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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목회독서교육 이동익............... 조회 수 7101 추천 수 0 2010.02.17 17: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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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G. 달 사쏘 - R. 꼬지 편찬 / 이재룡 ? 이동익 ? 조규만 옮김

제 1 장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

1)격변의 시대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4년과 1226년 사이에 이탈리아 아퀴노(Aquino)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입회하게 될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St. Dominico)가 죽은 지 5년쯤 뒤의 일이고, 성 프란치스코(St. Francesco de Assisi)가 죽기 1년쯤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란돌포 데 아퀴노(Landolfo de Aquino)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이었다. 1231년 여섯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 그 해 봄 15세쯤에는 볼료냐 대학과 그 밖의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던 다른 기관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1224년에 설립한 나폴리 ‘대학(studium generale)'을 다녔고, 1240년에서 1244년에 ‘7자유학예’를 공부하여 기초 교육을 마치고 자연철학을 배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배웠다.

2)토마스 아퀴나스 수사

- 토마스는 1243년쯤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지니고 있는 형제애에 매력을 느꼈다.  토마스는 젊음의 활력과 희망을 품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가족의 계획을 거절하면서, 19세에 1242년  또는 1243에 나폴리에 있는 설교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수도원은 1231년에 (창설자일 뿐만 아니라 그 즈음에는 성인이기도 했던) 도미니코에게 헌정되었다. 거기서 도미니코의 후계자 조르다노 데 삭소니아(Giordano de Saxonia)는 1236년에 대학생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의 독창성은 그의 소명과 그에 대한 복종안에 현존하고 있다.

3)교육과 저술

- ?1252-1256년  파리에서의 명제집 학사  ?1256-1259년 파리에서의 신학 교수(1)
?1259-1268년 이탈리아 체류기 
    [나폴리(1259-1261),오르비에토(1261-1265),로마(1265-1267), 비테르보(1267-1268)] 
  ?1268-1272년 파리에서의 신학 교수  ?1272-1273년 나폴리에서의 교육과 저술

4)걸작 구상

- 1260년경에 토마스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로마 관구, 그가 10여년전 도미니코회의 수도복을 받았던 나폴리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가 맡고 있던 파리대학 신학 교수좌는 한 영국 도미니코회원에게 넘겨졌다. 40세에, 토마스는 철학적 주해서들과 성서 주해서들에 대한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속하는 것들을 (...)간략하고 명료하게 진술하기”시작하였다(『신학대전』, “머리말”이다. 아마 제1부는 그가 재차 파리에서 가르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끝마쳤을 것이다.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과 윤리학에 대한 주해서들이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제2부 1편을 편찬하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것과, 이 도미니코회원이 그의 신학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그것들을 주해하였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신학대전』에 대해서는 제2부 2편과 제3부의 몇몇 부분들이 두 번째 파리 체류 기간에 집필되었다. 동시에 아퀴나스는 특별한 평온함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주해서, 즉 『로마서주해』및 『욥기주해』와 더불어 대단히 섬세한 것으로 분류되는 『요한복음주해』를 집필하였다. 1272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는 서방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착수하고 동방 교회와의 재결합을 모색하기 위해 제2차 리용(Lyons)공의회를 소집하였는데, 거기에 이 도미니코회 신학자도 초빙되었다. 1274년2월초에 일군의 도미니코회원들이 나폴리를 떠나 로마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로마를 경유하여 리용 공의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거기에서 토마스가 추기경으로 임명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 50세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제 2 장 『신학대전 요약』의 구조

1)「신학대전요약」은 총3부와 ‘보충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자들은(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로마에서 오래도록 함께 동고동락하며 자주 앞날의 과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고, 또 서로 의지와 격려로 「신학대전」엄청난 분량 때문에도, 어찌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이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다만 한 작은 디딤돌이나마 되어보자고, 이 「요약」의 번역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하였다고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전체 논술은 ‘문제(quaestio)'들로 나뉘어져 있고, 이 문제들은 또다시 각각의 ’항목(articulum)'들로 세분되어 있다(오늘날로 얘기하자면 장[章]과 절[節]쯤에 해당될 것인데, 총 611장이나 된다.  이 요약은 「신학대전」의 구조를 충실히 따랐으며, ‘문제’와 그 제목은 그대로 옮겨 놓았고‘항목’을 그저 단순히 ‘번호’로 표시하였다.

제 1 부는 9개의 문과 119개의 항목으로 (신-창조-인간) [이재룡;철학]번역 담당하였으며, 제 2 부 ; 제1편은 8개의 문과 114개의 항목으로 (윤리원론)[이재룡 번역-이동익검토], 제2 부 ; 제2편은 11개의 문과 189개의 항목으로 (윤리신학)[이동익;윤리신학], 제 3 부는 7개의 문과 90개의 항목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사)[조규만;교의신학], 보충부는 7개의 문과 99개의 항목으로 (성사와 종말)[조규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3 장 『신학대전 요약』입문

《제Ⅰ부》는 신에 관한 <교의(敎義)>부분으로서, 원리인 신으로부터의 발원(exitus)으로, 무엇보다도 신에 대해서 신을 창조의 ‘능동인(能動因)’으로서 고찰하는데. 먼저 신을 그 자체로 고찰하고 다음으로 그의 작품, 즉 피조물 속에서 고찰한다.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신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신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신은 신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불변적이다. 신의 고유한 본질인 영원성은 신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오직 신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완전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은 오직 하나다.

 ‘신’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신’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신의 작용’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신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 지워져 있다. 신에겐 인식이 그 실체이므로, 실체가 불변이듯이 지식도 불변적이다. 이처럼 신의 인식은 사변적(speculativa)일 뿐 아니라 또한 실천적(practica) 즉 작용적(operabilis)이다.


 진리(veritas)란 ‘지성에 있는 질서’로, 신은 ‘최고 진리’ 이자 ‘제일 진리’이다. 일치성과 동일성까지 있으며 그의 지성이 ‘사물의 척도(mensura rerum)'이기 때문이다. 신의 규범으로부터 멀어져 갈 때 거짓이 될 수 있으며, 진리가 그렇듯 거짓(falsitas)도 지성과 관계된다. 흰색과 검은색처럼, 진리와 거짓은 서로 모순되며 신에게는 사물들 속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이 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운동보다는 그 운동이 속하는 실체(substantia)를 가리킨다. 신은 최대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신의 의지는 어떤 특수한 의지가 아니라, 보편적 의지이다. 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다. 신의 의지는 언제나 채워진다. ‘의지의 신호’라 불리우는 의지의 현현은 : 선을 이루고, 명하고, 권장할 때, 악을 허용하거나, 금지할 때. 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악에 앞서 선으로 향하는 의지의 일차적 움직임은 ‘사랑(amor)'은 ‘공동선’으로 향한다. 신에게는 무기력하지 않은 [즉 역동적인] 의지가 있으며 사랑이 있다.

신의 본질은 무한하다. 이 능동적 무한 권능인 ‘전능(omnipotentia)'은 모든 가능 대상,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즉 모순이 아닌 모든 것이 그 권능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권능을 신은 가지고 있다.  대상에 있어서 유일하고 활동에 있어서 여럿인 행복은 신 직관과 사물 직관을 ‘명상적 행복’과 더불어 공유하고 ‘능동적 행복’과 더불어 우주 지배를 공유한다. 따라서 복된 자들은 신을 그들의 인식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의 작용은 지성 존재들에 견주어서 고찰되어야 한다. 신에게 있는 실제적 ‘관계’ 그 자체는 신의 본질 자체이다. 신의 관계들에게는 ‘대립’(oppostio, 대면[對面])이 중요하고, 그 대립에 중요한 것은 ‘구별’이다. 신의 ‘관계들’은 ‘전개들’에 좌우 된다 ; 성부성(paternitas), 성자성(filiatio), 발원성(發源性, spiratio), 발원을 통한 전개.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substantia individa natura rationalis)'는 “위격”(또는 인격, persona)이라고 불리운다. 위격은 이성적 실체들에 있어서 다른 실체 범주들에서는 어떤 특정 본성, 자립성, 기체성(基體性, 희랍어=우유들 밑에 있는 것)으로 구성된 그것을 가리키며, 이처럼 ‘위격’이란 말은 본성 전체에서 가장 완전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사물의 모든 완전성들은 ‘두드러진 방식’으로  신의 위격은 오직 셋[三位]이다. ‘위격’이란 이름은 세 위격에 공통된 이름이다. 우리가 세 사람이라고 말할 때 ‘사람’이라는 이름이 셋에 공통이듯이 말이다. ‘삼위(Trinitas)’는 신의 위격이 하나 이상이고 정확히 말해 ‘셋’임을 말하며, ‘성자는 성부와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자가 성부와 구별됨을, ‘성부는 유일신이다’라는 표현은 다른 잡신(雜神)들 배격하는 의미로 알아들어야한다.

 성부(Pater)에게는 ‘원리(principium)’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성부는 다른 위격들과 구별해 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제일 위격의 고유 이름이다. 또한 ‘출산되지 않는 존재(Ingenitas)'로 성부는 원리이다.

신에게 있어서 성자의 고유이름인 ‘말씀(Verbum)’은 하나의 유일한 활동으로,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또 당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하는 피조물에 대해서도, 형성하게 되는 표상적 기능이다. 엄밀히 말해 ‘모상(image)’이기도 하다. 성부에게서 첫 번째 ‘전개’는 성자이며, 두번째 전개는 ‘성령(Spiritus Sanctus)’으로 ‘영(靈)’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이 부는 바람(風)의 고유한 기능이듯이, 사랑하는 자를 사랑받는 자에게로 추동하는 것이 사랑의 고유 기능이기 때문에 두 번째 전개는 바로 ‘사랑의 방식’으로 발생한다.

신에게 있어서 ‘성부성’은 성부이며, 위격들은 이 신의 본질과 동일시된다. 모든 관념적 활동들의 종착점은 한 단일 위격일 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위격만이 ‘말씀’으로 전개되고, ‘사랑’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삼위는 서로 동등하다. 각 위격은 숫 적으로 하나이고 동일한 신 본질로 자립하기 때문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전개되는 것은 성부의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 본성의 완전성의 결과에 따라서이다. 이런 완전성은 영원하므로, 영원으로부터 성부 ? 성자ㆍ성령이 있다. 신적 위격의 비가시적(非可視的) 파견은, 파견됨과 수용됨을 함축하는데, 이것은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과 더불어 발생한다.

창조(創造)

‘제일 질료(materia prima)'가 사물의 구성 요소로 들어오고 사물들의 일부가 되나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제2의 질료도 신으로부터 유래한다. 신은 창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들 자체가 창조 활동을 통해 기원(起源)되어 나왔다. 실상 장인(匠人)들은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취해 각기 형상을 주고, 또 자연도 기존하는 재료 위에 작용한다. 그러나 신은, 어떤 것도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에, 사물들을 창조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질료(물질)를 창조했어야 했다.

