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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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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9. 2. 22. 주일 4부 설교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가 쉬게 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현대 사회의 한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콘크리트 사회인 것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이 아파트, 빌딩 콘크리트 속에 갇혀 살다보니 마음과 생각도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보고 섬기기보다는 서로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몰인정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이어령 씨는 과거 시대가 ‘가마솥 문화’인 반면 신시대는 ‘라면세대’라고 말합니다. 가마솥은 부글부글 끓여서 오랜 시간 만에 음식을 내먹는데 라면은 그냥 뜨거운 타가지고 휘휘 젖어서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현대시대는 깊이가 없는 그런 시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빨리 빨리’를 추구하면서 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빨리해라. 빨리해라. 빨리 먹어라. 빨리 소제해라. 빨리 갖다 오너라.”‘빨리’가 오늘 현대입술에 발린 말입니다. 셋째는 스트레스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지만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합니다. 97%의 사람은 고생만 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스트레스로 인해 두려움, 불안과 공포심, 분노와 원한이 증가합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대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인 피에르 상소는 “안식의 상실”을 지적하며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이레째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 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명령하기를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절대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같이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휴식 없이 칠일 계속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휴식 없이 일을 하면 결과에는 병이 들고 맙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설교 통역을 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제직들이 저를 업고 적십자 병원으로 가서 제가 정신을 차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 깨어나자 새벽기도에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니까 우리 장로님 한분이 상담을 하자고 왔어요. 나를 보더니 “목사님이 참 굉장히 교만하시군요?” 남 아픈 사람 보고서 격려는 안하고 교만하다니..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위대한 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목사님 뭐라고 하나님보다 좋습니까? 왜 안 쉬고 야단법석을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좀 맡겨야지 교만하게 자기가 안하면 못한다고 그렇게 하면 오래 못삽니다.” 그 말이 내 생애 속에 잊어지지 않고 늘 기억납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우리가 뭐기에 이레 동안 내내 일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얼마 못가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떠나가라 그러는데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거든 다 내게로 오라. 이 세상에 육체적인 짐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마음의 짐인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짐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요.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간이 턱 내려앉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값을 받는가보다. 그런 죄책이 언제나 있고 사람은 죽음의 입구에 들어가면 무서운 죄책감을 느낍니다. 마음의 무거운 죄책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심성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먹지 않고 싶은데 자꾸 술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담뱃대를 끊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담배 피웁니다. 방탕을 안 하려고 하는데 방탕을 합니다. 미워 안하려고 하는데 미워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기가 포로가 돼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 슬퍼하는 것입니다. 병은 여러분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들면 마음도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가족에 부담이 되고 자녀들에게 짐이 되니 마음에 부담이 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생활에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속에 사는 것이 무언가, 인생을 사는 것이 무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구나.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가 짓누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 죽어야 하니까 죽음은 허무의 짐을 우리에게 짊어져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잘났다 해도 죽으면 그때로부터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6년 자료에 의하면 10만 명 당 21.5명으로 OECD 국가 중에 1위였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총 사망 원인 중 암과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4번째가 자살인 것입니다. 경희 의료원 정신과의 백종우 교수는 “80% 이상이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분석에 따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해마다 증가해 2007년도에는 47만 명, 2006년보다 7.2% 늘었고, 2008년 우울증 환자는 2007년에 비해 5% 이상 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육체적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이요, 마음의 우울증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이 다가오면 모든 인생이 회색빛으로 드러나고 우리 마음속에 살 희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겠는데요.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하드필드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지가 육체적 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 가를 실험했는데, 이를 위해 손으로 쥐는 ‘악력’을 측정해 분석했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남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쥐어 보라고 했었습니다. 보통 상태에서 평균 악력은 45킬로그램 이었습니다. 딱 쥐는 것이 45kg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는 의사가 그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약골이다. 육체의 근육을 보니까 힘을 못 쓰게 되어 있다. 영양실조다. 힘이 없다.” 그렇게 약하다고 인식을 시켜 놓고 또 다시 주먹을 쥐라고 하고 보니까 겨우 13kg의 악력 밖에는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때 45kg을 쥐던 사람이 약하다고 인식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정말로 13kg밖에 쥐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또 실험하는 사람이 “당신은 굉장히 강하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 근육을 보니까 훨씬 더 무거운 것을 걸머질 수 있다. 힘 있다. 약하지 않다. 튼튼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용기를 주고 측정을 하니까 무려 68kg을 쥐었던 것입니다. 