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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동양일보] 파랑도

신춘문예 김미숙............... 조회 수 1645 추천 수 0 2010.01.22 09: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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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동화부문>

파 랑 도 

 김 미 숙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드라운 털초롱이끼가 소년의 발을 가만가만 감싸 주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맨발인 채였다. 포근한 듯 서늘하게 발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들큼하고 비릿한 남실바람이 소년의 곱슬머리를 살그머니 헝클어뜨렸다. 볼록하게 솟은 이마에서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몇 시간째인지 소년은 줄곧 걷기만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오랫동안 바다를 헤엄쳤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들쭉날쭉 얽히고설킨 시간은 소년의 머릿속에서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어쨌든 꽤 오랜 시간 동안 헤엄치고, 걷고, 뛰고를 반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거였다. 얼마 전 체육 시간에 체력검사를 했는데, 소년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선생님 말로는 ‘지구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 소년은 조금만 달려도 숨이 가빴고, 물속에 들어가면 곧바로 포로로 가라앉기 일쑤였다. 팔과 다리를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좀체 물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바닷가 소년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파도를 가를 수 있는 미끈한 물고기와도 같았으니까. 그건, 세상의 빛을 느낌과 동시에 네 다리로 벌떡 일어서는 아기 사슴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소년이기에 지금의 상황은 소년조차 어리둥절했다. 발을 앞으로 내디딜수록 자꾸만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몸은 가벼웠고, 기분은 상쾌했다. 섬의 바람과 공기에 요정의 마법약이라도 흩뿌려져 있는 건지 소년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섬 곳곳을 탐색해 나갈 수 있었다.
저만치서 쌉싸래하고 향긋한 생강 냄새가 풍겨왔다. 녹나무 냄새였다.
잠시 후, 울울창창한 녹나무 울타리가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년은 거침없이 녹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초록의 물결모양 톱니 잎이 사각사각 몸을 떨며 소년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아빠가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 무럭이가 무럭무럭 자라날수록 아빠는 더 열심히 일했다. 무럭이는 아빠가 지어준 여덟 달 된 뱃속 아기의 태명이었다.
아빠는 소년이 달콤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 이른 새벽에도 벌써 많은 일들을 해치우는 중이었다. 주섬주섬 옷도 챙겨 입고, 뚝딱 밥공기도 비우고, 엄마와 무럭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소년의 방문을 빠끔 열어 잠든 소년을 30초 정도 바라보고는 힘차게 바닷가로 향했다.
아직 어슴푸레한 바닷가에서 아빠는 언제나처럼 고깃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었다. 신비의 섬 ‘파랑도’ 노래를 부르며.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었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네

