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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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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2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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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5.26
오늘 오후에 우리 나라 월드컵 축구팀과 현재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프랑스와 평가전이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대와 설레임이 있을 것입니다. 11시에 축구 시합이 있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 경기를 볼만큼 열광적인 축구팬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권투를 하도 좋아했는데 저녁에 있어서 저녁 예배 시간을 옮겨서까지 권투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낚시를 참 좋아했는데 어느날 낚시 도구를 챙겨 나가는데 길에서 만난 교회 집사님이 "어데 가세요"라고 그러드래요. 그래서 "보시다 시피 낚시갑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주일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오후 6시에 검찰에서 출두하라면 지금 어떤 기분이 들까요? 설레임과 기대가 있을까요? 불안할 것입니다. 오늘 오후 6시에 암 수술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더 불안할 것입니다. "혹시 수술 도중에 죽지는 않을까?" "마취에서 깨어나지는 않을까?" "의사가 실수하지 않을까?" "수술을 하였는데 이미 치료 불가능이라는 판정은 내리지 않을까?" 아주 불안할 것입니다. 결코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밥먹는 맛이 나지 않을 것이고 예배를 드려도 불안과 초조, 긴장으로 드릴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죽음 앞에 서 계시는 분이 놀라운 평안을 가지고 계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입니다. 이제 몇시간 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됩니다. 로마 군병들에 잡히고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그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 형을 당하여야 만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시면 제자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작별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요한복음 13:38참조), 제자 중 한 사람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한복음13:21~24참조)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살기는 제자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누리고 있는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평안을 가지고 일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이 평안을 잃지 않고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평안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 답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훈자라는 곳의 사람들은 120세를 넘겨 산다고 합니다. 병원도 없지만 죽을 때도 그 날의 밭일을 다 하고 저녁먹고 잠들고 아침에 가보니 조용히 죽어있음을 발견할 정도로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장수 비결은 마음의 평안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직장에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불확실한 생활을 매일매일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불행과 위험과 재난이 우리를 엄습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투명한 미래 가운데도 예수님처럼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은혜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우리가 평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우리가 가정 생활하는 것도 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본적인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2002.5월 23일 자 시사저널을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신장이상설’'중병설' 등이 나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통령의 일정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국무총리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나이에 아들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형 선고도 받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도 넘긴 분일지라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가진 자 일지라도 아들이 감옥에 가 있고 앞으로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르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걸리면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퍼마시고 아무리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허무만 남고 불안만 남습니다. 방탕한 인생을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제가 주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1)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있으므로 평안한 평안입니다. 그 조건이 있으면 평안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면 불안해 집니다.
2)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도나, 마음의 수양 등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고통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4)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평안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끼친다는 것요" 다른 하나는 "주노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은 전자는 화해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요, 후자는 고요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죄용서함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가졌다하여도 죄가 있으면 결코 이 평안을 맛볼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평안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여도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있는 사람이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평안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맨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이 평안은 은혜를 받을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단 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2. 성령 충만으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 평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아이가 아무 이야기 없이 12시까지 들어오지 않아 보십시오.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막상 상황을 만나면 그렇게 잘 조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문에 보조키 세 개를 단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우리의 내면 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성령이 떠나니까 그 순간부터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까? 심리적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위기 가운데서도 시를 짓고 찬양을 드립니다. 더욱 담대해지도 평안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얼마나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까? 감옥에 가서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1) 성령충만하면 확신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26, 28)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한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두렵고 겁이 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니까 그 내막을 모르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것을 알게 하고 성령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궁극적인 결과를 알게 됨으로 가지는 평안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28).
내가 간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결과적인 것으로서 부활할 것이고,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하고, 고난스러우나, 그 결과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여도 우리는 마지막 약속들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복음찬양 666)
환란과 고난이 면제된 평안이 아닙니다.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고난의 물결이 출렁이고, 전개될 미래는 암울한 폭풍우가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구름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구름 낀 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이깁니다. 극복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해도 성령님께서 넉넉히 그 문제에 의해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평안이야말로,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내는 평안이요, 모든 환란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참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으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깊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평안입니다. 파도 일렁인다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보십시오. 불안한 미래입니다. 죽음이 앞에 있는 미래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평안을 가집니다.
