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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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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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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840 |
2007.01.21.
고린도교회
그리스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처럼 반도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개미의 몸처럼 가운데가 잘록합니다. 북쪽 본토와 남쪽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의 서남단에 고린토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건축양식 중의 하나인 ‘코린티안’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거쳐야 하며, 동쪽 바다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역시 고린도를 거쳐야 합니다. 네로가 이 지협을 뚫는 운하건설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근대로 넘어와 1893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던 고린도는 고대시대에 이미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따르면 바울은 2차 선교여행 후반부에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비교적 크게 사업을 하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따라서 로마를 쫓겨나 이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이 바울과 똑같은 가죽가공업이었던 때문이지 바울은 이들과 쉽게 친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포함해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전도 효과는 상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지만 이방인, 즉 고린도 사람들은 비교적 우호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여러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바울은 3,4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에베소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는 클로에 집안사람들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11) 둘째는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6:17) 셋째는 고린도 교회가 직접 바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한 소식입니다.(고전 7:1)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고린도서를 통해서 그 교회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시민들에게서 영향 받은 부도덕성입니다. 5-8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문란한 성윤리, 교우 사이의 재판, 결혼, 자유인과 노예의 문제, 우상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한 문제 등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파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1장1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당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만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행위자, 신유능력자, 행정가, 방언자 등등이 서로 자기들의 일을 앞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이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끝없는 분열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명제는 이런 점에서 무조건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이외에 다른 편지도 있는데, 그것은 분실되어서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천
바울이 이 분열을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신학적인 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교회론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이런 몸을 가리키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이후에 현실성이 된 영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이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지체라는 뜻입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의 머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서로 연결된 지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대개의 신앙생활은 자기의 종교적 욕구에 묶여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수평적으로 신자들 사이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지만 교회의 일치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수를 면키 어렵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영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배워야합니다.
고전 12:1-11절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은총의 선물”과 “성령”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곧 카리스마를 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 카리스마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사’, 즉 은혜로운 선물을 가리킵니다.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 전체가 자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8,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8절에 의하면 이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 등이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거리와 직무들이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게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만, 성서 헬라어 개념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일과 평범한 직책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카리스마는 성령이 주신다는 말씀이 12:1-11절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바로 위에서 짚은 대로 병을 고치는 능력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가대의 활동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은사, 즉 카리스마이고, 교회청소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의 원천은 곧 성령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기도 하고, 제가 다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느 정도로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대답하기가 망설여지지요? 도대체 성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은 무조건 “아멘” 하고 대답하겠지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솔직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힘이며,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건 곧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그걸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성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 설교의 주제와 연결해서 다시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는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지요. 그것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그 은사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군요.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했다면,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집사람이 주일에 함께 나눌 먹을거리를 준비하는데, 그것도 역시 성령의 선물인 은사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작은 공동체래서 여러 활동들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과 연결됩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과 연결되는 매우 귀중한 기회입니다.
유기적 공동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실제 몸을 비유로 들면서 카리스마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은사의 원천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은사는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은사가 한 성령에서 온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은사는 똑같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착상이며,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목사나 사찰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장로나 주일학교 선생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행위 자체가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15절부터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눈의 역할과 귀의 역할은 다릅니다. 위의 역할과 손의 역할도 다릅니다. 목사의 역할과 성가대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은 동일하게 카리스마일 뿐입니다. 성령에게서 온 카리스마는 비록 기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이나 모두 베토벤이 작곡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소품이니까 수준이 낮고 합창 교향곡은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면, 또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사람에 비해서 합창교향곡을 지휘하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그는 음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카리스마가 동일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교회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누가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자신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카리스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게 참으로 현실교회가 일으켜 세워야 하고, 극복해야 할 카리스마의 영성입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과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할의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약하기 때문에 카리스마의 영성은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공동체 전체가 꾸준하게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 방향은 아주 분명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떤 직책이든지 개인을 높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어떻게 교회공동체가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영인 성령이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문제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깊이 성찰해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더 요긴하게 생각해야 하며,(22절)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24절)
이런 카리스마의 영적인 원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전체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받는 세상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 강요받는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카리스마의 원천인 성령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고 신뢰할 때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런 일을 위한 징표(symbol)로 자리매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린도교회
