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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4: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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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학습성 무력감(學習性無力感 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좌절의 경험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낙관주의의 심리학(positive psychology)’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셀리그먼 박사가 연구하여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는 메이어(Steven Maier) 교수와 함께 개를 가지고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개를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상장에 집어 넣고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개는 벽을 뛰어 넘으면 전기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을 하기 전에 세 집단의 개들을 서로 다른 조치를 받았습니다. 한 집단은 사전에 전기 충격을 전혀 받지 않았고 한 집단은 전기 충격을 줄 때 머리를 움직여 판을 누르면 전기 충격이 중지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집단은 머리로 아무리 판을 두드리더라도 전기 충격이 멈추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전에 훈련시킨 개를 시험 상자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실험대에 오른 개는 처음 전기 충격을 받자 미친 듯이 날뛰다가 우연히 장벽을 기어 오르고 충격을 도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행에서 개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더 빨리 장벽을 넘었습니다. 몇 번 하니까 아주 능률적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기 충격에서도 도피할 수 없는 훈련을 받은 개는 달랐습니다. 상자에 들어가 전기 충격을 받자 약 30초 동안 미친 듯이 날뛰다가 그리고 나서 움직이기를 멈추고 넘어져서 조용히 낑낑 울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분이 지나면, 충격은 자동적으로 중지되게 해 놓았습니다. 다음 시험에서도 이 개는 다시 도피하지 못했고 처음에는 약간의 노력을 보이지만, 그 다음에는 곧 단념하고 수동적으로 충격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습성 무력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않되면 자신은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밤새워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별수 없구나 공부할 수 있는 채질이 아니구나라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신앙의 무기력 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별 수 없어 늘 발전이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도도 할 수 없고, 나는 성격이 좋아 질 수도 없고, 나는 행복해 질 수도 없고, 나는 발전할 수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무기력 증에 사로잡혀 그럭 저럭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살고 별로 나아질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교회 나와도 그만 안나와도 그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운명론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무기력 증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1. 먼저 패배주의 의식에서 벗어나 승리의식으로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상상력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생활과 운명의 큰 변화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생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 잠언 23:7에서도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인간의 잠재력과 개인의 효율성을 개발하는 미국 최고 수준의 권위자 중의 하나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절대 변하지 않는 8가지 성공원칙"이라는 책에서 정작 성공한 사람은 3%로 밖에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법칙이 있다고 '검증된 성공의 법칙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 중에서 생각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창조적인 힘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고 생각을 바꾸면 몇 초 안에 생활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조가 중요합니다. 실패를 계속하게 되면 마음의 구조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이 됩니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 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실패를 반복하게 되면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패배주의에서 마음을 바꾸어 승리주의로 가득채워야 합니다. 실패했을 때 마음대로 일이 안될 때 그것을 보는 관점이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개발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없이 침체되게 되어 있습니다. 비관적이 아니라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셀리그먼은 무기력의 학습을 3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단계는 아무리 노력(행동)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아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2단계는 현재의 상황이나 고통을 참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깨닫고 무력감을 학습한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그 무력감은 상황이 변해도 새로운 학습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안되었으니 오늘도 미래도 안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째 되는 해입니다(삼상13:1). 사울은 정예부대 3천을 골라 놓고 모두 집으로 보내어 버렸습니다. 그중 1천을 아들 요나단에게 주었는데 요나단이 블레셋 족속이 세워 놓은 전승비를 때려 부수고 그것을 지키던 블레셋 군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가장 힘이 강력한 블레셋이 가만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전차 3만입니다. 기마병이 육천입니다. 보병을 해변의 모래같이 많이 거느리고 쳐들어 왔습니다(5). 이스라엘 군인은 겨우 3천입니다. 전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위 틈에 숨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떨었습니다(7). 흩어졌습니다(8). 심지어는 우물로 숨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급하니까 제사장이 해야할 번제를 드려 버리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로부터 이 일로 책망을 받습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떠나버립니다. 그들은 무기도 변변치 못합니다. 당시 블레셋은 무기를 제조하지 못하도록 기술을 단속하여 대장장이가 없었습니다. 현제도 강대국이 쓰는 무기 정책이 아닙니까? 미국이 자신들은 핵무기를 만들고 첨단 무기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약소국은 무기 못만들도록 규제하지 않습니까? 이제 남아 있는 군인은 겨우 600명입니다(15). 블레셋은 세방향으로 특공대를 만들어 쳐들어 옵니다. 결국 패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무기력 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과 백성의 이런 무기력 증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전쟁에 동참하게 만들고 결국 승리하게 만든 한 인물이 오늘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요나단과 그의 부관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가득 차 있는 패배감을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의 자세입니다. 