보통 때는 45kg을 쥐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13kg를 쥐던 사람이 강하다고 용기를 줘 놓으면 68kg을 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면 완전히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강하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 육체 생활에 굉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지만 나는 못나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그 무엇이나 하나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인데 마음이 약해지면 육체적으로 모든 생활이 다 미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육체의 짐을 진 사람도, 마음의 짐 진 사람도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기와 힘도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면 연약한 사람이 강하게 되고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더 강하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2절에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야~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광풍을 피하는 사람, 폭우를 가리우는 것 같은 사람,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광풍을 피한다는 것은 뭡니까? 광풍이라는 것은 지상에 불어 닥치는 환란의 풍파인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나 거의 침몰할 뻔 당한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면 환난과 고통의 풍파가 광풍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련과 환란이 연이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온 세계는 경제적인 광풍을 만나서 미국을 위시해서 구라파 할 것 없이 모두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왕우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시편 50편 15절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렇게 광풍이 불 때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광풍을 피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과 재능을 가지고 광풍을 피하려고 하면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광풍을 피하게 해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왜? 하나님이 여러분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다른 데를 찾아가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려운 곳에도 내가 주님을 알면 주님이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잡을 수 없어도 같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계셔서 주님의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고 막대기로 원수를 치고 우리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 광풍을 피하게 하는 우리 주님 얼마나 놀랍고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그리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폭우라는 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별 도리 없이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오래 기다리지만 우리의 날수가 다 차고 죽게 될 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폭우를 가리우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이 쏟아질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난 사람만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의 톱레이디 목사가 어느 날 계곡을 지나다가 갑작스런 광풍과 번개, 소나기를 만나 물이 콸콸 넘쳐나므로 황급히 피할 곳을 찾다 보니까 한 바위에 틈이 있어요. 그래서 빨리 뛰어 들어가서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폭풍우와 그 홍수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마음에 시가 하나 떠올라 왔어요. 그래서 주머니에서 종이를 내어서 그 시를 적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188장 “만세 반석 열리니”라는 시인데 영국의 알버트 왕자는 죽음이 임박한 침상에서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윌리암 글라드스톤 수상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찬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면서 이들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더 이상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 명예, 권세가 죽는 길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반석이요 위로요 안식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광풍을 만나거나 폭우를 만났을 때,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올 때 우리의 위로와 안식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찬송 한번 불러 보십시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4 살아 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따나서
거룩하신 주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만세 반석인 것입니다. 광풍이 불어오고 폭우가 쏟아질 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고 내 반석으로 들어오라. 내 반석이 열려 있다.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열려 있으니 내 안에 들어오면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에도 안전하고 죽어서 심판 받을 때도 안전해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인 죽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땅에 물이 없으면 아무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벌레도 고기도 동물도 못삽니다. 그러나 그 마른 땅에 샘물이 흐리기 시작하면 당장 풀들이 돋아나고 생명들이 생겨나고 고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다.” 내 마음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황막하고 사막같이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샘물에서 흘러나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희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을 주는 생명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황막한 광야같은 세상에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메말라 죽어가는 그 마음에 예수님은 샘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우리가 그 예수님을 모시면 마음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러분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십시오. 그 안에 예수님이 샘물로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찾지 말고 그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님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 한분 붙들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 했습니다. “성경을 다 알지 못해도 천국 갑니까? 구약성경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것 몰라도 천당 갑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예수만 믿으면 천당간다. 낫 놓고 ‘ㄱ’자 몰라도 우리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지 지식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 많이 앎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누구를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할 것 없이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은즉 그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주시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곤비한 땅이란 뭡니까?