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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합3: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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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이정원 2003·11·1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감사절에 우리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추수감사절도 그 절기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생활 할 때 베풀어주셨던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다시 기억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들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늘까지 베풀어주신 풍성하신 은혜를 낱낱이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살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환경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은혜를 다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정치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고,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교육 문제와 실업 문제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가 있으며,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있고,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고생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늘이 감사주일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믿음 좋은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냥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석연치가 않습니다. 문제를 대충 덮어두고 그래도 감사하자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감사절에 진정으로, 감격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고민
하박국 선지자는 B.C.600년 경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으므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의 말기에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다는 총체적인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범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당신에게도 이러한 고민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명 중에 4명은 그리스도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부끄럽게 행동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고민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맛을 잃은 소금처럼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고민하며 가슴 아파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더욱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질문
하박국 선지자는 타락한 유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2-4) 하박국 선지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악한 자들을 그냥 두고 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민하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징벌하실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1:5-6)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한 자들을 치시기 위해서 바벨론 군대를 파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었으며, 제사장들과 방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
이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선지자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굽게 하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바벨론 사람들을 통하여 유다를 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악하기로 하면 그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더 악한 자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이렇게 기도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선지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문제들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내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서 당신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고 나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기도하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나의 고민과 문제를 내놓고 기도한 성도는 하나님의 응답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찐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합2:4-8)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만한 자는 패망하나 의로운 자는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의인을 압제하며 악하고 오만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은 그 믿음에 의하여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하나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모든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요, 자식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며, 돈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백성들은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찬송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하박국 선지자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계획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의 실망스런 행위와 모습을 보고 분노하며 고민했으나, 이제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흔들림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도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했으며, 격렬한 영적투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환경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여전히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려고 힘쓰던 요시야 왕은 어이없게도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은 왕들은 한결같이 믿음 없고 죄악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과 애굽은 번갈아가면서 쳐들어와 왕들을 잡아가고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의 운명은 폭풍 앞에 높인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환경 가운데 있다면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는 갈수록 악하고 부패해가며, 믿는 자들에게서는 그 경건의 능력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으며, 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위태롭고,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는 형편에 있다면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하박국의 찬송은 그가 처한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부른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찬송은 현실이 여전히 암담하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가운데서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찬송이 형식적이거나 체념적인 찬송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며 감격이 넘치는 찬송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솟아나는 절대기쁨의 찬송, 감격과 감사의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하나님 백성이 불러야 할 찬송이 아니겠습니까?
김준곤 목사님은 정말 믿음 좋고 헌신적이던 딸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딸은 남편과 두 딸을 남기고 29세에 죽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딸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감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신희는 죽었다. 아내가 그의 눈을 감겨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 산소 호스와 목에다 심장으로 꽂은 주사 바늘을 빼갔다. 그는 신부처럼 주님의 품에 안겼을까, 어린 딸로 안겼을까? 나와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꼭 잡은 두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와지고 있었다. 종이장 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호수처럼 잔잔하다 …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섬에 선 것이다.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빗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다 …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이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셨다. 그 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나 위해 계셨다.
어떤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십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를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복되고 귀합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더욱 뜨겁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19절)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과 같은 감격의 찬송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감사절에 우리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추수감사절도 그 절기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생활 할 때 베풀어주셨던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다시 기억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들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늘까지 베풀어주신 풍성하신 은혜를 낱낱이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살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환경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은혜를 다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정치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고,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교육 문제와 실업 문제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가 있으며,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있고,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고생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늘이 감사주일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믿음 좋은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냥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석연치가 않습니다. 문제를 대충 덮어두고 그래도 감사하자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감사절에 진정으로, 감격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고민
하박국 선지자는 B.C.600년 경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으므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의 말기에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다는 총체적인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범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당신에게도 이러한 고민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명 중에 4명은 그리스도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부끄럽게 행동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고민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맛을 잃은 소금처럼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고민하며 가슴 아파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더욱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질문
하박국 선지자는 타락한 유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2-4) 하박국 선지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악한 자들을 그냥 두고 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민하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징벌하실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1:5-6)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한 자들을 치시기 위해서 바벨론 군대를 파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었으며, 제사장들과 방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
이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선지자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굽게 하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바벨론 사람들을 통하여 유다를 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악하기로 하면 그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더 악한 자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이렇게 기도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선지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문제들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내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서 당신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고 나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기도하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나의 고민과 문제를 내놓고 기도한 성도는 하나님의 응답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찐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합2:4-8)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만한 자는 패망하나 의로운 자는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의인을 압제하며 악하고 오만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은 그 믿음에 의하여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하나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모든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요, 자식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며, 돈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백성들은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찬송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하박국 선지자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계획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의 실망스런 행위와 모습을 보고 분노하며 고민했으나, 이제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흔들림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도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했으며, 격렬한 영적투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환경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여전히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려고 힘쓰던 요시야 왕은 어이없게도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은 왕들은 한결같이 믿음 없고 죄악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과 애굽은 번갈아가면서 쳐들어와 왕들을 잡아가고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의 운명은 폭풍 앞에 높인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환경 가운데 있다면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는 갈수록 악하고 부패해가며, 믿는 자들에게서는 그 경건의 능력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으며, 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위태롭고,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는 형편에 있다면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하박국의 찬송은 그가 처한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부른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찬송은 현실이 여전히 암담하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가운데서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찬송이 형식적이거나 체념적인 찬송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며 감격이 넘치는 찬송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솟아나는 절대기쁨의 찬송, 감격과 감사의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하나님 백성이 불러야 할 찬송이 아니겠습니까?
김준곤 목사님은 정말 믿음 좋고 헌신적이던 딸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딸은 남편과 두 딸을 남기고 29세에 죽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딸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감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신희는 죽었다. 아내가 그의 눈을 감겨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 산소 호스와 목에다 심장으로 꽂은 주사 바늘을 빼갔다. 그는 신부처럼 주님의 품에 안겼을까, 어린 딸로 안겼을까? 나와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꼭 잡은 두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와지고 있었다. 종이장 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호수처럼 잔잔하다 …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섬에 선 것이다.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빗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다 …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이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셨다. 그 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나 위해 계셨다.
어떤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십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를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복되고 귀합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더욱 뜨겁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19절)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과 같은 감격의 찬송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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