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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부산일보] 할머니의 차표

신춘문예 정희............... 조회 수 1981 추천 수 0 2010.01.22 08: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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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부산일보 신춘문예-동화] 할머니의 차표  /정희

20091231000013_0.jpg 
"할매, 차표도 없이 차를 타면 우야는교."
기사아저씨가 옆눈질을 하며 소릴 질렀다.
"어허, 참! 표도 없이 우예 차를 타노. 쪼매 기다려 보소."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의자가 있는 뒤 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보따리 하나가 힘겹게 할머니 뒤를 따라갔다.
"같이 앉아 가재이. 뒤에 가면 멀미가 날라 캐사서……."
할머니는 명우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뒤쪽에 빈자리도 많은데 하필 여기 앉을 게 뭐람.
명우는 못마땅한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숨차래이."
할머니는 파마머리를 쓸어 넘기며 명우를 보고 씨익 웃었다.
순간, 파마약 냄새가 확 진동을 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가 엄청 촌스럽단 생각을 하면서 명우는 코를 틀어막았다.
"할매, 아직꺼정 몬 찾았는교?"
기사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뽀글이 할머니를 재촉했다.
"디기도 보채쌌네. 쪼매 기다리라 카이. 쯧."
뽀글이 할머니는 혀까지 차며 기사아저씨를 노려봤다.
"뻐스가 무슨 자가용인지 아나?"
기사아저씨가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퍼뜩 찾아보소."
이번에는 기사아저씨가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를 꽥 질렀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뽀글이 할머니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이고, 참! 기다리라카이. 누가 표 안 주까바 그라는교."
뽀글이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참 희한타. 내가 분명히 여기 넣었는데. 이기 발이 달린나."
뽀글이 할머니는 조끼 주머니를 뒤지며 중얼거렸다. 조끼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와 허연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에이, 참!"
명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뽀글이 할머니는 스웨터 주머니도 털었다. 스웨터 주머니에선 달랑 완두콩 두 알이 나왔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던 뽀글이 할머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번엔 아예 주머니를 뒤집어 털었다.
주머니가 긴 혓바닥을 쑥 내밀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기사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할매요! 표를 사기는 샀능교?"
뽀글이 할머니는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통로로 내려앉아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이기 도대체 어디로 갔으꼬."
뽀글이 할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처음보다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참기름병, 단감, 생밤, 그리고 풋고추가 담긴 올망졸망한 비닐봉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핏 봐도 차표가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뽀글이 할머니는 자꾸 뒤적거렸다.
"이기 어디로 갔노. 도대체 이기 어데로 갔으꼬."
뽀글이 할머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보따리를 다시 묶는 할머니 손이 허둥거렸다.
마디가 굵고 손톱 밑까지 시커먼 손이었다.
접어올린 소매 단도 털어보고 혼자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뽀글이 할머니는 차표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의자 틈새에 떨어진 휴지조각도 펴보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통로랑 의자 밑도 살폈다.
"야 야, 발 좀 치아봐라."
갑자기 뽀글이 할머니가 명우 발을 툭, 치며 말했다.
"에이 참!"
명우는 짜증을 내며 마지못해 두 발을 들어올렸다.
'차라리 저 뒷자리로 가버릴까?'
하지만 선뜻 일어설 수가 없었다. 명우는 두 발을 든 채 애써 참고 있었다.
"참 얄궂다. 분명히 여기 넣었는데……."
뽀글이 할머니가 고개를 숙이자 또 파마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음 정류소에서 버스를 거칠게 세우며 기사아저씨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 정신으로 어댈 댕깁니까? 표를 잊아뿟으면 돈으로 내던가."
기사아저씨가 통로에 삐죽이 나온 할머니 보따리를 발로 툭 걷어차며 말했다.
순간, 명우는 기사아저씨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발로 걷어찬 게 보따리가 아니라 뽀글이 할머니인 것만 같았다.
뽀글이 할머니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명우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기사양반, 차비가 얼만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 한 분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도대체 얼마길래 노인네한테 그래샀능교?"
아저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기사아저씨 얼굴 앞에 내밀었다. 기사아저씨가 멈칫거리며 돈을 받으려는 순간, 뽀글이 할머니가 소리쳤다.
"이보소, 젊은 양반. 놔두소. 내가 표를 분명히 끊었단 말이시더. 고맙지만 됐니더."
뽀글이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단숨에 거절했다.
"할매요, 여지껏 찾아도 없으면 없니더."
아저씨가 말했다. 할머니가 고집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할매가 똥고집은……."
기사아저씨가 툴툴거리며 자기 자리로 갔다. 뒷자리 아저씨도 멋쩍은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명우는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손을 뺐다. 대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닥을 살펴봤다. 목을 길게 빼고 할머니의 발밑도 살폈다. 목이 늘어진 뽀글이 할머니의 빛바랜 분홍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명우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할머니! 혹시 양말 속에 넣지 않았어요?"
뽀글이 할머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이고, 맞데이!"
뽀글이 할머니는 목 늘어진 양말을 쑥 잡아 뺐다. 기다렸다는 듯 종잇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참말로 용타. 니가 이걸 우예 알았노?"
뽀글이 할머니가 차표를 흔들어 보이며 아이처럼 웃어댔다.
"나는 내가 넣고도 잊어 뿌릿는데, 니가 우찌 알았노?"
"옛날에 울 할머니도 그랬거든요."
"그래? 니 할매는 몇 살이고?"
"돌아가셨어요. 작년 겨울에."
"아이구, 그랬나? 요런 착한 손자를 두고……."
착한 손자란 말이 명우 마음에 턱 걸렸다.
"저 착한 손자 아니예요."
명우는 옛날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그날도 엄마한테 가는 길이었다. 엄마가 하는 식당은 할머니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야했다. 갑자기 할머니가 주머니에 차표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찾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준 적도 없는 차표를 찾는다고 명우의 주머니도 막 뒤졌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방도 거꾸로 털어가며 한참을 난리법석을 떨었다. 차표는 어이없게도 할머니 양말 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명우는 씩씩거리며 할머니를 노려봤다. 명우는 화가 나서 할머니를 차에 두고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차표 사건 이후로 버스를 타면 명우는 할머니랑 한자리에 앉기도 싫었다. 할머니가 같이 앉아 가자고 명우를 불러도 못들은 척 하고 일부러 맨 뒷자리에 가서 자는 척 하기도 했다.
'이젠 정말 안 그럴껀데…….'
명우 눈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뽀글이 할머니가 명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의 손길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기사양반, 표 여기 있니더."
다음 정류소에서 뽀글이 할머니는 당당하게 차표를 냈다.
"담부터는 차표 쫌 단디 챙기소."
기사아저씨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표를 받았다.
뽀글이 할머니는 내리기 전에 잘 익은 단감 한 개를 명우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명우는 한 입 단감을 깨물었다. 입안에 단물이 확 퍼졌다.
명우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뽀글이 할머니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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