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계시록 14장에 기독 신자에게 최후 승리가 있다는 진리는 전투하는 지상 교회에 신·망·애를 불러일으킨다.
1) 14만 4천 인은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된 구원 받은 자의 상징적 총수이다(계 14:1~5). 저들은 성부·성자·성령의 인을 받고 있다.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지 않는가? 저들은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절이 있다. 목자 제일주의로 살았다. 처음 익은 열매였다. 진실한 자들이었고, 순결한 자들이었다.
2) 성도를 위하여 영원한 복음의 천사가 날아갔다(계 14:6~7). 공중으로 선도하여 날아가는 첫 번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 천사였다. 그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믿으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신자를 위한 전투 교회에서의 3대 생활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살아야 될 자들이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세계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나르는 천사가 아닌가?
3) 성도들의 인내 비결이 있다고 하였다(계 14:12)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 파수에 있다. 이것이 바로 최후까지 살아남는 승리의 비결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마 24:13).
4) 성도들의 죽음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계 14:12) 성령께서는 저들의 삶이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저들은 자금 이후로 주를 높이다가 죽었다. 저들의 최후에는 전투가 끝난 후 안식이 주어지고, 무한한 보상의 축복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5) 성도는 성자 예수에게 직접 영접을 받는다고 하였다(계 14:14~16). 성도의 최후를 곡식 추수에 비유하였다.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이 곡식을 추수하신다고 하였다. 그 얼마나 큰 영광인가?
2.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악인들의 최후 멸망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1) 큰 성 바벨론의 종말이 있다고 하였다. 큰 성 바벨론은 사단 운동의 센터였다. 그것은 음행의 술에 만취되었던 연락의 도시였다. 세상 왕국의 운명적인 종말의 한 날이 결국 오고야마는 것은 하늘의 정한 법칙이다(전 3:1~9). 이는 우주적 종말의 한 날을 예고하는 진리이다.
2) 짐승의 표, 666을 받은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서 세세토록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다(계 14:19~11). 이 사람들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이다. 저들은 이마에나 손에 짐승의 표, 666을 받은 자들이다. 바로 그 표는 불신자의 표요, 멸망의 표이다. 저들은 최후의 날에 진노의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영원한 고난(영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릴 행복의 은총이 얼마나 지고한 것인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저들의 최후 심판은 성 밖으로 던져짐을 당하는 것이다(계 14:17 ~20). 저들은 익은 포도송이가 발에 밟혀 터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서 밟히고 터진다. 저들은 성 밖으로 내던짐을 당하게 되어 피의 호수를 이룬다. 필연적인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진행되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 최후 심판이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14장은 기독신자의 최후 승리와 불신자의 최후 멸망, 곧 영생과 영벌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진리로, 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있다.
3. 종말은 양극 시대임을 명심해야 한다(계 14:14~20).
성도는 곡식으로, 불신자는 포도송이로 비유하였다. 곡식이 익어 추수한다고 하였다(계 14:15). 포도송이가 익어 추수한다고 하였다(계14:18). 종말에 접근할수록 선과 악은, 영과 육은, 신앙과 불신앙은 함께 익어 가고 있다. 극에서 극으로 상반하여 달리고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하였다. 양극 시대의 극대화는 최후 심판의 확실한 증거이다. 영과 육의 대결이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절대적이다. 여기엔 양보나 타협이나 화합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의 절대성이다(롬 8:1~3, 갈 5:16~17).
4. 종말의 필연성을 계시하는 천적(天的) 계시이다(계 14:1~20).
개인에게도 종말이 있다(개인적 종말). 전 세계에도 종말이 있다(우주적 종말). 종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다. 종말은 피조 세계의 유한을 알려주는 진리이다. 종말은 신적 필연성에 기초한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종말이다. 결코 인류는 하나님이 집행하시는 종말의 날을 지연하거나,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말의 사건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이 종말은 예고된 종말이다. 계시된 종말이다. 공개적인 종말이다. 그것은 심판을 수반하는 종말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갈라 세우는 종말이다. 영생과 영벌의 세계를 도래시키는 종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류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펼쳐지는 종말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입어야 한다.
5.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 일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 중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주를 높이다가 죽은 성도의 기록적인 최후에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다. 전도서 12장 14절에 이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그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하였다. 신자의 선행은 결코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 또한 신자의 선행이 보상을 목적으로 행해질 수도 없다. 신자들의 선행은 오직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순전한 보은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보은 행위에 무상한 축복의 상을 약속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신행일치의 삶을 누리려고 애를 쓴다.
6. 영물(천사)들의 수종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타나는 최후 심판의 장관 앞에 천사들의 활동은 실로 대단하고 중대하다.
1) 복음 천사가 있다(계 14:6).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하였다.
2) 바벨론 천사가 있다(계 14:8). 그는 큰 성 바벨론의 운명적인 종말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결코 복음 천사를 앞지르지 못하였다. 언제든지 복음 운동은 역사에 선행한다. 그는 666을 받은 자, 곧 짐승의 표를 받은 개인, 개인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실 날이 오고 있다고 전달하는 천사였다.
3) 곡식 추수의 천사가 있다(계 14:15). 그의 출처는 성전이었다. 그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곡식 추수(성도 추수)의 명을 받아 성자 예수에게 알려주는 사명을 받은 천사였다.
4) 포도 추수 천사가 있다(계 14:18). 그의 출처도 성전이다. 그는 이한 낫을 직접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포도송이(불신자) 추수꾼으로 하나님의 명을 받고 대행하는 천사였다(계 14:19).
5)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다(계 14:18). 그의 출처는 제단이다. 그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로 성전으로부터 앞서 나와, 이한 낫을 들고 있는 천사에게 포도송이 추수를 시행하라는 전달을 하였다. 이렇듯 영계에는 영물들이 실존한다. 저들은 구원받을 후사들을 섬기기 위하여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자의로 움직이지 않고 항상 성전이나 제단이나 보좌로부터 명을 받고 움직이는 실존들이다.
7. 사도 요한의 영지(靈知) 작용은 곧, 오늘의 교회가 받아야 될 은총이다.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서 그는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내가 보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3장 11절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라고 했다. 그는 두 짐승의 정체를 보고 저가 하는 말을 듣고, 그 행사를 볼 수 있었다. 그는 666의 수를 알았다(계 13:18).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라고 하였다. 그는 천계에 서 있는 주님과 성도들을 보았다. 그는 요한계시록 14장 2절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라고 하였다. 그는 천계의 노래를 들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 8~9절에 세 천사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고, 저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그는 성도의 최후를 기록하라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와, 성령이 화답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4장 14절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예수를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추수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다(계 14:16). 또한 이한 낫을 가진 천사와 불을 다스리는 천사들의 음성과 활동을 보고 들었다. 밧모섬의 요한은 오묘하고 신비한 영계의 지식으로 충만하였다. 결코 적막과 고독과 우수만으로 덮여져 버린 정배지 밧모섬은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그 곳에서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듣고 말하고, 또 기록하고 있지 않았는가? 오늘 전투 마당에 있는 지상 교회는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늘의 광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보고들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증인의 생리이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바로 공개 완성된 기록 계시, 신구약 66권에서 이 사실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광경을 보고, 하늘의 광경을 즐기고, 바로 그 사실을 황급히 말해야 한다. 바로 그런 사람, 그런 교회가, 고도의 영지 작용을 보유한 은총을 입은 자요, 교회가 아니겠는가? 기록된 계시(성경)는 말세를 만난 우리를 위하여 기록되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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