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 땀 흘리고 지쳐 배가 고파 쓰러져서 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계속 나고 허기져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바로 근처에 큰 바위가 그늘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벌벌 기어가서 바위 밑에 들어가니까 당장 시원하고 바위 밑에 샘물도 나오고 거기에서 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삶을 재생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안기면 그 세상의 뜨거운 햇빛에서 피할 수 있고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피할 수가 있고 메마른 공기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새 힘,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밥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약을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는 새 힘인 것입니다.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올라가도 피곤치 아니하고 일이 바빠서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고 일이 잘되어서 천천히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힘이 되는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셋째로 말씀하기를 너희가 내게로 오면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을 하고 난 다음 피곤할 때 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6.25사변 때 우리가 살기가 힘들었지 않습니까? 저는 6.25사변 때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밤에 부두에 하역작업에 나갔는데 그때는 20살 된 애들만 불렀는데, 나는 17살이었는데 키가 컸기 때문에 20살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20살로 속여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데 초저녁까지는 버텨 나갈 수 있어요. 씨레이션 박스를 어깨에 걸머지고 갖다 나를 수 있는데 초저녁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저녁을 먹고 아침 새벽까지 일할 때는 도저히 일할 수가 없어요. 그냥 짐을 지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아요. 그러면 흑인 병사가 와서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때리고 차도 관심이 없어요. 좌우간 맨땅에도 꿇어앉아서 잠을 자야지 안자고는 못 견디겠어요.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사람이 쉬지 않고는 못산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 힘이 끝까지 가지는 안 간다.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교회 나와서 주님 품에 들어오면 내가 알 수 없이 마음에 휴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품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요.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마음에 온유하고 겸손을 배워야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길들임을 잘 받은 것입니다. 가축인 소나 양이나 염소는 온유한 가축입니다. 길을 잘 들여서 사자가 호랑이나 범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길들이지 않습니다. 사나운 짐승입니다. 그러나 길 잘들인 것은 온유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길 잘들인 사람은 하나님께 아주 순종을 잘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왈가닥이 되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 온유한 사람을 주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11절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사나운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기에는 사납게 말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차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 온유한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사납고 다스릴 수 없는 그러한 완악한 마음을 가진 개인이나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훈련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온유한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부드럽고 순종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드럽고 순종하고 잘 따르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 앞에 언제나 꿇어 엎드려서 주님을 경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잘 살게 되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일할 때는 성공을 했으나 성공하고 난 다음 살만하게 되면 큰 쉼을 쉬고 그 다음에는 건방져지는 것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거만하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되어야 주님 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겸손하게 들어가면 때가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아니 내가 저를 높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지만 먼저 낮아져야 그 다음 높아지는 것입니다. 손도 골이 깊으면 손도 높습니다. 골이 평평하면 산도 높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해서 깨어지고 내 중심이 무너지고 주님께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 들어서 축복을 해주고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람이 너무나 낙심을 하고 얼굴이 창백하고 지금이라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기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하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군. 당신 내 처지에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해요?”그래서 선교사님이 포켓트에 손을 넣어 가지고서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기차가 막 흔들리는데 만년필을 두고서 “당신이 이 연필을 상에 세워 보십시오?”하니까 “당신 나를 조롱하는 거요? 이렇게 흔들리는 기차에 앞에 밥상에 만년필을 세우라니 어떻게 세운다는 말이요?” “나는 세울 수 있어요.” “어디 세워 보세요.”두 손을 잡고 “세웠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여겨 두 손으로 세우는 것 세워지겠느냐?” “못 세우더라도 두 손으로 하면 세워지는 것처럼 인생도 혼자는 못설 때 주님의 손이 붙잡으면 설수가 있다니까요.”그래서 그 사람이 크게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못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면 우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에 “저가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께 의지하면 주님은 책임지고 우리를 붙들어서 세워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환난과 풍파가 몰아쳐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움직이지 않고 버림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었습니다. 예수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온유하게 겸손하게 삶을 배우라. 주님의 멍에는 뭡니까?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부패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네 짐을 내게 맡기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 밑에 들어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 중동에서는 밭을 갈 때 언제나 어미 소 멍에 밑에 새끼소를 같이 넣어서 밭을 갑니다. 새끼소가 온유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미 소 목에다 길마를 걸어 놓고 그 옆에다가 새끼소를 넣어서 ‘이랴~’ 어미 소가 잔뜩 힘을 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끕니다. 그런데 새끼소는 하나도 안 무겁거든. 엄마가 왜 저렇게 땀을 흘리고 야단이냐. 