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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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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불러 질문하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네가 어디 있느냐?,‘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네가 무엇을 보았느냐?,‘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며 직설적으로 잘 물으십니다.
이제 본문에서도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더니 또 하와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짐승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짐승에는 묻지 않고 단번에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제 위치에 있지 못할 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아무개야,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하시며 우리가 깜짝 놀라도록, 우리 이름을 부르면서, 어느 때는 우리 직함을 부르면서 깨우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이 말씀은 먼저 격의 소재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면 격에 맞지를 않습니다. 고기가 물에 있어야지 산에 있다든지, 나무가 산에 있어야지 바다에 있다든지 하면 격에 맞지 않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지 ‘나는 왜 꼭 솔잎만 먹고살아야 되나? 저 누에처럼 뽕잎도 좀 먹어 보자’하고 뽕잎을 먹는다면 죽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성도는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드려야 할텐데, 주일날 교회에 있지 않고 엉뚱한 데 가 있으면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령 이 시간에 술집에 가 있다든지,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 할 돈을 가지고 엉뚱한 데 쓴다든지 하면 이것은 모두 격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사람이니까 물어주시는 것입니다. 짐승들에게는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사명의 소재를 묻는 질문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이드로의 양 무리를 끌고 호렙산 들판을 누비고 있을 때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가시덤불에 불붙은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더니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얼마 전까지도 양을 쳤던 곳입니다. 오물을 버렸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 계시니 거룩한 곳입니다.
신을 벗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사명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책상머리,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겠지만, 그 책상머리에서 주님을 생각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가정 주부가 바쁘게 찬송을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게 아니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과 천한 곳의 장소를 구별해 놀지 않으셨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으면 그곳은 마귀의 장소요, 노상일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생각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이요, 시간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날개를 달아 멀리 상상의 나래를 펴고 비약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은 미국에 있는 아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호주에 있는 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여행 갔다 왔던 울릉도나 제주도, 일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면서 엉뚱하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개야! 네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시간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 속에 주님을 모시지 아니하면 주님은 자꾸 물으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옛날을 생각할 수도 있고 미래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현실에 충성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이 말씀은 우리 죄를 깨우치는 물음이요, 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 탓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야만 됩니다. 자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질문의 대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치 않으면 포기해 버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긍휼을 베풀어 비뚤어진 길로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무개야, 네가 지금 무얼 생각하느냐?’,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엉뚱한 자리에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 음성을 바로 듣고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말씀 안에 있나이다." 이 말이 우리의 첫 번째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 있든지 말씀 밖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주여, 진리 안에 있나이다. 두 번째 대답입니다. 진리대로 살아가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여, 주 앞에 있나이다." 세 번째 대답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우리는 떳떳하게 이 세 가지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을 항상 자신 있게 하면서 사는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99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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