그리스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처럼 반도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개미의 몸처럼 가운데가 잘록합니다. 북쪽 본토와 남쪽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의 서남단에 고린토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건축양식 중의 하나인 ‘코린티안’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거쳐야 하며, 동쪽 바다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역시 고린도를 거쳐야 합니다. 네로가 이 지협을 뚫는 운하건설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근대로 넘어와 1893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던 고린도는 고대시대에 이미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따르면 바울은 2차 선교여행 후반부에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비교적 크게 사업을 하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따라서 로마를 쫓겨나 이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이 바울과 똑같은 가죽가공업이었던 때문이지 바울은 이들과 쉽게 친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포함해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전도 효과는 상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지만 이방인, 즉 고린도 사람들은 비교적 우호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여러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바울은 3,4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에베소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는 클로에 집안사람들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11) 둘째는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6:17) 셋째는 고린도 교회가 직접 바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한 소식입니다.(고전 7:1)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고린도서를 통해서 그 교회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시민들에게서 영향 받은 부도덕성입니다. 5-8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문란한 성윤리, 교우 사이의 재판, 결혼, 자유인과 노예의 문제, 우상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한 문제 등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파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1장1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당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만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행위자, 신유능력자, 행정가, 방언자 등등이 서로 자기들의 일을 앞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이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끝없는 분열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명제는 이런 점에서 무조건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이외에 다른 편지도 있는데, 그것은 분실되어서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천
바울이 이 분열을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신학적인 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교회론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이런 몸을 가리키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이후에 현실성이 된 영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이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지체라는 뜻입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의 머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서로 연결된 지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대개의 신앙생활은 자기의 종교적 욕구에 묶여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수평적으로 신자들 사이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지만 교회의 일치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수를 면키 어렵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영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배워야합니다.
고전 12:1-11절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은총의 선물”과 “성령”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곧 카리스마를 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 카리스마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사’, 즉 은혜로운 선물을 가리킵니다.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 전체가 자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8,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8절에 의하면 이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 등이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거리와 직무들이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게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만, 성서 헬라어 개념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일과 평범한 직책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카리스마는 성령이 주신다는 말씀이 12:1-11절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바로 위에서 짚은 대로 병을 고치는 능력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가대의 활동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은사, 즉 카리스마이고, 교회청소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의 원천은 곧 성령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기도 하고, 제가 다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느 정도로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대답하기가 망설여지지요? 도대체 성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은 무조건 “아멘” 하고 대답하겠지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솔직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힘이며,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건 곧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그걸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성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 설교의 주제와 연결해서 다시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는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지요. 그것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그 은사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군요.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했다면,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집사람이 주일에 함께 나눌 먹을거리를 준비하는데, 그것도 역시 성령의 선물인 은사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작은 공동체래서 여러 활동들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과 연결됩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과 연결되는 매우 귀중한 기회입니다.
유기적 공동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실제 몸을 비유로 들면서 카리스마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은사의 원천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은사는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은사가 한 성령에서 온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은사는 똑같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착상이며,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목사나 사찰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장로나 주일학교 선생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행위 자체가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15절부터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눈의 역할과 귀의 역할은 다릅니다. 위의 역할과 손의 역할도 다릅니다. 목사의 역할과 성가대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은 동일하게 카리스마일 뿐입니다. 성령에게서 온 카리스마는 비록 기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이나 모두 베토벤이 작곡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소품이니까 수준이 낮고 합창 교향곡은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면, 또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사람에 비해서 합창교향곡을 지휘하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그는 음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카리스마가 동일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교회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누가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자신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카리스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게 참으로 현실교회가 일으켜 세워야 하고, 극복해야 할 카리스마의 영성입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과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할의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약하기 때문에 카리스마의 영성은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공동체 전체가 꾸준하게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 방향은 아주 분명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떤 직책이든지 개인을 높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어떻게 교회공동체가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영인 성령이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문제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깊이 성찰해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더 요긴하게 생각해야 하며,(22절)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24절)
이런 카리스마의 영적인 원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전체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받는 세상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 강요받는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카리스마의 원천인 성령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고 신뢰할 때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런 일을 위한 징표(symbol)로 자리매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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