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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요한계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36 추천 수 0 2010.02.10 16: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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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22:12-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085 
emoticon  2007.05.20.

27권으로 구성된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성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문학적으로 특이한 장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아주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작한 글쓰기를 가리켜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소설이나 산문에 비해서 현대의 난해시를 이해하기 어렵듯이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인 묵시문학도 그렇습니다. 극단적으로 난해한 현대시(詩)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컨대 요한계시록에는 옥좌, 두루마리, 일곱 봉인, 십사만사천명, 금향로, 일곱 천사의 나팔, 천년 왕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열두 대문 등등, 온갖 종류의 상징들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묵시문학적인 상징들은 종말에 일어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종말에 관한 일이라니요. 더 이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묘사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될 그 종말은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이게 오늘 우리의 삶과 연관이나 있는 겁니까? 이를 이해하려면 초기 기독교 기독교의 신앙을 잘 알아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묵시적인 종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완성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신약이며, 율법의 완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그 묵시적인 사건을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재림 신앙이 요한계시록의 결론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 말씀에 거듭해서 강조되었습니다. 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12절 말씀도 역시 그것을 말합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17,20절 참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분은 창조 이전에 계셨고,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다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십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알파이며 동시에 오메가이십니다. 오메가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14절과 15절이 설명하듯이 그는 ‘문’ 안에 거할 사람과 문 밖에 머물러야 할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런 기독교 신앙을, 즉 종말과 심판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잘 모릅니다. 그냥 막연하게 그런가 보다 하고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종말과 심판을 오늘 우리가 착하게 살라고 하는 가르침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종말과 심판 때문에 잠도 못잡니다. 그들은 유황불이 타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거나 천국에 가서 황금면류관을 쓸 기쁨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양 극단의 신앙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재림을 무시하고, 다른 한쪽은 현실의 삶을 무시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예수님의 재림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늘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인가요, 아니면 오늘의 삶은 의미가 없고 내세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내세주의인가요? 아마 여러분들은 양 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 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요즘 정치계에서는 중도가 각광을 받는 것 같지만 신앙에서 중도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주의와 내세주의 사이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그 두 가지를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현실과 내세의 중간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기독교인은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며, 동시에 극단적으로 내세적입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으며, 오늘 본문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전하고 있는 오늘 본문을 세밀하게 살펴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가 처한 복잡한 상황과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약간 복잡하게 진술되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포착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은 오늘 우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은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신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그는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라고 합니다. 성령, 교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받아 읽는 사람들도 “오소서!” 하고 외치라는군요. 왜 이렇게 외쳐야 합니까? 주님이 오셔야 앞에서 묘사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시작되기 때문이겠지요. 그 새로운 세계는 22:1-5절에 압축적으로 묘사되어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빛을 받기 때문에 태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세계입니다. 우리도 그런 때를 기다리며 삽니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그 이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을 사람들의 심정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주님이여 오소서! 사도바울도 고전 16:22절에서 아람어로 “마라나타!” 하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잠꼬대로 이런 노래를 부를 정도로 주님의 세계를 기다리면 삽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런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습니다. 부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지만 내심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한 많은 것들을 즐겨야하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계에서 제일 크게 키운 교회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런 교회와 아주 작은 교회인 샘터교회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세계선교 비전도 수포로 돌아갑니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들의 야망도 물거품이 됩니다. 우리 샘터교회가 어둠침침하던 27평에서 전망이 좋은 33평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서 쏟았던 노력도 헛수고가 됩니다. 저의 전망 좋은 서재도 접어야 합니다. 모르긴 해도 내일 당장 예수님이 오신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겁니다. 우리는 ‘마라나타’라는 노래를 부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다면 누가 이런 노래를 애타게 부를 수 있을까요? 답은 오늘 본문이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17b절) 이 구절은 이사야 55:1절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에 중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 7:37,38절) 그렇습니다. 목마른 사람만이 “예수여, 오소서!”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시 누가 목마른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은 지천입니다. 삶에 시달린 사람들은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이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 장애인들, 외국인 노동자들, 실직자들은 모두가 목마른 사람들이겠지요. 고3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나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겠지요. 가출한 청소년들과 미혼모들의 삶도 목마릅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목마른 사람만이 절대적인 세계를 강력히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일상의 문제로 인해서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이 파괴되는 일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팍팍하게 만드는지, 인간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겠지요. 복지사회의 목표는 바로 이런 종류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복지사회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문의 목마름을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장애를 고친다고 합시다. 비장애인들은 잘 알고 있듯이 비장애가 모든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실직자가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 기쁨은 잠시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적으로는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 같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 목마름은 여전합니다. 제삼세계에서는 꿈도 꾸기 힘들 정도로 풍요롭게 사는 선진국 국민들이 여전히 목말라한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예수님님이 주시는 생명의 세계는 복지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을 개선해나가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빈부격차를 꾸준히 줄여나가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일들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실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자리하도록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목마름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섭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당하는 고난과 투쟁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근원적으로 넘어서는 세계를 기다립니다. 그런 세계가 바로 하늘나라이며, 영생이며,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곧 영의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목마름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곧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은 곧 성령의 일이니까요. 도대체 영적인 사람, 또는 영적인 목마름은 무엇일까요? 영적인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목마름으로 목이 타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성령, 또는 영성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영적인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착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출석,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를 통한 경건생활을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와 해외 단기 선교, 선행과 봉사를 영적인 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일들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바로 성령의 일과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성령의 일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바람이 어떤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성령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계획과 노력으로 달성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설령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같이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겉모양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겠지만 창조와 생명의 영인 성령의 일은 아닙니다. 조금 엄밀하게 말한다면, 베드로 성당은 어떤 부분에서 반생명적인 건축물입니다. 성당의 완공에 모자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영적인 것이 될 수 있나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생명은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계획들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코끼리의 털 하나를 붙잡고 어떻게 코끼리를 말할 수 있나요? 영적인 일은 영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생명은 생명의 영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목마르다는 것은 생명의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아이를 키웁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는 동안 아이는 혼자서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 아이는 저녁때가 되어 엄마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장난감도 아이를 계속해서 즐겁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과자를 계속 먹을 수도 없습니다. 엄마가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때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본문 말씀으로 바꿔 대답해보세요.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20절)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기자의 이런 절박한 심정을 별로 진지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예 목마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목마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겠지요. 아직 완성된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우리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목마릅니다. 다만 그걸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컴퓨터 중독에 걸린 아이는 엄마가 오지 않아도 애가 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는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영적으로 예민한, 목마른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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