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리하는 시온산 교회(구원, 계 14:1~5) 1) 어린양이 주도하는 교회이다. 2) 성도만의 교회이다(14만 4천 인). (1)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다고 하였다. (2) 14만 4천 인은 구원의 표적이 있는 자들이다.
(3) 새 노래를 부르는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14장 2~3절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하였다. ① 새 노래란 무엇인가? ‘새롭다’란 ‘카이노스’(kaino,j)인데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새 노래’란 세상의 노래와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차원 있는 노래이다. 그것은 곧, 해방의 노래이다. 승리의 노래, 구원의 노래이다. 성도들은 지상에서도 이런 노래를 부르며 살아간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에나, 사사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나, 다윗이 격전에서 승리를 얻었을 때 구원의 함성을 토하였다. 신약 시대의 사도들도 교회사 중에 진리 운동에서의 승리가 왔을 때 개가를 불러 영광을 주님께 돌렸다. 이런 경우의 노래는 모두 구원의 노래, 해방의 노래, 부활의 노래, 생명의 노래인 것이다. 즉 구원의 개가였다. 그러므로 ‘새 노래’란 구원의 찬가를 뜻한다. ‘새 노래’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임금을 찬양하는 것이다.
② 어디서 불렀던가?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는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라고 하였다. 이곳은 바로 천국이다. 새 노래는 본질적으로 전투하는 지상 교회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아니다. 새 노래는 영광의 왕도(王都)에서 불려지는 노래이다. 성결의 보좌, 영광의 보좌 앞에서 부르는 환희의 노래이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곡조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영물들 앞에서, 어린양 예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③ 새 노래의 음색은 어떠했던가? 요한계시록 14장 2절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소리 같더라」고 하였다. ‘많은 물소리와 뇌성’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소리이다. ‘거문고 소리’는 부드러움과 고고함을 나타내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새 노래의 음색은 장엄과 부드러움, 웅장함과 사랑스러움이 조화된 노래이다. 참으로 놀라운 조화의 노래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조화된 노래이다.
④ 새 노래의 주제는 무엇인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영광된 송가의 주제이고, 성경에 나타난 모든 찬양들의 주제이다. 흔들 수 없는 영광의 보좌에 어린양이 서 있다고 하였다(계 14:1). 그와 함께 14만 4천 인이 들어섰는데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말할 나위 없이 어린양의 구속의 은총인 것이다. 저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 7:10)라고 그 노래의 주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새 노래는 이 세상 노래와 다르다. 그것은 유행가도, 민요도, 타령도, 수심가도, 자장가도, 군가도, 애국가도 아니다. 그것은 시대 따라, 사조 따라, 철 따라, 때 따라 변하는 무상의 지상 노래가 아니다. 새 노래는 영원한 노래이다. 아가페의 노래이다. 왜냐하면 노래의 주제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그의 구원이 영원하다. 그의 축복이 영원하다. 그의 사랑이 영원하다. 그의 나라가 영원하다. 그의 백성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이 새 노래이다.
⑤ 새 노래를 누가 부르는가?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하였다. 그것은 성도만의 노래이다. 구원받은 신자들에게만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승리의 개선가는 격전지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사람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14만 4천 인은 구원받은 신자의 총수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승전가를 높이 부르며 입성하는 세계이다. ⑥ 새 노래의 성격은 어떠했던가? 이 새 노래는 아가페 노래이다. 그것은 가족애나 우애나 성(性)적 낭만을 즐기는 에로스적인 노래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없어지고야 말 세상 노래요, 이방인의 노래요, 허무와 허상의 노래이다. 그러나 이 새 노래는 쉬지 않고 부르는 노래요 영광의 노래인데, 어린양 예수의 구속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노래이다. 스펄전(Spurgeon)은 ‘우리는 대양과 같은 슬픔에서 물 한 방울만한 기쁨을 가진다. 그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크로스비(F. J. Crosby) 여사는 맹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녀는 무려 600수 이상이나 되는 많은 찬송시를 지었다. 그녀는 고백하기를 ‘나는 남들이 모르는 축복을 홀로 누렸다.’고 하였다. 어떤 곤경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감사할 수 있는 찬양을 가진 자는 실로 복이 있는 자이다. 14만 4천 인에게는 이렇게 새 노래가 있다. 하늘의 노래, 영원한 노래, 생명의 노래가 있다. ‘노래’란 인격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성 발로의 표현 중에 최고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 중의 하나이다. 요는 어떤 감성을 발로시키느냐가 문제이다. 기독신자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발로시키는 새 노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래의 노래요, 혼의 노래이다. 이 새 노래를 가지고 부르는 자마다 14만 4천 인의 대열에 참예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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