세상의 질서(ordo)는 통일성을 형성한다. 모든 사물들이 그들 상호간에 그리고 신에 관련되어 질서를 이루고 있으므로, 오직 하나의 신이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의 세상이 있을 뿐이다. 사물들 간의 비동일성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불멸의 사물들도 있고 멸망할 사물들도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멸망할 것들은 멸망 또는 결함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가멸적(可滅的, corruptibile)'이 아닐 것이다. 이 ‘가멸성’은 상대적 선의 결핍 즉 ‘악’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악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악엔 형상도 목적 질서도 결핍되어 있기에 형상인(刑相因)도 목적인(目的因)도 아니고, 오직 질료인(質料因: 이 질료인은 악의 주체로서 ‘선’이다)과 작용인(作俑因: 악을 부수적으로 산출하는 행위 주체)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악의 원인은 선이다.

천사들은 ‘분리된 실체(substantia separata)'들이다. 천사는 육체에 결합되어 있지 않다.  천사들은 신처럼 되길 원했다. 그것은 신처럼 되어 창조 능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결정적으로 자연적 완성품인 것처럼 자처했거나, 또는 은총 없이 다만 자연적 능력만 가지고 초자연적 능력만 가지고 초자연적 지복 상태를 넘보았던 것이리라. 악령들은 그들의 지성에 손상을 입었다. 자연적 인식에 관해서가 아니라, 은총의 인식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신의 신비에 대한 사변적 인식을 잃었고, 그에 대한 애정적 인식은 완전히 상실했다. 이처럼 ‘황혼녘의 인식’은 그들에게 ‘한밤중’이 되었고 육화(肉化. incarnatio)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들에게는 공포에 질릴 만한 인식이었다.

오리게네스(Origenes)가 생각했듯, 물질적 피조물들은 신이 영적 피조물들의 죄를 벌하고자 했을 때 창조해 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지어낸 이유는 그 다양성 속에서 (덜 고상한 것은 더 고상한 것에 종속된다) ‘신의 선성을 온통 표상하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 이다. 성서가 말하는 “어둠이 땅을 뒤덮고 있었고, 땅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창세 1,1-2]는 구절은 , 어떤 형체를 갖추지 않은 질료가, 즉 아직 어떤 ‘실체적 형상’도 갖추지 않은 ‘제일 질료’가,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존재 없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창조는 ‘형체가 없다(informitas)'고 즉 거의 ‘일그러졌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하늘에는 아직 빛이 없었고 물속에 잠긴 땅엔 풀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물질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빛이 첫째 날 창조된 것은 마땅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관찰을 상기해보면, <신의 영감을 받은 성서는 언제나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잘못될 수 있다.> 하늘 또는 궁창(firmamentum)이 어떻게 그리고 왜 둘째 날에 만들어졌는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생각하듯 4가지 원소로 구성되었는지, 플라톤(Platon)이 생각하듯 한 단순 요소로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하듯 어떤 다섯 번째 물체인지 하는 따위의 문제는 무익한 공론(空論)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창조의 날들은 시간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가리킨다’고 말하게 될 때 말이다. 아마도 ‘궁창’이란, 구름들이 농축되게 되는 대기층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탈레스(Thales)는 ‘물은 무한한 물체로서 다른 물체들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세(Mose)가 “물들 사이에 궁창이 생겨라”는 신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 줄 때, 그는 탈레스의 것과 같은 의견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는커녕, (무지한 자들에겐 허공[虛空]과 똑같은) 공기를 거론하지 않은 채 자신의 표현들을 거친 히브리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그것을 박식한 이들의 용어인 ‘궁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벌거숭이 황량한 땅은 보기에도 제거되어야 할 일그러짐(deformitas)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서 성서는 이 일이 땅을 풀과 초목으로 장식함(vestire)으로써 일어났다고 말한다. 또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대로라면, 그것들을 산출할 능력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앞의 창조 3일간의 기간은 후속하는 3일간의 ‘꾸미는(decus)'기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넷째 날 성서는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장식한다. 창조의 첫 3일의 가운데 날(즉 제2일)물과 궁창이 갈라진다. 그래서 성서가 물과 궁창들을 물고기와 새들로 꾸미는 것을 둘째 그룹의 가운데 날 (즉 제5일)에 배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비슷하게 둘째 그룹의 마지막 날 즉 여섯째 날은 땅을 장식하는 세 번째 날에 상응한다. 그날에 지상에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또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의견대로라면, 그것들을 산출할 능력들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적절하게도 성서는 일곱째 날 존재자들의 번성에 관한 ‘축복(benedictio)'그들의 신 안에서의 휴식에 관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를 배정하고 있다.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는 매우 지혜롭다. 왜냐하면 ‘말씀’을 암시하며 ‘태초에(in principio)'라고 즉 ‘원천과 원형(元型)인 자 속에 서’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물들 위를 감돌고 있던 신의 ‘영(Spiritus)’에 대해 말하면서 ‘성령’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인간 영혼은 육체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 ‘자립하는(subsistens)'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적 인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지성적 인식을 통해서 모든 물체들의 본성을 안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영혼은 물체에 속하는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 육체의 ‘실체적 형상(forma substantialis)'은 인간의 지성적 작용과 지성적 생활의 원리인 지성적 영혼 즉 인간의 영혼이다. 이처럼 지성(영혼)은 육신(질료)에 직접적이고 내밀하게 결합된다. 인간 육신의 ‘실체적 형상’ (=인간에게 종(種)적인 존재를 주는 것)이 지성이라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부터 알려진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한다(intelligere)’는 것은 종(種)에 특징적인 것이고, ‘형상’은 종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사물들의 끊임없는 변화 때문에 학문은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학문 또는 확실한 지식을 부인했다. 플라톤은 학문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이 ‘분리된 본질들’을 직관(visio)하는 데에 성립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식에 있어서, 사물은 인식 주체의 존재 방식에 따라 주체 속으로 이동해서 실존하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물질적이고 움직이는 사물들을 ‘비물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비물질적인 우리 지성은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자체 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인식하는 외감들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지성은 감각상(phantasmta)들로부터 추상(抽象)을 통해서  즉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항구하고 형상적인 관념들만 포착함으로써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영혼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활동을 통해서’ 인식한다. 분리된 영혼(anima separata)은 자기 자신을 보며(視), 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분리된 실체들 즉 다른 영(靈)들을 안다.

성서가 인간 창조를 장황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의 정점(頂点)이자 왕(王)임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첫 여인 하와는 실제로 첫 인간 아담의 ‘갈비뼈’로 구성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동료’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발(足)’에서도 나오지도 않았다. 종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의 원형적(元型的) 원인(causa exemplaris)이고, 또한 인간은 신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이 모상은 바로 ‘유사성’과 ‘유래성(由來性)을 알려 준다. 첫 인간이, 혹시 탈혼 상태(raptus)에서라면 모를까, 신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신 직관(visio Dei)은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고, 지복 직관을 누리는 이들은 의지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없으므로 죄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신의 ‘거울(speculum)'이고 신은 거울이 깨끗할수록, 그리고 거기 머무는 눈(眼)이 건강할수록, 더 잘 보인다. 범죄 이전의 아담에게 있어서는, 피조물들은 가장 깨끗한 거울이었고, 거기 머무는 그의 지성도 조금도 어둡지 않았었다.

무죄 상태에서 아담은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인간은 낙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낙원으로 인도되었다. 왜냐하면 불멸성(immortalitas)의 선물이 은총에 의한 것이었듯이, 불멸성에 적합한 장소도 역시 은총에 의한 것이지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신의 통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반기를 들 수 없다; 가끔 반기를 드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말이다. 실상 모든 작용에는 충동과 목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충동하고 목적으로 이끄는 자가 바로 세상을 통치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자기를 그렇게 형성한 제작자에게 빚지고 있다. 빛에는 태양이 ‘참여된 존재(ens participatum)인 우리는 존재 자체인 신에게 우리의 모든 존재와 그 보존을 빚지고 있다. 신에게 있어서 사물들의 보존은 하나의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이다. ‘움직이게 한다(movere)'는 것은 작용의 원리를 말한다. 지성적 존재자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인식 능력을 주고 또 인식 활동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다 지성적 존재자들을 움직인다. 비물질적 제일 유(ens primum)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에게는 모든 가지적(可知的) 사물들이 선재(先在)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인간 지성을 ‘조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자신들을 맞추어서 감각상(感覺像)의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적인 일들을 계시한다. 이간은 자기가 조명되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언제나 누구에게서부터 온 것인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위 천사들을 파견하는 것 을 ‘천사(天使:angelus)'라고 불리우는데, ‘선포자’ 또는 ‘소식 전달자(annuntiator)’ 란 뜻이다. 파견 중에도 천사들은 신을 명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직접 보기 때문이다.

제일 질료(materia prima)는 순전히 수동적이지만, 형상을 가진 물체들은 어떤 종(種)적 활동을 갖기도 한다. 운명(fatum)이란 만물을 목적으로 질서지우는 신의 섭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조차도 교부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육체를 형성하도록 규정된 하나의 형상인 우리의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장소 이동에 관해서 물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영혼들은 세상 시작시에 모두 한꺼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영혼들은 육체에 주입될 때 그때마다 창조된다.

《제Ⅱ부》는 <윤리>부분으로서, 신을 ‘목적인(目的因)’으로서, 즉 모든 피조물과 특히 인간의 ‘궁극 목적’으로서 고찰한다. 제1편은 인간 행위 일반을, 즉 궁극 목적인 신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검토한다. 제2편은 덕(德) ? 은사(恩賜) ? 완성 상태 등 인간 행위를 풍요롭고 완전케 하는 동시에 신께로 향하게 하는 구체적인 수단들을 탐구한다.

제 1 편  윤리원론 : 인간 행위 일반

인간은 행위 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따라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 즉 참된 행복(beatitudo, 幸福또는 至福)은 부(富)에 있지 않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은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라 불리운다.  인간적 행위에 외부적이고 부수적인 상황 (circumstantia)은  인간적 행위를 목적과 관련시키기 때문에, 특별한 고찰이 필요하다.

선에 대한 이성적 욕구인 의지는 당연히 어떤 것(=선)에 의해 움직여진다. 의지는 오직 최종 목적 속에서만 충족될 수 있으므로, 진정한 향유는 오직 최종 목적에 대한 것이다. 지향(志向, intentio)은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아가는 의지에 고유한 것이다.

