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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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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60 |
2006.9.24.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베드로보다 훨씬 막강한 권위를 행사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바울이 강조한 믿음보다는 실천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바울의 가르침과 야고보의 가르침이 대립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과 실천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실천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야고보가 믿음을 배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을 달리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기승을 부리던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야고보는 실천적인 요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차별
야고보는 1-4절에서 “사람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말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이때 부자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많은 관심을 보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곧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막연하게 일반적인 윤리를 교훈하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게 될 교회에서 사람차별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을 특별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디서나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처럼 신자들이 너무 없을 경우에는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반기겠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교회라고 한다면 이런 차별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차별하게 됩니다. 부자들은 아무래도 교회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물질적인 힘이 교회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회에서의 사람차별은 단순히 빈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식의 유무, 교양의 유무와도 상관이 됩니다. 교회가 교양을 함양하는 집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도력도 있고,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지식과 교양도 없는 사람들은 그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사람차별은 교회 공동체의 문제 이전에 인간 자체의 문제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부, 지식, 교양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들입니다. 학교로부터 사회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행위가 바로 이런 기준들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회 구조가 우리의 삶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나름의 안정감 때문입니다. 부, 지식, 교양,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사회적 신분은 인간에게 성취감과 자기 만족감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이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현대의 사회가 인간을 얼마나 심각하게 차별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직접 가르치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보면 인간차별은 인간본질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서도 이런 차별은 흔했습니다. 심지어 애찬식을 나눌 때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따로 모였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행동했습니다.(고전 11장 참조) 부자들의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일부러 가난한 사람을 힘들게 했다기보다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회집단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부자들의 횡포
야고보는 5절 이하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을 대립적으로 비교합니다. 이런 구절은 흡사 해방신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을 부요하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믿음이 좋다는 뜻일까요? 약간 어려운 대목입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품성은 부자들보다 거칠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이 무조건 좋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이 재물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매일 돈, 돈 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겠지만,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재물에 대한 미련은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되기는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오히려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믿음이 부요한 이런 사람들을 왜 업신여기는가 하고 책망한 다음에, 그들이 숭배하는 부자들에게 대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6,7절) 이런 말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는 야고보가 부자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다거나, 그 성격이 매우 과격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크게 봐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부자들은 사람들을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도 법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살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법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둘째, 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박해한 사람들이 주로 기득권층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당시 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한 이유는, 혹은 무시한 이유는 그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건이 어리석어보였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비판을 읽은 여러분들은 한편으로는 통쾌하게 여길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찜찜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든 부자는 이렇게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을 모든 부자는 나쁜 인간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야고보는 그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적인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야고보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야고보는 지금 사회과학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과학은 우리의 참고사항일 뿐이지 신앙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한 계층의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자들을 향한 비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본숭배의 어리석음
야고보의 이런 진술은 자본에 내재해 있는 마성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자본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부자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분의 힘에 완전히 예속되어 버린 그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니, 야고보가 따끔하게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부자를, 그 부자들의 부와 자본을 숭배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본은 지금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세상을 기본적으로 재테크의 대상과 수단으로 간주합니다. 돈이 된다면 산을 깔아뭉개면서도 골프장을 건설하고, 대형주거 아파트를 건설합니다. 갯벌을 파괴합니다. 난자도 사고팝니다. 오늘의 자본은 야고보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물신숭배가 바로 오늘의 신흥종교입니다. 물신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도 역시 이런 경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고, 때로는 국가주의를 옹호하기도 하며, 심지어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의 책망은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물신숭배가 교회 안에서 사람차별로 나타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 앉고, 가난한 사람은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차별을 죄라고, 계명위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물신숭배로부터, 사람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야고보가 교회 안에서 사람차별하지 말아라, 하고 가르쳤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단지 윤리적인 차원, 인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야고보는 차별대우에 관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1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광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늘 사람을 차별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어떤 사람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주어진 사회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차별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잘 안 됩니다. 개인의 정신적인 상태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에이 학점을 주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대우 하는 겁니다. 이 사회는 구조적으로 그걸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영적인 지평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지평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왕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처형당했지만 놀랍게도 부활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영광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땅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앞에서만 우리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광의 주님은 인간적인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거나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여기 애벌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비가 됩니다. 기어 다니던 상태에서 날아다니는 상태로 된다는 것은 기어 다니던 모든 차이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애벌레들이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희망할 수 있다면, 애벌레 상태에서의 작은 차이들, 즉 털이 몇 개 더 있는가, 뚱뚱한가 아닌가 하는 차이들을 넘어설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은 차별의 극단화입니다. 이 문제는 억지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억지로 사랑할 수 없듯이 억지로 차별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에 휩싸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어른이 되면 구슬치기가 더 이상 재미가 없듯이 차별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지 않을 겁니다. 거꾸로, 이 말은 곧 우리가 아직 차별에 기울어져 있다면 우리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뿐만 아니라 믿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예수에게 나타난 영광의 빛 안에서 바라보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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