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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7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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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고린도전서 7장
오늘은 우리가 고린도 전서, 수요 성경공부 고린도 전서를 함께 같이 공부 합니다.
7장 이 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 연구가 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히고 있었든 또 하나의 문제, 결혼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결혼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금주에 동아일보사의 시사 주간지, 뉴스플러스 라는 잡지에 보면, 커버 스토리가 뭐냐하면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네일 날짜로 발행되는99년9월 16일, 이미 발행이 되었습니다 마는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커버 스토리에 대한 몇 가지 기사를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가족간의 이합 집산이 많은 서구 사회에서는 가족을 빗댄 우스개 소리가 있다. ‘여보, 당신 아이하고 내 아이가 싸우는걸 우리 아이가 말리고 있어요” 아직 못 깨달은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이것은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98년도 인구 동태 연보에 따르면, 지나간 한해 동안 작년에요, 작년 한해 동안 한국 땅에서 이혼한 사람이 12만3천700쌍, 같은 기간에 혼인한 사람은3십 6만6천600쌍이므로 통계상으로 3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루에1005쌍이 결혼식장에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 까지를 맹세하는 그 사이, 다른339쌍이 가정 법원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다. 그리고 새로 결혼한 부부중이 약 10%는 재혼이다. 이혼 남녀의 평균 연령은 지난 98년 기준으로 남자가 40.1세, 여자는 36.5 세로 해마다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중년 이혼과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만쌍이 넘는 부부가 갈라서며 내세웠든 이혼의 사유는 무엇일까
통계층이 내어놓은98년, 이혼 부부들의 이혼사유는 부부불화 78.2% 경제문제 6.9% 가족간의 불화 3.0% 건강문제 0.9% 순위다. 90년도 결혼한 커플들 가운데 이혼의 제1위는 이혼사유중의 제 1는 성격 차이가 가장 많았다.그러나 또한 성적인 불만이 이혼의 사유 중 매우 중요한 순위를 차지하여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이혼에 따른 가치관의 반영이 나타나고있다. 네, 그렇습니다. 이혼의문제, 그리고 흔들리고있는 가정의 문제는 우리의 현실 사회 속에 깊숙히 들어와서 어떤 가정도 예외 일수는 없다는 그러한 경계선상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고린도 전서 전체가 그렇습니다만은, 특별히 고린도 전서 7장에 다루는 이 문제는 아마도 정식으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 사도에게 서면 지리를 했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에 대한 정중한 답변으로서 오늘의 메세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7장 1절에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 함이 좋으나” 자, 여기 보시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너희가 쓴 내용에 보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에게 무언가를 썼어요 그렇죠? 그 쓴 얘기에 대한 지금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답변을 하고 있어요 .자 7장 25절에 보면은 7장 25절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이것이 뭐냐하면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처녀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아마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모양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내 의견에 의하면,.. 이렇게 바울이 자기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자, 특별히 7장25절에서 재미있는 표현중의 하나는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계시와 자기의 의견을 정직하게 구별하고 있는가를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막연히 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내가 이 문제 관해서는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 내가 기도 해보았지만 주님의 뚜렷한 어떤 계시와 확실한 어떤 메세지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내 개인적인 사견이다. 이렇게 전제 하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경, 즉 정경에 캐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령께서 바울의 의견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든 것으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고린도 전서7장에 결혼을 둘러싼 세가지 문제가 다루어 집니다.
첫째는 성 생활의 문제, 부부에 성생활문제, 둘째는 이혼의 문제, 그리고 세 번째는 독신생활의 문제, 싱글 라이프의 문제, 이 세 가지 의 문제가, 결혼을 둘러싼 이 세가지 논제들이 비울 사도를 통해서 답변 되고 있습니다. 첫째문제 이것은 부부의 성생활 문제 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을 둘러싼 뚜렷한 두 가지 대조적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의 교회 안에도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무 율법주의적 경향, 또 하나는 그와 정반대의 율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 율법주의적 경향 이라는 것은 뭐 율법에서 신경 안 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는 도덕 패기론이라고도 말합니다. 도덕패기론, 율법패기론. 율법은 별 의미가 없다. 율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다. 그러나 자유의 의미를 곡해한 나머지 성적인 방종에 빠져 버릴 수 있었든 경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그 당시 고린도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를 반영해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이 고린티안, 고린도인이란, 말 자체가 그 당시에는 일종의 욕이였어요. 고린도인 처럼 행동한다 이 말은 성적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 라는 말과 동의어 였습니다.
고린도 사회에는 전형적인 소위 프리섹스 소사이어티, 성(性) 에 있어 아주 자유로운 그런 사회 였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경향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경향이고, 그러니까 교회는 교회대로 나오면서도 성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자유화 한 삶을 살고있었든, 일단의 교인들이 존재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 율법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자, 이것하고 정반대의 경향, 이것은 무슨 경향이에요? 율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에대해서 아주 패쇄적인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빌면, 이것은 금욕주의적 경향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욕주의적 경향, 특별히 초대교회는 초대교회 전체를 위협하든 매우 강력한 이단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였습니다. 영지주의, 영지주의자 들은 인간을 이원론 쪽으로 간파 했습니다. 그래서 영과 육을 딱 나누어 놓았어요. 물론 우리가 죽을 때 영과 육은 분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분리될 수 없는 거에요. 하나로 묶여져 있는 일종의 전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혼과 육체를 딱 나눠놓고 영혼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육체는 악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영혼이 더 깨끗해 질려면 육체를 억압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깨끗해질 수가 있다. 육체를 학대하고 또 육체를 모든 쾌락에서 멀리하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경향, 혹은 율법주의적 경향 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아예 섹스를 피한다든지, 섹스란 말만 들어도 그것을 혐오감을 갖는다든지, 죄악시하는 경향, 이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유교의 영향으로 상당히 성에 대해서 패쇄적이고 부정적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유교가 주는 역 기능적 하나의 영향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 아니에요. 복음주의는 성에 방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앙은 성에대한 폐쇄적 태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어요. 자, 바울의 대답이 무얼까요? 한마디로 7장1절부터 7절 사이에 이 성(性) 생활에 문제, 이성 생활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적극적으로 성생활을 하라는 거죠 부부가 되었으면, 부부가 되었으면, 결혼이란 한계 안에서 적극적 성생활을 하라, 그것이 어떤 단어로 쓰여지고 있습니까?
