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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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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213 |
2007.08.19.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예수님의 비유(35-40)이고, 다른 단락은 그 비유에 대한 부연설명(41-48)입니다. 첫 단락의 비유는 아주 간단해서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3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한 밤중에 혼인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신랑 아버지는 신랑을 데리고 한 밤중에 신부 집에 갔다가 신부를 데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맞아주지도 않는다면 주인은 기분이 몹시 상할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일이 간혹 일어났겠지요. 신부 집에 갔다가 일이 늦어져서 며칠을 더 묶을 수도 있겠고, 돌아오다가 어려운 일이 생겨서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다가 실수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종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는 건 종들에게서 당연한 일인데, 무슨 일인지 이 이야기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고(37a) 합니다. 행복은 주인의 몫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불시에 돌아와도 종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본문은 잠도 자지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던 종들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b)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요?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할 사람들,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종입니다. 주인은 늘 시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은 늘 종으로 살아야 하고 주인은 늘 주인으로 대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세상의 당연한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런 세상의 질서가 전복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됩니다. 주인이 종을 시중듭니다. 이건 분명히 혁명입니다. 고착된 세상 질서가 뒤집어지는 혁명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가능할까요? 비슷한 일들은 간혹 일어나기는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로마가톨릭의 교황은 가난한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그 일을 따라하는 겁니다. 개신교회에서도 그런 행사를 하는 교회가 제법 많습니다.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건 그야말로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백화점 식료품 코너에서 행하는 맛보기 행사와 비슷합니다. 이런 행사가 이 세상의 계급적 질서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의 봉사는 어떻습니까? 그녀의 사랑과 희생은 휴머니즘의 극치입니다. 많은 이들이 테레사에게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 세상의 험악한 위계질서는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아마 칼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갈 수 있는 세계를,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레닌과 모택동은 마르크스의 이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간을 숙청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모릅니다. 그 어디에서도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시중드는 모습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시늉을 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한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르고 이상적으로만 말씀하신 거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삶의 짐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주인이 섬김을 받습니다. 이걸 부인하기가 힘듭니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주인처럼 섬김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독교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지금 모두 처분해서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 노숙자와 알코올중독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계속하기는 힘들 겁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을 섬기는 일은 바로 주인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봉사와 섬김은 주인에 의한 배타적 행위입니다. 그 주인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 마지막 때 올 ‘사람의 아들’입니다.(40절)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섬길 줄 모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우리는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혁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개량에 머물 뿐입니다. 무한 경쟁에 빠져든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모토로 시작된 공산주의도 결국 관료주의에 빠져들어 몰락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의 질서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인 종말에 우리에게 다시 오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세계의 진정한 혁명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무력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우리의 능력이 닿는 대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상을 향해야 앞으로 나가야겠지요. 학벌과 학력으로 인간이 재단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세상 말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면 어떨까요? 만약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만 한다면 아무리 옆에서 대통령을 하라고 해도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수상을 뽑아야 하는데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정치적인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자기의 삶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전투구 식으로 대통령을 하려고 나선다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노력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래와 위가 바뀌는 질서는 천지가 개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우리에게 실현될 세계입니다.
깨어 있는 문지기
우리에게 큰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할 일은 있지 않을까요? 이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계전복을, 또는 세계혁명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듯이 다행스럽게 이 사명도 아주 단순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 종은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지기의 역할이 바로 그 종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대 혁명은 문을 여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을 여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문지기는 일단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더 나아가서 확신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늘 이런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예수 재림의 지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 이 문지기는 깨어있어야만 했습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깨어있다는 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의 의지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아무리 다짐해도 우리의 의지는 쉽게 흔들립니다. 주님의 재림이 일정하게 결정되어 있으면 거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있지만 언제인지 모른다면 준비하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는 위에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그런 새로운 세상은 그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문지기입니다. 하나님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때에 맞추어 문을 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그걸 느낄 겁니다. 깨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또는 실제로는 깨어있지 못하면서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어떤 분은 새마을 운동 차원의 일을 하면서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계시더군요. 누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적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주인이 온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40절 말씀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에온’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약성서의 ‘에온’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에온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세상을 공간적인 의미의 ‘코스모스’라고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은 시간적인 의미의 에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세상은 악한 권세가 다스리는 과거의 에온입니다. 이제 오게 될 세상은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새로운 에온입니다. 그 새로운 에온은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단순히 무늬만 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체질 자체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 사이에 유비(analogia)는 없습니다. 애벌레 상태에서 나비 상태로 되는 세상을 비교할만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묵시문학의 방식으로 그 세상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의 환상과 이사야의 환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전복된 세상이 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극단적인 상징도 이것을 말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큰 붉은 용이 나오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립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런 서술이 너무 낯설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산은 바다였고, 바다는 산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대접을 받고 종이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정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세상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성서의 세계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공생애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가르침은 오직 이 사실 하나에 집중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됩니다. 노동시장에서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을 잘 섬겼다고 자랑하던 사람은 외면당하고,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상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이런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부활생명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혁명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깨어서 준비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단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 새로운 세상,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새로운지, 얼마나 혁명적인지, 얼마나 전복적인지 영적인 눈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가 얼마나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지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명히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문지기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된 세상의 참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예수님의 비유(35-40)이고, 다른 단락은 그 비유에 대한 부연설명(41-48)입니다. 