패배감이란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패배감으로 인한 무기력증도 먼저 마음의 병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패배감에 사로잡혀있을 때 요나단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보십시오.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전초부대를 향하여 돌진하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군인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과 부관 둘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사람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신앙적인 말입니까? 참으로 대단한 신앙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으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말입니다. 우린 어떤 경우에도 패배감에 사로잡혀 무기력증으로 쓰러져서는 아니됩니다. 환경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보면 우리는 패배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습관을 고치려 해도 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업을 잘 해보려해도 사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 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 장애물을 보면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니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능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나단과 그의 부하 두명이지만 바다의 모래와 같은 사람을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이기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백성들은 다 메뚜기같다고 떨고 있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나아가 정복하였습니다. 신앙인이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죽음에도 희망을 갖는 것이 신앙인이 아닙니까? 무기력증에 빠져 "나는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되는 것이 없다. 나는 실패자고 나는 가난할 수 밖에 없고 나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라는 말하지 마십시오. 패배 의식에 사로 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누구입니까? 온 천하보다 귀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고 산 자들입니다.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 찬양-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함이라/ 이것을 너희이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하려함이라"
바울도 로마서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6절을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없는 것 보며 포기하지 말고 가진 것 가지고 집중해서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힘을 비교하여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쉽게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몇차례 해보다 안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야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지금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무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전차가 있고 기마병이 있습니다. 칼과 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칼과 창이 없습니다. 겨우 사울왕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있습니다(삼상13:22). 군대를 비교해 보십시오. 3000명이었는데 그것도 도망가 버리고 600명만 남았습니다. 블레셋 군인은 전차병만 3만대이고 기마병 6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같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십시오. 군인의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까? 마음만 가지고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차도 없습니다. 기마병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칼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삼상 13장 22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칼과 창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계산법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없는 것만 자꾸 봅니다. 그리고 무기력해 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느냐고 나는 못배웠다고 나는 능력이 없다고 나는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나는 이미 늙었다고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나는 말이 둔하다고 늘 없는 것만 보며 절망하며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손에 지팡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집중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운동선수, 예술가, 과학자, 작가 등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작업에 몰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 가지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고 만족감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다 얻을 수도 없고 모든 것 다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 주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데 칼 10자루 필요 없는 것입니다. 칼 한 자루가 가장 전쟁에는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열 자루가 있으면 전쟁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이미 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요나단은 나가 싸웁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부관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불충성하고 배신하는 만명의 군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충성 스러운 부관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 가지고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가지고 원망하지 않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변화 심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앤서니 라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97년, 국제상공회의소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10인"에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10년 전 캘리포니아 베니스에 있는 10여 평의 독신자 아파트에 앉아서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가난뱅이 뚱보였다고 합니다. 