3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자 문맥을 읽어보면 여기서 의무가 무슨 의무에요? 성생활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생활의 의무, 의무를 다하라! 그것은 의무다. 결혼했으면 그것은 거의 의무다. 의무를 등한히 하지말라, 열심히 성생활을 하라, 성경엔 별게 다 있어요.그래서 저는 성서는 가장 위대한 성(性)서 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 적극적인 성생활을 하라, 그러나 또 하나 교훈은 뭐냐하면 우리가 성생활을 할 때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내 중심으로 하지말고 상대방 중심으로 하라, 상대방 중심에 성생활을 하라, 저는 그것이 아가페적 성생활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절에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자,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내 몸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떠냐? 우리가 결혼했으면 부부는 한 몸이란 말이에요. 문자 그대로 한 몸이 될 수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내가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 몸을 사용하지말고, 어떤 때는 내게 성적인 감이 없어도,성감이 없어도, 남편이 요청하면 남편에게 자신을 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에요.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해서는 안되고, 아내의 욕구에 의해서, 아내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사랑은 뭡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경이 강조하는 사랑, 아가페적 사랑,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인데 이 아가페적 심장, 그 사랑의 핵심은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지금은 나에게 어떤 성생할에 대한 리드와 필요와 감이 없어도, 상대방에 그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응해 주라는 말입니다..그래서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이 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이두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남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적극적인 성생활, 혹은 상대방 중심의 성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그 이유를 세가지로 요약 할 수가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2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2절 다같이 시작,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녜, 결혼의 이유중의 하나가 음행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결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은 아니에요.그러나 결혼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결혼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결혼관 전체를 여기서 피력 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너무나 바울이 소극적으로 이 결혼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견해를 가지는 사람도 없잖아 있을 거에요. 그러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한정에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결혼의 소극적 이유중의 하나가 뭐냐? 결혼의 소극적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가 계속 뭐 성적인 필요가 있는데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인간에게 그 성적인 리드, 필요에 대한 활동들이 시작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성적인 욕구를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엉망진창의 무질서한 성적인 부도덕의 삶을 삶으로써 계속적인 음행의 범죄 가운데 거하는 것 보다 결혼하라, 이 말이에요. 결혼하라, 결혼의 소극적인 이유중의 하나가 음행의 범죄를 극복 하기 위해서다. 성생활에 불만이 생기면 어떻습니까? 성생활에 불만이 생기면 외도의 이유나 핑계를 제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여기 저가 읽어드린 동아일보 뉴스 프라스 이 시사 주간지에도 그 내용이 나왔습니다 마는 특별히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 왜 이혼하는가 이혼 사유의 넘버원이 성격 차이에요 그런데 분석을 해보면 그것은 핑계에요. 그냥 하기 좋은 말이 성격이 달라서, 그러나 성격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격을 빼어야 되요. 격을 빼어야 되요. 녜, 이 성생활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부부생활에 그런 문제의 요인이 되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우리 이웃초청 생명의 잔치에 오시는 강사중의 한 분이 박수웅 장로님이신데 낮시간 월 화 수 낮에 사흘동안은 우리가 가정생활 세미나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미국에서 한국인 의사로서 성생활 강의에 왕초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성생활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고 희안한 강의를 해주게 될 것입니다..그래서 주변에 성생활에 관심이 있는 이웃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전도집회 가자, 이러지 말고 성생활 강의 들으러 가자, 그래서 이웃 사람들을 데리고 오셔서 예수 믿는 계기를 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부부의 적극적 성생활의 필요성, 첫째로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두번째는, 진정한 부부사이의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부부사이 진정한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부부들은 우리가 부부가 된 이상은 몸을 자기의 몸으로만 생각 해서는 안된다. 내 몸이 남편의 몸이고, 남편의 몸이 내 몸이다. 그게 하나됨의 의미죠.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면 뭐가 하나가 되었어요? 하나됨의 진정한 의미, 바로 부부의 성교는, 부부의 성교는,이 하나됨을 상징화 시키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상징화 시키는 사건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남편의 필요 아내의 필요를 서로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종의 거의 권리에 속한다.