선택(electio)은 그 본질에 있어서의 의지 행위이다. 선택 또는 의지의 숙고에는, 형상적으로 지성에 속하는 심사 숙고(consilium)또는 검토가 선행(先行)된다. 동의란 선택에 이어지는 것이므로 선택처럼 수단에만 관련되지 목적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위들은 사물들이 그렇듯 존재를 가지고, 의도되고, 원욕된 것인 한 선하거나, 있어야할 어떤 것을 결(缺)하고 있는 한 악하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죄는 참된 목적에로 질서 지워진 행위가 아니다. 모든 인간적 행위는 어떤 목적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올바르거나 아니면 죄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원함(velle bonum)'이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선을 원한다. 따라서 사랑은 ‘탐욕적 사랑’과 ‘우정의 사랑’으로 나뉜다. 사랑은 결합(unio)을 그 결과(혹은 효과)로 가진다. 사랑은 실제적 결합으로 기울고, 또 이미 그 자체 속에 사랑의 대상과의 결합이 있다. 선이 사랑의 원인이듯이, 악은 미움(odium)의 원인이다. 바람은 사랑과도 기쁨과도 구별된다. 현존 대상이 흡족한 것이면 기쁨(gaudium)이다. 그 대상이 욕구를 자극하게 되면 사랑이다.

고통(dolor)은, 그 원인이 육체에 있긴 하지만, 영혼의 한 열정이다. 왜냐하면 육체에 생명을 주고 그래서 육체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영혼 때문인 까닭이다. 지성이나 상상력의 깨달음에서부터 오는 고통을 ‘슬픔(tristitia)'이라고 부른다. 고통은 다른 어떤 열정보다도 육체를 헤친다. 왜냐하면 심장의 정상 복동을 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열정보다 더 무겁다. 왜냐하면 그의 대상은 현존하는 어떤 악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을 대 가벼워지며, 눈물(lacrima)로 완화된다. 친구들의 위로(compassio)로 가볍게 하며, ‘진리탐구’와 ‘명상’, 잠(수면)이나 목욕으로 완화시키기도 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며 악에 대해 슬퍼함은 악이 아니다.

두려움(timor)은 피하기 어려운 미래의 어떤 악으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영혼의 열정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사랑일 수도 있고 주체의 약함 때문이거나 해치고자 하는 대상의 강함 때문이다. 그 결과로 사람을 반성하도록 만들어주며 선에 대한 성찰은 저해한다. 대담한 사람들은 어떤 위험의 끝판에 보다는 초판에 더욱 자극받는다. 그들은 성급한 판단으로 감각적 욕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자들은 그들과 반대로 행동한다.


 분노(ira)는 하나의 일반적인 열정이다.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자기에게 행해진 어떤 악이다. 이 어떤 악은 늘 ‘마땅한 존중의 결핍(parvipensio)'에로 환원된다. 그 결과로 복수하리라는 생각과 희망에서 나오는 분노는 애정(delectatio)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덕(德, virtus)은 어떤 능력을 완전하게 만들며, 행위의 규범으로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신의 선한 성질’로서, 그 때문에 올바르게 살아가게 되고, 아무도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지 않는 그런 성질이다“라고 정의한다. 덕의 등급은 덕의 주체는 능력들의 완성이며, 선한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 지성 속에 있으며 사변적 지성은 신앙(fides)의 덕을 지닐 수 있고 실천적 지성은 ‘현명의 덕(prudentia)'을 가질 수 있다. 덕은, 인간이 이성의 자극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선물(혹은 은사[恩賜, charisma])은 인간이 성령의 자극에 따르기 위한 것들이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고 있는 열매로 사랑, 기쁨, 평화, 관대, 선함, 인내, 온순, 믿음, 겸손, 절제, 정결, 이들은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서 영혼이 그 자체로 또는 이웃을 향해 또는 자기 행위들에 관해, 좋은 성품을 갖추는 한에서 우리 안에 솟아난다.

윤리덕은 움직임의 원리이며 열정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습관들을 통솔하여 욕구 능력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드는 덕이다. 윤리덕은 질료, 열정, 대상 그리고 기능에 따라 구분되며, 윤리덕은 하나의 덕이 다른 덕들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하다. 죽음 후에도 윤리덕은 남는다.  

 이에 반해 지성적 덕은 선을 행하는 기능을 마련하는 한에 있어서 덕이며 윤리덕 없이도 있을 수 있다. - 그 자체로 ‘행위의 올바른 규범’ 인 현명의 덕을 예의로 친다면 말이다. 또한 지성적 덕의 으뜸은, 최고의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혜’이다. 그러기에 ’웅장한 덕(virtus architectonica)'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악습(vitium)은 덕에 반대이다. 이성에 반(反)해서 악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특징적인 것은 이성이며 덕은 이성에 합치됨으로 악습은 이성에 반대되고 따라서 본성에 반대된다.

죄는 인간의 악한 행위이며 규범에 관련해서 악하다. 가까운 규범은 올바른 이성이고, 먼 규범은 영원법이다. 죄의 내면적 원인 중 가까운 원인은 이성과 의지이고, 먼 원인은 상상과 감각적 욕구이다. 죄의 외부 원인은 세속적인 사물들, 사람들, 악령들이 될 수 있다. 무지(ignorantia)가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죄이다. 사악함(malitia)에서 오는 죄는 알고 원해서 짓는 죄이고, 무지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계산(indstria)해서 짓는 죄이다. 인간은 제일 원인인 신에 의해 지탱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인간적 행위는 그래서 인간의 것이자 또한 신의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우는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를 지니게 되었는데, 인간 본성의 죄이다. 인간 본성은 실체적 형상(=영혼)으로부터 가지게 된다. 영혼이 육체의 형상인 것은 그의 능력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영혼의)본질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원죄는 영혼의 본질을 그 주체로 삼고 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이 재물에 대한 ‘탐욕’이다. 재물은 모든 나쁜 욕심을 키우고 채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죄의 시작은 ’집회서‘가 말하고 있듯이‘교만’이다. 교만은 나보다 두드러지고 싶어 하는 무질서한 사랑으로서,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선들을 뒤쫓고 따라서 모든 죄의 뿌리인 인색과 서로 뒤섞인다.

 인간은 죄지음으로써 질서에서 벗어난다 ; a)자신의 이성의 질서에서, b)그가 속한 사회 질서에서 c)신의 통치 질서에서, 그러므로 후회, 불명예, 신의 진노의 형벌을 받게 된다. 개인적ㆍ 사회적ㆍ보편적 세 질서의 원리는 최종 목적이다. 질서의 원리, 즉 영혼이 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기본 의무까지 침범하는 질서 전복은 회복할 수 없는 무질서이고 ‘영벌(영원한 처벌의 벌, poena damni infinita)’을 당하게 되며, 그리 무겁지 않은 무질서에는 일시적 형벌로 족하다.

법(lex: 라틴어 legare ‘묶다’, ‘매다’ 동사에서 나왔다)은 인간 행위의 규칙과 규범이다.

 법의 구분으로 영원법(lex aeterna); 신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은 신의 영원한 이성에 의해 목적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는 신의 이성에 의해 사물에 주어진 성품(dispositio)으로 사물들의 본성에 새겨져 있고. 이성적 존재의 본성에 따라 인간에게도 분여(分與)되어 이성의 자연적 빛을 통해 인식된다. 이렇게 해서 영원법은 ‘자연법(lex naturalis)'이 된다. 자연법은 인간을 살아 있는, 통속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습성(habitus)이다. 자연법은 공통된 원리들을 제시하고, 이 원리들은 인간 이성의 개별적 성품에 의해 적용된다. 그래서 ‘인정법(人定法, lex humana)’이라 불리운다. 자연법과 일치하지 않는 인정법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성과도 일치하지 못한다.  이때 이것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인정법은 자연법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모든 것이 자기의 규칙과 규범에 비례하는 형상을 가질 때 올바른 것처럼, 적극적인 법도, 성 이시오로(S. Isidorus)가 말하고 있듯이. 정직하고, 의롭고, 합당하고, 필요하고, 유익한지가 그 상급법에 의해서 판단되고 규제되어야 한다. 인정법은 ‘공동선(共動善)’으로 질서 지워져 일반성과 항구성을 지녀야 하므로 가능해야 한다.  너무 세밀하게 되면, 솔로몬이 말하는 대로 , 백성의 피를 말리고 진을 빼는 것이다. 인정법은 영원법ㆍ자연법ㆍ인정법은 자연 질서를 위해서 넉넉하나 자연적 질서를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한데 이 때문에 신의 특별한 법, 즉 신법(神法, lex divina)이 필요하다.

신법은 ‘옛 법(lex vetus)’과 ‘새 법(lex nova)'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불완전하고, 하나는 완전하다. 하나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선을 약속하고, 하나는 천상의 지성적 선을 약속한다. 하나는 ’두려움의 법(lex timoris)'이고, 하나는 ‘사랑의 법(lex amoris)'이다. 또한 ’육(肉)의 법(lex fomitis seu carnis)'한 마디로 관능의 경향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법으로부터의 일탈로서,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의 정의(正義)로부터 허락된 조건이다. 법의 결과(효과)는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백성을 고유한 덕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법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영원법에 종속된다. 그러나 신적인 것들은 영원법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법 자체이다.

모세의 법 : 모세의 십계명은 신 및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예식 규범은 신의 지혜로부터 설정되었고 어떤 목적성이 있었고 또 합리적인 것이었다. 예규의 목적은 장차 올 메시아의 예형(豫形)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축자적(逐字的)의미 외에도 신비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모세법 이전의 ‘옛 법’의 예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증(例證)들이 함축하고 있듯이, 오직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사회 규범들은 직접적으로 정의(正義) 건설을 위한 것이다.  모세의 사회 입법은 최상의 통치 규범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 법제는 군주제-귀족 정치제-민주제였기 때문이다.

‘새 법’이란 무엇보다도 각자의 가슴마다 새겨져 있는 성령의 은총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이차적으로 은총을 향하게 만드는 ‘성문법(成文法)’을 가리킨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새 법은 사람을 의인(義人)을로 만들고, 둘째 의미에서는 문자(文字)가 아니라 영(靈, spiritus)이 사람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새 법에서는 내면생활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이 완벽하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고, 사도들의 품위를 설정한 다음, 인간을 그 내면에 있어서 사물과, 이웃과, 신과의 올바른 질서에 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법의 예규적ㆍ재판적 규율들의 뒤범벅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래서 ‘자유의 법(lex libertatis)'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완전한 덕(정결, 청빈, 순명)이 제시되고 권고 방식으로 충분히 교육될 필요가 있었다.

  선을 행하고 이와 함께 신 직관(神職觀)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 이다. 이 성화 은총은 인간을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킨다. 은총은 결과에 따라  a)치유하고, b)작용하고, c)협력하고, d)인내심을 주고 e)영광스럽게 만든다.