고작 고등학교 졸업장밖에 갖지 못한 새파란 젊은이였지만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가 온 것은 "능력의 집중"이라는 원칙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천만부 이상 팔린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책에서 사람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능력의 집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절된 집중력은 레이저 광선 같아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떤 것이라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취미 삼아 해보는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잠자는 거인, 즉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재능과 자질, 그리고 자신만의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 하나를 집중적으로 개발하면 사람은 변화가 되고 그 변화된 사람에 의해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루어 내는 것은 어쩌다 한 번 하고 마는 행동이 아니라 꾸준하게 계속되는 행동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낙관주의의 심리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셀리그먼 박사는 낙관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언제나 즐겁다. 만족스럽다. 돈이 있다. 이것이 낙관주의의 인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낙관주의란 ‘희망’을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 실패하거나 쓰라린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은‘행동’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바로 낙관주의인 것입니다.”생각은 행동화되어야 합니다. 있는 것 가지고 집중하여 행하면 무엇인가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나아 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요나단을 보십시오. 7절을 보십시오. 있는 것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입니다.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야 합니다. 앞서 가야 합니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있는 것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버티고 있습니다. 신장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큰 칼을 가졌습니다. 그 때 그는 무엇으로 싸웠습니까? 칼과 창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목동으로 이미 익숙한 물매와 돌 다섯개를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삼상 17:40). 그리고 그것으로 그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배고파 굶주릴 때 예수님은 무엇으로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어린 아이의 보리떡 5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장정만 5천명입니다. 비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있는 것으로 축사하시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우고 12 광주리를 남기었습니다. 없는 것 보고 포기하며 무기력증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갈멜산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아합왕이 무릎꿇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쫓아 오자 그는 산속으로 도망가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합니다.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나 홀로 남았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이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지팡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형 아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 보며 무기력증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주신 것이 하나님께 헌신될 때 기적을 일으킵니다. 없는 것 보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보면서 무기력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아직 남아 있는 건강이 있고 아직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청교도 황태자라고 불리우는 스펄전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날 어느 여인이 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거부했지만 계속적인 간청으로 그를 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여인은 바틀렛 여사였고 주교 체용된 때는 1859년 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 없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전도합니다. 매주 발전하여 주일학교 학생 700명을 전도하였습니다. 등록 교인 1000여명을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입술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여인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여인의 말을 들어 보세요." 외칩니다. 마지막 하늘 나라에 부름 받았을 때 그의 무덤 묘비명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을 추억하며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의 목사 이하 제직들과 주일학교 어린학생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가 된 그의 말을 여기에 새긴다. 자매여 십자가로 가까이 오세요"라는 글을 스펄전 목사님은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있는 것이 있습니다.
3. 이성의 노예가 되어 주저앉지 말고 믿음으로 진력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이성의 노예가 되면 반드시 무기력증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신앙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적인 말씀을 먹기 싫습니다. 입을 벌려 전도하기도 싫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생깁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이성이 신앙에 의해 쓰임받을 때 날개를 다는 것이지 이성의 노예가 될 때는 오히려 그 이성 때문에 무기력증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전력에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패전한다는 결론 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숫적으로 비교되지 않지만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합니다.
심리학자 프레드릭 플래치는 신앙심을 위기극복 능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성이 믿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함께 여행할까?" 믿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함께 여행할 수 없어" 이성은 계속 믿음에게 동행해 줄 것을 졸랐습니다. 믿음이 거절했지만 이성은 막무가내로 믿음을 따라 나섰습니다. 할 수 없이 믿음은 이성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를 여행한 후 둘이는 깊고 넓은 강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 나는 이 강을 건널 수 없어" 이성은 절망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성을 등에 없고 그 강을 건넜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둘은 높은 산을 만났습니다. 그때 이성은 외쳤습니다. "우린 이 산을 넘지 못할거야. 되돌아 가자고" 믿음은 산을 바라보며 이성에게 넘어가자고 권했습니다. 이성은 주저 앉아 징징 거렸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산에는 무서운 호랑이도 있고 별별 이유를 다 대었습니다. 이성은 한치도 앞으로 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혼자 남겨 둘 수 없었습니다. 다시 이성을 등에 없고 그 산을 넘었습니다. 여행 내내 이성은 믿음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여행을 즐기는 좋은 길동무였습니다.