우리가 그 다음 5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서로 분방 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 이 말에 그 원문의 뜻은 본래는 박탈하지 말라, 서로가 서로를 박탈하지 말라, 권리를 박탈하지 말라, 부부가 되었으면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말이죠. 그 권리를 박탈하지 말고 서로 기도할 틈을 얻는 시간만 제외 해놓고, 또 어떤 사람은 뭐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놓고 그래서 계속 피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안된단 말이죠. 합의상 그것도 합의상 얼마동안 짧은 시간동안은 하되 다시 합해야 한다 4절의 말씀처럼 내 몸은 남편의 몸이고 남편은 나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됨을 정말 성취하는 사건이다 말이죠. 진정한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이 적극적인 성생활은 부부 사이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부부의 적극적 성생활의 세번째 이유는,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자, 여기 5절의 마지막 부분에 이는 너희의 뭐라고 했습니까? 절제 못함으로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녜, 에베소서를 읽어보시면은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틈을 노려요 틈, 계속 틈을 노려요, 부부가 갈라지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마귀가 제일 좋아해요. 마귀는 참소자 입니다. 마귀는 히랍어로 디아-볼러스 라는 말로 표시하는데 이 디아 라는 말 은 영어에 비투인, 사이 사이 에 이런 뜻이고, 볼러스라는 말은, 발로, 던진다, 스로우,,던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이에 던져서 나눈다. 이 마귀란 단어의 뜻은 그렇습니다. 마귀는 그러니까 관계를 파괴 하는 자, 관계의 갈등을 일으켜서 관계를 나누는 자, 그러니까 모든 가정의 불화의 배후,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서도 교인과 교인사이에 그 관계의 갈등, 그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로 틈을 주지말라. 그러나 부부가 자꾸만 서로 관계가 멀어지다 보면 사단이 이때다,하고 비집고 들어 온단 말이죠.그러니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부의 적극적인 성생활은 가정의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매우 필요한 것이다 성생활에 적극적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이 안나와요 이상하게..아멘이 안나와요, 이상하게? 내가 틀린 말했어요? 성경을 말했는데 아멘 소리가 안나오네?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챙피해지네
자, 오늘 고린도 전서 7장에 결혼을 둘러싼 일련의 문제, 첫째문제는 성생활의 문제이고, 두번째 문제는 이혼의 문제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이혼의 문제, 7장10절부터 16절의 까지 입니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혼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 혹은 성경의 대답은 뭐냐? 첫째로 할 수 있으면 이혼 하지 말라! 당연한 얘기죠. 자, 10절과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절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자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 성경의 대답은 아주 자명합니다. 첫째는 이혼하지 말라, 이혼하지말라, 녜.우리가 부부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아무도 나누지 못할지니라, 나누어서는 안된다. 갈라지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아라,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인간사회에 그런 고통스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때는 11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갈릴지라도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할 수 있으면 회복을 추구하라, 할 수 있으면 화합을 추구하라, 연합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분명히 10절에서 괄호 부분에 들어가 있읍니다마는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울이, 인간이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메세지가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창조의 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라. 화합을 추구하라. 이혼하지말고 화합을 추구하라.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에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혼이 전개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특별히 둘 중에 한 사람이 불신자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남편이 안 믿거나 아내가 안 믿을 경우 불신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아마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초대 교회 경우에는 주로 남자가 예수를 먼저 믿습니까?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습니까?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어요.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으면 남자는 자동적으로 불신자가 되죠. 그러면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계속 살아야 하느냐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 신앙적인 갈등이 초래 될 수도 있습니다.
자, 그 문제에 관해서 10절부터 14절까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자, 10절부터 14절인데 10절과 11절은 이미 읽었으니까 12절부터14절까지만 읽겠습니다 12,13,14절 다같이 시작,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이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하면 한쪽이 불신자라도 이혼 하지 말아라. 한쪽이 불신자라도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아라. 이혼하지 말아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냐14절의 말씀처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뭐가 돼요? 거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에요. 거룩의 시초는 구원이에요. 그래서 이 거룩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도덕적인 거룩만 생각 하지말고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 때문에 예수 믿고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남편이 예수 믿을 수 있는 챤스,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힘들어도 계속 살아라, 그리고 남편이 구원 받도록 기도하라, 이 말이죠.
또 그 반대의 경우에도 사실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이것은 16절에도 다시 강조됩니다. 16절 읽어보겠습니다. 16절 다같이 시작,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어떤 자매님이 제게 상담을 와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평생 이 고통을 당하면서 이 믿지 않는 남편과 살아야 할 인생의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매님에게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드렸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말을 했어요. 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땅에 사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이고, 그 예수님은 기꺼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 것이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다면 천하보다 더 귀한, 천하보다 더 귀한 고귀한 영혼, 내 남편이 나를 통해서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의 구원을 위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잔인한 얘기 일지도 모르죠. 요즘 시대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시대에서 이것은 잔인한 충고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할 수 있으면 버리지 말아라 내 남편이, 아내가, 예수를 안 믿어도 버리지 말라.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그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 달라 그 얘기죠.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이, 불신자인 아내가, 이혼을 하자고 주도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성경의 대답이 허용 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허용 될수 있다. 1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믿지 아니 하는 자가 행동의 주체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이혼하자 라고 나왔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너무 구속 받을 것은 없다. 녜,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울은 또 한가지 말을 첨부 했습니다. 뭐라구요?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다. 할 수 있으면 다시 화평을 추구하라. 그러나 허용은 될 수가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될 수가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주도해서 이혼이 이루어 졌다면 그것에 관해서 너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혼의 문제에 대한 바올의 대답 이였고 성경의 대답이 였습니다.
자, 세번째 문제,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결혼을 둘러싼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신생활의 문제 입니다. 독신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종류의 독신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이 된 사람도 있고 결혼했다가 독신이 된 사람이 있죠. 이혼을 해서 독신이 된 사람이 있고 남편이나 아내를 사별하므로 독신이 되는 케이스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 독신자가 한국 사회 속에도 점점 많아 지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 가서 미국교회 주일 학교에 가보면 선데이 스쿨 안에 제일 큰 주일학교가 뭐냐 하면 어른도 주일학교에 들어가니까 성인 주일 학교, 제일 큰 주일학교가 싱글 디파트먼트, 그만큼 독신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혼자 살면서 자녀를 키우는 홀부모도, 홀어머니가 특별이 많아지죠. 싱글마더가 아주 많아집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 문제가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대처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미국에서 아주 귀한 자매님 한 분을 만났는데 본인 자신이 남편의 부정으로 이혼을 당하셨어요. 그땐 크리스챤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이혼의 고통 속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주 아름다운 딸이 되셨고, 또 기도 속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소명감을 가지고 이 싱글마더 세미나를 해요. 그래 제가 초청을 했습니다. 11월 말에 오셔요. 이번에 오셔서 한 이틀간 싱글마더 세미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일에 있어서 우리 주변의 분들을 도울려는 노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자!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독신생활의 문제 7장 8절 9절에 나오고, 그 다음 17절부터38절까지가 다 그 내용입니다. 우선 8절 9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그기 잠깐 언급하고 그 다음에 17절부터 시작해서 특별히 25장부터 38절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자, 제가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독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할 수 있으면 그냥 혼자 살아라.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대답이고 할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면 혼자 살아라. 이것이 8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이한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경우가 뭐냐하면 환난의 때 환난의 때를 전제로 하고 있어요. 26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26절, 25절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 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임박한 환난이 뭐냐하면 초대 크리스챤들은 핍박을 받고 있었잖아요, 신앙이 핍박을 받는 시기, 굉장히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 지금도 지구촌에는 모슬렘 나라 같은 데서는 지금 그런 핍박을 받고 있잖아요. 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요? 혼자 사는 것이 좋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이 있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까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이것이 바울의 대답이에요. 할 수 있으면 혼자 살아라. 만약 이런 고통의 시대 혹은 환란의시대속에 가족을 갖다 보면 29부터 31절까지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우리가 견뎌야 할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나 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지불해야 할 고통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이런 특수한 상황, 특수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에요.
