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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3대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

고린도후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962 추천 수 0 2010.02.06 22: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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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4:16-18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미국 경영학회로부터 '20세기 최고의 경영인'으로 선정된 GE의 전회장인 잭 웰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입사 첫해에 1만 5천달러(약 2천만원)였던 그의 연봉은 41년이 지난 지난해(2001) 1천 6백만달러선(약 2백 10억원)으로 뛰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개인적으로 번돈은 재산총액 6억 8천만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 잘 자라내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별명이 '중성자탄'(82년 뉴스위크), '미국에서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84년 포천)입니다. 처음 5년간 직원 다섯명 중 한명꼴인 8만여명을 내보내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사관리는 탁월했는데 직원을 세 그룹으로 구별하여 관리했다고 합니다. 첫째 20%는 아주 탁월한 A급으로(열정과 비전), 두 번째 70%는 회사의 중추이자 성공적인 업무수행에 필요한 B급(헌신과 성실성), 나머지 10%는 업무수행을 할 능력이 없는 C급(계산하고 안주해)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A급과 B급의 차이를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의 유지에는 B급의 인재들이 중요하지만 기업의 성패를 위해서 A급을 발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C급의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찾아내서 내보내었다고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지 못하게 하고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인사정책을 쓴다면 무슨 방법을 쓰겠습니까? 열정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사단이 악령과 함께 성도를 무찌르고 넘어지게 하는 무기 전시회를 열었답니다. 무기 밑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장 비싼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대장인 마귀에게 물었답니다. "왜 이 무기는 다른 것에 비해 크지도 않은데 이렇게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까?" 마귀가 대답했답니다. "이 무기는 백발백중 서서히 넘어지게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지." 그 무기는 쉽게 구할 수있고 도처에 널려 있는 낙망이라는 무기였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 중의 하나가 낙심입니다. "나같은 것이, 이제 도무지 할 수 없어, 이제 끝이야, 교회에 나가서 기도해도 소용없어, 이 나이에 무엇을, 우리 가정은 어쩔 수없어, 우리 아이들은 , 우리 남편은, 우리 나라는, 우리 교회는 별수 없어" 낙심합니다. 낙심은 무서운 정신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낙심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낙심하면 자신의 가치를 평가 절하합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 절하합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우리말 큰 사전에는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이라고 해설해 놓았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완전히 분쇄된다. 용해된다."라는 뜻이 있고, 헬라어로는 "무가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게 하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인생을 황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낙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3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면 우리는 인생을 좀더 열정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그 세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것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16)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 때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예를 잃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인기, 재물, 친구, 건강을 상실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대기업 회장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회사가 부도나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 사람 얼마나 낙심하겠습니까? 일년 전만 해도 부하 수 천명을 거느리는 연대장으로 있었는데, 일년 전만해도 대기업 부장으로 있었는데 옷을 벗고 나니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누가 받아 주는 곳이 없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집니다. 몸은 점점 말을 듣지 않습니다. 건강이 상실됩니다. 이럴 때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어느날 자식들이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 헛살았구나 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늙어서 건강도 상실하고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노후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랑했던 제자들도 떠나버리고 자신이 개척한 일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일관성이 없다고 배척을 받고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글을 잘 쓰는 데 설교는 시원찮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상실의 대표적인 건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겉사람의 후패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상실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질그릇(7), 몸(10), 죽을 육체(11) 옛사람(롬6:6; 엡4:22)을 말합니다. 즉 피조물로서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패한다는 말은 사전적 용어로는 "썩어서 못쓰게 됨. 썩어 문드러짐. 또는 철저하게 부패하다. 파괴하다. 전적으로 썩다."라는 뜻입니다. "후패" 자신이 늙어 간다는 것을 느끼는 세대들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감"입니다. 건강하고 탄력있던 육체가, 촉촉하고 그렇게도 아름답던 육체가 쪼글쪼글해져 갑니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사서 바르고 오이 맞사지를 하고 몸에 좋다는 보약을 먹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기력이 썰물처럼 밀려 갈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서히 죽음이 밀물처럼 다가옴을 느낄 때 이제 끝났구나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상실감으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속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속사람입니다.