어떤 절벽 앞에서도 어떤 강 앞에서도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지 않고 건너가게 하고 넘어가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한번 7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리력증을 극복하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요나단의 믿음의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요나단의 작전 계획을 보십시오. 단순합니다. 8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매복하여 언덕에 이르러 몸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적들이 꼼짝 말아라 우리가 내려 갈 때까지 그대로 기다려라라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있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로 올라오너라라고 하면 올라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넘겨 주겠다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참으로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믿음의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떨림이 일어납니다(삼상 14: 15,19,20, 19: 7-4; 14: 15), 하나님이 동사하십니다(삼상 14:45), 큰 구원을 이루고(삼상 14: 23,39,45, 삼하 23: 9-12, 삼상 19:5). 낙망했던 사람에게 새 용기를 주게 됩니다.(삼상 14: 21-22, 삿 5: 13, 학 1 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며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 승리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풍요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97장 1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장들을 보십시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인생을 승리고 이끈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우상 장사의 아들입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조카와 불협화음으로 가정 갈등을 가진 사람입니다. 홀홀 단신으로 이민 갔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그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17-24)"
다윗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 거대한 힘 앞에 주저 앉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보십시오. 백성들 모두가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무기력증으로 주저 앉았을 때 그들은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9)"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 싸워 이겼습니다.
무기력증에서 해방되는 길 /사무엘상14:6-15/2002. 5.19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사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않되면 자신은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밤새워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별수 없구나 공부할 수 있는 채질이 아니구나라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신앙의 무기력 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별 수 없어 늘 발전이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도도 할 수 없고, 나는 성격이 좋아 질 수도 없고, 나는 행복해 질 수도 없고, 나는 발전할 수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무기력 증에 사로잡혀 그럭 저럭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살고 별로 나아질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교회 나와도 그만 안나와도 그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운명론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무기력 증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1. 먼저 패배주의 의식에서 벗어나 승리의식으로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상상력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생활과 운명의 큰 변화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생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 잠언 23:7에서도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인간의 잠재력과 개인의 효율성을 개발하는 미국 최고 수준의 권위자 중의 하나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절대 변하지 않는 8가지 성공원칙"이라는 책에서 정작 성공한 사람은 3%로 밖에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법칙이 있다고 '검증된 성공의 법칙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 중에서 생각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창조적인 힘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고 생각을 바꾸면 몇 초 안에 생활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조가 중요합니다. 실패를 계속하게 되면 마음의 구조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이 됩니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 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실패를 반복하게 되면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패배주의에서 마음을 바꾸어 승리주의로 가득채워야 합니다. 실패했을 때 마음대로 일이 안될 때 그것을 보는 관점이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개발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없이 침체되게 되어 있습니다. 비관적이 아니라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셀리그먼은 무기력의 학습을 3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단계는 아무리 노력(행동)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아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2단계는 현재의 상황이나 고통을 참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깨닫고 무력감을 학습한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그 무력감은 상황이 변해도 새로운 학습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안되었으니 오늘도 미래도 안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째 되는 해입니다(삼상13:1). 사울은 정예부대 3천을 골라 놓고 모두 집으로 보내어 버렸습니다. 그중 1천을 아들 요나단에게 주었는데 요나단이 블레셋 족속이 세워 놓은 전승비를 때려 부수고 그것을 지키던 블레셋 군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가장 힘이 강력한 블레셋이 가만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전차 3만입니다. 기마병이 육천입니다. 보병을 해변의 모래같이 많이 거느리고 쳐들어 왔습니다(5). 이스라엘 군인은 겨우 3천입니다. 전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위 틈에 숨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떨었습니다(7). 흩어졌습니다(8). 심지어는 우물로 숨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급하니까 제사장이 해야할 번제를 드려 버리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로부터 이 일로 책망을 받습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떠나버립니다. 그들은 무기도 변변치 못합니다. 당시 블레셋은 무기를 제조하지 못하도록 기술을 단속하여 대장장이가 없었습니다. 현제도 강대국이 쓰는 무기 정책이 아닙니까? 미국이 자신들은 핵무기를 만들고 첨단 무기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약소국은 무기 못만들도록 규제하지 않습니까? 이제 남아 있는 군인은 겨우 600명입니다(15). 블레셋은 세방향으로 특공대를 만들어 쳐들어 옵니다. 결국 패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무기력 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과 백성의 이런 무기력 증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전쟁에 동참하게 만들고 결국 승리하게 만든 한 인물이 오늘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요나단과 그의 부관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가득 차 있는 패배감을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의 자세입니다. 패배감이란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패배감으로 인한 무기력증도 먼저 마음의 병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패배감에 사로잡혀있을 때 요나단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보십시오.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전초부대를 향하여 돌진하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군인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과 부관 둘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사람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신앙적인 말입니까? 참으로 대단한 신앙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으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말입니다. 우린 어떤 경우에도 패배감에 사로잡혀 무기력증으로 쓰러져서는 아니됩니다. 환경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보면 우리는 패배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습관을 고치려 해도 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업을 잘 해보려해도 사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 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 장애물을 보면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니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능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나단과 그의 부하 두명이지만 바다의 모래와 같은 사람을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이기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백성들은 다 메뚜기같다고 떨고 있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나아가 정복하였습니다. 신앙인이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죽음에도 희망을 갖는 것이 신앙인이 아닙니까? 무기력증에 빠져 "나는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되는 것이 없다. 나는 실패자고 나는 가난할 수 밖에 없고 나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라는 말하지 마십시오. 패배 의식에 사로 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누구입니까? 온 천하보다 귀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고 산 자들입니다.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 찬양-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함이라/ 이것을 너희이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하려함이라"
