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리하는 시온산 교회(구원, 계 14:1~5) 1) 어린양이 주도하는 교회이다. 2) 성도만의 교회이다(14만 4천 인). (1)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다고 하였다. (2) 14만 4천 인은 구원의 표적이 있는 자들이다. (3) 새 노래를 부르는 교회이다.
(4) 정절이 있는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여기 ‘여자로’라고 할 때 ‘귀나이콘’(gunaikw/n)은 ‘여자들’인데 세상이나 세상 안에 있는 잡다한 것들을 뜻함이다. 특히 우상과 우상 숭배를 가리켜서 사용한 말이다. ‘정절’ 곧 ‘팔데노스’(parqe,noj)는 ‘처녀성’을 뜻함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신앙의 정절을 나타냄이 분명하다. 어떤 신앙 생명의 순결을 의미하고 있는가?
① 그것은 도덕적 순결이다. 그것은 성(性) 생활의 순결을 의미한다. 순리를 따라 부부 생활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17).
② 영적인 신앙 절개를 의미하였다. 이 ‘세상’의 별칭은 ‘여자’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을 ‘큰 음녀’라고 표현하였다(계 17:1). 이 세상 ‘큰 성 바벨론’을 ‘여자’라고 하였다(계 18:7).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고 있다(요일 2:16). 이것이 이 세상의 영적 특성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여자(세상)와 더불어 짝하는 것을 간음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약 4:4).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이러한 여자로 더불어 자기의 신앙 생명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신앙 생명의 정절을 유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정절의 단체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라고 하였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왕 아합은 여자 이세벨로 더불어 자기와 자기 백성의 영·육을 더럽히고 말았다. 그 결과 그와 그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진노를 받았다. 그는 영적으로 바알과 간음하였다. 그래서 그와 그 시대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 결과 흉년의 천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바알과 입 맞추지 아니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정결한 교회가 있었다(왕상 19:18). 이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소망이요, 빛이요, 등불이었다. 또한 옛날 이스라엘은 모압 왕 발락이 썼던 미인계에 빠진 일이 있다. 모압 왕 발락은 모압 여자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맛있는 우상 제물을 가지고 굶주린 이스라엘 군대를 유혹하였다(민 25:1).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고전 10:8). 이제 큰 붉은 용인 사단은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교회들에게 미인계를 쓰고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큰 음녀인데, 그 이마에 「바벨론」(계 17:5)이라고 쓴 이름이 있다. 그 여자는 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큰 붉은 용인 짐승을 타고 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빛나는 물건과 그의 음행의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진 금잔을 들고 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들과 권세자들과 백성들이 이 음녀에게 끌려오도록 행사한다. 그 결과 음녀가 제공하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게 된다(계 17:1~5).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인 생명책에 녹명된 하나님의 참된 교회(성도)들은 이러한 붉은 용의 유혹에 자기의 신앙 생명을 더럽히지 않고 정절을 파수한다. 존 번연(J. Bunyan)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진충(眞忠)이란 자가 나타난다. 그는 가난산 밑에서 노아담을 만났다. 그 노아담이란 자는 자기에게 호색과 탐재, 고명이란 세 딸이 있는데, 마침 지금 그 사윗감을 구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 노아담은 진충에게 말하기를 진충이 와서 맘대로 고르라고 하였다. 진충은 처음에는 따라 가려 했으나 곧 「옛 사람를 벗어버리고」(엡 4:22) 하는 성경의 진리가 생각이 나서 그 유혹을 물리치고 그 자리를 뜨고야 말았다. 그 노아담의 딸 삼 형제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상징하였다. 이것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요일 2:16). 우리는 진충처럼 항상 성경 계시의 빛에서 힘을 얻고 이 세상이란 여자를 떠나야 한다. 옛날 삼손은 호색이란 자에게 유혹을 받아 그 신앙의 위력이 약해져 버린 일이 있었다. 발람 선지자와 가룟 유다는 탐재(재리)의 유혹을 받아 멸망의 길로 가 버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고명(이생의 자랑)에게 유혹을 당하여 하나님의 천벌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이 모든 세상이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이기고 만다(요일 5:4).