그 다음에 독신생활의 두번째 교훈은 뭐냐하면 그러나 부르심에 따라서 하라. 부르심에 따라서 하라. 또 부르심이 있는지 점검해보라.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것은 부르심이 있는 사람이에요. 부르심, 독신의 부르심, 독신자로서의 부르심이 있는, 이 17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이 부르심의 문제 컬링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소명이라는 것은 독신자의 부르심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혼자 살아도 괜찮아요. 살만해요. 뭐 그렇게 유혹도 안 받고, 유혹을 잘 견딜 수도 있고 이런 사람은 뭡니까? 은사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그냥 지내라. 그런데 은사도 없이 혼자 지내 보겠다 그래서 많은 유혹을 받고 그것은 합당하지가 않다. 그래서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부르심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런데 결혼하는 것도 부르심 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부르심이라구요.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결혼 안하고 살아도 괜찮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
17절 한번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나는 결혼체질이다. 그러면 결혼하고 나는 뭐에요? 독신 체질이다. 그러면 독신으로 살고, 그렇게 하란 말이죠. 자, 이것이 20절 24절 계속 강조가 되어요. 20절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또 24절도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부르심을 점검해보고 독신자의 부르심이 있다면 그대로 지내라.
그러나 세번째 독신생활에 대한 세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하라.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하라! 네, 이것이 9절에 아주 리얼하게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9절에, 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사람도 있어요. 체질에 따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건 빨리 결혼 하라는 말이죠. 빨리 결혼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라. 이 말입니다. 성경의 표현이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실제적입니까? 아닙니까? 추상적으로 안개같이 얘기 하지는 않아요 성경은 아주 솔직하게 아주 솔직하게 다룹니다. 성경처럼 솔직한 책이 없어요
자, 네번째는 그러나 재혼을 할려면 주 안에서 하라. 재혼을 할려면 주 안에서 하라. 39절, 또 독신자로서 처음 결혼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고, 또 결혼했다가 독신이 되어 다시 재혼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주안에서 하라. 39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뭐에요?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을 갈 것이나, 남편 죽으면 나는 자유다! 자유다, 그러나 그러나 뭐냐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또 재혼을 고려할 케이스 속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혼한 사람이 다시 재혼했다가 그 결혼이 깨어지는 확률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거의 70%이상 80%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준비없이 하면 안돼요. 재혼도 준비없이 하면 안돼요. 그래서 이런 방면에도 저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마지막으로 독신생활에 대한 마지막 결론, 뭐냐하면 주를 섬기기 위한 동기로 결단하라. 재혼을 하든지, 아니면 혼자 계속 남을 거냐를 결단하든지,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동기가 뭐냐하면 자기 안에서 범죄의 가능성을 줄이고 그대신 뭐에요? 자기의 삶의 에너지, 행복의 에너지를 가지고 뭐에요? 주님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3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결론입니다. 주를 섬기게 하려함이라. 어떤 사람은 결혼해서 잘 섬길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죠. 어떤 사람은 내가 독신으로 있는 것이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 그러면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뭐에요? 주님을 섬긴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더 잘 섬길 수가 있느냐,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결론을 맺습니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정말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섬기며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혼 문제에 대해서 저는 교회가 언제나 두 가지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혼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두 가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한가지 역할은 뭐냐하면 예언자적 역할이에요. 예언자적 역할, 그것은 이혼을 예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혼에 대한 가르침, 또 결혼에 대한 가르침, 성경적 결혼관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쳐서 교인들이 이혼하지 않도록 돕는 것, 이것이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입니다. 이혼을 예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사장적 역할이 중요해요. 제사장적 역할, 제사장은 뭐냐하면 고통을 담당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는 일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미 이혼한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될까요? 치유자 역할을 해야 돼요. 그것이 제사장적 역할이예요. 치유자 역할,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이혼한 사람을 막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혼한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이런 사람에게 아픔을, 상처를 가중시키지 말고, 상처를 치유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저는 진정한 참된 건강한 교회의 이미지는 이두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이혼을 예방 해야 되고 이미 이혼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요? 다시 상처를 싸매고 재기 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돕는 역할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운데 주께서 이혼을 예방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가정을 견고하게 해주시기를 기도 하십시다. 그러나 우리주변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싸매어주고 그들을 세워주도록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 고통의 시대,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 때에 가면은 이혼이 훨씬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추세에요. 하나님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게 될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또한 우리가정도 지켜주셔서 하나님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가정, 우리부부, 우리자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같이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귀하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주께서 사랑하는 귀한 종들을 세워주시고 저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복음의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져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거룩한 권능으로 함께 하시사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앞에 나와 귀한 말씀을 통해서 삶을 사는 지혜, 아주 명쾌하고 실제적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 오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염려해 주시고, 걱정해주시고, 또 삶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지요. 오늘 이 말씀을 잘 붙들고 주의 말씀을 따라 우리 가정을 지키고, 또 상처 받은 이웃들을 치유하고,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지는 우리 가정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가 늘 말씀가운데 살아 갈수 있다는 것이 어찌 그리 특권인지요.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그리고 내 길에 빛이십니다. 정말 이 말씀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말씀 안에 우리의 지혜가 있고, 말씀 안에 우리의 길이 있음을 언제나 발견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시 우리를 보내시는 삶의 장으로 나아갑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주님을 경배하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마음의 헌금을 주앞에 드리고 이제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모든 주의 자녀들의 발걸음 마다 성령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승리케 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우리가 고린도 전서, 수요 성경공부 고린도 전서를 함께 같이 공부 합니다.