 사도 바울로가 열거하는 거저 주어지는 은총은 지혜의 정신, 앎의 정신, 믿음의 정신; 치유의 은총, 예언의 은총, 양심 식별의 은총, 언어의 선물, 연설의 선물. 그러나 우리를 직접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해 주는 성화 은총은 거저로 주어진 은총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은총은 오직 신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은총은 사람에 따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적게 받을 수 있다. 이 은총의 다양성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신에 의해 안배된 것이다. 만일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가 은총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공로(meritum)란 정의로운 보상 또는 대금(代金)이라는 의미에서 동등한 자들 간에 있을 수 있다. 신과 인간은 평등 관계가 아니며,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도움을 받아 보상받을 행위들을 추구하도록 안배했다는 의미에서 공로는 오직 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서 작용하고, 사랑의 의지적 행위로 신에게로 향한다. 공로의 종점은 영원한 생명이다. 지나가는 세상의 선들이 영생(永生)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공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엄격히 말해 공로의 대상이 못된다.

제 2 편  윤리신학 : 덕(德) ? 은사(恩賜) ? 완성 상태 등 인간 행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조건과 지위에 연관되어 있는 덕과 악습에 대해서

 우리 신앙의 대상은 첫째 진리, 즉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원인(原因)이다. 하느님을 생각함(Credo Deum), 하느님에 대해 생각함(Credo Deo), 하느님을 믿음(Credo in Deum)의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은 첫째가 질료적 대상, 그 다음이 형상적 대상, 그리고 세 번째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육화(肉化)에 관한 의심 없는 신앙은 구원을 위해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신앙이다. 또한 삼위 일체(三位一體)에 관한 신앙도 똑같이 필요하다. 삼위 일체 신앙은 육화의 신앙으로부터 분명하게 추정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신앙 고백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하다.

신앙은 그 자체로 제1(德)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영성 생활의 원리이며,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질료적 대상으로서의 신앙을 갖게 하신다. 하느님은 믿을 진리를 계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사고(思考)의 동의로서의 신앙을  갖게 하신다. 동의는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성(知性)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은총을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지성의 선물을 소유한다. 지식은 성령(聖靈)의 선물이다. 물질적 사물 안에서 지력(知力)의 동의를 위해서는 이미 제기된 문제를 이해하도록 하는 지성(知性)보다는 지식이 더 요구된다.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구원에 대한 포기이다.

희망(spes)의 덕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영원한 선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은 영원한 행복이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우정이며 동시에 서로를 위해 선을 원함으로써 서로를 위하는 사랑인 애덕(cariitas)은 행복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과 관련되는 특수덕이며, 모든 덕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애덕은 덕의 형상(形相)이다. 애덕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때 완전하다.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애덕의 한 효과인 영적 기쁨은 사랑받는 선(善)의 현존이 우리 내부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즉, 하느님의 머무르심으로부터 성화 은총(聖火恩寵)을 통해서 애덕의 열매가 우리 안에 자리하는 기쁨이다. 하느님과의 평화(平和, pax)그리고 인간과의 평화는 애덕의 행위이며 효과이다.

사랑하는 것의 효과로 선행(善行, beneficentia)은 애덕의 행위이다. 자선(慈善, eleemosyna)의 동기는 자비이며, 애덕의 효과이며 애덕의 행위이다. 자선을 행하는 것은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올바른 이성이 명령하는 덕의 행위이다. 또한 동시에 이웃에게는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덕의 행위이다. 만일 필요성이 극도에 달한다면 자선의 의무는 커지며, 이때 자선의 행위는 부차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무를 부과한다. 성 암브로시오(S. Ambroosiu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굶주려 죽는 사람에게 양식을 주어라. 그에게 양식을 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를 죽이는 것이다.” 자선을 많이 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현명의 덕(prudentia)은 미래에 대한 예견이기 때문에 인식덕(認識德)이며, 올바른 갈망을 예견하는 지덕(知德)이며 또한 윤리덕(倫理德)이다.

 현명의 덕의 분야는 세 가지로 나뉜다. 필수적 분야, 주체적 분야, 잠재적 분야이다. 의견의 선물은 하느님께서 축복받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식을 그들에게 보존시켜 주는 천국에 존재한다. 올바른 관심은 현명의 덕에 속하기 때문에 공정함의 결핍인 태만(怠慢, negligentia)은 현명의 덕에 반대된다. 육욕적(肉慾的)인 선을 최후 목적으로 하는 정욕(情慾), 거짓과 가장(假裝)의 방법으로써 고유한 목적에 도달하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인 교활(狡猾), 말로써 작용하는 교활, 말로써나 행동을 통해서 작용하는 교활에 속하는 사기, 일시적 사물에 대한 염려, 최후 목적으로 추구, 미래에 대한 염려는 적당한 시기에 멈추어야 하며, 예상되어서는 안된다. 현명의 덕과 혼동되는 이러한 악습들은 정의(정의)에 속하는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방해하며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십계명에서는 현명의 덕에 대한 규범은 없지만 구약성서 가장된 지혜의 덕의 형태에 대해 금지된 규범, 즉 사기와 기만이다.

여러 덕들이 인간을 인간 자신의  질서 안으로 인도하는 반면, 정의(正義)의 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져야만 하는 것 안에서 인간을 타인(他人)을 향한 질서 안으로 인도한다. 즉 이는 평등하게 행하는 것을 설정함에 있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며, 평등하게 하는 것이 평등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지향하는 정의는 그 대상으로 법(法), 라틴어로 유스(JUS)로 불리운다.

인간은 불의를 원하면서 불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불의를 원하지 않으면서 불의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르고 불의를 범할 수도 있으며, 불의를 원하면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재판(裁判, judicium)은 올바른 것에 대한 결정이다. 재판한다는 것은 정의의 행위이며, 재판관은 살아 있는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예이다. 재판은 정당한 것인 만큼 정의의 행위이다. 법은 자연법을 가르치며, 긍정적인 법을 내포한다.. 올바른 것에 대한 확정인 판결(判決)은 성문법(成文法)에 근거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편애(偏愛)는 죄이다. 이는 분배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편애를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 그 사물이 당연히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사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자살은 하느님의 권한을 횡령하는 것이며, 천국에 빨리 가기위해, 무서운 죽음, 아주 중하고 번민되는 죽음을 모면하기위해, 어떤 죄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살은 정당하지 못하다.

진실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 중에서 어떤 점에 대해서는 대답을 피하는 것이 현명의 방법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정당하다.

인내의 덕을 통해서 우리는 무례를 참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때로는 모욕을 주는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의 품위와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모욕을 되돌려 보내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의 비이성적인 창조물을 저주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짓이다.

기도(祈禱, orattio)란 ‘유익한 것을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느님 앞에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예수님께서 가장 완전한 기도로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청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선만이 아니고 이웃의 선도 간절히 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이웃을 위해도 기도해야 한다. 형제적 애덕에 대한 기도가 오히려 하느님께 더 잘 받아들여진다. 기도는 세 가지 효과를 갖는다. 즉 공로(功勞), 영혼의 만족, 그리고 영혼의 양식으로서의 효과이다. 첫째, 둘째 효과에 있어서는 제일 지향, 즉 잠재적인 지향에 유의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러한 유의는 계속해서 말로. 느낌으로 혹은 하느님께로 직접 방향이 바뀌어질 수 있다. 우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하느님을 흠숭(欽崇, adoratio)해야 한다. 흠숭은 내적이며 또한 외적 행위이다. 그리고 내적ㆍ외적 흠숭은 서로 종속되어 있다. 흠숭은 종교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흠숭으로써 하느님께 존경을 드리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제사(祭祀, sacrificium)를 봉헌하는 것은 자연법에 속한다. 외적 제사는 내적 제사의 표지(標識)이며, 또한 창조의 으뜸 원리이며, 행복의 목적인 분에게 봉헌되는 생명력 있는 제사의 표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구약성서에서 십일조(十日組, decimae)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적인 근거는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오늘날도 십일조는 정당한 제도이다.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권위가 교회 안에 다시 자리 잡기 때문에 오늘날도 형평과 온정으로써 십일조에 상응하는 역할을 제정하는 것은 교회의 권한이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원리가 되시고 부모가 출생의 원리가 되는 것처럼 이는 통치의 원리가 된다. 공경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탁월함은 마음만으로도  증거할 수가 있다. 인간에게 행해지는 존경(尊敬, dulia)이 있고, 또 모든 사물의 원리 이며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존경이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존경은 보다 높은 존경으로서, 이는 흠숭의 예배이어야 한다. 순명(순명, oboedientia)한다는 것이 하급자가 상급자의 동의(動議)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모든 사물은 가장 으뜸이며 동시에 우주의 원동력이 되시는 하느님의 동의에 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자연법적으로 모든 사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명해야만 한다. 불순명(不順命, inoboedientia)은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 인간과의 좋은 관계를 지향하는 애덕에 반대된다. 명령하는 사람의 인격을 경멸하는 것은 명령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따라서 불순명보다 더 중대한 죄도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무죄한 사람은 죄인보다도 더 하느님께 감사(感謝, gratitudo)드려야 한다.

십계명의 계명들은 정의의 계명이다. 첫 번째 계명은 종교 생활의 기초가 되며, 두 번째 계명은 종교심의 탈선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계명은 예배의 실천을 통해서 종교 안에서의 적극적인 생활로서 스스로를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 계명으로서 부모께 합당한 공경이 옮겨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명들은 이웃과 함께 지니고 있는 모든 의무들이 단계적으로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사람의 가장 가까운 목표는 용덕(勇德)의 행위이지만, 먼 목적은 참된 행복, 즉 하느님이다. 또한 용덕의 행위를 완성함으로써 분노의 열정을 이용한다. 그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그는 덕성 있게 조절된 분노를 사용하게 되고, 그가 지녔던 분노는 이미 사라지게 된다.

성 대(大)그레고리오(S. Gregorius Magnus)가 말하는 교만의 종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을 온전히 자신의 것, 하늘의 선물을 온전히 자신이 이룩한 업적,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허풍을 떠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이 네가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법에의 복종을 거절함으로써 나타나는 사죄가 된다.  무죄한 상태로 창조되었던 첫 인간(人間)의 죄(罪)는 교만에 관한 죄였다. 하와는 뱀에게 신뢰를 두었었고, 아담도 죄로 유인했다. 하와는 아담보다 무겁게 벌을 받았다. 성서는 인간 본성의 완전성을 보존했어야 할 그 선물의 상실로 인해 아담과 하와에게 부과된 첫 번째 죄에 대한 벌(罰)을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지성과 가성이라는 이중(二重)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 카리스마적 은총, 지식, 말씀, 활동과 관련되는 카리스마적 은총에 관해서

예언(豫言, prophetia)이란 먼 일들에 대한 현시(顯示, Visio)를 의미하는 인식력이다. 일종의 신적 조명이기 때문에, 예언적 현시는 마치 표면의 빛이 모든 색깔에로 분산되듯이 모든 일에로 확장된다.