첫 단락의 비유는 아주 간단해서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3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한 밤중에 혼인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신랑 아버지는 신랑을 데리고 한 밤중에 신부 집에 갔다가 신부를 데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맞아주지도 않는다면 주인은 기분이 몹시 상할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일이 간혹 일어났겠지요. 신부 집에 갔다가 일이 늦어져서 며칠을 더 묶을 수도 있겠고, 돌아오다가 어려운 일이 생겨서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다가 실수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종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는 건 종들에게서 당연한 일인데, 무슨 일인지 이 이야기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고(37a) 합니다. 행복은 주인의 몫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불시에 돌아와도 종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본문은 잠도 자지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던 종들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b)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요?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할 사람들,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종입니다. 주인은 늘 시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은 늘 종으로 살아야 하고 주인은 늘 주인으로 대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세상의 당연한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런 세상의 질서가 전복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됩니다. 주인이 종을 시중듭니다. 이건 분명히 혁명입니다. 고착된 세상 질서가 뒤집어지는 혁명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가능할까요? 비슷한 일들은 간혹 일어나기는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로마가톨릭의 교황은 가난한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그 일을 따라하는 겁니다. 개신교회에서도 그런 행사를 하는 교회가 제법 많습니다.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건 그야말로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백화점 식료품 코너에서 행하는 맛보기 행사와 비슷합니다. 이런 행사가 이 세상의 계급적 질서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의 봉사는 어떻습니까? 그녀의 사랑과 희생은 휴머니즘의 극치입니다. 많은 이들이 테레사에게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 세상의 험악한 위계질서는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아마 칼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갈 수 있는 세계를,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레닌과 모택동은 마르크스의 이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간을 숙청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모릅니다. 그 어디에서도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시중드는 모습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시늉을 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한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르고 이상적으로만 말씀하신 거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삶의 짐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주인이 섬김을 받습니다. 이걸 부인하기가 힘듭니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주인처럼 섬김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독교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지금 모두 처분해서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 노숙자와 알코올중독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계속하기는 힘들 겁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을 섬기는 일은 바로 주인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봉사와 섬김은 주인에 의한 배타적 행위입니다. 그 주인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 마지막 때 올 ‘사람의 아들’입니다.(40절)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섬길 줄 모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우리는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혁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개량에 머물 뿐입니다. 무한 경쟁에 빠져든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모토로 시작된 공산주의도 결국 관료주의에 빠져들어 몰락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의 질서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인 종말에 우리에게 다시 오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세계의 진정한 혁명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무력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우리의 능력이 닿는 대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상을 향해야 앞으로 나가야겠지요. 학벌과 학력으로 인간이 재단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세상 말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면 어떨까요? 만약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만 한다면 아무리 옆에서 대통령을 하라고 해도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수상을 뽑아야 하는데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정치적인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자기의 삶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전투구 식으로 대통령을 하려고 나선다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노력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래와 위가 바뀌는 질서는 천지가 개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우리에게 실현될 세계입니다.
깨어 있는 문지기
우리에게 큰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할 일은 있지 않을까요? 이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계전복을, 또는 세계혁명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듯이 다행스럽게 이 사명도 아주 단순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 종은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지기의 역할이 바로 그 종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대 혁명은 문을 여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을 여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문지기는 일단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더 나아가서 확신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늘 이런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예수 재림의 지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 이 문지기는 깨어있어야만 했습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깨어있다는 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의 의지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아무리 다짐해도 우리의 의지는 쉽게 흔들립니다. 주님의 재림이 일정하게 결정되어 있으면 거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있지만 언제인지 모른다면 준비하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는 위에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그런 새로운 세상은 그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문지기입니다. 하나님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때에 맞추어 문을 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그걸 느낄 겁니다. 깨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또는 실제로는 깨어있지 못하면서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어떤 분은 새마을 운동 차원의 일을 하면서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계시더군요. 누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적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주인이 온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40절 말씀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에온’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약성서의 ‘에온’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에온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세상을 공간적인 의미의 ‘코스모스’라고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은 시간적인 의미의 에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세상은 악한 권세가 다스리는 과거의 에온입니다. 이제 오게 될 세상은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새로운 에온입니다. 그 새로운 에온은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단순히 무늬만 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체질 자체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 사이에 유비(analogia)는 없습니다. 애벌레 상태에서 나비 상태로 되는 세상을 비교할만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묵시문학의 방식으로 그 세상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의 환상과 이사야의 환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전복된 세상이 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극단적인 상징도 이것을 말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큰 붉은 용이 나오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립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런 서술이 너무 낯설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산은 바다였고, 바다는 산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대접을 받고 종이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정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세상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성서의 세계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공생애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가르침은 오직 이 사실 하나에 집중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됩니다. 노동시장에서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을 잘 섬겼다고 자랑하던 사람은 외면당하고,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상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이런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부활생명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혁명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깨어서 준비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단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 새로운 세상,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새로운지, 얼마나 혁명적인지, 얼마나 전복적인지 영적인 눈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가 얼마나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지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명히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문지기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된 세상의 참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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