7장 이 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 연구가 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히고 있었든 또 하나의 문제, 결혼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결혼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금주에 동아일보사의 시사 주간지, 뉴스플러스 라는 잡지에 보면, 커버 스토리가 뭐냐하면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네일 날짜로 발행되는99년9월 16일, 이미 발행이 되었습니다 마는 이혼,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커버 스토리에 대한 몇 가지 기사를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가족간의 이합 집산이 많은 서구 사회에서는 가족을 빗댄 우스개 소리가 있다. ‘여보, 당신 아이하고 내 아이가 싸우는걸 우리 아이가 말리고 있어요” 아직 못 깨달은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이것은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98년도 인구 동태 연보에 따르면, 지나간 한해 동안 작년에요, 작년 한해 동안 한국 땅에서 이혼한 사람이 12만3천700쌍, 같은 기간에 혼인한 사람은3십 6만6천600쌍이므로 통계상으로 3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루에1005쌍이 결혼식장에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 까지를 맹세하는 그 사이, 다른339쌍이 가정 법원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다. 그리고 새로 결혼한 부부중이 약 10%는 재혼이다. 이혼 남녀의 평균 연령은 지난 98년 기준으로 남자가 40.1세, 여자는 36.5 세로 해마다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중년 이혼과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만쌍이 넘는 부부가 갈라서며 내세웠든 이혼의 사유는 무엇일까
통계층이 내어놓은98년, 이혼 부부들의 이혼사유는 부부불화 78.2% 경제문제 6.9% 가족간의 불화 3.0% 건강문제 0.9% 순위다. 90년도 결혼한 커플들 가운데 이혼의 제1위는 이혼사유중의 제 1는 성격 차이가 가장 많았다.그러나 또한 성적인 불만이 이혼의 사유 중 매우 중요한 순위를 차지하여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이혼에 따른 가치관의 반영이 나타나고있다. 네, 그렇습니다. 이혼의문제, 그리고 흔들리고있는 가정의 문제는 우리의 현실 사회 속에 깊숙히 들어와서 어떤 가정도 예외 일수는 없다는 그러한 경계선상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고린도 전서 전체가 그렇습니다만은, 특별히 고린도 전서 7장에 다루는 이 문제는 아마도 정식으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 사도에게 서면 지리를 했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에 대한 정중한 답변으로서 오늘의 메세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7장 1절에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 함이 좋으나” 자, 여기 보시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너희가 쓴 내용에 보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에게 무언가를 썼어요 그렇죠? 그 쓴 얘기에 대한 지금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답변을 하고 있어요 .자 7장 25절에 보면은 7장 25절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이것이 뭐냐하면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처녀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아마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모양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내 의견에 의하면,.. 이렇게 바울이 자기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자, 특별히 7장25절에서 재미있는 표현중의 하나는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계시와 자기의 의견을 정직하게 구별하고 있는가를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막연히 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내가 이 문제 관해서는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 내가 기도 해보았지만 주님의 뚜렷한 어떤 계시와 확실한 어떤 메세지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내 개인적인 사견이다. 이렇게 전제 하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경, 즉 정경에 캐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령께서 바울의 의견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든 것으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고린도 전서7장에 결혼을 둘러싼 세가지 문제가 다루어 집니다.
첫째는 성 생활의 문제, 부부에 성생활문제, 둘째는 이혼의 문제, 그리고 세 번째는 독신생활의 문제, 싱글 라이프의 문제, 이 세 가지 의 문제가, 결혼을 둘러싼 이 세가지 논제들이 비울 사도를 통해서 답변 되고 있습니다. 첫째문제 이것은 부부의 성생활 문제 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을 둘러싼 뚜렷한 두 가지 대조적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의 교회 안에도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무 율법주의적 경향, 또 하나는 그와 정반대의 율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 율법주의적 경향 이라는 것은 뭐 율법에서 신경 안 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는 도덕 패기론이라고도 말합니다. 도덕패기론, 율법패기론. 율법은 별 의미가 없다. 율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다. 그러나 자유의 의미를 곡해한 나머지 성적인 방종에 빠져 버릴 수 있었든 경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그 당시 고린도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를 반영해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이 고린티안, 고린도인이란, 말 자체가 그 당시에는 일종의 욕이였어요. 고린도인 처럼 행동한다 이 말은 성적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 라는 말과 동의어 였습니다.
고린도 사회에는 전형적인 소위 프리섹스 소사이어티, 성(性) 에 있어 아주 자유로운 그런 사회 였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경향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경향이고, 그러니까 교회는 교회대로 나오면서도 성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자유화 한 삶을 살고있었든, 일단의 교인들이 존재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 율법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자, 이것하고 정반대의 경향, 이것은 무슨 경향이에요? 율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에대해서 아주 패쇄적인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빌면, 이것은 금욕주의적 경향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욕주의적 경향, 특별히 초대교회는 초대교회 전체를 위협하든 매우 강력한 이단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였습니다. 영지주의, 영지주의자 들은 인간을 이원론 쪽으로 간파 했습니다. 그래서 영과 육을 딱 나누어 놓았어요. 물론 우리가 죽을 때 영과 육은 분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분리될 수 없는 거에요. 하나로 묶여져 있는 일종의 전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혼과 육체를 딱 나눠놓고 영혼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육체는 악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영혼이 더 깨끗해 질려면 육체를 억압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깨끗해질 수가 있다. 육체를 학대하고 또 육체를 모든 쾌락에서 멀리하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경향, 혹은 율법주의적 경향 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아예 섹스를 피한다든지, 섹스란 말만 들어도 그것을 혐오감을 갖는다든지, 죄악시하는 경향, 이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유교의 영향으로 상당히 성에 대해서 패쇄적이고 부정적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유교가 주는 역 기능적 하나의 영향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 아니에요. 복음주의는 성에 방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앙은 성에대한 폐쇄적 태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어요. 자, 바울의 대답이 무얼까요? 한마디로 7장1절부터 7절 사이에 이 성(性) 생활에 문제, 이성 생활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적극적으로 성생활을 하라는 거죠 부부가 되었으면, 부부가 되었으면, 결혼이란 한계 안에서 적극적 성생활을 하라, 그것이 어떤 단어로 쓰여지고 있습니까?