 예언적 현시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개념을 토대로 해서 신적 조명의 영향으로 완성되며,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개념들의 새로운 배치로써 완성된다. 모세의 가시덤불처럼 감각적인 표현으로써 완성될 때에는 추상적인 감각이 없이 완성되며, 가야파의 경우처럼 움직이는 성령 앞에서 결함투성이의 도구에 불과하기에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위험, 예지(叡智), 운명(運命)이 예언의 종류이며, 앞으로 다가올 진리에 관한 현시이며, 현재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행복을 통해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갔다는 표지이기도한 언어(言語, linguae)의 선물을 온 땅의 여러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들이 성령 강림 때에 받았다. 또한 성령으로부터 설교(說敎, sermo)의 선물을 받았다.

인간의 특성인 지성은 진리에 대한 명상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사변(思辨)과 행동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인식력인 실천(實踐)의 두 가지로 곧 명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이다. 명상적(瞑想的)생활(vita contemplativa)은 근원적으로 진리에 대한 명상으로 , 지성의 원리와 진리의 소유에서부터 기쁨과 사랑이 의지에로 옮겨지게 되며, 인간의 보다 고상한 업적, 하느님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활력에 넘치는 생활이며, 지성을 통해서 육체의 수고 없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윤리적 덕의 행위, 현명의 덕은 실천적(實踐的)생활(vita activa)스승의 직무로서, 학생을 위한 시험으로서의 가르침은 실천적 생활에 속하며, 천국은 명상적 생활인 지복 직관(至福 直觀)의 생활이고, 천국에서는 실천적 생활이 사라질 것이다. 명상적 생활은 실천적 생활의 동기가 되며 실천적 생활은 명상적 생활을 요청하는 것으로 두 가지 생활을 비교(比較)하기도 한다. 신분(身分, status)이란 변화되는 품위나 풍요로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는 데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시민 생활에서건, 영적 생활에서건 직접적으로 자유와 예속에 관련된다. 교회에서의 여러 가지의 직무(職務, officium)의 다양성은 활동과 관련되어 완덕(完德)의 신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 더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며, 필요성이 활동의 다양한 종류를 수반하는 직무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죄 혹은 정의에 대한 예속,  죄 혹은 정의(正義)로 부터의 자유에 관한 영성적인 두 가지 신분이 있는데, 그리스도적 완덕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한 하느님 사랑을 통해서 가능한 완덕이 생기며, 완덕의 신분에 도달한 사람들 중에는 서원(誓願)한 수도자들도, 직무를 가지 주교(主敎)들도 있다. 성대 서원(盛大(誓願)을 발한 수도자들이나 주교 축성을 받은 주교들도 모두 의무적으로 완덕을 향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교직(主敎職, episcopatus)이 명(命)해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 완덕의 신분은 하느님 사랑을 위한 이웃의 구원에 관심을 시작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책임을 지니며, 자신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하고, 침묵을 지키고, 밤 기도, 단식의 규정을 지키며, 시과경(時課經)을 바치는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수도자(修道者)들은 완덕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로서, 주교들을 위해서는 주교 축성을 요구하고, 수도자들을 위해서는 성대(盛大)하게 치루어지는 약속, 즉 서원 청빈, 정결, 순명으로 책임이 요구된다. 모든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로 자신을 봉헌한다. 애덕의 실천 방법과 신심(信心)의 실천에 차이가 있는데 교회 안에서의 수도회(修道會)도 다양하다. 그 수도회가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볼 필요가 있다. 수도자가 되는 것은 덕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죄인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리고,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소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면, 수도자가 되는 데 어떤 장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수도회와 어떻게 입회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필요하다.

《제Ⅲ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사(聖事, sacramentum)에 관한 <교의>부분으로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살피고 그가 인간 개개인을 구원의 공로에 참여시키기 위해 설정한 ‘성사’들을 고찰한다.

구원자 그리스도(1) : 육화의 신비

육화(肉化)는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최고선(最高善)이신 그분이 피조물(被造物)과 친교를 이루는 최고의 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본성의 일치는 은총(gratia), 하느님의 뜻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며, 선물이다. 인성을 취(取)한다는 것은 신적 위격에 속한다. 위격적인 하나의 행위이기 까닭이다. 그런데 취함의 근원은 신 본성이기 때문에, 신 본성이 인성을 그의 위격 안에 취했다고 말 할수 있다. 인성을 취함에 있어 신 삼위(神三位)에 공통적인 신적 덕능(德能, virtus)이 시작으로서의 행위가 착수되며, 종결로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말씀(Verbum)의 위격 안에서보다 더 적합한 자리가 없다.  육화는 삼위 일체의 하느님의 작업이지만 그 완성은 성자(聖子, Filius)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수난 때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기도하셨다. 그분이 진정으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당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멜기세덱(Melchisedech)의 사제직은 사제직의 예형(豫形)이였으며, 그리스도 사제직의 예형이기도 했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예를 따라 사제이시다. 그러나 그 예형을 뛰어 넘는 실재였던 만큼 더욱 탁월한 사제이셨다. 양자로 입양(入養, adoptio)한다는 것은 그가 고유한 상속(相續)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며, 피조물과 관계되고, 신적 삼위격(三位格)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신적 위격이시며 본성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그리스도의 운명(運命, praedestinatio)은 우리들의 운명의 본보기며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고, 그런 은총을 받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경배(敬拜, adoratio)하는 방법은 그분의 신성에 있어서나 인성에 있어서나 흠숭지례(欽崇之禮, cultus latriae)의 한 가지 방법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합당하며, 피조물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흠숭지례가 합당하지 못하며 특별한 공경지례, 즉 상경지례(上敬之禮, cultus hyperdualiae)가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분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중재자(Christus mediator)이시다.

구원자 그리스도(2) : 육화하신 말씀(Verbum)의 행하심, 그 고통의 감수(甘受)에 대하여

1)세상으로 들어오신 첫걸음에 대하여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여”라고 했던 것처럼, 동정녀(童貞女) 마리아는 영혼을 받기 전에는 거룩할 수 없었고, 그분이 구원자의 모친이 되었을 때, 격정적 원인(fomes)이 제거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죄로부터 물들지 않는 특혜(特惠)의 빛 안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유래하는 질료적 신체를 지녔고, 아브라함(Abraham)과 다윗(David)의 혈통을 따라야 했으며, 그 피는 현실태(現實態)가 아니라 가능태(可能態)로 있는 뼈와 살로 육체를 이루어 여인으로부터 탄생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적합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성신의 잉태(孕胎, conceptio)로 성신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일 실체성(同一實體性, consubstantialitas)의 관계를 지니고 있고, 육체에 대해서 능동인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잉태는 기적적(奇蹟的)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 사물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그 능동적 시원은 그리스도 잉태에 있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혈통은 이미 거룩하며, 잉태의 첫 순간에 완전하게 되었고, 영혼을 받아 일치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nativitas christi)은 과 그리스도의 공현(公顯)은 목동들에게, 동방 박사들에게, 성전에 거주하고 있는 의인들에게 , 처음엔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 이민족에게, 나중에 유대 민족 전체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에게 구원자라는 의미의 “예수”라는 이름은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준 이름이었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유아(乳兒)로서 성전에 봉헌되었고, 맏아들로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대속되어 계명을 기꺼이 율법을 준수(circumcisio)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洗禮, Baptismus)물로써만 베풀어진 것이었고, 예수는 물을 성화시키고자 세례를 받은 것이며, 그분이 받아들인 인간 본성, 즉 다른 인간의 인간 본성의 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2)그분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신 생애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진리를 보여 주고자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자, 하느님께로 나가는데, 그 문을 열어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들 가운데 함께 사시면서 그들의 생활방식(modus conversationis)과 상응하셨다. 평범한 삶과 가난한 생활, 당신 자신의 삶을 율법의 계명에 일치시키고, 율법을 인정하셨고, 완성하시고 극치를 보여주셨고, 유대인들의 악의적인 중상 모략을 예견하셨다. 그리스도는 유혹(誘惑, tentatio chrsti)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적으로 필요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교만과 하느님을 멸시(蔑視)하기까지 이른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방법과 순서를 따라 유혹을 당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doctrina)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었다. 당신의 지식을 아끼지 않았고, 정직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항상 군중들, 사도들만을 평범한 가운데 가르치셨다. 비유(比喩)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비유들이 영신적 신비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스도의 기적(奇蹟)들은 그분이 가르친 진리와 상응해야 할 목표를 지니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 기적들을 행할 것을 기대한 것은 합당하였다. 완전한 시기가 이르렀을 때 가르치기 시작하셔야 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는지를 그와 같이 설명하며, 그분의 신성을 충분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악령들을 추방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태양이 어두어졌던 것처럼, 병자들들 회복시켜 주시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종류의 놀라운 일로써 비이성적 존재들 위에 기적을 이루신 것은 세상 만물이 그분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또 그렇게 해서 백성의 신앙을 도와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시기 적절하게 변모(變貌, transfiguratio) 하셨고, 당신 자신을 영광의 빛 안에서 드러내셨다. 그것은 시련(試鍊)의 끝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변모 사건에 있어서 모세(Moyses)와 엘리아(Elias), 그리고 특별히 사랑했던 제자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3)그분의 이 세상으로부터의 떠나심에 대해서

인류의 구속(求贖)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난(受難, passio)과 죽음을 겪어야 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그리스도는 영광에로 현양(顯揚)되고 하느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이 매우 적절하였다. 그러한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고, 어떤 죽음이라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맡기셨다. 보다 합당한 희생 제물로, 스스로의 의지로 하느님께 봉헌하셨다. 그렇게 아담의 불순종을 치유하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기 위해 필요한 덕행인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구속의 능동인(causa efficie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은총을 다시 선사하는 사랑에로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그 값을 치르고 구속함으로써, 수난이 도구가 되는 그 신적 덕능(virtus)을 통하여 죄를 추방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mors christi)은 죄에 대한 형벌이며, 죽음을 통해서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보여 주셨으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 죄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죽음으로서 죄에 대해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부활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묻히심(sepultura)은 그의 죽음의 진실성이 증명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틀 밤과 하루 낮을 무덤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이틀 밤은 두 가지 죽음, 즉 영혼과 육신의 죽음으로서 우리를 그런 죽음으로부터 해방하셨음을 뜻하며, 하루 낮은 그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분의 죽음의 결실은 단지 신앙과 사랑으로 그분과 일치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죄 받은 사람들은 신앙과 사랑이 결핍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하 세계(infernus)에 내려가신 것이 단죄 받은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4)지상 생애 이후의 그분의 현양(顯揚)되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Resurrectio)은 하느님의 정의를 찬미하기 위해, 우리들의 신앙을 교육하기 위해, 우리의 희망을 근거 있게 하기 위해, 우리들을 선한 행위로 이끌기 위한 가르침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기위해 필요하였다. 진정한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것, 그 이후로 다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의미에 있어서 첫 번째로 다시 살아나신 분이요, 그 분 이전에 다른 사람들의 소생(蘇生)은 불완전한 부활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의 원인이셨다. 그분의 신성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며, 영혼과 육체와 일치하여 죽음에 머무시면서 사흘 만에 영혼을 육신과 일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영광스럽게 다시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지니신 고유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천하셨다.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ascensio)은 우리에게 구원의 원인이다. 승천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천상에로 이끌어지고, 그리스도는 그 문을 여셨으며 그분은 성인들의 성소 안으로 대사제로서 들어가셨으며, 거기서 그분의 신적 선물을 우리에게 계속 베푸신다.