2)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밤길을 가면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손을 잡고 가면 평안합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은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옆에서 돕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요14:16-17을 보십시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영이십니다. 재벌과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주고, 권력자와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 주어 안심하고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어가도 두렵지 않는데 우리 성령님과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3. 기도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일어난 문제, 일어날 문제)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어느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친정 어머니 위암으로 앓고 있는데 자주 문병을 가지 못했답니다. 집안일과 자녀 일로 바쁘다 보니 가보지 못해 늘 죄송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오목가슴이 쓰리고 소화가 안되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인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나도 어머니처럼 위암이..?] 불안해서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병원에도 못갔답니다. 부인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진찰도 받아보기 전에 이미 자신이 위암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에 암이 걸린 것입니다. 위암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절망과 공포에 빠져버렸습니다. 자식의 잠든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나 죽으면 저 어린것의 고생이 얼마나 클까...]걱정이 태산같습니다. 문여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전화벨 소리,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 등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쓸데없는 공상과 잡념으로 머리속은 더욱 혼란하다. 초조감이 밀려오면 [이러다가 내가 미쳐서 길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뜻하지 않는 위협이 다가옵니다. 갈등이 몰려 옵니다. 어떤 사건으로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로 불안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예측되는 위협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로부터 이미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 인해서입니다. 과거 일어난 문제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래 일어날 문제로 인해 염려하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1)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하여도 마음의 평안은 빼앗기기 않습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면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풀릴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불안해 하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 먼저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주를 의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2)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를 풀어 주심으로 평안을 줍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를 보십시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불안합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미국의 생명수 교회의 사모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 태아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날 확률이 90% 이상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중증 장애인을 낳고 기르겠습니까? 아니면 제하겠습니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모님이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중증 장애인을 나에게 주면 그것을 하나님이 내 평생 지라는 십자가로 알고 저는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어찌 내 생명을 내가 죽이겠습니까? 죽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느데 낳자마자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동안 그 어머니는 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어머니는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를 가져와서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어린아이의 눈과 어머니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에 어린아이의 눈에 안개처럼 희미한 것이 덮여 있는데 이 아이 눈에서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벗겨져 맑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면서 벙긋벙긋 두 번 웃더랍니다. 너무 기뻐서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 울었는데 그 날 이후로 그 어린아이에게는 장애증상이 다 사라지고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체육도 잘 하고 음악도 잘 하고, 믿음이 좋아서 새벽마다 엄마, 아빠 따라 나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가장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있다"고 간증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되어 불안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 올 줄 믿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의원을 찾아 다니며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효험이 없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 옷에 손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우리 예수님께 나오면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 역사가 이루워질줄 믿습니다. 문제 앞에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요14:25-31/2002.5.26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오늘 오후에 우리 나라 월드컵 축구팀과 현재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프랑스와 평가전이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대와 설레임이 있을 것입니다. 11시에 축구 시합이 있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 경기를 볼만큼 열광적인 축구팬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권투를 하도 좋아했는데 저녁에 있어서 저녁 예배 시간을 옮겨서까지 권투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낚시를 참 좋아했는데 어느날 낚시 도구를 챙겨 나가는데 길에서 만난 교회 집사님이 "어데 가세요"라고 그러드래요. 그래서 "보시다 시피 낚시갑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주일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오후 6시에 검찰에서 출두하라면 지금 어떤 기분이 들까요? 설레임과 기대가 있을까요? 불안할 것입니다. 오늘 오후 6시에 암 수술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더 불안할 것입니다. "혹시 수술 도중에 죽지는 않을까?" "마취에서 깨어나지는 않을까?" "의사가 실수하지 않을까?" "수술을 하였는데 이미 치료 불가능이라는 판정은 내리지 않을까?" 아주 불안할 것입니다. 결코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밥먹는 맛이 나지 않을 것이고 예배를 드려도 불안과 초조, 긴장으로 드릴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죽음 앞에 서 계시는 분이 놀라운 평안을 가지고 계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입니다. 이제 몇시간 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됩니다. 로마 군병들에 잡히고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그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 형을 당하여야 만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시면 제자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작별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요한복음 13:38참조), 제자 중 한 사람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한복음13:21~24참조)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살기는 제자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누리고 있는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평안을 가지고 일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이 평안을 잃지 않고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평안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 답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훈자라는 곳의 사람들은 120세를 넘겨 산다고 합니다. 병원도 없지만 죽을 때도 그 날의 밭일을 다 하고 저녁먹고 잠들고 아침에 가보니 조용히 죽어있음을 발견할 정도로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장수 비결은 마음의 평안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직장에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불확실한 생활을 매일매일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불행과 위험과 재난이 우리를 엄습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투명한 미래 가운데도 예수님처럼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은혜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우리가 평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우리가 가정 생활하는 것도 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본적인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2002.5월 23일 자 시사저널을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신장이상설’'중병설' 등이 나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통령의 일정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국무총리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나이에 아들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형 선고도 받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도 넘긴 분일지라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가진 자 일지라도 아들이 감옥에 가 있고 앞으로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르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걸리면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퍼마시고 아무리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허무만 남고 불안만 남습니다. 방탕한 인생을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제가 주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1)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있으므로 평안한 평안입니다. 그 조건이 있으면 평안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면 불안해 집니다.