나는 아주 가벼운데.. 왜, 멍에가 엄마 목에 걸려 있지 자기 목에 안 걸려 있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니까 목에 걸렸지만 엄마 멍에 밑에 들어가서 따라가니까 자기는 쉽고 가볍게 걸어갑니다. 엄마만 땀을 흘립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걸머졌습니다. 십자가에 다 걸머졌고 우리가 예수님께 온유하게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따라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 다 얹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내게로 오라” 마음의 짐, 육체의 짐, 생활의 짐을 짊어지고 내게 와서 내게 맡겨라. 짐은 내게 맡기고 내 밑에 들어와서 순종하고 온유하게 따라가면 너는 쉽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어려운 세상에 쉽고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는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지만 우리에게는 쉽고 가볍습니다. 왜, 예수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우리의 부패 때문에 우리가 쫓겨 나갈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부패를 다 청산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 병 때문에 우리가 병을 걸머지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서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걸머지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십자가에 매달렸던 것,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서 공짜로 죽었다가 쉽게 부활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쉽습니다. 죄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고 축복받고 쉽게 죽어 부활해서 영원한 천국을 얻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사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68편 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옛날에만 걸머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의 짐을 걸머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멍에를 우리에게 내 놓으면서 “자, 네 짐을 여기다 맡겨라. 너의 죄 짐을, 너의 불의와 추악의 짐을, 너희 질병의 짐을, 너희 저주의 짐을, 너희 절망의 짐을, 너희 죽음의 짐을 자! 여기 내 어깨에 맡겨라. 그리고 나와 같이 걸어가자. 사람들은 네가 십자가를 걸머진 것 같지만 너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한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결론>
이 세상 삶은 오늘도 불안, 초조, 절망 등으로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께 의지하면 마음과 생활에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같이 있으리라” 그냥 주님 와서 같이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고 또 지금도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의 멍에를 걸머지고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믿지 말고 형식적으로 믿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인생사는 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정신적인 짐이 너무나 무거워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고 육체적인 짐도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고통이 한없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못 지는 짐을 주님이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인생을 살아감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주님,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도 십자가에 우리의 짐을 다 짊어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겸손하게 온유하게 주님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주께 모든 짐을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시옵시고 모두 다 쉽고 가볍게 감사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가 쉬게 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현대 사회의 한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콘크리트 사회인 것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이 아파트, 빌딩 콘크리트 속에 갇혀 살다보니 마음과 생각도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보고 섬기기보다는 서로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몰인정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이어령 씨는 과거 시대가 ‘가마솥 문화’인 반면 신시대는 ‘라면세대’라고 말합니다. 가마솥은 부글부글 끓여서 오랜 시간 만에 음식을 내먹는데 라면은 그냥 뜨거운 타가지고 휘휘 젖어서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현대시대는 깊이가 없는 그런 시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빨리 빨리’를 추구하면서 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빨리해라. 빨리해라. 빨리 먹어라. 빨리 소제해라. 빨리 갖다 오너라.”‘빨리’가 오늘 현대입술에 발린 말입니다. 셋째는 스트레스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지만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합니다. 97%의 사람은 고생만 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스트레스로 인해 두려움, 불안과 공포심, 분노와 원한이 증가합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대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인 피에르 상소는 “안식의 상실”을 지적하며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이레째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 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명령하기를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절대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같이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휴식 없이 칠일 계속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휴식 없이 일을 하면 결과에는 병이 들고 맙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설교 통역을 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제직들이 저를 업고 적십자 병원으로 가서 제가 정신을 차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 깨어나자 새벽기도에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니까 우리 장로님 한분이 상담을 하자고 왔어요. 나를 보더니 “목사님이 참 굉장히 교만하시군요?” 남 아픈 사람 보고서 격려는 안하고 교만하다니..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위대한 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목사님 뭐라고 하나님보다 좋습니까? 왜 안 쉬고 야단법석을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좀 맡겨야지 교만하게 자기가 안하면 못한다고 그렇게 하면 오래 못삽니다.” 그 말이 내 생애 속에 잊어지지 않고 늘 기억납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우리가 뭐기에 이레 동안 내내 일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얼마 못가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떠나가라 그러는데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거든 다 내게로 오라. 이 세상에 육체적인 짐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마음의 짐인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짐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요.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간이 턱 내려앉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값을 받는가보다. 