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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5:1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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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68 |
2006.10.15.
신약성서 당시에 흔하던 이름인 ‘야고보’가 누구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이라는 바울의 입장과 달리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바울의 신학과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호보완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통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를 밝혀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어떤 젊은 두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느끼면서 내면이 밝아지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내면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향해서 무언가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든지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내거나 특별한 날에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면의 변화는 믿음이고,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표현은 행위입니다. 바울은 내면적인 존재의 변화를 강조했다면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야할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교회생활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본문에서는 아래와 같이 다섯 대목이 다루어졌습니다.
고난
13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인간실존이라고 부르는 고난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자기 삶에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은 완전히 도가 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도(道)만이 현실이기 때문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도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 않거나 초월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고난당하는 사람은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면 모든 고난이 물러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주술적인 능력은 아니겠지요. 모든 고난이 구체적으로 해결된다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그런 고난을 더 이상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더 중요합니다.
기쁨
야고보 선생은 같은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는 말은 곧 시편을 노래하라는 뜻입니다. 시편은 단지 인간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평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속의 노래와 교회의 노래가 다른 이유입니다. 세속의 노래는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모든 걸 걸어두지만 교회의 노래는 하나님에게 집중합니다. 요즘에는 교회의 노래도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건 근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그리고 오늘 야고보 선생이 그런 시편을 노래하라는 이유는 거기서만 우리의 기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걸 존재론적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우리는 기쁘다는 걸 늘 자기의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합니다. 그 뒤는 허무와 좌절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혼자 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늘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고, 지금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때문에 우리가 기쁠 때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질병
고난과 기쁨에 이어 야고보 선생은 앓는 사람에게 충고합니다. 교회의 원로들을 청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14절)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그 당시에 교회만이 아니라 세속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습관입니다. 그 기름이 실제로 환자의 치유에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의료 행위는 오늘과 같은 과학이 아니라 민간요법이기 때문에 오늘의 잣대로 기름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기름이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인 효과는 나타냈을 겁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아픈 곳을 어머니가 침으로 발라주시곤 했습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진통의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여기서 교회 원로들을 청하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특별한 신유의 능력을 확보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의 어른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연인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공인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즉 아픈 사람을 위한 기도와 그 효과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라고 일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고 구하는 기도”는 그 앓던 사람을 낫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기계적으로 치료된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비록 치료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치료된 거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냥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드리는 게 좋을까요? 이런 각자의 영성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연히 기도해야겠지요.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과 용서
야고보 선생이 네 번째로 거론하는 대목은 신앙적인 인간관계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앓는 사람을 위한 기도에 이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병은 죄로부터 왔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장로들이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 공동체가 온전해질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여기서 죄를 고백하라는 말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의미이고, 남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은 용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어떤 교회에서는 거의 반복적으로 죄를 자복하는 순서를 갖기도 합니다. 내부 결속력이 강한 소종파일수록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사소한 것이야 그냥 지나갈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스캔들까지 밖으로 나오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야고보 선생이 이런 가르침을 준 본래의 취지는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 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음이 맺힌 상태에서는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 잔 마시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되겠지요. 야고보 선생의 의견으로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배교
오늘 본문이 19,20절에서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있는 문제는 배교자를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구도자들과 배교자들의 변화가 심했을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가 말하는 대상이 반드시 배교자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냉담자일 수도 있고, 고린도교회에 여러 파가 나뉘었듯이 교리적으로 약간 다른 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은 그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길과 그릇된 길은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길의 종착지를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흡사 밀림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길을 찾으려면 자기 눈앞에 보이는 나무와 풀만 보는 게 아니라 하늘의 태양과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길을 잃었을 때 당황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방향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대개는 눈앞의 종교현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발호도 이런 데 연유하며, 정통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은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야고보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공동체는 영적으로 가장 깊은 곳에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우리는 위에서 야고보 선생이 제시한 다섯 가지 가르침을 함께 검토했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기도하고, 기쁜 사람은 찬양하고, 아픈 사람은 장로들을 초청해서 기도 받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기도해주며, 그릇된 길로 간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이끌어줍니다. 교회의 모든 구조와 행위들은 이런 가르침의 활성화에 봉사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런 일들에만 묶여 있을 수는 없겠지요. 나름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평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신앙적 일상들은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교회생활에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신앙의 본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기 위해서 이런 일상을 충실하게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도사 연하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상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인 재림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약 5:7절에서 야고보 선생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섯 가지 가르침은 바로 이 대림절 신앙의 열매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야고보는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리는 농부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상에 투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모든 일상은 해체될 것입니다. 기도, 찬양, 병 등등, 위에서 거론된 다섯 가지 요소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 전까지 이것은 우리가 안고가야 할 일상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살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삶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초월과 내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고보가 가르친 다섯 가지지 외에도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일상이 있겠지요.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일상은 지금 우리가 최선으로 감당해야 할 재림신앙을 본질로 삼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신앙적 일상과 세속적 일상 모두를 투철하게 살아갑니다. 아멘.