언젠가 소년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빤, 파랑도 전설을 믿어요?”
“제주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믿어야지.”
잠깐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파랑도가 제주도 남서쪽에 있는 조그만 암초섬이라고 했는걸요. 발견된 지도 벌써 20년이나 됐고. 책에서도 봤어요.”
소년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아빠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기며 조용히 웃었다.
“파랑도는 제주도 사람들만의 섬이지. 뭍에서 온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단다.”
아빠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울에서 온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는 분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높은 빌딩과 땅속을 헤엄쳐 다니는 지하철, 별별 것들이 다 있는 백화점, 환상의 섬 파랑도보다 한층 더 환상처럼 느껴지는 놀이동산. 선생님이 서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소년은 두 눈을 초롱초롱 굴리곤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모르는 것도 다 있다니…….
아빠는 의심으로 흔들리는 소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파랑도는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섬이란다. 그 곳은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섬이지. 거기엔 아픈 사람도, 슬픈 사람도, 배고픈 사람도 없단다. 게다가 파랑도에서는 모든 마음이 하나로 합쳐진단다. 행복한 마음 말이야. 그래서 한 번 파랑도로 간 사람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단다. 네 할아버지와 삼촌처럼…….”
아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다만, 마당의 밀감나무에 오랫동안 눈을 부은 채 무언가를 깊이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소년이 아빠의 큼직한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개 얹었다. 가로로 동그란 손톱이 닮은 두 손이었다.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아빠도 파랑도로 갈 건가요?”
“언젠가는 가게 되겠지. 그건 바다 사람의 운명이란다.”
“그땐 저도 꼭 데려가주세요.”
“파랑도는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갈 때가 되면 파랑도가 먼저 바다 사람을 부르지. 이제는 때가 됐다고. 파랑도는 그때야 비로소 바다 사람에게 길을 열어준단다. 그러면 바다 사람은 파랑도 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아빠의 말에 소년은 약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가슴이 찌르르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섬이라도 아빠와 함께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소년은 가고 싶지 않았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파도가 높지도, 바람이 거세지도 않았다. 바람은 조용조용 불었고, 파도는 살랑살랑 일렁였다. 어젯밤 아홉시 뉴스 일기예보에서도 낮 한때 비가 조금 온 뒤, 오후부터 점차 갤 거라고만 했다.
소년은 학교에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다. 이미 우산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 경험이 있던 터라, 이 정도 비에는 아예 우산을 가져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새벽 바다로 나갔다.
첫 시간은 국어였다. ‘우리 할머니’라는 동시를 배웠고, 소년은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했다. 창 밖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둘째 시간은 미술이었다. 소년은 가족 그림을 그렸다. 파란 옷을 입은 아빠를 맨 앞쪽에 제일 크게 그렸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배는 일부러 동그랗고 불룩하게 그렸다. 그 속에 무럭이가 자라고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무럭이도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엄마 곁에 막 소년을 그려 넣으려는 찰나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창 밖에선 제법 굵은 빗방울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셋째 시간도 역시 미술이었다. 소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칠판 위의 스피커가 ‘치직’거렸다.
“아…… 아, 교내에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인해 오늘은 단축 수업을 실시겠습니다.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는 대로 신속히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며, 빗길 사고가 없도록 안전에 특히 주의하기 바랍니다. 각 교실 선생님들께서는 곧 교무회의가 있을 예정이오니 30분 이내로 교실을 정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학교 곳곳에 울려 퍼졌다. 창밖의 빗방울은 더 이상 방울이 아니었다. 좍좍 운동장을 내리긋는 비는 이미 줄넘기 줄만큼이나 굵은 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년은 끝내 가족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밤새 돌풍과 함께 많은 비가 쏟아졌다. 비는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바람은 휘잉휘잉 비명을 질러댔고, 성난 파도는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을 적셨다. 마을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년과 엄마도 아빠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다.
아침은 고요하게 찾아들었다. 바람이 서서히 멎는가 싶더니 비가 그쳤다. 그러자 벌꿀 빛 햇살이 바닷가 마을을 골고루 어루만져 주었다. 무너진 축대와 모래가 쓸려나간 사장, 끊어진 다리, 날아간 지붕, 부서진 어선 조각들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마을은 복구 작업으로 분주했다. 그러나 마을의 몇 몇 사람들은 하염없이 수평선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오지 못한 어부의 가족들이었다. 소년과 엄마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온종일 해양경찰들의 어선 수색작업이 계속됐지만 반가운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노을만이 붉게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과 엄마의 마음도 자꾸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없는 집은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마당에 널어놓은 그물코에선 황량한 바람이 이리저리 오고갔고, 댓돌에 벗어놓은 아빠의 운동화에선 그리움이 한가득 머물다 사그라졌다.
그 즈음 몸이 무거운 엄마의 얼굴에서도 차츰 생기가 사라져갔다. 소년은 엄마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죽여 울었다. 소년의 볼에서 무럭이의 움직임이 꼬물꼬물 느껴졌다. 엄마도 소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슬프게 울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소년은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찍 파랑도에 가서 아빠를 찾아와야겠어. 아빠는 파랑도로 가버린 게 분명해.’

녹나무 울타리 속에 숨겨진 숲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듯 보드라운 풀밭엔 색색깔의 꽃들이 앙증맞게 피어있었고, 나무마다 잘 익은 과일들이 먹음직스럽게 열려 있었다. 얼마나 열매가 많이 매달려 있던지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아래로 휘청 휘어있었다. 언덕 위에선 맑은 폭포수가 촬촬거리며 쏟아졌고, 그 뒤론 쌍무지개가 신비롭게 피어올랐다.
근처에서 엄마 노루와 풀을 뜯는 아기 노루는 사람을 보고도 경계하는 빛 없이 한가롭기만 했고, 소년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산제비나비는 팔랑팔랑 즐겁게 춤을 추었다. 모든 게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 곳에서 아빠는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년은 큰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아빠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빠, 역시 파랑도에 계실 줄 알았어요.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난 안 간다.”
소년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말도 안 돼요. 엄마와 무럭이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아빠만 기다리고 있단 말예요.”
소년은 답답한 마음에 발까지 동동 구르며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기만 했다.
“여긴 파랑도야. 이렇게 좋은 곳에 왔는데…… 난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그럼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랑 무럭이는요?”
“여길 둘러 봐라. 얼마나 아름답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두고 어떻게 떠나란 말이냐?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하단다. 그러니 갈 테면 너 혼자 가거라.”
소년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려 발밑의 해당화 꽃잎 위로 똑똑 떨어졌다. 분홍 꽃잎도 슬픈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콧노래를 불렀다. 평소 아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년이 눈물을 흘릴 때면 아빠는 늘 소년을 꼭 안아주곤 했었다. 아빠는 파랑도의 마력에 단단히 빠져든 게 분명했다. 소년은 급한 마음에 아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빨리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이것 놓지 못하겠니.”
아빠가 소년을 세게 밀쳤다. 소년은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아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아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팔뚝보다 3배는 두꺼운 아빠의 팔 힘을 소년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어른의 힘’이었다.
그때였다. 숲 언저리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소리는 점점 커져 소년과 아빠를 향해 또렷이 다가왔다.
“응애~ 응애~”
아기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는 섬의 마법을 깨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섬 곳곳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소리에 놀란 아빠는 갑자기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소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빠를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눈을 뜨자, 아빠가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니?”
“아빠, 언제 온 거예요?”
“오늘 새벽에 왔지.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단다. 좀 전에 무럭이가 태어났단다.”
소년은 팔을 뻗어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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