③ 신앙의 절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섬기지 않음에서 나타난다. 히브리 세 소년들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우상 제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뜻을 정함으로 저들의 신앙 절개를 나타냈다(단 1:8). 그 결과 하나님은 저들에게 승리를 주었다. 또한 저들은 느부갓네살의 황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신앙 절개를 나타냈다(단 3:16~17). 그 결과로 저들은 역시 죽음에서 승리하였다. ⓑ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기도에서 나타난다. 다니엘은 다른 신에게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진다는 악법에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였다(단 6:10). 그 결과 죽음에서 승리하였다. ⓒ 육정을 초월함에서 그 절개성은 나타난다. 저들은 집이나 전토를, 형제나 부모를, 고향이나 본토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버렸다(마 10:36~39). ⓓ 예수의 계명과 증거를 가짐에서 나타난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짐승의 우상을 섬기지 않음은 저들의 신앙 정절의 표시이다(계 12:17, 14:12). ⓔ 죽음조차도 불사하는 충성에서 나타난다. 온갖 고난과 시험과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죽도록 그를 사랑하고 충성한 데서 저들의 신앙 절개가 나타났다(계 2:10).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자들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만을 즐김에서 나타난다. 14만 4천 인의 삶의 모토(Motto)는 금세와 내세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것은 구원의 은총이다. 구원 은총에 보은함이 저들 생존의 의의요, 목적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세상에 살 동안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로 자부하였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소유일 뿐이라고 자증하였다(롬 14:7~8). 저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바로 저주라고 생각하였다(고전 16:22). 결코 저들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주(主)가 없었다. 저들은 주님의 사랑의 강권을 받아 움직였다. 다시 얻은 생명의 은총으로 결코 사단과 죄와 타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신앙 정절, 곧 절개였다. 이것을 저들은 자랑으로 여기고 행복의 극치로 만족하였다. 참으로 이러한 신앙 절개가 그립고 필요한 시대를 맞이하였다. 오늘 교회의 세속화 내지는 물질화가, 영적으로 육체주의와 배금주의에 타협함이 되었다.
(5) 목자 제일주의의 교회였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 중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라고 하였다. ‘어린양’은 죽임을 당하신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른다’함은 ‘아콜루데오’(avkolouqe,w)인데 곧 제자가 됨을 뜻함이다. ‘인도’함은 감동력 있는 유도, 혹은 선도, 이끌어 감을 뜻함이다. 우리 본문은 주와 교회 사이를 목양(牧羊)의 관계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이시다. 선한 목자이시다. 교회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어린양이다.
① 선한 목자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 그는 양의 문이시다. 양에게 생명의 문이 된다(요 10:7, 9). ‘나는 양의 문이다. 나만이 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문이다. 구원의 문이다. 꼴을 얻는 생명의 문이다.’라고 하였다. ⓑ 그는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이다. 양에게 그의 음성을 알려 주는 목자이다. 인격적 목자이다.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있는 목자이다(요 10:3). 여기의 ‘부름’은 구체적인 사랑의 부름을 의미한다. 주님은 바로 구원에로의 초청을 하시는 목자이시다. ⓒ 그는 인도하는 목자이다(요 10:3).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고 하였다. 영광과 축복의 동산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안전한 영생 포구로 인도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신다(시 23편). ⓓ 그는 앞서 가는 목자이다(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하였다. ⓔ 그는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는 목자이다(요 10:10, 27, 28).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였다. 그 생명은 영생이다. ⓕ 그는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요 10:11, 15). 그는 선한 목자시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였다. 스스로 자진하여 취하시는 희생의 목자시다(요 10:15). ⓖ 그는 한 우리의 목자가 된다고 하였다(요 10:16). 그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도 인도하신다고 하였다. 저희도 예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한다고 하였다. ⓗ 그는 자기 양을 잘 알고 있는 목자이다(요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안다고 하였다. 여기 ‘앎’은 사랑의 앎, 내용적이고 구체적인 앎이다. 본질적인 앎, 영원한 앎을 뜻함이다. ⓘ 그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 목자라고 하였다(요 10:16~17). 그는 아버지께서 그를 아시고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얻기 위하여 잃는 삶을 치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 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그는 권세 있는 목자이다(요 10:18). 그의 권세는 자진하여 취하시는 권세였다. 자기 목숨을 자기 양들을 위하여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였다. 곧 십자가의 죽음(死)과 부활(活)의 권세를 뜻함이다. 그에게는 죽음(死)과 삶(活)의 권세가 있다. ⓚ 그는 궁극적인 안전 보장의 목자이다(요 10:28). 결코 자기 양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신다. 하나도 잃지 않고 지키신다(눅 15:3~7). 하나도 잃지 않고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도록(요일 5:18),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보장하신다. ⓛ 그는 영생, 곧 구원의 목자이다(요 10:10, 28). 그는 양들의 생명, 곧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 그가 베푸신 구원은 영생이다. 그것은 양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요, 은혜이다. ⓜ 그는 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목자이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하였다. 또 10장 3절에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였다. 27절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였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며」(계 14:4)라고 하였다.
