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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3: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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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813 |
2007.01.07.
예루살렘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그런 공동체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는지, 그걸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는지는 우리가 지금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님의 생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여기서 사도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실천이 오늘 교회의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연루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초기 기독교 안에 두 가지 큰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물론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즉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들이 지도자로 활동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를 할 때 짚은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생 살았던 유대교의 한 지파로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처했으며, 가능한 유대교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7,18)
이에 반해 이방인 공동체는 율법과의 단절을 시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이 보도하고 있는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벗겨주었습니다. 율법 문제로 인해서 이방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계속적으로 트집을 잡혔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방인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과의 병행이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역사에 살아남은 교회의 뿌리입니다. 그 당시에 주류로 자처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역사에 살아남은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자는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역사적 기독교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오늘과 같은 교회의 모습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과 직접 생활했던 사도들의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예수님을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대신 다마스쿠스 도상에서의 환상으로만 예수님을 경험했던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쓴 편지인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매우 중요한 신앙과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처인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그리스에 복음을 전한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려서 말씀을 전하다가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큰 저항을 받은 곳입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도들을 불러 고별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행 19,20장 참조) 현재 터키의 서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지역적으로 유럽과 이스라엘 중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유럽도 아니고 중동도 아닌 곳에 자리한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이 편지에서 유독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하는 공동체야말로 바울이 꿈꾸던 교회의 참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바울의 신앙이며, 신학이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바울은 평생 이 일에 매진했으며, 그 열매가 곧 오늘의 교회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는 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습니다.
우선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은 헬라어 ‘무스테리온’을 가리킵니다. 영어로 ‘미스터리’라고 하는 그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끌어가는 단어는 바로 이것 무스테리온입니다. 개역성서는 비밀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심오한 계획이라고 번역했고, 마틴 루터는 ‘게하임니스’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비슷한 뜻입니다. 은폐되어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이런 단어를 들으면 조금 당황하실 겁니다. 바울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전수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그는 특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가 깨달았다는 말은 점쟁이들이 점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바둑에서 남이 모르는 깊은 수를 발견하는 사건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수는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비밀이지요. 그러나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바울은 무엇을 하나님의 무스테리온, 즉 비밀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비밀은 곧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획하신 일이 바로 그 비밀입니다. 그 내용은 6절입니다.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신비로운 비밀을 기대했던 분들은 바울의 이런 진술 앞에서 실망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늘 듣던 이야기입니다. 시시하게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천기누설에 해당됩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것,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그는 지금 말하는 중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감 있게 이해하라고,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인과 기독교인이 모두 한 몸의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로 바꿔놓고 들어보세요. 오늘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배타적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모두 사탄의 자녀들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당에 타종교인도, 또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과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누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 종교다원주의가 옳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그 당시에는 아주 혁명적인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턱대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지난밤 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일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복음’입니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라는 바울의 진술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은 곧 율법과 대척점에 놓인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걸 근본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이미 우리가 햇빛과 공기 안에서 살아가듯이 하나님은 생명을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셨고, 궁극적으로 완성될 그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업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우리에게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적인, 도덕적인 의로움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매사에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으로 믿고 평생 동안 십일조 헌금을 꼬박꼬박 드린 사람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평생 동안 반공주의에 물들어 살던 사람에게 비록 실패했지만 공산주의도 역시 사람답게 살만한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서로 적대적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지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보았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건 바로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울에게는 보였으니 비밀이 분명합니다. 이런 바울의 신앙 때문에 역사적 교회가 출현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비밀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전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런 일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걸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춰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 주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감춰졌던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이 이제 바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온 세상에 전파된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결국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까지 더 볼까요?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내세워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조금 복잡한 문장을 우리는 위에서 읽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의 비밀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비밀은 감춰졌던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비밀을 전하는 사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의 그 사명이 곧 오늘 교회에 주어진 동일한 사명입니다. 이 교회의 사명을 바울은 묵시문학적인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은 그 당시 제국의 군왕들을 가리킵니다. 황제들은 무소불위한 힘을 갖고 있는 하늘의 세력들과 똑같았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비밀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비밀, 하나님의 지혜를 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알리는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과 그 지혜를 모릅니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과 그 지혜의 간수자들입니다. 간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비밀과 지혜의 간수자이며 증언자로 남을 수 있을까요?
앞서 저는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그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전체 인류가 일치하는 사건을 상징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 인류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걸 추구해야 합니다. 피부색, 성의 차이,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궁극적으로 종교형식의 차이도 없어지는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종교적, 도덕적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걸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산한 온갖 차이와 차별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일입니다. 남북일치, 흑백일치, 노동현장에서의 일치가 필요하겠지요. 더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과의 일치까지 필요하겠지요.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권세자들은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겁니다. 그러나 현실교회는 어떻습니다.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분리 아닌가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사회를 부정하고 타종교를 억누르고 있지 않나요? 자기가 잘났다는 걸 자꾸 확인하려고 들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그런 공동체와, 그런 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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