그리스도에게 “성부 오른편에 좌정(坐定)하시다” 라는 것은 하느님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부와 동일한 영광, 동일한 권능을 지닌다는 것을 뜻하며, “오른편”이라고 하는 표현은 권능, 지복, 영광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성자의 위격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지혜이시면서 성부로부터 나오는 진리이며, 성부께서 지상으로 파견하신 분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심판의 권한(심판권, iudiciaria potestas)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부여되고 있다.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까닭이다. 현세에 대한 심판 이후 최후의 공심판이 남는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다면 완전한 심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사(聖事,  sacramentum) 일반(一般)에 대해서

성사(聖事, sacramentum) 란 인간의 성화(聖化, sacrificatio)를 위한 모든 성스러운 표징을 일컫는다. 인간의 성화에서 그 원천인 그리스도의 수난, 형상(形相, forma)인 은총, 그 궁극적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사는 3중의 표징이다. 기념적(記念的)이고, 표현적(表現的)이며, 예고적(豫告的)이다. 성사적 제도 안에 그 실재들은 모든 것의 원천이요 성부의 영원한 언어이신 말씀(Verbum)을 확실하게 상응케 하는 것과, 형상이 되는 영혼이 질료(質料, materia)가 되는 육체와 공존하는 이간에게 영적 약품(藥品)이 될 수 있어야하며, 형상으로서의 언어가 질료와 일치되어 있지 않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성사적 표징의 본성에 언명(言明)과 상응(相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사의 효과를 통하여 영적 임무를 책임 맡은 관리가 되면서 특별한 표식을 받게 된다. 인호(印號, character sacramentalis)라고 부르는 영적 표식이다. 영적표식으로서 인호는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써, 영적 능력(potestas spiritual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호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 경배에 관한 임무를 임명받거나 다른 사람을 임명하게 된다. 성사적 인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닮게 하며, 인호는 그리스도의 표시이다. 인간에게 하느님 경배에 대한 질서 안에서 주거나 받게 되는 어떤 최종적 능력을 지니게 하는 인호를 새겨주는 성사들은 오로지 성사들의 문(門)인 세례성사, 세례성사를 완전하게 하는 견진성사. 하느님 경배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신품성사이다.

모두에게 주는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um baptismi)는 씻는 예절에서 표징을 성화에 있어서 의미를, 인호에서 표징과 의미 모두를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가치(價値)를 지닌다. 물의 사용은 정결 예식(淨潔禮式)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으로부터, 성신의 은사(恩事)로 유래하는 효과를 지닌다. 세례성사는 다시 반복(反復)될 수 없으며, 영적ㆍ육적인 삶에서는  단 한번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와 더불어 죄의 생활에 있어서 죽는 것이며,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의화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사람은 죄의 묵은 삶에 대하여 죽고 은총의 삶에로 들어간다. 세례성사는 묵은 삶을 이루었던 전의 모든 죄를 사(赦)한다. 

 견진성사(堅振聖事, sacramentum confirm!ationis)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성화 은총(聖化恩寵)을 부여하는 성령을 받게 된다. 견진성사를 주는 주교(主敎, episcopus)에게 축성된 성신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 그 덕을 의미하는 기름과 향을 합성한 크리스마(chrisma)유(油)가 이 성사의 재료이다. 

성체성사(聖體聖事, Sacramentum Eucharistiae)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와 결합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육신적인 삶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 이외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이외에도 또 하나의 성사, 영적인 음식(飮食)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체다. 그 자체로 ‘훌륭한 은총(grtia bona)'을 의미하는 성체성사는 과거를 기념함에 있어서 ‘희생제(犧牲祭, sacrificium)’라고 일컫고, 현재를 중점으로 ‘성찬(聖餐, communio, 또는 synaxis)'이라 부르며, 미래적 의미로서 '노자 성체(路資聖體, viaticum)'라고 부른다. 성체성사의 재료(materia eucharistiae)는 빵과 포도주이다.    성사적 측면에서 단순한 성사로서, 영적 측면에서 영적 효과에 대한 것으로서 신령성체(communio Eucharistae spiritualiter)를 완전한 방식과 불완전한 방식으로 구별한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신자들의 일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은총에 의해 완전하게 되는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죄 중에 성체를 모시는 것은 거짓의 죄를 짓는 것이며 하나의 모독(冒瀆)이 된다. 교회는 매일 미사를 드리도록 정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은 삼시경(낮12시)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장엄미사는 여기에 맞추어 정규적으로 정오에 드리도록 하고 있다.

고해성사(告解聖事 또는 참회성사, Sacramentum poenitentiae)는 하나의 성사다. 참회(懺悔, poenitentia)도 성화를 향한 거룩한 무엇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고치고자 하는 참회자의 행위가 그렇고, 그 죄를 사해 주는 사제의 행위가 그렇다. 이 두가지 행위가 고해성사를 이룬다. 고해성사의 질료는 뉘우치는 감각적 행위다. 즉 통회(痛悔), 고백(告白), 보속(補贖)등의 행위다. 죄는 뉘우치지 않거나 뉘우칠 수 없는 것일 때 사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고해성사의 질료로서 질서 지워진 덕인 참회는 그 안에 열쇠의 능력이 형상을 대신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성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질료의 결정적인 부분을 이룬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덕으로서의 참회의 결과이다. 더 나아가서 성사로서 참회의 효과이다.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 역시 하느님으로부터의 결별(訣別)을 뜻한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경죄도 개선되어야한다. 이 개선은 적어도 행한 것에 대한 후회를 포함해야 한다. 이런 후회스러움 없이 사면(赦免)은 불가능하다.

덕(德, virtus)은 고해성사로 되돌아온다. 덕은 은총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은총의 회복과 더불어 덕은 회복된다. 초자연적 은총의 마지막 성향은 자유 의지의 동기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것에 따라서 그 전보다 더 상당한 정도로, 또는 똑같은 정도로, 더 못한 정도로 회복된다. 고해성사의 본질적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양적인 부분은 질료적 부분이며, 이들은 고해성사 안에서 통회와 고백과 보속이 우정(友情)의 화해(和解)에로 이끌기 위한 것으로 화해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뉘우침), 하느님의 대리자의 판단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백), 정해 준 보속을 받아들여야 한다(보속) 이 세가지 모두가 온전하게 참회를 이룬다. 덕으로서의 참회는 세례 이전의 참회, 사죄의 참회, 경죄의 참회로 구별되는데, 첫 번째는 성신의 새로운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부패된 삶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며, 마지막은 보다 완전한 삶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보충부》는 『신학대전』의 마무리 부분으로서, 성 토마스가 이 웅대한 논술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익명의 어떤 제자’가 스승의 다른 작품(특히 『명제집 주해』)을 참조해서 스승이 못다 이룬 부분을 ‘보충’해 놓은 것이다(즉 이 부분은 성 토마스가 친히 쓴 부분이 아니다).

교회의 성사(聖事,  sacramentum) 일반(一般)에 대해서 계속

뉘우침(통회;痛悔, contritio)은 죄를 고백하고 또 그 죄를 참회하는 일과 더불어 지니게 되는 죄에 대한 아픔을 말한다.  뉘우침(소재;素材, obiectum)은 어떤 형벌에 대한 것의 아픔이 아니며, 원죄(原罪)의 고통 또한 아니며, 죄를 사하는 뉘우침이기 위해서 하느님을 모독(冒瀆)한 모든 실제적인 죄에 대한 마음의 뉘우침이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고통인 뉘우침(강도;强度, quantitas)은 더욱 큰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의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 고통은 결코 지나치게 큰 것일 수는 없다.

 의지의 고통인 뉘우침에는 지나치게 강렬한 것이 있을 수 없듯이 뉘우침의 시간(tempo contritionis)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죄에 대해 뉘우치는 것이 마땅하다.  뉘우침(효과;效果, effectus)은 성사의 측면에서 도구인 으로서 죄를 사하고, 덕의 행위의 측면에서 질료인으로서 죄를 사한다. 교회가 죄를 알지 못하면 치유를 할 수 없다. 죄인의 고백으로 그 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의 고백이 필요하다(必要性, necessitas confessionis). 고백은 고백하는 사람의 양심(良心)을 표현한다. 저지른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위법(違法)하는 것이다. “고백이란 용서의 희망을 통하여 숨겨진 악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의(定意)로서 가장 완전하다. 행위와 결과의 본질적인 모든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의 본성(quidditas confessionis)은 기본적인 조건을 통하여 진실을 지니는 것으로서, 진실됨의 훈련이며, 참회의 덕이 예견(豫見)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죄를 사하는 것으로, 참회의 덕과  한 가지 행위이며, 심판 중에 악한 자의 고백은 정의의 행위이고, 은혜를 받은 자의 고백은 은덕의 행위이다.

고해성사의 집전자(執典者)는 오직 사제(司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 또 신비적인 육체에 대해서 능력을 지니는 사제만이 그 은총을 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성사의 한 부분으로 본인 스스로의 입으로 본인의 잘못을 발설함으로써 드러내는 것인데, 완전한 고백(질;質, qualitas confessioniis)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이어야 하고, 단순해야 하며, 겸손된 것이어야 하고, 분별적이어야 하며, 신실해야 하고, 발음되어야 하며, 뉘우치는 것이어야 하고, 순수해야 하며, 순명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고백(효과;效果, effectus confessionis)은 사죄(死罪)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무엇보다도 고백 안에 성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잘못과 형벌의 채무인 장애(障碍)를 제거(除去)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낙원(樂園)의 문을 열며,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준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제는 성사로 알게 된 죄를 비밀로 지켜야 한다.