2) 바울은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는 것을 확신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속사람은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골3:10)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올 세대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갱신된다.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겉 사람은 끊임없는 고난과 수고로 인하여 닳아 없어지고 쇠약해지지만 속 사람은 마치 씨앗이 썩어짐으로 그 속에서 새 싹이 터 나오는 것 같이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고 인격인 성숙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3)우리는 겉사람의 상실감으로 낙심하지 말고 속사람의 새로워 짐으로 소망을 갖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쇠퇴를 보면 낙심할 수 밖에 없으나 우리 인생은 속사람 영혼이 있습니다. 속사람의 성숙을 보며 새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쇠퇴는 결코 속사람의 성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쇠퇴하는 것을 보면 더욱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80살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120세때에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75세에 이민을 갔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약속의 땅을 차지 하기 위해 사령관이 되어 전투에 임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노년에 새로운 가문을 이루어냈습니다. 건강잃었다고 재산 잃었다고 직장잃었다고 가까운 사람들 잃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상실은 우리의 겉사람에서 속사람으로 관심을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속사람이 날로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겉사람의 상실은 오히려 속사람을 더욱 새롭게 하는 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소유한 모든 것은 결국 다 상실하고 말 것들입니다. 한 가지도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되어야 합니다(엡 4:15;골 3:10). 아무리 아름답고 건간한 사람일지라도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입니다. 그러나 속사람 우리의 영혼은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존재입니다. 상실이 결코 상실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목표 달성의 장애물로 오는 낙심(17)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썻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앞에 놓여 목표를 이룰 수 없을 때입니다. 대학진학을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하여 낙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것뿐입니까? 연애를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사업을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이룰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면 낙심해 버립니다. 상담학자 로렌스 J. 크렙은 장애물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필요를 느끼게 되어 동기가 유발되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기본적인 가정들을 만들을 목표를 향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법관이 되어야하겠다고 생각한 학생은 법관이 되기 위해 법대를 목표해 놓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다가 옵니다. 이 장애물의 그는 법주를 세가지로 말을 합니다. ①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목표 자체를 잘못세우는데서 오는 장애물입니다. 장애물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사람은 죄책감(자기 능력에 맞지 않는 목표)이 생기고 낙심하게 됩니다. ②외부적인 환경입니다. 장애물이 부모님의 가난 때문에 공부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때는 이학생은 부모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역시 낙심합니다. ③장애물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미리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애물 때문에 불안해 하고 결국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장애물이 온다하여도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1) 바울은 장애물로 다가온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정도 주를 위해 수고했으면 나이들어 이제는 조금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어서도 로마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는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고후 1:8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8)" 고후 11:23-27절에는 바울이 당한 환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이 정도의 환난, 이 정도의 장애물이면 낙심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8)"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주를 위해 일했는데 댓가가 이런 것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주를 위해 고생했다면 늙어서는 조금은 편안히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2) 바울은 오히려 이런 고난을 경한 것,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래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그 환난은 오히려 가볍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와 '영원' 그리고 '경한 것'과 '능한 것'의 극명(克明)한 대조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환난은 가볍고 일시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환난을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1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광에 비해 현재의 환난은 가볍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 환난을 당하나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 받는 환난이 장차 누릴 영광의 원인이 된다고 행각했습니다. 주를 위해 환난을 당한 만큼 영광도 크다는 말입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고 그 환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영광이 달라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 우리는 장애물을 만날 때 그 장애물을 거침돌이 되어 낙심되는 것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고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어내는 소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물이라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애물에 부딪쳐 넘어져 낙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물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급의 도구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주신 기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파도를 타는 사람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파도를 즐기는 것입니다. 환난은 영광스러운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믿는 사람에게 주는 환난은 환난도 우리에게 준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바라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더욱 순결해 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고 시련없이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은 그만큼 더 많은 시련을 거친 결정체인 것입니다. 폭풍우는 참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게 박히게 하고 쇠붙이는 달구지 않고는 좋은 연장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웅은 전쟁 중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장애물없이 어떻게 아브라함이, 모세가, 야곱이, 요셉이, 욥이, 느헤미야가, 바울이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겠습니까? 그들은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고 더욱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그마한 장애물이 와도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장애물이 오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큰 능력을 체험받고 더 많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어떤 장애물일지라도 디딤돌로 삼고 일어나 장애물로부터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장애물은 낙심의 도구가 아니라 더 큰 상급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18)
사람들이 낙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가를 받을 때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그 대가가 결국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밤새워 공부했는데 60점을 맞았습니다. 불철주야 기도하며 목회했는데 10년이 지나도 교회가 성장되지 않습니다. 밤잠 자지 못하며 회사를 일구었는데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고 자식들을 가르쳤는데 결국 자식들이 탈선하였습니다. 이럴 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1) 사도 바울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열심히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파당을 지어 싸웁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근친 상간을 하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돌아 온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있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재산이 있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무수히 많은 제자들이 따랐습니까? 노년까지 집한채도 없이 감옥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출세한 아들 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존경하며 따른 것도 아닙니다. 다들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자 떠나 버렸습니다. 질병에 거려 있습니다. 세상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얼마나 낙심할 상황입니까? 사도행전 28장 30절을 보십시오. 셋방살이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기대치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 18절을 보십시오.
