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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경남신문] 안나푸르나의 아이

신춘문예 엄성미............... 조회 수 1697 추천 수 0 2010.01.22 08: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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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안나푸르나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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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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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빠와 같이 떠났던 한국 원정대가 사흘 만에 돌아왔다. 원정 대원들은 길을 안내하던 아빠와 한국 원정대 대장이 히든크레바스에 떨어졌다고 했다.

실종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는 아무 말도 못했다. 롯지 밖으로 나가 그네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가 살아계실까요?”

엄마는 대답 없이 안나푸르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안나푸르나는 거대한 공룡들을 닮았다. 공룡들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머리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털어낼 것만 같았다. 안나푸르나에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 주변에 잠시 머물렀다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엄마는 마치 겨울나무처럼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나야, 아빠는 살아 계실거야. 아빠를 구하러 가야겠다.”

엄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산악 등반가인 엄마는 구조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경험이 많은 두 명의 셀파 아저씨와 두 명의 한국 원정 대원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아빠와 엄마 대신 롯지를 잘 부탁한다. 지금부터 네가 이 집 주인인 걸 잊지 마라.”

엄마는 떠나기 전에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엄마가 떠난 뒤, 요리 담당인 마야 아줌마를 도와 부엌일을 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아빠가 아끼는 결혼사진 액자를 깨끗이 닦았다. 사진 속에서 아빠와 엄마가 활짝 웃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기뻐하도록 롯지를 잘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내 손을 붙잡고 집 지을 땅으로 데려온 건 일곱 살 때였다.

“안나야,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빠가 발로 땅을 꽝꽝 찼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엄마는 3000m 높이라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거라고 말했다. 원래 살던 곳도 2000m가 넘는 곳이지만, 이곳은 훨씬 더 높은 곳이라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안나야, 아빠가 셀파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이 집을 지었어. 일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 거고, 이층에는 손님을 맞을 거야.”

아빠가 나를 번쩍 안고 이층집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지은 집은 겉모양이 번드레한 것은 아니지만 실내는 아늑했다. 아빠의 소망대로 일층 중앙에는 따뜻한 난로와 손님 맞을 다섯 개의 식탁이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부엌이 있어 요리하기가 편해 보였다. 오른쪽에는 우리 가족이 머물 수 있는 넓은 방이 있었다. 아빠가 직접 만든 부부 침대와 어린이 침대가 보였다.

“우와, 예쁜 이불이다! 분홍 장미가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가 축하 선물로 한국에서 보내주신 거란다.”

나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났다.

“아빠가 침대 모서리마다 귀여운 강아지들을 새겨 두었어. 꿈속에서 악당을 만나면 강아지들이 널 지켜줄 거야.”

“우와, 아빠 최고!”

나는 아빠 볼에 뽀뽀를 했다.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초록 풀들이 얼굴을 뾰족하게 내민 들판 위로 그네의자가 그림처럼 놓여 있었다.

“그네의자에 앉으면 안나푸르나를 볼 수 있단다.”

아빠가 그네의자에 앉아 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안나야, 네 이름은 안나푸르나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안나는 ‘풍요롭다’라는 뜻이거든. 안나푸르나의 풍요로운 샘물처럼 따뜻한 마음씨가 샘솟으라고 아빠가 지은 이름이란다.”

아빠가 안나푸르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빠 생각을 하며 마당으로 나가 그네의자에 앉았다. 아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울지 않았다. 내가 울면 아빠가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였다.

나는 안나푸르나를 향해 소리쳤다.

“아빠와 원정 대장님을 꼭 돌려보내 주세요.”

그때 안나푸르나 쪽에서 산새들이 포르르 날아왔다. 안나푸르나가 새들을 보내 대답하는 것 같았다. 네 아빠는 살아있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벌떡 일어나 새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롯지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 원정 대원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난롯가에 둘러앉았다. 대원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다드렸다.

“고마워요, 꼬마 아가씨.”

원정 대원들 얼굴에 잠시 웃음꽃이 피었다.

“저 애 엄마는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은 몇 안 되는 한국인이죠. 여러분을 안내한 네오의 부인이에요. 안나 엄마가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를 때, 네오가 셀파를 하면서 둘이 사랑에 빠진 거죠. 안나 엄마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네오 덕택에 살아 돌아왔지요.”

카밀 아저씨가 말했다.

“정말인가요? 남자도 오르기 힘든 곳인데요. 그럼 두 분이 국제결혼을 하신 거네요.”

한국 원정 대원이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네오가 상사병에 걸린 걸 봤어야 하는데. 굉장했죠! 안나야, 이제 네가 몇 살이지?”

카밀 아저씨가 물었다.

“열 셋이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밀 아저씨는 아빠가 실종됐는데 웃음이 나올까. 우리 가족 이야기를 떠벌리는 카밀 아저씨가 못마땅했다. 그만 하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지금 롯지의 주인은 나니까 손님들 기분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안나 엄마가 스물한 살 때였죠. 안나 엄마가 등반을 무사히 마치고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자, 안나 외할아버지가 네팔까지 와서 데려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분이 얼마나 화를 내든지!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줄행랑쳤답니다.”