② 또한 악한 목자를 따르지 아니한다는 의미이다.
악한 목자는, ⓐ 타인들이다(요 10:5, 27, 딤후 2:19, 요 10:3, 4, 5). ⓑ 절도며 강도들이다(요 10:1, 8, 10). ⓒ 삯꾼이다(요 10:12, 13). ⓓ 노략질하는 이리들이다(요 10:12). 주님의 양들은 결코 이런 악한 목자들을 따르지 아니한다. 여기 악한 목자는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그를 추종하는 어용 종교지도자를 뜻한다. 곧 거짓 선지자와 666을 받은 무리들이요, 음녀 바벨론이다. 주님의 양들은 이들의 음성을 듣고 자기 주인이 아님을 알며,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망친다. 진리의 음성을 분별하는 양들이기 때문이다(딤후 2:15). ③ 주님의 양으로 따름을 의미한다.
ⓐ 십사만 사천 인, 즉 주님의 양은 예수의 양이다(요 10:14, 26, 27). 주님은 계속해서 내 양이라고 반복하였다. 자기 양이라고 하였다.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다.
ⓑ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하였다(요 10:27, 3, 8, 16). 바로 계시의 음성, 구원의 음성, 생명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하였다. 이 음성은 진리의 음성이요, 복된 음성이다. 이 음성을 알아듣는 양의 귀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 주님의 양은 주님만을 따른다고 하였다(요 10:4, 5, 27, 계 14:4). 주님의 양은 주님만 알고, 주님 음성만 알아듣고, 주님만 따른다. 타인이나, 삯꾼이나, 이리나, 절도나, 강도 등 다른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한다.
ⓓ 주님의 양은 주님의 사랑만을 안다고 하였다(요 10:4, 14, 27). 주님의 양은 주님이 문이심을 알고, 모습도 알고 ,음성도 알며, 인도함을 안다. 영지 작용이 참으로 밝은 양들이다.
ⓔ 주님의 양은 반드시 문으로만 출입한다(요 10:1, 9). 그 문은 유일한 문이요, 좁은 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요, 꼴과 생명을 얻는 문이다.
ⓕ 주님의 양은 목자의 꼴만 먹는다(요 10:9~10). 그 꼴은 주님의 생명, 곧 십자가 대속의 생명이다. 그것은 그의 음성, 곧 계시의 음성인 신구약 66권이 바로 진리의 꼴이다.
ⓖ 주님의 양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고야 마는 자들이다(요 10:28). 주님의 양 중에는 구원받지 못할 양이 하나도 없다. 주님의 양이 받은 구원 생명, 곧 영생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고 하였다.
④ 죽기까지 따름을 의미한다. 저들은 이미 예수의 제자로서 따른다. 그 따름은 생명적 관계의 따름이다. 저들은 자기를 부인한다. 직위나, 전토나, 부모나, 형제나, 고향이나, 친구나, 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아니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막 8:34, 마 10:34~39). 사데 교회 중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주와 함께 다니는 자가 있었다(계 3:4). 서머나 교회에는 죽도록 충성한 자들이 있었다(계 2:8~10). 두아디라 교회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계 2:25).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계 3:8, 10). 이런 자들이 14만 4천 인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그야말로 목자 제일주의의 걸음이었다. 예수 제일주의의 삶이었다. 시작도 목자 예수, 진행도 목자 예수, 마침도 목자 예수의 걸음이었다. 순경 중에도 목자 예수, 역경 중에도 목자 예수였다. 금세에도 목자 예수, 내세에도 목자 예수였던 삶이었다.