2)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안는 영원한 것에 기대를 걸고 살았습니다.
돌아 본다는 말은 '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궁극적으로 이세상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소망을 두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은 영원한 세계였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3) 우리는 이 세상 기대치를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면 누구나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충족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 기르면 기른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그것 대가 받으려고 하면 실망합니다.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해요. 결혼 해보십시오. 자기들 좋다고 합니다. 부모님 오는 것 꺼립니다. 짝사랑 하지 말아요. 김치 가지고 가면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 놓고 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서운생각 할 것없습니다. 실망할 것없어요. 인간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안 그랬습니까? 부모님 얼마나 서운하게 했습니까? 그저 이 땅에서 수고하고 봉사한 것 다 누릴려고 하면 남는 것은 실망 밖에 없습니다. 개혁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돌보는 것,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헌신하는 것, 늙으신 부모님 위해 희생하는 것 너무 대가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끝내야합니다. 너무 대가를 받으려고 하면 낙심합니다. 오늘 성경 보십시오. 보이는 것 잠깐입니다. 이 땅 잠깐 살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관심 갖는 것 잠깐입니다.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이 땅에 일어나는 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물을 주님이 닦아 주십니다. 이 땅에서 다 대가 받지 말고 닦아줄 눈물 가지고 가야합니다. 계7:17을 보세요.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계21: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낙심 사단이 사용하기 가장 편리하고 가장 흔하고 가장 치명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서서히 썩어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싹을 잘라버리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16), 목표 달성의 장애물로 오는 낙심(17),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18)의 늪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겉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에 관심을 가지므로서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 달성의 장애물을 만날 때 그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아 환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할 때 장애물을 통해 오는 낙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에 못미치는 대가에서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에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비아냥 거리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 받은 직분임으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8절을 보십시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십시오. 다시한 번 낙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라는 말을 보면 앞의 말을 받는 것같습니다.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1절).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14절)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낙심하지 않고는 못살겠지만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속사람 바라보며,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상급 바라보며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 3대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고린도후서4:16-18/김필곤 목사(2002.4.14 대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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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 사사기 변질 되지 말아야할 부모와 자식관계 삿14:5-9  김필곤 목사  2010-02-06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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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0 창세기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길 창4:1-15  김필곤 목사  2010-02-06 2475
2869 마태복음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마6:19-34  김필곤 목사  2010-02-06 2236
» 고린도후 인생 3대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 고후4:16-18  김필곤 목사  2010-02-06 2962
2867 요한복음 가장 귀중한 만남 요1:35-42  김필곤 목사  2010-02-06 3051
2866 요한복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20:11-18  김필곤 목사  2010-02-06 2517
2865 고린도전 십자가의 능력/ 고전1:18-25  김필곤 목사  2010-02-06 4558
2864 마가복음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는 신앙 막4:35-41  김필곤 목사  2010-02-06 2686
2863 예레애가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애3:19-33  김필곤 목사  2010-02-06 3754
2862 고린도후 믿음직스러운 자(청지기 같은) 고후8:16-24  최장환 목사  2010-02-06 1735
2861 사도행전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행23:17-35  이한규 목사  2010-02-04 2981
2860 사도행전 칭찬과 격려의 힘 행23:11-16  이한규 목사  2010-02-04 3845
2859 사도행전 담대함의 3대 원천 행23:1-10  이한규 목사  2010-02-04 2669
2858 사무엘상 사랑의 3대 정의 삼상23:13-17  이한규 목사  2010-02-04 2536
2857 사도행전 사명을 따르는 삶의 축복 행22:22-30  이한규 목사  2010-02-04 2917
2856 사도행전 신앙생활의 36계 행22:1-21  이한규 목사  2010-02-04 2432
2855 사도행전 축복으로 가는 비포장도로 행21:27-40  이한규 목사  2010-02-04 2758
2854 사도행전 리더십의 원천 행21:15-26  이한규 목사  2010-02-04 2632
2853 시편 축복의 4요소 시37:22-29  이한규 목사  2010-02-04 2536
2852 창세기 아브라함의 죽음 창25:1-18  이정원 목사  2010-02-03 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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