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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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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즐거운 낯빛으로 인사를 나누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네" 이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진실로 부활 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 정교인이 많은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한 공산당 이론가가 사람을 모아 놓고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하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 나오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안나올 줄 알았는데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공산주의자는 당황해서 "5분 밖에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제한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라고 하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전회중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장악하여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였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지금도 수십억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실로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역사상에 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고 최초로 전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무엇을 마구 달라고 해서 막달라가 아니고 지역이름입니다. 막달라라는 지역의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패인이 된 사람이엇습니다. 귀신들려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고 산 사람입니다(눅8:2).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제자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내어 열두 제자들 섬겼습니다(눅8:3). 행복한 인생 새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도 다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절이 고통을 당하여 돌아가셨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리 뜨거웠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10).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며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경험 차이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극적인 사랑을 맡본 사람입니다. 귀신들려 황폐화 된 인생이 예수님을 통해 새사람된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무관심과 무력감 속에서 집으로 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쉽게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사태를 만나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신앙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큰 사건을 만나니까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믿지 못합니다. 도마를 보십시오. "내가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의 못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노라"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왜 그들을 그렇게 슬픈 빛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 분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으로 우리가 믿었었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도 끝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경험은 이것들 보다 더 강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을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경험, 예수님을 사랑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믿음도 무너지고 소망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고백이 있으면 그 사랑은 다시 믿음도 일으키고 소망도 견고히 세워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하는 모습도 보십시오. 이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 십자가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배신했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 고백을 받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사랑 고백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의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배신한 자신을 용서하시면 사랑을 물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사랑이 있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에게 이런 사랑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사랑합니다."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 왕께 드리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50장" "주님 한 분 밖에는 사랑할이 없어요 905장" 이 찬양이 항상 마음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특별한 체험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통해 귀신에서 자유함을 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에서(눅23:49) 떠나지 못하고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고통과 임종을 지켜봅니다(요19:25). 무덤에 장사된 것을 지켜봅니다(막15:47; 눅23:55). 그리고 주일날 안식후 첫날 아침 일찍 향유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땅에 묻는 것이 동굴에 안치된 시신이기 때문에 볼 수가 있는데 동굴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도적 맞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1. 울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울음은 소리 죽여 조용히 우는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크라이우사"라는 말은 대성통곡하는 울음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슬퍼하며 대성통곡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인데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얼마나 통곡할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입니다. 귀신들려 모든 사람이 조롱하고 사람취급해 주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이 회복된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들,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탄생을 예고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우는 그를 향하여 물어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울음의 이유를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마리아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죽음으로 끝난 줄 알고 죽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그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9절 보십시오. 아직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한 때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가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이니이다."
죽검을 찾고 있는 마리아, 열심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도 있고, 책임감도 있는 마리아, 슬퍼 울고 있는 마리아, 이 마리아를 예수님을 찾아 오십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고통받고 있는 마리아, 상실감에 상처난 마리아 그 마리아를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 곁에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보고 있었으나 알지를 못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주님은 늘 우리의 슬픔의 현장, 절망의 현장에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먼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에 갇혀 침묵하고 모르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계서서 고통의 현장에 눈물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낙담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주 예수를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98장 1절)"
우리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 외면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도마를 찾아 가십니다. 도망가 자신의 옛날 직업 어부가 되어 버린 베드로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보여 주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절망과 울음의 현장에서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찾아 오셔서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 알지 못하는 자에게 알게 하시어 믿음 주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통곡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2절을 보십시오. 왜 울었다고 합니까?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까마득하게 잊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프면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 환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으면 예수님의 시체는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전혀 뛰어 넘지 못하고 이성과 경험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울고 있는 여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15절 보십시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래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는데 여자라고 말하니까? 막연히 말하니까 알지를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동산지기인줄 압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압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 주기 전까지는, 주님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되기 전까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십자가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말합니다. 당신이 옮겨갔으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고백이지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에게 시체를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떻게합니까? 다정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아마 주님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여인이 와서 시체를 찾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 이 무덤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름도 주님이 아시고 부르십니다. 