바울도 로마서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6절을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없는 것 보며 포기하지 말고 가진 것 가지고 집중해서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힘을 비교하여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쉽게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몇차례 해보다 안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야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지금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무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전차가 있고 기마병이 있습니다. 칼과 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칼과 창이 없습니다. 겨우 사울왕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있습니다(삼상13:22). 군대를 비교해 보십시오. 3000명이었는데 그것도 도망가 버리고 600명만 남았습니다. 블레셋 군인은 전차병만 3만대이고 기마병 6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같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십시오. 군인의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까? 마음만 가지고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차도 없습니다. 기마병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칼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삼상 13장 22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칼과 창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계산법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없는 것만 자꾸 봅니다. 그리고 무기력해 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느냐고 나는 못배웠다고 나는 능력이 없다고 나는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나는 이미 늙었다고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나는 말이 둔하다고 늘 없는 것만 보며 절망하며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손에 지팡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집중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운동선수, 예술가, 과학자, 작가 등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작업에 몰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 가지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고 만족감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다 얻을 수도 없고 모든 것 다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 주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데 칼 10자루 필요 없는 것입니다. 칼 한 자루가 가장 전쟁에는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열 자루가 있으면 전쟁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이미 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요나단은 나가 싸웁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부관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불충성하고 배신하는 만명의 군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충성 스러운 부관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 가지고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가지고 원망하지 않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변화 심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앤서니 라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97년, 국제상공회의소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10인"에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10년 전 캘리포니아 베니스에 있는 10여 평의 독신자 아파트에 앉아서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가난뱅이 뚱보였다고 합니다. 고작 고등학교 졸업장밖에 갖지 못한 새파란 젊은이였지만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가 온 것은 "능력의 집중"이라는 원칙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천만부 이상 팔린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책에서 사람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능력의 집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절된 집중력은 레이저 광선 같아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떤 것이라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취미 삼아 해보는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잠자는 거인, 즉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재능과 자질, 그리고 자신만의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 하나를 집중적으로 개발하면 사람은 변화가 되고 그 변화된 사람에 의해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루어 내는 것은 어쩌다 한 번 하고 마는 행동이 아니라 꾸준하게 계속되는 행동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낙관주의의 심리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셀리그먼 박사는 낙관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언제나 즐겁다. 만족스럽다. 돈이 있다. 이것이 낙관주의의 인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낙관주의란 ‘희망’을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 실패하거나 쓰라린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은‘행동’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바로 낙관주의인 것입니다.”생각은 행동화되어야 합니다. 있는 것 가지고 집중하여 행하면 무엇인가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나아 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요나단을 보십시오. 7절을 보십시오. 있는 것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입니다.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야 합니다. 앞서 가야 합니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있는 것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버티고 있습니다. 신장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큰 칼을 가졌습니다. 그 때 그는 무엇으로 싸웠습니까? 칼과 창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목동으로 이미 익숙한 물매와 돌 다섯개를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삼상 17:40). 그리고 그것으로 그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배고파 굶주릴 때 예수님은 무엇으로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어린 아이의 보리떡 5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장정만 5천명입니다. 비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있는 것으로 축사하시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우고 12 광주리를 남기었습니다. 없는 것 보고 포기하며 무기력증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갈멜산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아합왕이 무릎꿇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쫓아 오자 그는 산속으로 도망가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합니다.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나 홀로 남았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이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지팡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형 아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 보며 무기력증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주신 것이 하나님께 헌신될 때 기적을 일으킵니다. 없는 것 보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보면서 무기력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아직 남아 있는 건강이 있고 아직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청교도 황태자라고 불리우는 스펄전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날 어느 여인이 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거부했지만 계속적인 간청으로 그를 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여인은 바틀렛 여사였고 주교 체용된 때는 1859년 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 없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전도합니다. 매주 발전하여 주일학교 학생 700명을 전도하였습니다. 등록 교인 1000여명을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입술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여인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여인의 말을 들어 보세요." 외칩니다. 마지막 하늘 나라에 부름 받았을 때 그의 무덤 묘비명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을 추억하며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의 목사 이하 제직들과 주일학교 어린학생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가 된 그의 말을 여기에 새긴다. 자매여 십자가로 가까이 오세요"라는 글을 스펄전 목사님은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있는 것이 있습니다.
