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볼 하면서 농구를 하고, 겨드랑이 사이로 철봉을 끼고 턱걸이를 하면서 그런 모습을 자기만이 가진 장기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별명이 ‘휠체어의 황제’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둔 기색이 없고, 어머니도 그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한 달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충격을 받을까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그녀가 처음 자식을 보고 한 소리는 “야! 정말 귀엽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자식을 최고로 귀엽게 보고 기쁘게 키웠습니다. 아버지도 그의 자긍심을 높여주려고 자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은사인 다카기 선생은 4년간 그의 담임을 자원하여 멘토가 되어서 무조건 돕기보다 오토다케가 모든 일을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상인도 들어가기 힘든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한탄하지만 이 세상에 원래부터 불행한 존재는 없습니다. 불행은 행복을 포기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축복의 가능성도 무한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서 성공 사례를 만드십시오. 어떤 일을 성공하면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지만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장시키지 마십시오.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자신을 묶은 쇠줄을 잡아 빼고 도망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묶은 쇠줄로 인해 머리에 “나는 이 쇠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입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깨닫지 못하고 평생 묶여서 서커스를 하면서 삽니다. 그런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묻히고 살지 말고 축복의 넓은 세계로 나가십시오. 저의 첫째 딸 은혜는 원래 겁이 많습니다. 어릴 때 별명이 ‘사슴 눈’이었는데 행동도 사슴처럼 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순진해서 가끔 남학생으로부터 놀림도 받습니다. 진짜 강한 남자애들은 약해보이는 여자애를 놀리지 않고 오히려 더 품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자 세계에서 주로 얻어맞는 애들이 보통 여자애들을 울리고 괴롭힙니다. 그런데 일전에 같은 반에 은혜를 놀리고 괴롭히는 한 남자애가 있었습니다. 사실 은혜는 겁은 많지만 골격도 크고 힘도 장사라서 만약 비뚤어 나가면 분당 7공주 캡틴감입니다. 그런데 겁이 많고 착하고 순진하니까 힘이 있어도 놀림을 당하는 편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은혜가 폭발해서 자기를 계속 괴롭히는 그 남자애에게 연필 깎는 칼을 집어던졌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남자애가 겁나서 더 이상 은혜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 일이 은혜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작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가끔 보면 둘째 딸 한나가 순진한 언니를 놀려먹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둘째 딸이 엉엉 서럽게 울면서 전화했습니다. 급히 가보니까 한나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날 어떤 일로 둘이 다투게 되었는데 그때 은혜가 화가 나니까 한나의 머리를 세게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뼈를 가진 언니의 손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에 둘째가 큰 코를 다치면서 그때부터 언니 무서운 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보면 자신에게 내재된 폭발적인 힘을 묻혀 두고 무조건 겁부터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사슴처럼 약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사슴처럼 약하고 슬픈 모습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성공적으로 살기에 충분한 힘과 가능성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생각하고 힘없는 사슴처럼 살지 말고 힘 있는 사자처럼 사십시오. 이제 꿈과 비전을 향해서 사자처럼 힘 있게 달리십시오. 주님은 말구유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지만 계속 전진하다가 결국 하늘 끝까지 승천하셨습니다. 그처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자리로 나가십시오. 그래서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고, 이루고, 그 축복을 나눔으로 주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이 땅에 구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지금부터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 생각을 멋지게 하십시오 > 사람이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삶으로 바꾸고, 위축된 삶을 위대한 삶으로 바꾸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인생은 결정적으로 변화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축복된 존재가 되는 것은 상당 부분 생각에 의해 좌우됩니다. 잠언 2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즉 마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끔 저는 구글 세계지도를 보면서 꿈과 비전을 키웁니다. 그리고 우주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피부로 느낍니다. 지구가 엄청난 거리의 태양궤도를 돌면서 1년에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도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정교한 법칙에 깊은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과 관련된 법칙’도 그처럼 정교하게 만드셨습니다. 생각은 생명의 씨와 같아서 생각대로 결과가 생깁니다. 삶은 생각의 산물입니다. 욥기 3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쁜 생각은 나쁜 일을 만들고, 좋은 생각은 좋은 일을 만듭니다. 가끔 “이 일이 나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정말 일이 나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생각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부자들은 대개 그 전에 풍성함과 축복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나쁜 얘기와 생각을 계속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지만 좋은 얘기와 생각을 계속 하면 상황은 더 좋아집니다. 현재 가진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전에 생각한 것이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생각이 바뀌어야 인생도 바뀝니다. 생각은 환경과 인생을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듭니다. 그 법칙은 중력법칙처럼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구절은 많이 들었던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2개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23절에 나오는 ‘누구든지(whosoever)’라는 단어와 24절에 나오는 ‘무엇이든지(whatsoever)’라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을 주목해보십시오. 그 단어도 믿음과 생각의 법칙은 중력법칙처럼 아주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뜻을 내포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잘하고 믿음으로 그 생각을 뒷받침하면 누구든지 찬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데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필요한 것’만 아니라 그 이상의 ‘원하는 것’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만 구하지 말 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원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경제적인 기적도 원하고, 건강의 축복도 원하고, 자녀의 축복도 원하십시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받은 축복이 여러분들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원하면 그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구하고, 그 다음에 믿으십시오. 그러면 주님 말씀처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부터 복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생각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게 하십시오. 축복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처음에는 찬란한 생각을 하지만 어느새 그 생각을 의심하고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하루에 1만 번에서 5만 번까지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 중에서 절반은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보다 더 강도가 세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왜 내 삶은 이렇게 엉망인가? 왜 결혼생활이 이렇게 힘든가? 왜 이렇게 자주 아픈가? 왜 이렇게 돈을 벌지 못하는가? 왜 자녀가 저 모양인가?” 바로 그런 생각이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사로잡으라!”는 말은 “축복에 대한 생각의 초점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하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비전이 담긴 그림이나 이미지를 항상 보이는 곳에 두고, 아침에 처음 일어날 때나 컴퓨터를 켤 때마다 그것을 보면서 계속 그 원하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축복된 생각이 더욱 커지고 뚜렷해집니다. 또한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입술의 고백입니다. 축복된 생각을 계속 입술로 고백하고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생각의 초점이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십시오. 생각은 앞으로 될 사람됨을 좌우하고, 앞으로 있을 기적적인 체험을 좌우합니다. 그처럼 생각이 삶을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멋지고 위대한 큰 생각을 하십시오. 이제 거룩하고 구체적인 소원을 품으십시오.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되 사명감을 가지고 사용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계속 그 생각을 하십시오. 그처럼 바른 생각을 통해서 삶을 복된 삶으로 이끄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생각은 축복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멋진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멘토이신 주님이 그 생각과 믿음대로 이뤄주실 것입니다. 이제 더욱 축복 받을 것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품고 집중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의 풍성한 축복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고, 앞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과 이웃들을 돕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큰 축복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축복받을 자신을 생각하고 이미지화하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그 찬란한 꿈을 이루어 주님처럼 누군가의 멘토로서 행복하게 사는 복된 분들이 되십시오.ⓒ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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