 고백의 비밀(또는 봉쇄, sigillum confessionis) 자체가 죄를 사할 수 있는 열쇠의 능력과 관련을 지닌 만큼 사제들은 비밀 엄수, 즉 침묵(沈?)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덕은 형상적으로 정의로운 수단(手段) 안에 머문다.

보속(補贖, satisfactio)은 형상적으로 과거에 대해서 보상적(報償的)이며, 미래에 대해서 신중성(愼重性)을 수반(隋伴)한다.  성 안셀모의 성인에 의하면 “보속은 하느님께 마땅한 존경을 드리는 기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보속은 죄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그 정의를 보충하고 있다. 인간의 편에서 그 나름대로 정의를 수행하는 양식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만족을 드리는 것은 가능하다(보속의 가능성, possibilitas satisfactionis). 보속은 선한 일, 하느님께 영예(榮譽)를 들리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형벌 또는 참회의 의미를 지니는 일로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초자연적 은총은 그 자체 안에 모든 덕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참회의 덕도 지니고 있다. 참회는 단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참회자;懺悔者)에게만 가능하다.

열쇠의 힘(능력, clavis)은 낙원의 문을 여는 힘이며, 우리를 죄에 대해 닫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능력은 본연의 권리로서 삼위 일체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권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효과가 담겨져 있는 성사를 베푸는 교회의 직무자에게도 속한 것이 되었다. 고해성사 안에서 열쇠의 능력은 일시적 형벌(刑罰)의 사면(赦免)에도 작용한다. 합리적 능력으로서 열쇠의 능력은 단지 푸는 능력만이 아니라 묶는 능력이기도 하다.

파문(破門, excommunicatio)은 부당(不當)한 자들이 배제(排除)되는 하느님 나라로부터의 제외됨을 말하는데, 사죄로써 은총을 상실한 자들이다. 파문은 대단히 중한 형벌로서 외적인 기준에 의해, 먼저 경고를 받은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제이든지 본연의 권위를 가지고 파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과 특별 권한을 가진 사제만이 할 수 있다.   사제는 파문된 자가 당연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참회자를 파문으로부터 풀 수 있다(철회;撤回, absoluttio). 파문은 하나의 형벌이지 하나의 잘못이 아니며, 의지를 거슬러서 성립되는 것인 만큼 의지를 거슬러 풀릴 수가 있다. 참회는 영원한 형벌을 사하고 일시적인 형벌의 어떤 부분을 사한다. 남아 있는 현세적 형벌에 대한 것도 하느님 앞에 유효한 은사(恩赦, 또는 大赦, indulgentia)로서 사해 질 수 있다.

은사에 대한 허락은 서품권의 행사라기보다 재판권(裁判權)의 행사다. 오직 주교(主敎)만이 교회의 법적 형식상 충만한 재판권을 지니고 있다. 본당 신부들은 은사를 베풀 수 없다. 그러므로 공로의 보화(寶華)를 온전히 관리하는 일은 전 교회의 통치자, 교황(敎皇)에게 속하는 일이다. 사목상의 이유로 교회의 부분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는 주교들은 교황으로부터 허락(許諾)된 한도(限度) 안에서 은사를 베풀 수 있다. 사죄(死罪)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은사가 적용되지 않으며, 수도자들을 위해서, 그 은사를 베푸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약(藥)은 병(病)에 맞추어 조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공공적인 죄와 상당히 깊이 관련된 죄는 공공(公共)적인 참회(solemnitas poenitentiae)가 요구된다. 장엄한 참회는 지상 낙원으로부터의 아담의 추방(秋芳)과 유사하다. 그가 단 한 번 쫓겨나 것처럼, 장엄한 참회도 두 번 반복되지는 않는다. 성사의 효과는 죄로부터 치유(治癒)하는 것이고, 병자성사(丙子聖事, Sacramentum extremae unctionis)의 효과는 야고버 성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로부터 낫게 하는 것이다.

병자도유(病者塗油, extrema unctio)의 성사를 의미하는 “이 거룩한 도유를 통하여...”라는 축성 기도문에 이어서 이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의 사함 등의 내용이 합당한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생의 마지막에 사용하는 영적인 부드럽고, 침투적이고 확산적(擴散的)인 기름은 올리브기름이라야 한다. 이 기름은 주교(主敎)에 의해 축성되어야 한다. 세례가 영혼과 육체를 씻는 것처럼, 이 병자 도유는 영혼을 낫게 하는 것이 일차적이요, 첫째 효과는 영혼의 치유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바 이차적인 효과로서 육체를 낫게 하는 것이다.  병자 도유의 집전자는 오직 사제(司祭)이며,  병자 도유는 건강한 사람에게 베풀어지지 않는다. 단지 병자들에게만 해당되는데, 성 야고버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땅 끝까지 당신의 영향력을 단계적으로 행사하신바, 그 세상의 아름다움이 교회 안에서도 반영(反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신품성사(神品聖事, Sacramentum ordinis)를 설정하셨다.  서품에는 7가지가 있다. 7가지 직무가 있기 때문이다.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직(司祭職), 성체 분배에 있어 사제를 도와 주는 부제직(副祭職), 성기구(聖器具)들과 재료들을 준비하는 차부제직(次副祭職), 포도주와 물을 관리하는 시종직(侍從職),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이들을 방해하는 악마를 쫓아 내는 구마(驅魔)의 직무,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이들의 영혼을 안배케 하는 독서직(讀書職), 합당하지 못한 자들을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수문직(守門職)이 있다. 사제의 고유한 행위는 축성하는 일이며, 사제직을 위해 교육되고 그에게 권한이 주어질 때 축성의 행위를 할 수 있다.

혼인(婚姻, matrimonium)은 그 경향이 본성으로부터 의도된 목적인 자손의 출산을 바라보는 혼인의 행위는 항상 합법적(合法的)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혼인의 의무로 간주되고 있다.  혼인의 정의(定義, definitio); “합법적인 인격으로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으로 동일한 생활을 위한 부부의 결합(unio maritalis)이다.” 혼인의 본질인 결합(結合)을 표현하고 있으며, 혼인의 주체(主體)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일치의 결과로 따르는 불가 해소성(不可解消性)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사 안에는 질료적 행위가 있다. 혼인성사 안에도 하나의 질료적 행위로서 성사를 의미하고 본성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의미하는 영적 행위(靈的行爲)가 있다. 혼인이란 그 자체로 어떤 선익(善益, bonum)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부부 행위는 혼인 밖에서는 중대한 무질서(無秩序)로서 앞서 말한 세 가지 선 익에 의해서 판단되며, 정당한 방식 안에서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요, 거룩한 행위다.

혼인 장애(障碍, impedimentum matrimonii)들은 혼인을 불법적(不法的)이게 하며 혼인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금지장애(禁止障?)라고 하는데, 혼인의 본질 또는 계약자 편, 계약 상대편에 관련된 장애들이 있다. 이러한 장애는 무효 장애(無效障碍)로서 불법적일 뿐만 아니라 혼인을 무효화한다. 혼인의 작용인은 의지적(意志的)인 동의로 이 행위는 지성적 행위를 전제한다. 지성 안에서의 결핍은 의지 안에서의 결핍을 수반한다. 오류(誤謬,  imedimentum erroris)는 지성적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의지적 행위에도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적으로 오류는 혼인을 무효화(無效化)한다.

노예 상태(奴隸狀態). 성품(聖品)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것으로 정결(貞潔)은 품위에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의무적(義務的)인 것이다. 라틴 교회에서 대품(大品)은 그 자체로, 그와 연결된 정결 서원을 통해서 혼인을 하는 데 장애(障碍)가 된다. 성대 서원(誓願), 혼인에 있어서 첫 번째로 꼽는, 후손의 선익은 친족(親族) 관계에 의해서 장애(障碍)가 된다(impedimentum consanguinitatis). 인척 장애;姻戚障碍, impedimentum affinitatis),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영적 출생을 통하여 혼인에 장애가 되는 영친장애(impedimentum cognationis spiritualis). 대부모(代父母)와의 관계가 법적으로 맺어지는  친인척 관계(법정 장애, cognatio legalis)는 영친 관계보다 더 육체적 출생에 의한 자연법적 관계에 접근한다. 그 밖에 자녀 출산을 위하여 요구되는 부부 행위의 불능(不能)은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태생적인 결핍이요, 항구적인 것이라면 혼인을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치료 불가능과 항구적인 불능이 질병이나 마술의 주문에 의한 것과  이전에 미친 사람과의 혼인, 친족과 불법적인 육체적 결합으로부터 유래하는 인척 관계, 연령 미달도 혼인에 있어서 무효 장애로 간주된다. 혼인의 첫 번째 선 익인 하느님을 경배(敬拜)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信者)와 비신자(悲辛者) 사이의 신앙의 상이성(相異性)은 그러한 효과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그 상이성은 혼인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障碍)가 된다. 다른 사람과 혼인할 목적으로 배우자를 죽도록 한 사람과 혼인을 맺을 수 없다.

정의에 따라 배우자 살해는 하나의 혼인 장애(범죄 장애; 배우자 살해-配偶者殺害, uxoricidium)가 된다. 혼인으로 결합된 자가 배우자의 동의 없이 하느님께 성대 서원을 행할 수 없다. 혼인을 통하여 배우자에게 속해 있게 되는 권리를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는 권리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인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경우, 계약은 체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부부 행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성대 서원(Votum solemne)이 가능하다. 그때 그는 수도자가 되기에 아직 자유롭다. 이 경우에 죽음의 경우처럼 해소(解消)된다. 협약의 관례(慣例)에 있어서 만일 상대편에 신용(信用)의 의무(義務)가 결핍되어 있을 때, 신용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지 않다. 한 남편이 그 스스로가 불충실한 아내와 헤어질 수 있다. 부인의 불충실성에 관한 경우 남편은 스스로의 권위로써 잠자리를 격리(隔離)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자리와 거주(居住)의 분리(分離)는 교회법정(敎會法庭)에 판결을 청해야 한다. 그 경우 아무도 스스로가 재판관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충실한 아내로부터 스스로 멀리 하는 것 이외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뉘우치면 그는 어느 때라도 그를 되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죄에 머물러 있으면 되 불러와서는 안 된다. 혼인의 매듭은 부부 가운데 한 편의 죽음으로써 풀린다. 그러므로 상대편은 새로운 혼인(두 번째 혼인;재혼, xecundae nuptiae)을 맺을 수 있다. 혼인은 육체적 욕망(慾望)을 치료할 목적을 지니고 있고, 남편은 그 부부 행위의 의무에 응(應)해야만 하며, 아내는 월경 중에도 남편이 원하면 그에게 복종하여 부부 행위의 의무에 죄 없이 응할 수 있다. 부부는 상대편의 동의 없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또 다른 사람에게 내맡길 수도 없고, 하느님께 받치는 서원을 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봉헌한 기간 동안 부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영혼에 있어서 죄가 된다.