3. 이성의 노예가 되어 주저앉지 말고 믿음으로 진력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이성의 노예가 되면 반드시 무기력증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신앙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적인 말씀을 먹기 싫습니다. 입을 벌려 전도하기도 싫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생깁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이성이 신앙에 의해 쓰임받을 때 날개를 다는 것이지 이성의 노예가 될 때는 오히려 그 이성 때문에 무기력증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전력에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패전한다는 결론 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숫적으로 비교되지 않지만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합니다.
심리학자 프레드릭 플래치는 신앙심을 위기극복 능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성이 믿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함께 여행할까?" 믿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함께 여행할 수 없어" 이성은 계속 믿음에게 동행해 줄 것을 졸랐습니다. 믿음이 거절했지만 이성은 막무가내로 믿음을 따라 나섰습니다. 할 수 없이 믿음은 이성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를 여행한 후 둘이는 깊고 넓은 강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 나는 이 강을 건널 수 없어" 이성은 절망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성을 등에 없고 그 강을 건넜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둘은 높은 산을 만났습니다. 그때 이성은 외쳤습니다. "우린 이 산을 넘지 못할거야. 되돌아 가자고" 믿음은 산을 바라보며 이성에게 넘어가자고 권했습니다. 이성은 주저 앉아 징징 거렸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산에는 무서운 호랑이도 있고 별별 이유를 다 대었습니다. 이성은 한치도 앞으로 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혼자 남겨 둘 수 없었습니다. 다시 이성을 등에 없고 그 산을 넘었습니다. 여행 내내 이성은 믿음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여행을 즐기는 좋은 길동무였습니다.
어떤 절벽 앞에서도 어떤 강 앞에서도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지 않고 건너가게 하고 넘어가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한번 7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리력증을 극복하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요나단의 믿음의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요나단의 작전 계획을 보십시오. 단순합니다. 8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매복하여 언덕에 이르러 몸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적들이 꼼짝 말아라 우리가 내려 갈 때까지 그대로 기다려라라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있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로 올라오너라라고 하면 올라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넘겨 주겠다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참으로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믿음의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떨림이 일어납니다(삼상 14: 15,19,20, 19: 7-4; 14: 15), 하나님이 동사하십니다(삼상 14:45), 큰 구원을 이루고(삼상 14: 23,39,45, 삼하 23: 9-12, 삼상 19:5). 낙망했던 사람에게 새 용기를 주게 됩니다.(삼상 14: 21-22, 삿 5: 13, 학 1 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며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 승리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풍요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97장 1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장들을 보십시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인생을 승리고 이끈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우상 장사의 아들입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조카와 불협화음으로 가정 갈등을 가진 사람입니다. 홀홀 단신으로 이민 갔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그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17-24)"
다윗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 거대한 힘 앞에 주저 앉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보십시오. 백성들 모두가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무기력증으로 주저 앉았을 때 그들은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9)"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 싸워 이겼습니다.
무기력증에서 해방되는 길 /사무엘상14:6-15/2002. 5.19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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