모태로부터 날때부터 우리를 아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난당하고 있을 때, 실망하고 있을 때, 가슴 아파하며 상처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기도를 잊었는가 어둠 속에 기도는 하늘 보좌 흔든다오 네모든 사정을 주님게 고백을 하여 위로받고 구원받아 참 평화를 영원 영원 영원 토록 1129장)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랍오니여 나의 선생님이여하며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붙들려 끝나는 무능력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환란, 질병, 풍파, 사망 권세를 이기신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 다른 성경에 보면 천사 무엇을 마리아에게 말씀합니까? ( 마 28:5-6)"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도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하고 내려간 것입니다.(눅 24:25)" 세상의 소리를 듣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은 "사람의 생애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면서 평생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했습니다. 걱정할 일이 없으면 결혼도 안 시킨 아들의 손자까지 걱정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말씀을 확신했다면 주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통하여 사실을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공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안에서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앞길이 환해질 수 있고 내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죄악을 회개할 수 있고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사랑하는 음성입니다.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십니다. 세상의 음성을 듣지 말고 부활하셔셔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활절 예배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 기도 가운데, 성도의 교제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위로의 말씀, 책망의 말씀, 교훈의 말씀, 소명의 말씀을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여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집중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죄를 이기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죽음에 관심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는 열심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님을 마리아가 모른 것은 너무 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를 부탁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여인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을 중지하라는 말입니다(마28:9).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같이 있을 것을 바랬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였지만 아직 승천하지 않았지만 예언한 대로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라는 전하라고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부활시킨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 주님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약속 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 때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전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본 것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간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침묵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신문사에 알리고 일가 친척에게 알리고 친구에게 알리지 않겠습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어찌 그냥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삶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입술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랜 동안 목회를 하며 많은 대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김 준곤 목사님께서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라는 음반을 만들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음반에는 29세의 나이로 암에 걸린 딸의 투병 1백 67일을 지켜보는 아버지, 엄마 잃은 두 손녀를 5년 간 키우며 가슴을 저미는 할아버지, 딸의 죽음으로 신앙을 다지는 목회자의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었을 때, 저는 존재의 제로 점에 서있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애절한 기도가 무참히 거절당한 직후였지요.". "체중이 26㎏까지 내려간 신희는 온몸에 바늘을 꽂은 채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몸을 뒤틀며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딸애의 고통을 보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비 된 자로서 12번 딸의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습니다." 딸만 넷인 김 목사님에게 둘째 딸은 유독 연약하고 착했던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경제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간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 와 미국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신경성이라면서 신경 안정제만 한 움큼씩 복용하게 했다고 합니다.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정밀진단을 받으니 이미 늦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이었죠.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 나와 내게는 딸의 죽음. 아무리 나누어도 가벼워 질 수 없었죠. 손녀들이 감싸주며 슬픔을 삭이는 모습이 너무나 가여워서…". 가냘픈 아이의 가혹한 고통을 보면 김 목사님은 나중에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처음으로 섭섭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4월 어느날 여동생 윤희씨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즐거웠던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앉아 김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는 "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러나 딸은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 세상 떠나기 전날 딸은 모처럼 만에 편안한 잠을 잤고, 깨어나서는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하도 편안하게 보여 김 목사님은 내심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작은 기대를 가졌지만 이튿날 세상을 떠났답니다. "눈 감고 주님의 품에 안긴 신희의 종잇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습니다.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 데 그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요? 그 얼굴은 분명 티없이 해맑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주 꿈에 둘째딸 신희를 보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신희는 밝은 목소리로 "아빠 이젠 걱정 마, 다 나았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어찌나 허전하고 슬픈지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들고 베갯잇을 적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날 내게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깊고 깊은 존재의 저 밑바닥, 주님이 들으신 지하에서 생명수가 솟듯이 내 안에서 아주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찬송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나를 대신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내 위에 살아계셨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 김 목사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합니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졌고, 한없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딸을 땅 위의 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 더 필요로 해서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찬송 이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 주님은 나의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것을 끝내 빼앗아가 버리셨지만 나는 이제 주님의 그 빼앗은 손보다 주님이 다른 손에 준비하신 선물을 더 기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영원한 소망, 영원한 생명, 지금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일 내가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나면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주겠지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며 죽음은 허무요 단절이며 고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의 삶의 지평은 넓어지고 세계관은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죽음을 맛본 후 12시간 이후에 소생한 600여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죽음 후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20:11-18/김필곤 목사
1. 울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울음은 소리 죽여 조용히 우는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크라이우사"라는 말은 대성통곡하는 울음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슬퍼하며 대성통곡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인데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얼마나 통곡할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입니다. 귀신들려 모든 사람이 조롱하고 사람취급해 주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이 회복된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들,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탄생을 예고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우는 그를 향하여 물어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울음의 이유를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마리아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죽음으로 끝난 줄 알고 죽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그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9절 보십시오. 아직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한 때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가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이니이다."