그런 죄책이 언제나 있고 사람은 죽음의 입구에 들어가면 무서운 죄책감을 느낍니다. 마음의 무거운 죄책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심성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먹지 않고 싶은데 자꾸 술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담뱃대를 끊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담배 피웁니다. 방탕을 안 하려고 하는데 방탕을 합니다. 미워 안하려고 하는데 미워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기가 포로가 돼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 슬퍼하는 것입니다. 병은 여러분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들면 마음도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가족에 부담이 되고 자녀들에게 짐이 되니 마음에 부담이 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생활에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속에 사는 것이 무언가, 인생을 사는 것이 무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구나.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가 짓누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 죽어야 하니까 죽음은 허무의 짐을 우리에게 짊어져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잘났다 해도 죽으면 그때로부터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6년 자료에 의하면 10만 명 당 21.5명으로 OECD 국가 중에 1위였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총 사망 원인 중 암과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4번째가 자살인 것입니다. 경희 의료원 정신과의 백종우 교수는 “80% 이상이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분석에 따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해마다 증가해 2007년도에는 47만 명, 2006년보다 7.2% 늘었고, 2008년 우울증 환자는 2007년에 비해 5% 이상 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육체적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이요, 마음의 우울증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이 다가오면 모든 인생이 회색빛으로 드러나고 우리 마음속에 살 희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겠는데요.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하드필드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지가 육체적 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 가를 실험했는데, 이를 위해 손으로 쥐는 ‘악력’을 측정해 분석했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남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쥐어 보라고 했었습니다. 보통 상태에서 평균 악력은 45킬로그램 이었습니다. 딱 쥐는 것이 45kg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는 의사가 그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약골이다. 육체의 근육을 보니까 힘을 못 쓰게 되어 있다. 영양실조다. 힘이 없다.” 그렇게 약하다고 인식을 시켜 놓고 또 다시 주먹을 쥐라고 하고 보니까 겨우 13kg의 악력 밖에는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때 45kg을 쥐던 사람이 약하다고 인식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정말로 13kg밖에 쥐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또 실험하는 사람이 “당신은 굉장히 강하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 근육을 보니까 훨씬 더 무거운 것을 걸머질 수 있다. 힘 있다. 약하지 않다. 튼튼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용기를 주고 측정을 하니까 무려 68kg을 쥐었던 것입니다. 보통 때는 45kg을 쥐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13kg를 쥐던 사람이 강하다고 용기를 줘 놓으면 68kg을 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면 완전히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강하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 육체 생활에 굉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지만 나는 못나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그 무엇이나 하나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인데 마음이 약해지면 육체적으로 모든 생활이 다 미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육체의 짐을 진 사람도, 마음의 짐 진 사람도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기와 힘도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면 연약한 사람이 강하게 되고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더 강하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2절에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야~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광풍을 피하는 사람, 폭우를 가리우는 것 같은 사람,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광풍을 피한다는 것은 뭡니까? 광풍이라는 것은 지상에 불어 닥치는 환란의 풍파인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나 거의 침몰할 뻔 당한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면 환난과 고통의 풍파가 광풍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련과 환란이 연이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온 세계는 경제적인 광풍을 만나서 미국을 위시해서 구라파 할 것 없이 모두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왕우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시편 50편 15절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렇게 광풍이 불 때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광풍을 피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과 재능을 가지고 광풍을 피하려고 하면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광풍을 피하게 해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왜? 하나님이 여러분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다른 데를 찾아가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려운 곳에도 내가 주님을 알면 주님이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잡을 수 없어도 같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계셔서 주님의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고 막대기로 원수를 치고 우리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 광풍을 피하게 하는 우리 주님 얼마나 놀랍고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그리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폭우라는 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별 도리 없이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오래 기다리지만 우리의 날수가 다 차고 죽게 될 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폭우를 가리우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이 쏟아질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난 사람만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의 톱레이디 목사가 어느 날 계곡을 지나다가 갑작스런 광풍과 번개, 소나기를 만나 물이 콸콸 넘쳐나므로 황급히 피할 곳을 찾다 보니까 한 바위에 틈이 있어요. 그래서 빨리 뛰어 들어가서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폭풍우와 그 홍수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마음에 시가 하나 떠올라 왔어요. 그래서 주머니에서 종이를 내어서 그 시를 적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188장 “만세 반석 열리니”라는 시인데 영국의 알버트 왕자는 죽음이 임박한 침상에서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윌리암 글라드스톤 수상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찬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면서 이들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더 이상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 명예, 권세가 죽는 길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반석이요 위로요 안식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광풍을 만나거나 폭우를 만났을 때,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올 때 우리의 위로와 안식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찬송 한번 불러 보십시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4 살아 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따나서