카밀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창 너머로 내다보니 구조 나갔던 한국 원정 대원들이 보였다.

롯지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원정 대장님이 히든크레바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척추를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 헬기를 불러 주십시오."

원정 대원들의 눈시울에 눈물이 어렸다.

“아저씨, 아빠는요?”

“아직 찾지 못했단다.”

원정 대원의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는요?”

“어두워지니 돌아가자고 했지만 소용없었어. 눈구덩이를 파서 비박한 후에 날이 밝으면 네 아빠를 다시 찾아보겠다고 했어. 셀파 아저씨들이 엄마와 같이 있으니 걱정 마라.”

겁이 났다. 이러다가 엄마까지 위험한 건 아닐까? 눈사태가 나면 어쩌지. 눈구덩이 속에 엄마까지 묻히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아빠와 엄마는 왜 위험한 일을 하는 걸까? 아빠는 산악 등반을 그만두면 사업 자금을 대 주겠다던 외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부모님들처럼 카트만두에서 장사를 하거나 롯지를 운영하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아빠와 엄마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푸르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말렸다. 왜 자꾸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려 하냐며 나무랐다. 내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을 테고 친구도 없을 거라며 말렸다. 하지만 아무도 아빠와 엄마의 황소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빠는 카트만두 친척 집에 나를 맡겨 버렸다. 가족과 떨어지는 게 슬퍼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아빠가 사람은 배워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방학 때면 엄마와 아빠와 같이 살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외동딸인 나보다 안나푸르나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가끔 안나푸르나에게 질투가 나서 안나푸르나를 향해 주먹질을 하곤 했다. 안나푸르나가 나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엄마가 구조를 떠난 날 밤, 나쁜 생각들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꿈일까, 현실일까? 침대 모서리에 있던 강아지들이 아빠를 구하러 가자고 내 잠옷을 끌었다. 나는 강아지들을 따라 안나푸르나로 달렸다. 강아지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아빠를 찾았다. 나는 아빠, 아빠라 외치며 차가운 빙판 길을 걸었다.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마야 아줌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세수하고 마야 아줌마를 도와 손님들에게 대접할 차를 끓였다. 하지만 지난밤에 강아지들과 아빠를 찾아 헤매던, 꼭 현실 같은 꿈이 떠오르는 바람에 차 주전자를 엎질렀다.

“앗, 뜨거워!”

“안나야, 괜찮아?”

마야 아줌마가 따뜻한 코코아를 갖다 주었다. 코코아를 마시는 동안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아빠에게는 시간이 생명과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가 점점 더 위험해질 텐데…!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제발, 아빠를 돌려보내 주세요.”

나는 안나푸르나의 신에게 기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나야, 안나야.”

밖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셀파 아저씨들이 두 개의 구조 썰매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아빠, 엄마는요?”

셀파 아저씨들은 구조 썰매를 가리켰다. 아빠와 엄마가 구조 썰매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설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니, 두 분 다 주무시는 거란다.”

셀파 아저씨들이 빙그레 웃었다.

롯지에 있던 사람들이 아빠와 엄마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나는 얼른 따뜻한 모포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셀파 아저씨들은 난롯가에 앉아 숨을 돌렸다. 엄마와 같이 구조하러 간 셀파 아저씨들에게 뜨거운 차를 대접했다.

“안나 아빠를 어떻게 구조하신 거예요?”

마야 아줌마가 셀파 아저씨들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아저씨들 곁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어젯밤에 눈을 파서 비박할 구덩이를 만들었죠. 웅크리고 앉아 눈보라를 피하는데, 안나 엄마가 갑자기 밖으로 나갔어요. 안나 엄마는 ‘여보, 어디 있어요?’라고 밤새 부르짖었어요.”

셀파 아저씨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눈보라가 안나 엄마의 목소리를 산산이 흩트려 놓았어요.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렸지만 안나 엄마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런데 새벽녘에 거짓말처럼 네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어요.”

셀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우리는 손전등을 들고,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어요. 네오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기운이 났어요. 네오는 우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크레바스에 떨어져 있었어요. 안나 엄마는 자일을 이용해 네오를 구하러 내려갔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히든크레바스에 떨어진 네오는 피켈을 이용해 간신히 멈출 수 있었대요. 밤이 되면 자일에 매달려 잠을 잤고, 낮이 되면 피켈로 얼음 절벽을 찍으며 올라왔답니다.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안나와 안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대요.”

셀파 아저씨들 말을 듣고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아빠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던 엄마가 고마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침실로 갔다. 아빠가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아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에서 신선한 눈 냄새가 났다.

“아빠! 아빠가 깨어나면 더 이상 카트만두로 내려가자고 조르지 않을게요. 나보다 안나푸르나를 더 좋아하냐고 토라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아빠 엄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게요. 아빠, 얼른 기운 차리고 일어나세요. 아빠가 좋아하는 수르와를 끓여 둘 테니까요.”

나는 아빠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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