3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자 문맥을 읽어보면 여기서 의무가 무슨 의무에요? 성생활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생활의 의무, 의무를 다하라! 그것은 의무다. 결혼했으면 그것은 거의 의무다. 의무를 등한히 하지말라, 열심히 성생활을 하라, 성경엔 별게 다 있어요.그래서 저는 성서는 가장 위대한 성(性)서 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 적극적인 성생활을 하라, 그러나 또 하나 교훈은 뭐냐하면 우리가 성생활을 할 때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내 중심으로 하지말고 상대방 중심으로 하라, 상대방 중심에 성생활을 하라, 저는 그것이 아가페적 성생활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절에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자,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내 몸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떠냐? 우리가 결혼했으면 부부는 한 몸이란 말이에요. 문자 그대로 한 몸이 될 수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내가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 몸을 사용하지말고, 어떤 때는 내게 성적인 감이 없어도,성감이 없어도, 남편이 요청하면 남편에게 자신을 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에요.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해서는 안되고, 아내의 욕구에 의해서, 아내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사랑은 뭡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경이 강조하는 사랑, 아가페적 사랑,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인데 이 아가페적 심장, 그 사랑의 핵심은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지금은 나에게 어떤 성생할에 대한 리드와 필요와 감이 없어도, 상대방에 그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응해 주라는 말입니다..그래서 상대방 중심으로 성생활을 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이 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이두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남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적극적인 성생활, 혹은 상대방 중심의 성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그 이유를 세가지로 요약 할 수가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2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2절 다같이 시작,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녜, 결혼의 이유중의 하나가 음행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결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은 아니에요.그러나 결혼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결혼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결혼관 전체를 여기서 피력 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너무나 바울이 소극적으로 이 결혼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견해를 가지는 사람도 없잖아 있을 거에요. 그러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한정에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결혼의 소극적 이유중의 하나가 뭐냐? 결혼의 소극적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가 계속 뭐 성적인 필요가 있는데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인간에게 그 성적인 리드, 필요에 대한 활동들이 시작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성적인 욕구를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엉망진창의 무질서한 성적인 부도덕의 삶을 삶으로써 계속적인 음행의 범죄 가운데 거하는 것 보다 결혼하라, 이 말이에요. 결혼하라, 결혼의 소극적인 이유중의 하나가 음행의 범죄를 극복 하기 위해서다. 성생활에 불만이 생기면 어떻습니까? 성생활에 불만이 생기면 외도의 이유나 핑계를 제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여기 저가 읽어드린 동아일보 뉴스 프라스 이 시사 주간지에도 그 내용이 나왔습니다 마는 특별히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 왜 이혼하는가 이혼 사유의 넘버원이 성격 차이에요 그런데 분석을 해보면 그것은 핑계에요. 그냥 하기 좋은 말이 성격이 달라서, 그러나 성격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격을 빼어야 되요. 격을 빼어야 되요. 녜, 이 성생활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부부생활에 그런 문제의 요인이 되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우리 이웃초청 생명의 잔치에 오시는 강사중의 한 분이 박수웅 장로님이신데 낮시간 월 화 수 낮에 사흘동안은 우리가 가정생활 세미나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미국에서 한국인 의사로서 성생활 강의에 왕초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성생활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고 희안한 강의를 해주게 될 것입니다..그래서 주변에 성생활에 관심이 있는 이웃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전도집회 가자, 이러지 말고 성생활 강의 들으러 가자, 그래서 이웃 사람들을 데리고 오셔서 예수 믿는 계기를 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부부의 적극적 성생활의 필요성, 첫째로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두번째는, 진정한 부부사이의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부부사이 진정한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부부들은 우리가 부부가 된 이상은 몸을 자기의 몸으로만 생각 해서는 안된다. 내 몸이 남편의 몸이고, 남편의 몸이 내 몸이다. 그게 하나됨의 의미죠.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면 뭐가 하나가 되었어요? 하나됨의 진정한 의미, 바로 부부의 성교는, 부부의 성교는,이 하나됨을 상징화 시키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상징화 시키는 사건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남편의 필요 아내의 필요를 서로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종의 거의 권리에 속한다.