(6) 제물로서 바쳐진 교회였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은 또 말하기를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하였다. 저들이 ‘구속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는 값을 지불한 후 사낸 것을 의미한다(계 5:9). 그 값은 어린양 예수의 피였다. 그 구속은 특별한 구속이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엄선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맏물을 뜻함이다. 수확에 있어서 제일 처음 것, 제일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제물을 의미하였다.
① 첫 열매가 누구인가? 많은 사람 중에서 구속받은 14만 4천 인을 의미한다. 저들은 특별한 선택의 영광을 입었던 자들이다.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행복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첫 열매란 구속받은 자의 총칭이다.
② 어떻게 첫 열매가 되었는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구속을 받은 결과이다. 속전의 값을 지불하고 사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③ 누구의 소유인가? 영원히, 또 영원히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저들은 주님 앞에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들이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한다.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다」(사 49:15)고 한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요 13:1)고 한다.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습 3:17)고 한다. 「나는 너를 잠잠히 사랑하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한다」(습 3:17)고 한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8절에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14만 4천 인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영광의 존재들이다. 축복의 존재들이다. 적어도 저들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제물로서의 존귀를 갖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7) 순결한 교회였다.
요한계시록 14장 5절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하였다.
① 신앙고백의 순결이다(바른 신앙). 우리 본문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라고 하였다. 이는 말의 정결, 곧 언어의 순결 혹은 진실을 뜻함이다. 언어는 신앙고백 기구이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그 입에 거짓말이 없다고 함은 마음으로 믿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바르게 고백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것이 거짓말인가?
ⓐ 언행의 모순이 거짓말이다. 요한일서 1장 6절에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듦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쟁이가 된다고 하였다(요일 1:6~10). 말과 행위가 같지 않음이 거짓말이요, 언행일치가 참이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하였다. 이 거짓말은 죄에 이른다. 이것은 지옥 가는 죄목 중의 하나이다(계 21:8). 본질적인 거짓말이요, 근원적인 거짓말이다. 존재 자체와 구원 자체를 부인하는 거짓말이다. ⓒ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거짓말이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형제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지 않거나 나타내지 않음을 뜻한다. 거짓말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 중의 하나이다(잠 6:16~19). 거짓말은 의인들의 미워하는 것이다(잠 13:5).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낫다고 하였다(잠 19:22). 이러한 거짓말은 마귀의 특성이요, 본성이다(요 8:4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한다. 그것이 곧, 신앙고백의 순결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는 입술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야말로 기독교 신자들의 제일차적인 생명의 요건이다. 이것은 마치 여인이 그 정조를 생명처럼 여김과 같은 것이다. 14만 4천 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바른 신앙고백의 정절 때문에 생명까지도 초개와 같이 던지지 않았던가? 거짓 선지자의 입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계 16:13).
② 행위의 순결이다(바른 윤리). 우리 본문에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행동 강령의 순결, 곧 논리적인 순결을 뜻함이다. 여기 ‘흠이 없는’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모모스(a;mwmoj)인데 특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들에 대해서 쓰는 말이다. 구약의 제물은 흠이나 점이 없는 정결한 것이어야 하였다. 기독신자의 윤리적인 순결은 거룩하신 주님의 요구였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5장 26~27절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신앙과 행위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곧 순결한 교회이다. 신앙이 정통이면 행위(생활)도 정통이어야 한다. 신앙의 정통성만 내세우고 생활의 순결이 따르지 않을 때, 그것은 위선이요, 살았으나 죽은 정통이다. 신앙의 정통은 무시하고 윤리적인 정결만 앞세움은 이행득구주의이다. 그것은 자유주의 사상이요, 이방 도덕 철학의 주장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구원과 행위, 곧 신앙과 생활은 언제든지 일치해야 함이 주님의 교훈이요, 요구이다. 아니 그것이 14만 4천 인의 교회, 시온산 교회의 특색이다. 언제든지 바른 신앙고백(입술)에는 바른 생활들이 따라온다(흠이 없음). 그것이 지상 전투 교회에서의 성화 과정이 아닌가? 믿음과 행위! 그 입에 거짓이 없고, 그 행위에 흠이 없는 교회! 실로 아름답고 영화로운 이상 교회이다. 그것은 지상 전투 교회의 비전(Vision)이요, 또한 현실적인 과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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