죽검을 찾고 있는 마리아, 열심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도 있고, 책임감도 있는 마리아, 슬퍼 울고 있는 마리아, 이 마리아를 예수님을 찾아 오십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고통받고 있는 마리아, 상실감에 상처난 마리아 그 마리아를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 곁에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보고 있었으나 알지를 못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주님은 늘 우리의 슬픔의 현장, 절망의 현장에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먼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에 갇혀 침묵하고 모르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계서서 고통의 현장에 눈물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낙담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주 예수를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98장 1절)"
우리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 외면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도마를 찾아 가십니다. 도망가 자신의 옛날 직업 어부가 되어 버린 베드로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보여 주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절망과 울음의 현장에서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찾아 오셔서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 알지 못하는 자에게 알게 하시어 믿음 주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통곡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2절을 보십시오. 왜 울었다고 합니까?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까마득하게 잊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프면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 환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으면 예수님의 시체는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전혀 뛰어 넘지 못하고 이성과 경험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울고 있는 여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15절 보십시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래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는데 여자라고 말하니까? 막연히 말하니까 알지를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동산지기인줄 압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압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 주기 전까지는, 주님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되기 전까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십자가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말합니다. 당신이 옮겨갔으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고백이지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에게 시체를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떻게합니까? 다정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아마 주님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여인이 와서 시체를 찾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 이 무덤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름도 주님이 아시고 부르십니다. 모태로부터 날때부터 우리를 아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난당하고 있을 때, 실망하고 있을 때, 가슴 아파하며 상처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기도를 잊었는가 어둠 속에 기도는 하늘 보좌 흔든다오 네모든 사정을 주님게 고백을 하여 위로받고 구원받아 참 평화를 영원 영원 영원 토록 1129장)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랍오니여 나의 선생님이여하며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붙들려 끝나는 무능력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환란, 질병, 풍파, 사망 권세를 이기신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 다른 성경에 보면 천사 무엇을 마리아에게 말씀합니까? ( 마 28:5-6)"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도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하고 내려간 것입니다.(눅 24:25)" 세상의 소리를 듣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은 "사람의 생애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면서 평생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했습니다. 걱정할 일이 없으면 결혼도 안 시킨 아들의 손자까지 걱정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말씀을 확신했다면 주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통하여 사실을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공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안에서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앞길이 환해질 수 있고 내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죄악을 회개할 수 있고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사랑하는 음성입니다.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십니다. 세상의 음성을 듣지 말고 부활하셔셔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활절 예배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 기도 가운데, 성도의 교제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위로의 말씀, 책망의 말씀, 교훈의 말씀, 소명의 말씀을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여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집중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죄를 이기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죽음에 관심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는 열심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님을 마리아가 모른 것은 너무 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를 부탁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여인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을 중지하라는 말입니다(마28:9).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같이 있을 것을 바랬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였지만 아직 승천하지 않았지만 예언한 대로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라는 전하라고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부활시킨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 주님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약속 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 때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전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본 것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간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침묵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신문사에 알리고 일가 친척에게 알리고 친구에게 알리지 않겠습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어찌 그냥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삶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입술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랜 동안 목회를 하며 많은 대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김 준곤 목사님께서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라는 음반을 만들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음반에는 29세의 나이로 암에 걸린 딸의 투병 1백 67일을 지켜보는 아버지, 엄마 잃은 두 손녀를 5년 간 키우며 가슴을 저미는 할아버지, 딸의 죽음으로 신앙을 다지는 목회자의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었을 때, 저는 존재의 제로 점에 서있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애절한 기도가 무참히 거절당한 직후였지요.". "체중이 26㎏까지 내려간 신희는 온몸에 바늘을 꽂은 채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몸을 뒤틀며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딸애의 고통을 보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비 된 자로서 12번 딸의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습니다." 딸만 넷인 김 목사님에게 둘째 딸은 유독 연약하고 착했던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경제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간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 와 미국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신경성이라면서 신경 안정제만 한 움큼씩 복용하게 했다고 합니다.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정밀진단을 받으니 이미 늦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이었죠.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 나와 내게는 딸의 죽음. 아무리 나누어도 가벼워 질 수 없었죠. 손녀들이 감싸주며 슬픔을 삭이는 모습이 너무나 가여워서…". 가냘픈 아이의 가혹한 고통을 보면 김 목사님은 나중에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처음으로 섭섭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4월 어느날 여동생 윤희씨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즐거웠던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앉아 김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는 "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러나 딸은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 세상 떠나기 전날 딸은 모처럼 만에 편안한 잠을 잤고, 깨어나서는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하도 편안하게 보여 김 목사님은 내심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작은 기대를 가졌지만 이튿날 세상을 떠났답니다. "눈 감고 주님의 품에 안긴 신희의 종잇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습니다.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 데 그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요? 그 얼굴은 분명 티없이 해맑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주 꿈에 둘째딸 신희를 보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신희는 밝은 목소리로 "아빠 이젠 걱정 마, 다 나았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어찌나 허전하고 슬픈지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들고 베갯잇을 적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날 내게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깊고 깊은 존재의 저 밑바닥, 주님이 들으신 지하에서 생명수가 솟듯이 내 안에서 아주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찬송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나를 대신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내 위에 살아계셨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 김 목사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합니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졌고, 한없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딸을 땅 위의 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 더 필요로 해서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찬송 이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 주님은 나의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것을 끝내 빼앗아가 버리셨지만 나는 이제 주님의 그 빼앗은 손보다 주님이 다른 손에 준비하신 선물을 더 기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영원한 소망, 영원한 생명, 지금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일 내가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나면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주겠지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며 죽음은 허무요 단절이며 고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의 삶의 지평은 넓어지고 세계관은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죽음을 맛본 후 12시간 이후에 소생한 600여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죽음 후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20:11-18/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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