2)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도나, 마음의 수양 등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고통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4)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평안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끼친다는 것요" 다른 하나는 "주노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은 전자는 화해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요, 후자는 고요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죄용서함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가졌다하여도 죄가 있으면 결코 이 평안을 맛볼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평안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여도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있는 사람이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평안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맨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이 평안은 은혜를 받을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단 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2. 성령 충만으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 평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아이가 아무 이야기 없이 12시까지 들어오지 않아 보십시오.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막상 상황을 만나면 그렇게 잘 조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문에 보조키 세 개를 단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우리의 내면 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성령이 떠나니까 그 순간부터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까? 심리적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위기 가운데서도 시를 짓고 찬양을 드립니다. 더욱 담대해지도 평안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얼마나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까? 감옥에 가서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1) 성령충만하면 확신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26, 28)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한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두렵고 겁이 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니까 그 내막을 모르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것을 알게 하고 성령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궁극적인 결과를 알게 됨으로 가지는 평안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28).
내가 간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결과적인 것으로서 부활할 것이고,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하고, 고난스러우나, 그 결과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여도 우리는 마지막 약속들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복음찬양 666)
환란과 고난이 면제된 평안이 아닙니다.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고난의 물결이 출렁이고, 전개될 미래는 암울한 폭풍우가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구름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구름 낀 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이깁니다. 극복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해도 성령님께서 넉넉히 그 문제에 의해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평안이야말로,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내는 평안이요, 모든 환란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참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으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깊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평안입니다. 파도 일렁인다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보십시오. 불안한 미래입니다. 죽음이 앞에 있는 미래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평안을 가집니다.
2)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밤길을 가면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손을 잡고 가면 평안합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은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옆에서 돕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요14:16-17을 보십시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영이십니다. 재벌과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주고, 권력자와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 주어 안심하고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어가도 두렵지 않는데 우리 성령님과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3. 기도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일어난 문제, 일어날 문제)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어느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친정 어머니 위암으로 앓고 있는데 자주 문병을 가지 못했답니다. 집안일과 자녀 일로 바쁘다 보니 가보지 못해 늘 죄송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오목가슴이 쓰리고 소화가 안되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인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나도 어머니처럼 위암이..?] 불안해서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병원에도 못갔답니다. 부인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진찰도 받아보기 전에 이미 자신이 위암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에 암이 걸린 것입니다. 위암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절망과 공포에 빠져버렸습니다. 자식의 잠든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나 죽으면 저 어린것의 고생이 얼마나 클까...]걱정이 태산같습니다. 문여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전화벨 소리,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 등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쓸데없는 공상과 잡념으로 머리속은 더욱 혼란하다. 초조감이 밀려오면 [이러다가 내가 미쳐서 길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뜻하지 않는 위협이 다가옵니다. 갈등이 몰려 옵니다. 어떤 사건으로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로 불안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예측되는 위협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로부터 이미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 인해서입니다. 과거 일어난 문제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래 일어날 문제로 인해 염려하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1)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하여도 마음의 평안은 빼앗기기 않습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면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풀릴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불안해 하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 먼저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주를 의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2)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를 풀어 주심으로 평안을 줍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를 보십시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불안합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미국의 생명수 교회의 사모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 태아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날 확률이 90% 이상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중증 장애인을 낳고 기르겠습니까? 아니면 제하겠습니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모님이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중증 장애인을 나에게 주면 그것을 하나님이 내 평생 지라는 십자가로 알고 저는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어찌 내 생명을 내가 죽이겠습니까? 죽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느데 낳자마자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동안 그 어머니는 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어머니는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를 가져와서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어린아이의 눈과 어머니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에 어린아이의 눈에 안개처럼 희미한 것이 덮여 있는데 이 아이 눈에서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벗겨져 맑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면서 벙긋벙긋 두 번 웃더랍니다. 너무 기뻐서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 울었는데 그 날 이후로 그 어린아이에게는 장애증상이 다 사라지고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체육도 잘 하고 음악도 잘 하고, 믿음이 좋아서 새벽마다 엄마, 아빠 따라 나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가장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있다"고 간증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되어 불안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 올 줄 믿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의원을 찾아 다니며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효험이 없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 옷에 손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우리 예수님께 나오면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 역사가 이루워질줄 믿습니다. 문제 앞에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요14:25-31/2002.5.26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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