여러 부인을 두는 일부 다처제(一夫多妻制, pluralitas uxorum)는 것은 자녀 출산이나 자녀 교육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지라도, 신자들에게는 혼인의 성사를 거스르는 것이다. 혼인이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상징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이처제(一夫二妻制, bigamia)는 항상 불완전(不完全)한 혼인이 된다. 후속적으로 두 부인을 하나는 법적으로, 또 하나는 실제의 사실로서 취하는 것은 불법적(不法的)인 것이다.

이혼장(離婚狀, libellum repudii)은 미움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배우자 살해를 피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거부의 원인은 미움이었다. 혼인의 불가 해소성(不可解消性) 안에서도 자연법의 첫 번째 목적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 관면이 가능할 수 있다.

비적자(非嫡子; 서자, 사생자, filius illegitimus)란 법의 규정(規定)을 거슬러 태어난 자를 말한다. 진정한 혼인 이외에 태어난 자녀들은 자연법(自然法)의 질서(秩序)를 거슬러서 태어나는 것이다. 서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손해는 자연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정법에 의해서 적법화 됨으로써 그러한 손해들이 제거(除去)된다.

부활 이전에 선행(先行)되는 것들에 대해서

영혼(靈魂)은 그들의 존재가 육체(肉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육체적인 것들이 바로 영적(靈的)인 것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안배(按配)하셨고, 영혼에게도 그들의 장소(場所, locus) 천당(天堂, caelum)인바, 우리가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이 천당에 머문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영혼들은 찬란한 장소에 모이고, 악한 영혼들은 어두운 곳에 모이는 것이다. 영혼의 거처(居處)는 그 영혼의 상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거처는 다섯 군데가 있다. 죽은 후 영혼의 거처는 낙원(천당), 연옥, 지옥, 그리고 성조들의 지옥의 변두리, 림보(Limbus, 또는 고성소), 유아들의 림보 이다.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감각 능력(potentia sensitiva)은 영혼과 결합된 육체의 소유물(所有物)이다. 육체가 소멸한 후 그 능력은 고유한 원리로서 근원적으로 영혼 안에 남는다. 만일 영혼이 육체와 다시 결합하게 되면 이 능력은 다시 현실화 되는 효력으로서 영혼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 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공로(功勞)나 하느님의 자비(慈悲)에 근거하고 있는 기도(祈禱)와 같은 행위는 유효하다.

죽은 이를 위한 중재 기도(仲裁祈禱, suffragia)중 죄인들을 위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애덕으로부터 유래하는 만큼, 연옥(煉獄)에 있는 모든 영혼들, 애덕 안에 일치되어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유용(有用)하다.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우리들에 대한 호의(好意)로서 성인들의 기도(Oratio sanctorum)는 항상 이루어진다. 그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원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심판(審判)하기 위한 주님의 오심은 그분의 심판의 권한(權限)의 위엄에 관련된 특별한 표징(表徵)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존경(尊敬)하고 그분께 복종(服從)하도록 이끌게 하기 위하여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심판이 가까워 오면 ;심판의 전조(前兆, Signa judicii)아마도 해, 달, 그리고 별들이 하느님 때문에 그 때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만큼 어둡게, 그들의 빛을 잃을 것이다. 심판에 앞서 마지막 재앙(災殃)으로서의 불(lgnis ultimae conflagrationis)은 자연적 능력으로서든지, 하느님의 정의의 도구로서든지 간에 그의 정화 작업(淨化作業)을 수행할 것이다.

인간의 최종적 목적과 그 최종적 완전함은 지복(至福)이다. 육체(肉體)의 부활(復活) 없이는 그 지복에 도달(到達)하지 못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우리의 부활은 그분에게 돌려야 하며, 하느님으로서 그 부활의 원인이 되며, 신(神)-인(人)으로서 동일한 원인이 된다. 만일 영혼이 그 이전의 동일(同一)한 육체를 다시 취하지 않는다면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부활한 자의 자기 동일성(自己同一性, identitas). 부활은 신적 작용을 통해서 발생한다. 다시 살아난 육체는 그 형상이요. 목적인 영혼과 완전하게 상응(相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모든 지체(肢體)를 완전하게 지니게 될 것이다(부활한 육체의 완전성, integritas).

우리 각자에게 자연적인 질(質)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도 상대적(相對的)이다. 각자가 모든 결함을 제외하고서 완전히 성숙(成熟)한 연령과 관련된 체격을 지닌 채, 인간 본성의 결함과 관련되는 것들은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세상의 삶에는 먹는 것, 마시는 그런 종류의 것은 일체 없을 것이다.

부활 후 복된 자들은 그 육체가 외적으로 해(害)로운 영향을 전혀 받지 않게 된다. 완전히 영적 정신(靈的精神)에 의해 지배(支配)받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는 그 성향을 거슬러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는 소재가 되지 못한다. 즉 불가 침해적인 것이 될 것이다(불가침해성;不可侵害性, impassibilitas). 침투(浸透, penetratio)하는 것을 섬세하다고 말한다. 섬세함은 물질이 아니라 형상이 지배하는 육체의 속성(屬性)에 관여한다. 부활 후 지복자들의 육체는 그 형상(形相)이 질료(質料)에 대해서 완전히 우세(優勢)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영혼이 완전히 지배한다. 그러므로 섬세함은 성서가 영적 육체(靈的 肉體)라고 부르며 지시하는 바로 그런 육체들과 관련한다(영광스러운 육체의 섬세(纖細, subtilitas). 주체적 형상으로서만 아니라 원동자로서의 영혼(靈魂)이 영광스러운 육체를 운행하는 전적인 지배권(支配權)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민첩성의 능력을 지니고 영혼에 즉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지복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적어도 하늘로 올라갈 때, 이 재능을 분명히 사용할 것이다(영광스러운 육체의 민첩성;敏捷性, agilitas).  성서는 영광스러운 육체가 광채(光彩, 또는 명료성 claritas)를 지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영광의 풍요로움에 마땅한 명료성의 재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단죄된 자들은 망칙한 형태로 부활할 것이며, 그 육체도 불사불멸적(不死佛滅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 앞에 영원하게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부활에 뒤따르는 것들에 대해서

최후 심판에 있어서 각자의 양심(良心)이 그 증인(證人)이 될 것이다. 신적 능력을 통하여 각자의 기억(記憶)속에 그의 모든 행위를 상기시킬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의 책이 근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공로(功勞)와 과실(過失)도 표징(表徵)으로 드러날 것이다.

인간의 최종적 목적인 지복 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에 있다면 인간적 지성은 하느님을 그분의 본질 안에서 볼 수 있다고, 우리들의 지성과 하느님의 본질 사이에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인들의 지복은 심판 이후 영광스러운 육체와 다시 결합한 영혼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성상 더욱 완전하게 될 것이고, 는 천당에 있어 그가 머물려고 도달한 곳 맨션(mansio), 즉 그 거처(居處)지복의 단계에 따라 다르다. 성인들과 단죄된 자들의 관계에 있어서, 성인들은 하느님과 마주하고 있다는 인식이 부여되고 있으며, 복자들은 단죄된 자들의 형벌을 인식하고 있다. 낙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혼인(靈的 婚姻)이다.

지상의 혼인에 있어서 신부(新婦)에게 지참금(持參金)과 장신구(裝身具)가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가 언급하고 있듯이, 영혼이 낙원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영적 지참금과 장신구를 지급받는다. 지복자들의 지참금(持參金, dotes)은 지복에 질서지워진 성향과 질에 따라서 지급된다. 복자들의 영혼의 지참금은 세 가지 선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을 뵙는 것, 그 지복 직관을 현재적 기쁨으로 인식하는 것, 그 현재적 기쁨이 우리에게 소유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信德)ㆍ망덕(望德)ㆍ애덕(愛德)에 상응한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영적 기쁨에 첨가되는 고유한 승리(勝利)를 맛보게 하는 선행(善行)들의 기쁨을 후광(後光, aureola)이라고 부른다. 그처럼 후광은 낙원에서 그 상급은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영혼이 완전히 일치(一致)한다는 금관(金冠, corona aurea)과 구별(區別)된다.

단죄된 자들의 형벌(刑罰, poena)은 단지 불(火)의 형벌만이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노의 “세상 어느 부분에 지옥(地獄)을 위치케 할 것인가는, 만일 성령이 그것을 계시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는 말처럼, 무엇보다도 성서의 표현은 지하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서 그 명칭이 지옥(infernum)이다. 즉 우리의 아래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그곳은 마치 복된 자들에게 하늘이 합당한 장소인 것처럼 단죄된 자들에게 그만큼 어울리는 곳이다. 단죄된 자들에게 하느님이 주인인 선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래의 의지는 최종 목적이고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선을 원할 때에도 그것은 나쁜 목적을 위하여 원하는 것이므로 단죄된 자들의  의지는 항상 악한 것이다. 단죄된 자들은 심판 이전에 복된 자들이 영광 안에 있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심판 이후에는 복된 자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記憶)함으로써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와 단죄된 자들, 무한한 분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사죄(死罪)를 범한 자는 끝없는 벌을 받으며, 영원한 지옥(地獄)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비로운 일을 한 그리스도교 신자도 만일 죄 중에 죽었다면 영원하게 벌을 받을 것이다. 은총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 4 장 『신학대전 요약』을 읽고 나서 ~ ~

기도가 평범한 음악가를 제2의 베토벤(Beethoven)으로 변형시키지 않을 것이고, 또 성서를 읽는다고 가난한 화가가 모네(Mobet)로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무수한 관념들과 인용구들을 담고 있는 『신학대전 요약』의 내용과, 나의 무거웠던 심정들, 인간관계의 어려움 속에서의 무거웠던 마음들을 비교하며 하느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은 처음 읽었을 때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성서를 읽듯이 편안하게 읽어 나갔습니다. 아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 의 묵주기도 처럼요...

이동익 신부님께서 주신 이 ‘하느님 사랑’에 답하려는 마음은 컸지만, 방학이라 회사에서 직원들이 ‘밥 한 번 먹자, 술도 고프쟎니??’, 학우들이 공소 체험 가기 전에 맛있는 것 사 줄테니, ‘공소 체험담 들려 줘라’, 기도에 심취했던 마음이 흩어지는 바람에 기를 다시 모으느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워낙 장엄한 저서 인지라  더욱더 힘들었던 작업이었지만 감히 올려 봅니다.

‘하느님 사랑’ 으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참고서적 ;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오미어러 지음 / 이재룡 옮김     http://cafe.naver.com/leedongik/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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