우리가 그 다음 5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서로 분방 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 이 말에 그 원문의 뜻은 본래는 박탈하지 말라, 서로가 서로를 박탈하지 말라, 권리를 박탈하지 말라, 부부가 되었으면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말이죠. 그 권리를 박탈하지 말고 서로 기도할 틈을 얻는 시간만 제외 해놓고, 또 어떤 사람은 뭐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놓고 그래서 계속 피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안된단 말이죠. 합의상 그것도 합의상 얼마동안 짧은 시간동안은 하되 다시 합해야 한다 4절의 말씀처럼 내 몸은 남편의 몸이고 남편은 나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됨을 정말 성취하는 사건이다 말이죠. 진정한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이 적극적인 성생활은 부부 사이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부부의 적극적 성생활의 세번째 이유는,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자, 여기 5절의 마지막 부분에 이는 너희의 뭐라고 했습니까? 절제 못함으로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녜, 에베소서를 읽어보시면은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틈을 노려요 틈, 계속 틈을 노려요, 부부가 갈라지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마귀가 제일 좋아해요. 마귀는 참소자 입니다. 마귀는 히랍어로 디아-볼러스 라는 말로 표시하는데 이 디아 라는 말 은 영어에 비투인, 사이 사이 에 이런 뜻이고, 볼러스라는 말은, 발로, 던진다, 스로우,,던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이에 던져서 나눈다. 이 마귀란 단어의 뜻은 그렇습니다. 마귀는 그러니까 관계를 파괴 하는 자, 관계의 갈등을 일으켜서 관계를 나누는 자, 그러니까 모든 가정의 불화의 배후,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서도 교인과 교인사이에 그 관계의 갈등, 그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로 틈을 주지말라. 그러나 부부가 자꾸만 서로 관계가 멀어지다 보면 사단이 이때다,하고 비집고 들어 온단 말이죠.그러니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부의 적극적인 성생활은 가정의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매우 필요한 것이다 성생활에 적극적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이 안나와요 이상하게..아멘이 안나와요, 이상하게? 내가 틀린 말했어요? 성경을 말했는데 아멘 소리가 안나오네?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챙피해지네
자, 오늘 고린도 전서 7장에 결혼을 둘러싼 일련의 문제, 첫째문제는 성생활의 문제이고, 두번째 문제는 이혼의 문제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이혼의 문제, 7장10절부터 16절의 까지 입니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혼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 혹은 성경의 대답은 뭐냐? 첫째로 할 수 있으면 이혼 하지 말라! 당연한 얘기죠. 자, 10절과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절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자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 성경의 대답은 아주 자명합니다. 첫째는 이혼하지 말라, 이혼하지말라, 녜.우리가 부부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아무도 나누지 못할지니라, 나누어서는 안된다. 갈라지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아라,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인간사회에 그런 고통스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때는 11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갈릴지라도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할 수 있으면 회복을 추구하라, 할 수 있으면 화합을 추구하라, 연합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분명히 10절에서 괄호 부분에 들어가 있읍니다마는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울이, 인간이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메세지가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창조의 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라. 화합을 추구하라. 이혼하지말고 화합을 추구하라.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에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혼이 전개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특별히 둘 중에 한 사람이 불신자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남편이 안 믿거나 아내가 안 믿을 경우 불신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아마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초대 교회 경우에는 주로 남자가 예수를 먼저 믿습니까?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습니까?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어요. 여자가 예수를 먼저 믿으면 남자는 자동적으로 불신자가 되죠. 그러면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계속 살아야 하느냐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 신앙적인 갈등이 초래 될 수도 있습니다.
자, 그 문제에 관해서 10절부터 14절까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자, 10절부터 14절인데 10절과 11절은 이미 읽었으니까 12절부터14절까지만 읽겠습니다 12,13,14절 다같이 시작,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이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하면 한쪽이 불신자라도 이혼 하지 말아라. 한쪽이 불신자라도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말아라. 이혼하지 말아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냐14절의 말씀처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뭐가 돼요? 거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에요. 거룩의 시초는 구원이에요. 그래서 이 거룩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도덕적인 거룩만 생각 하지말고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 때문에 예수 믿고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남편이 예수 믿을 수 있는 챤스,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힘들어도 계속 살아라, 그리고 남편이 구원 받도록 기도하라, 이 말이죠.
또 그 반대의 경우에도 사실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이것은 16절에도 다시 강조됩니다. 16절 읽어보겠습니다. 16절 다같이 시작,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어떤 자매님이 제게 상담을 와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평생 이 고통을 당하면서 이 믿지 않는 남편과 살아야 할 인생의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매님에게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드렸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말을 했어요. 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땅에 사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이고, 그 예수님은 기꺼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 것이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다면 천하보다 더 귀한, 천하보다 더 귀한 고귀한 영혼, 내 남편이 나를 통해서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의 구원을 위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잔인한 얘기 일지도 모르죠. 요즘 시대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시대에서 이것은 잔인한 충고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할 수 있으면 버리지 말아라 내 남편이, 아내가, 예수를 안 믿어도 버리지 말라.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그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 달라 그 얘기죠.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이, 불신자인 아내가, 이혼을 하자고 주도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성경의 대답이 허용 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허용 될수 있다. 1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믿지 아니 하는 자가 행동의 주체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이혼하자 라고 나왔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너무 구속 받을 것은 없다. 녜,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울은 또 한가지 말을 첨부 했습니다. 뭐라구요?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다. 할 수 있으면 다시 화평을 추구하라. 그러나 허용은 될 수가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될 수가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주도해서 이혼이 이루어 졌다면 그것에 관해서 너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혼의 문제에 대한 바올의 대답 이였고 성경의 대답이 였습니다.
자, 세번째 문제,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결혼을 둘러싼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신생활의 문제 입니다. 독신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종류의 독신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이 된 사람도 있고 결혼했다가 독신이 된 사람이 있죠. 이혼을 해서 독신이 된 사람이 있고 남편이나 아내를 사별하므로 독신이 되는 케이스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 독신자가 한국 사회 속에도 점점 많아 지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 가서 미국교회 주일 학교에 가보면 선데이 스쿨 안에 제일 큰 주일학교가 뭐냐 하면 어른도 주일학교에 들어가니까 성인 주일 학교, 제일 큰 주일학교가 싱글 디파트먼트, 그만큼 독신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혼자 살면서 자녀를 키우는 홀부모도, 홀어머니가 특별이 많아지죠. 싱글마더가 아주 많아집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 문제가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대처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미국에서 아주 귀한 자매님 한 분을 만났는데 본인 자신이 남편의 부정으로 이혼을 당하셨어요. 그땐 크리스챤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이혼의 고통 속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주 아름다운 딸이 되셨고, 또 기도 속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소명감을 가지고 이 싱글마더 세미나를 해요. 그래 제가 초청을 했습니다. 11월 말에 오셔요. 이번에 오셔서 한 이틀간 싱글마더 세미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일에 있어서 우리 주변의 분들을 도울려는 노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자!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독신생활의 문제 7장 8절 9절에 나오고, 그 다음 17절부터38절까지가 다 그 내용입니다. 우선 8절 9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그기 잠깐 언급하고 그 다음에 17절부터 시작해서 특별히 25장부터 38절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자, 제가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독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할 수 있으면 그냥 혼자 살아라.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대답이고 할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면 혼자 살아라. 이것이 8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이한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경우가 뭐냐하면 환난의 때 환난의 때를 전제로 하고 있어요. 26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26절, 25절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 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임박한 환난이 뭐냐하면 초대 크리스챤들은 핍박을 받고 있었잖아요, 신앙이 핍박을 받는 시기, 굉장히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 지금도 지구촌에는 모슬렘 나라 같은 데서는 지금 그런 핍박을 받고 있잖아요. 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요? 혼자 사는 것이 좋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이 있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까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이것이 바울의 대답이에요. 할 수 있으면 혼자 살아라. 만약 이런 고통의 시대 혹은 환란의시대속에 가족을 갖다 보면 29부터 31절까지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우리가 견뎌야 할 육신의 고난이 너무 많다 나 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지불해야 할 고통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이런 특수한 상황, 특수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에요.
