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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23: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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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74 |
2006.11.5.
저는 욥기서를 읽을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전해야할지 방향을 잡기가 힘듭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당한 고난을 내가 실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친구들과의 논쟁을 따라가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의 최고 의인이었고, 부자였으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식들이 죽고, 재산을 날렸으며, 자신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야만 했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비난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그에게 와서 위로와 충고를 합니다. 그런 위로와 충고는 결국 격한 논쟁으로 바뀌고 맙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기 때문에 빨리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친구 세 명 중의 한 사람인 엘리바스가 욥을 충고한 다음에 욥이 대답한 내용입니다. 오늘 저는 중요한 몇 구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대신하겠습니다.
2절: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 놓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욥기 22장은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비난입니다. 그의 논리는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바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징벌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계속적으로 자기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욥이 못마땅했습니다. 엘리바스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누르시고 겸손한 자를 도와주신다네. 그는 무죄한 사람을 풀어 놓으시는 분, 그러니 자네도 손만 깨끗하다면 풀려 날 것이 아닌가?”(22:29,30) 이 구절만 따로 떼어내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예언자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끔찍스러운 재앙이 힘겨운 마당에 기억도 나지 않는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치는 친구들 앞에서 욥은 견딜 수 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털어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억울해하는 욥은 뻔뻔한 사람일까요?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르는 중에 지은 죄는 있지 않을까요?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몇 년 전에 서남아시아에 밀어닥쳤던 쓰나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 욥도 그런 비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굳이 신약과 비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과 모든 비난의 결집이 바로 십자가였으니까요.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는 논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임한 모든 재앙은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죄라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유 없는 고난도 없지 않습니다. 특히 재앙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유 없는 고난은 많습니다. 그걸 제가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을 그 아이들에게 지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두운 삶의 한 모습입니다. 욥기서는 그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왜 이런 이유 없는 고난을 보고만 계신가?
욥기서는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의로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욥이 실제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는 욥의 심정이 중요합니다. 공연한, 또는 과도한 비난을 받은 그의 마음을 말입니다.
욥기서는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억울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사회는 억울한 사람들을 대량생산해내고 있습니다. 돈과 사회적 신분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북한 정권과 주민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요? 그들이 잘못했으니까 굶어죽어도 싸다 하고 생각하면 될까요?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서 경제적인 위기에 빠지는 게 당연한 일일까요? 잘못한 사람은 그만큼 대가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그들이 저지른 잘못보다 더 크게 당하고 있어서 억울해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욥처럼 말입니다.
8,9절: 그런데 앞으로 가 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욥은 3-7절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런 억울함이 해속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7절) 그런데 문제는 8,9절에서 보듯이 사방을 보아도 야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욥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는지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동네 형들에게 얻어맞는 꼬마가 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욥은 평소 삶에서 진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지 모른다는 염려로 자식들을 위한 번제를 꼬박꼬박 드렸습니다. 전혀 흠이 없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인 욥이 지금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도 하나님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으신가요?
인간 삶에는 구원의 손길이 완전히 끊긴 것 같은 순간들이 흔합니다. 경제적으로 살아나갈 일이 막막할 수도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리는 일은 예상 외로 흔합니다. 한 달쯤 전에 저의 테니스 동호회원 중의 한 사람이 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살아날 희망을 완전히 던졌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불문하고 늘 일어납니다.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 말입니다.
욥은 지금 절망적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줄 수 있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마저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존재의 토대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형편이라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투정을 부릴 만합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헛살았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지도 않고, 과거의 삶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 계명과 말씀을 마음 깊숙이 간직해 두었습니다.(11,12)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일반적으로 말이 잘 안되지만 욥에게는 그것이 가능했고, 오늘 우리는 바로 그것을 욥에게서 배웁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름이 말했듯이 어쩌면 알기 위해서라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 옳은지 모릅니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13,14절: 그러나 그가 결정하시면 아무도 돌이킬 수 없고, 그가 계획하시면 기어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 그의 모든 계획이 다 시행되었듯이 나에게 내리신 형도 집행하시겠지.
욥의 신앙은 놀랍습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하나님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억울해 죽을 지경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진리로 고백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형편은 그 말씀과는 반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에서 확인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까지 나가는지 보십시오. “그의 모든 계획이 다 시행되었듯이 나에게 내리신 형도 집행하시겠지.”(14) 자신이 당한 재앙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임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도 하고 가정이 파탄이 나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이 늘 잘되는 건 아닙니다. 24장의 말씀에 의하면 오히려 악한 이들이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자신이 당한 재앙을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참된 믿음일까요? 아니면 숙명주의일까요? 그리스도교적인 믿음과 숙명주의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는 분에게 무게를 둔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숙명주의는 행복과 불행 자체에 무게를 둔 삶의 태도입니다. 전자는 행복과 불행이 결국 합하여 선하게 인도된다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행복과 불행이 그것자체로 끝나버립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일으키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숙명주의자는 행복과 불행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15,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어찌 그의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생각만 해도 떨리는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전능하신 분 앞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욥은 자기에게 내린 재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아니라 숙명주의자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과 불행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일들만 생겨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지배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잘 사는 나라, 힘이 강한 나라가 된 것을 청교도 신앙과 직결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하게 되면 결국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해야 하고, 이라크를 침략해서라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해야 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욥의 하나님 경험이 두려움이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의 두려움은 전쟁을 앞두고, 또는 싸스같은 전염병을 앞두고 느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훨씬 깊은 영성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선과 악, 행과 불행,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뛰어넘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일반적인 공포 앞에서는 사람들의 자아가 확대되지만, 이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는 자아가 축소됩니다. 그래서 이런 거룩한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평화로 나타납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더 깊고 궁극적인 생명과 맞닿아 있다는 경험으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우리는 그런 욥의 경험을 마지막 17절에서 조금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7절: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이런 구절을 번역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마소라 원본은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했기 때문이다.”로 되어있고, 어떤 사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짙은 암흑에 내 얼굴이 묻힐 수만 있다면.”이라고 했습니다. 개역성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어떤 번역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건 제 능력 밖입니다. 다만 앞 절과 연관해서 볼 때 17절도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욥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너무 심각해서 흑암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늘 밝음만이 아니라 어둠도 있습니다. 행복한 일들만 있는 게 아니라 욥의 경우처럼 견딜 수 없는 재앙과 고통도 따릅니다. 우리에게 올 수 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찌합니까? 그런 것에 휘둘려서 삶을 체념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시렵니까? 욥은 불리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차질이 없는 그분의 계획, 그분의 전능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흑암 속에 묻히는 것 같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욥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그것이 곧 욥의 하나님 경험이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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