거룩하신 주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만세 반석인 것입니다. 광풍이 불어오고 폭우가 쏟아질 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고 내 반석으로 들어오라. 내 반석이 열려 있다.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열려 있으니 내 안에 들어오면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에도 안전하고 죽어서 심판 받을 때도 안전해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인 죽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땅에 물이 없으면 아무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벌레도 고기도 동물도 못삽니다. 그러나 그 마른 땅에 샘물이 흐리기 시작하면 당장 풀들이 돋아나고 생명들이 생겨나고 고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다.” 내 마음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황막하고 사막같이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샘물에서 흘러나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희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을 주는 생명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황막한 광야같은 세상에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메말라 죽어가는 그 마음에 예수님은 샘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우리가 그 예수님을 모시면 마음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러분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십시오. 그 안에 예수님이 샘물로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찾지 말고 그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님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 한분 붙들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 했습니다. “성경을 다 알지 못해도 천국 갑니까? 구약성경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것 몰라도 천당 갑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예수만 믿으면 천당간다. 낫 놓고 ‘ㄱ’자 몰라도 우리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지 지식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 많이 앎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누구를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할 것 없이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은즉 그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주시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곤비한 땅이란 뭡니까?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 땀 흘리고 지쳐 배가 고파 쓰러져서 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계속 나고 허기져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바로 근처에 큰 바위가 그늘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벌벌 기어가서 바위 밑에 들어가니까 당장 시원하고 바위 밑에 샘물도 나오고 거기에서 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삶을 재생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안기면 그 세상의 뜨거운 햇빛에서 피할 수 있고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피할 수가 있고 메마른 공기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새 힘,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밥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약을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는 새 힘인 것입니다.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올라가도 피곤치 아니하고 일이 바빠서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고 일이 잘되어서 천천히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힘이 되는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셋째로 말씀하기를 너희가 내게로 오면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을 하고 난 다음 피곤할 때 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6.25사변 때 우리가 살기가 힘들었지 않습니까? 저는 6.25사변 때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밤에 부두에 하역작업에 나갔는데 그때는 20살 된 애들만 불렀는데, 나는 17살이었는데 키가 컸기 때문에 20살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20살로 속여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데 초저녁까지는 버텨 나갈 수 있어요. 씨레이션 박스를 어깨에 걸머지고 갖다 나를 수 있는데 초저녁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저녁을 먹고 아침 새벽까지 일할 때는 도저히 일할 수가 없어요. 그냥 짐을 지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아요. 그러면 흑인 병사가 와서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때리고 차도 관심이 없어요. 좌우간 맨땅에도 꿇어앉아서 잠을 자야지 안자고는 못 견디겠어요.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사람이 쉬지 않고는 못산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 힘이 끝까지 가지는 안 간다.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교회 나와서 주님 품에 들어오면 내가 알 수 없이 마음에 휴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품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요.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마음에 온유하고 겸손을 배워야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길들임을 잘 받은 것입니다. 가축인 소나 양이나 염소는 온유한 가축입니다. 길을 잘 들여서 사자가 호랑이나 범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길들이지 않습니다. 사나운 짐승입니다. 