그 다음에 독신생활의 두번째 교훈은 뭐냐하면 그러나 부르심에 따라서 하라. 부르심에 따라서 하라. 또 부르심이 있는지 점검해보라.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것은 부르심이 있는 사람이에요. 부르심, 독신의 부르심, 독신자로서의 부르심이 있는, 이 17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이 부르심의 문제 컬링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소명이라는 것은 독신자의 부르심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혼자 살아도 괜찮아요. 살만해요. 뭐 그렇게 유혹도 안 받고, 유혹을 잘 견딜 수도 있고 이런 사람은 뭡니까? 은사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그냥 지내라. 그런데 은사도 없이 혼자 지내 보겠다 그래서 많은 유혹을 받고 그것은 합당하지가 않다. 그래서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부르심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런데 결혼하는 것도 부르심 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부르심이라구요.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결혼 안하고 살아도 괜찮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
17절 한번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나는 결혼체질이다. 그러면 결혼하고 나는 뭐에요? 독신 체질이다. 그러면 독신으로 살고, 그렇게 하란 말이죠. 자, 이것이 20절 24절 계속 강조가 되어요. 20절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또 24절도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부르심을 점검해보고 독신자의 부르심이 있다면 그대로 지내라.
그러나 세번째 독신생활에 대한 세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하라.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하라! 네, 이것이 9절에 아주 리얼하게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9절에, 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사람도 있어요. 체질에 따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건 빨리 결혼 하라는 말이죠. 빨리 결혼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라. 이 말입니다. 성경의 표현이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실제적입니까? 아닙니까? 추상적으로 안개같이 얘기 하지는 않아요 성경은 아주 솔직하게 아주 솔직하게 다룹니다. 성경처럼 솔직한 책이 없어요
자, 네번째는 그러나 재혼을 할려면 주 안에서 하라. 재혼을 할려면 주 안에서 하라. 39절, 또 독신자로서 처음 결혼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고, 또 결혼했다가 독신이 되어 다시 재혼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주안에서 하라. 39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뭐에요?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을 갈 것이나, 남편 죽으면 나는 자유다! 자유다, 그러나 그러나 뭐냐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또 재혼을 고려할 케이스 속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혼한 사람이 다시 재혼했다가 그 결혼이 깨어지는 확률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거의 70%이상 80%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준비없이 하면 안돼요. 재혼도 준비없이 하면 안돼요. 그래서 이런 방면에도 저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마지막으로 독신생활에 대한 마지막 결론, 뭐냐하면 주를 섬기기 위한 동기로 결단하라. 재혼을 하든지, 아니면 혼자 계속 남을 거냐를 결단하든지,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동기가 뭐냐하면 자기 안에서 범죄의 가능성을 줄이고 그대신 뭐에요? 자기의 삶의 에너지, 행복의 에너지를 가지고 뭐에요? 주님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3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결론입니다. 주를 섬기게 하려함이라. 어떤 사람은 결혼해서 잘 섬길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죠. 어떤 사람은 내가 독신으로 있는 것이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 그러면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뭐에요? 주님을 섬긴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더 잘 섬길 수가 있느냐,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결론을 맺습니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정말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섬기며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혼 문제에 대해서 저는 교회가 언제나 두 가지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혼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두 가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한가지 역할은 뭐냐하면 예언자적 역할이에요. 예언자적 역할, 그것은 이혼을 예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혼에 대한 가르침, 또 결혼에 대한 가르침, 성경적 결혼관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쳐서 교인들이 이혼하지 않도록 돕는 것, 이것이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입니다. 이혼을 예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사장적 역할이 중요해요. 제사장적 역할, 제사장은 뭐냐하면 고통을 담당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는 일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미 이혼한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될까요? 치유자 역할을 해야 돼요. 그것이 제사장적 역할이예요. 치유자 역할,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이혼한 사람을 막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혼한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이런 사람에게 아픔을, 상처를 가중시키지 말고, 상처를 치유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저는 진정한 참된 건강한 교회의 이미지는 이두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이혼을 예방 해야 되고 이미 이혼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요? 다시 상처를 싸매고 재기 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돕는 역할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운데 주께서 이혼을 예방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가정을 견고하게 해주시기를 기도 하십시다. 그러나 우리주변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싸매어주고 그들을 세워주도록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 고통의 시대,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 때에 가면은 이혼이 훨씬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추세에요. 하나님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게 될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또한 우리가정도 지켜주셔서 하나님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가정, 우리부부, 우리자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같이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귀하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주께서 사랑하는 귀한 종들을 세워주시고 저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복음의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져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거룩한 권능으로 함께 하시사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앞에 나와 귀한 말씀을 통해서 삶을 사는 지혜, 아주 명쾌하고 실제적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 오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염려해 주시고, 걱정해주시고, 또 삶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지요. 오늘 이 말씀을 잘 붙들고 주의 말씀을 따라 우리 가정을 지키고, 또 상처 받은 이웃들을 치유하고,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지는 우리 가정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가 늘 말씀가운데 살아 갈수 있다는 것이 어찌 그리 특권인지요.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그리고 내 길에 빛이십니다. 정말 이 말씀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말씀 안에 우리의 지혜가 있고, 말씀 안에 우리의 길이 있음을 언제나 발견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시 우리를 보내시는 삶의 장으로 나아갑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주님을 경배하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마음의 헌금을 주앞에 드리고 이제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모든 주의 자녀들의 발걸음 마다 성령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승리케 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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