신약성서 당시에 흔하던 이름인 ‘야고보’가 누구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이라는 바울의 입장과 달리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바울의 신학과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호보완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통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를 밝혀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어떤 젊은 두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느끼면서 내면이 밝아지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내면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향해서 무언가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든지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내거나 특별한 날에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면의 변화는 믿음이고,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표현은 행위입니다. 바울은 내면적인 존재의 변화를 강조했다면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야할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교회생활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본문에서는 아래와 같이 다섯 대목이 다루어졌습니다.
고난
13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인간실존이라고 부르는 고난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자기 삶에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은 완전히 도가 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도(道)만이 현실이기 때문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도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 않거나 초월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고난당하는 사람은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면 모든 고난이 물러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주술적인 능력은 아니겠지요. 모든 고난이 구체적으로 해결된다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그런 고난을 더 이상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더 중요합니다.
기쁨
야고보 선생은 같은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는 말은 곧 시편을 노래하라는 뜻입니다. 시편은 단지 인간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평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속의 노래와 교회의 노래가 다른 이유입니다. 세속의 노래는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모든 걸 걸어두지만 교회의 노래는 하나님에게 집중합니다. 요즘에는 교회의 노래도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건 근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그리고 오늘 야고보 선생이 그런 시편을 노래하라는 이유는 거기서만 우리의 기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걸 존재론적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우리는 기쁘다는 걸 늘 자기의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합니다. 그 뒤는 허무와 좌절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혼자 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늘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고, 지금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때문에 우리가 기쁠 때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질병
고난과 기쁨에 이어 야고보 선생은 앓는 사람에게 충고합니다. 교회의 원로들을 청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14절)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그 당시에 교회만이 아니라 세속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습관입니다. 그 기름이 실제로 환자의 치유에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의료 행위는 오늘과 같은 과학이 아니라 민간요법이기 때문에 오늘의 잣대로 기름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기름이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인 효과는 나타냈을 겁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아픈 곳을 어머니가 침으로 발라주시곤 했습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진통의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여기서 교회 원로들을 청하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특별한 신유의 능력을 확보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의 어른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연인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공인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즉 아픈 사람을 위한 기도와 그 효과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라고 일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고 구하는 기도”는 그 앓던 사람을 낫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기계적으로 치료된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비록 치료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치료된 거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냥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드리는 게 좋을까요? 이런 각자의 영성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연히 기도해야겠지요.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과 용서
야고보 선생이 네 번째로 거론하는 대목은 신앙적인 인간관계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앓는 사람을 위한 기도에 이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병은 죄로부터 왔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장로들이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 공동체가 온전해질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여기서 죄를 고백하라는 말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의미이고, 남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은 용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어떤 교회에서는 거의 반복적으로 죄를 자복하는 순서를 갖기도 합니다. 내부 결속력이 강한 소종파일수록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사소한 것이야 그냥 지나갈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스캔들까지 밖으로 나오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야고보 선생이 이런 가르침을 준 본래의 취지는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 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음이 맺힌 상태에서는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 잔 마시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되겠지요. 야고보 선생의 의견으로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배교
오늘 본문이 19,20절에서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있는 문제는 배교자를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구도자들과 배교자들의 변화가 심했을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가 말하는 대상이 반드시 배교자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냉담자일 수도 있고, 고린도교회에 여러 파가 나뉘었듯이 교리적으로 약간 다른 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은 그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길과 그릇된 길은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길의 종착지를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흡사 밀림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길을 찾으려면 자기 눈앞에 보이는 나무와 풀만 보는 게 아니라 하늘의 태양과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길을 잃었을 때 당황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방향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대개는 눈앞의 종교현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발호도 이런 데 연유하며, 정통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은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야고보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공동체는 영적으로 가장 깊은 곳에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우리는 위에서 야고보 선생이 제시한 다섯 가지 가르침을 함께 검토했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기도하고, 기쁜 사람은 찬양하고, 아픈 사람은 장로들을 초청해서 기도 받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기도해주며, 그릇된 길로 간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이끌어줍니다. 교회의 모든 구조와 행위들은 이런 가르침의 활성화에 봉사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런 일들에만 묶여 있을 수는 없겠지요. 나름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평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신앙적 일상들은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교회생활에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신앙의 본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기 위해서 이런 일상을 충실하게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도사 연하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상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인 재림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약 5:7절에서 야고보 선생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섯 가지 가르침은 바로 이 대림절 신앙의 열매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야고보는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리는 농부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상에 투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모든 일상은 해체될 것입니다. 기도, 찬양, 병 등등, 위에서 거론된 다섯 가지 요소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 전까지 이것은 우리가 안고가야 할 일상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살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삶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초월과 내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고보가 가르친 다섯 가지지 외에도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일상이 있겠지요.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일상은 지금 우리가 최선으로 감당해야 할 재림신앙을 본질로 삼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신앙적 일상과 세속적 일상 모두를 투철하게 살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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