그러나 길 잘들인 것은 온유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길 잘들인 사람은 하나님께 아주 순종을 잘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왈가닥이 되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 온유한 사람을 주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11절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사나운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기에는 사납게 말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차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 온유한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사납고 다스릴 수 없는 그러한 완악한 마음을 가진 개인이나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훈련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온유한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부드럽고 순종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드럽고 순종하고 잘 따르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 앞에 언제나 꿇어 엎드려서 주님을 경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잘 살게 되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일할 때는 성공을 했으나 성공하고 난 다음 살만하게 되면 큰 쉼을 쉬고 그 다음에는 건방져지는 것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거만하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되어야 주님 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겸손하게 들어가면 때가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아니 내가 저를 높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지만 먼저 낮아져야 그 다음 높아지는 것입니다. 손도 골이 깊으면 손도 높습니다. 골이 평평하면 산도 높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해서 깨어지고 내 중심이 무너지고 주님께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 들어서 축복을 해주고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람이 너무나 낙심을 하고 얼굴이 창백하고 지금이라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기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하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군. 당신 내 처지에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해요?”그래서 선교사님이 포켓트에 손을 넣어 가지고서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기차가 막 흔들리는데 만년필을 두고서 “당신이 이 연필을 상에 세워 보십시오?”하니까 “당신 나를 조롱하는 거요? 이렇게 흔들리는 기차에 앞에 밥상에 만년필을 세우라니 어떻게 세운다는 말이요?” “나는 세울 수 있어요.” “어디 세워 보세요.”두 손을 잡고 “세웠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여겨 두 손으로 세우는 것 세워지겠느냐?” “못 세우더라도 두 손으로 하면 세워지는 것처럼 인생도 혼자는 못설 때 주님의 손이 붙잡으면 설수가 있다니까요.”그래서 그 사람이 크게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못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면 우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에 “저가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께 의지하면 주님은 책임지고 우리를 붙들어서 세워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환난과 풍파가 몰아쳐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움직이지 않고 버림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었습니다. 예수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온유하게 겸손하게 삶을 배우라. 주님의 멍에는 뭡니까?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부패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네 짐을 내게 맡기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 밑에 들어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 중동에서는 밭을 갈 때 언제나 어미 소 멍에 밑에 새끼소를 같이 넣어서 밭을 갑니다. 새끼소가 온유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미 소 목에다 길마를 걸어 놓고 그 옆에다가 새끼소를 넣어서 ‘이랴~’ 어미 소가 잔뜩 힘을 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끕니다. 그런데 새끼소는 하나도 안 무겁거든. 엄마가 왜 저렇게 땀을 흘리고 야단이냐. 나는 아주 가벼운데.. 왜, 멍에가 엄마 목에 걸려 있지 자기 목에 안 걸려 있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니까 목에 걸렸지만 엄마 멍에 밑에 들어가서 따라가니까 자기는 쉽고 가볍게 걸어갑니다. 엄마만 땀을 흘립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걸머졌습니다. 십자가에 다 걸머졌고 우리가 예수님께 온유하게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따라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 다 얹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내게로 오라” 마음의 짐, 육체의 짐, 생활의 짐을 짊어지고 내게 와서 내게 맡겨라. 짐은 내게 맡기고 내 밑에 들어와서 순종하고 온유하게 따라가면 너는 쉽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어려운 세상에 쉽고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는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지만 우리에게는 쉽고 가볍습니다. 왜, 예수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우리의 부패 때문에 우리가 쫓겨 나갈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부패를 다 청산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 병 때문에 우리가 병을 걸머지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서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걸머지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십자가에 매달렸던 것,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서 공짜로 죽었다가 쉽게 부활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쉽습니다. 죄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고 축복받고 쉽게 죽어 부활해서 영원한 천국을 얻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사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68편 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옛날에만 걸머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의 짐을 걸머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멍에를 우리에게 내 놓으면서 “자, 네 짐을 여기다 맡겨라. 너의 죄 짐을, 너의 불의와 추악의 짐을, 너희 질병의 짐을, 너희 저주의 짐을, 너희 절망의 짐을, 너희 죽음의 짐을 자! 여기 내 어깨에 맡겨라. 그리고 나와 같이 걸어가자. 사람들은 네가 십자가를 걸머진 것 같지만 너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한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결론>
이 세상 삶은 오늘도 불안, 초조, 절망 등으로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께 의지하면 마음과 생활에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같이 있으리라” 그냥 주님 와서 같이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고 또 지금도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의 멍에를 걸머지고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믿지 말고 형식적으로 믿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인생사는 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정신적인 짐이 너무나 무거워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고 육체적인 짐도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고통이 한없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못 지는 짐을 주님이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인생을 살아감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주님,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도 십자가에 우리의 짐을 다 짊어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겸손하게 온유하게 주님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주께 모든 짐을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시옵시고 모두 다 쉽고 가볍게 감사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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