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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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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전에 상도동의 어느 교회에 부목사로 제가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그 집은 다른 불평은 없고 다만 아들 하나 때문에 마음을 아파하는 집이었습니다.
혈육이 없어서 아들 하나를 데려다 키웠답니다. 기대를 많이 걸고 양육을 했는데, 그러나 크면서 온갖 재앙을 다 부리며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재산을 축내고 심지어는 칼부림까지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가족법이 바뀌고 남아 선호 사상도 누그러져서 옛날처럼 자식에게 얹혀 살겠다는 사고 방식은 많이 약해졌습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사명을 다하고, 자식이 집안에서 크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대와 기특함을 가질 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공통적으로 기대되는 바는 메시야 사상인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오시는 강림절의 셋째 주일에 즈음하여 "한 아기에게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하고 다섯 가지로 그 아들, 즉 예수님의 좋은 성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첫째, 기묘자입니다. 곧 신비롭고 놀랍다는 말입니다. 너무 황홀해서 말이나 붓으로 표현할 길이 없을 지경입니다. 기묘하다는 말은 영어의 표현입니다. 그의 인격과 그의 성품과 그의 생애가 기묘하며, ‘말씀이 육체를 입고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라’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더라고 사도 요한은 그의 짧은 필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삶은 우리에게 기묘합니다.
둘째, 주님의 이름은 모사자입니다. 이것은 권모술수가 아닙니다. 이 말은 돕는 자, 곧 상담 자를 말합니다. 의논하여 옳게 지도하는 카운슬러, 무언가 도와주고자 하는 상담 자를 생각하면 됩니다. 인생 행로의 많은 길에서 찢기워지고 상처받은 마음에 위로와 격려가 되고 도움을 베풀어주는 상대역이 바로 주님입니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무한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는 동일합니다.
아이들이 보면 아버지 어머니는 전능합니다. 세상에 못 해 낼 일이 없는 존재로 자식들은 그 부모를 완전히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말만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전능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세금을 받아 독재의 권세를 누리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왕은 왕이로되 세상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악한 병을 파멸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고, 영생을 약속해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넷째, 영원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젖먹이를 가진 어미가 어찌 그 자식을 잊겠습니까? 그라나 그들은 혹 잊을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는 풀이 죽고 기가 죽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오래 오래도록 영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종교는 죽은 신을 교주로 믿고 그 교주의 무덤이 있지만,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영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주님, 승천의 주님, 영생의 주님을 믿기에 활성화되는 축제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디를 가든지 ‘Creative Minority’로 불리웁니다. 창조적인 소수, 곧 뛰어난 소수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활동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영존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걱정 근심 모든 것 던져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예수의 이름의 뜻이 바로 영존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 곧 "샬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내가 평강을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주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평안을 예수를 통하여 베풀러 오셨습니다.
주님 곧 우리에게 주신 아기 예수는 첫째, 어둠 속에 있던 백성들에게 큰 빛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북쪽 국경지대입니다. 항상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던 곳인데, 이곳 나사렛 지방에서 메시아가 나심으로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 그분은 절망 중에서 어둠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셨습니다. 38년 간 중풍으로 소망을 잃고 살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큰 빛이셨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지만 삶의 만족을 찾지 못하고 항상 목마르던 우물가의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큰 빛이요 소망이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던 목자 잃은 양 같은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소망이요 희망이었습니다.
둘째, 이 아기는 무겁게 멍에를 맨 자들에게 큰 기쁨이셨습니다. 4절에 "이는 그들의 무겁게 얹은 멍에와 그 어깨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라"했습니다.
당시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자들이 지운 멍에는 너무나 무거웠고, 압제자들의 채찍과 막대기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언제 모세와 같은 메시야가 나와 이 압제 속에서 백성을 건질까, 이스라엘을 칠 년 간이나 괴롭히던 미디안 군대를 기드온이 물리치듯 압제자들을 물리칠 때가 언제일까 하고 항상 기다렸는데, 그 기다리던 예수가 바로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겁게 멍에를 얹은 자들에게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셨으니,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죄 많은 여인의 등에서 죄의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여자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로 고생하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새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 아기 예수는 다시 오실 재림주로 우리에게 희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를 영원토록 보존할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영원토록 다스려질 것이요, 정의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반드시 이를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오시는 성탄의 계절을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중동 지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일년 내내 햇볕만 내리쬔다면 이 세상은 곧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인생의 날씨도 항상 화창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따금 고통의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슬픔의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이런 기후가 인생의 긴장과 수분을 조절해 기름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가 올 때 짜증을 내거나 햇볕이 쨍쨍 뜨겁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비 올 때 참 감사하다 햇볕 날 때도 감사하다 하는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아기 예수의 성탄을 맞는 성도들의 마음 자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은 록키 산맥 꼭대기에서 비바람에 시달리며 비틀려 자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오히려 인생을 아름답게 공명시켜 주는 하나님의 섭리를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우리 성도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빨간 머리의 한 폴란드 젊은이가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줄 만한 몇 사람을 찾아가 연주했으나, 손가락이 짧고 굵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부족하다느니 다른 직업을 선택해 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청년은 우연히 안톤 루빈스타인을 만나 연주했고, 루빈스타인은 청년에게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으니 계속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루 일곱 시간씩 맹연습에 돌입, 결국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파데레프스키라고 합니다. 파데레프스키는 나중에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남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입니다. 산소도 부족할 때가 있고 햇빛도 가릴 때가 있지만 언어는 평생에 남는 것입니다. 이 말을 비난과 정죄와 모함과 비하로만 쓴다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칭찬과 격려와 용서와 감사의 말들이 실종되어 가는 이 시대, 질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손가락질하는 이 시대에 주 예수 오신 뜻을 깨달아 감사하고, 긍정하는 생활을 합시다. 부정의 말을 감사의 말로 바꾸어 놓자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탈리아의 여의사 넌 브러치의 ‘천재들’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넌 브러치 여사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어떤 청년의 시체를 해부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왼손을 꼭 쥐고 있어서 아무리 손을 펼려고 해도 펴지지 않았습니다. 죽은 시체니까 할 수 없이 메스를 댔습니다. 펴서 보니 그 속에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청년의 애인의 사진이었습니다. 이때 여사는 사랑의 경건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는 것입니다.
죽은 시신이 손에 쥐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모든 생명의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사랑은 더욱 고귀합니다. 그 가운데도 주님의 사랑이야말로 정말 귀합니다.
셋째, 부지런한 생활입니다. 주님은 부지런히 사셨습니다. 이것은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볼 때 좋은 교훈입니다.
우리나라의 개화기에 대나무 컵으로 물을 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종로 거리에 와서 이 대나무 컵을 사 갔다고 합니다. 이 대나무 컵은 물이 80%쯤 차면 밑에 있는 구멍이 벌어지면서 물을 쏟아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물 컵으로 쓰려고 사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교훈적인 선물로 사 갔다고 합니다. 너무 과욕을 부리지 말고 적당히 80%쯤 차면 베풀어주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교훈용 기구를 의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의기 문화가 꽤 발달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선비들은 흔히 일곱 모가 난 주사위를 손아귀에 속에서 굴렸는데, 일곱 면에 사, 인, 찬 등과 같은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루에 감사하는 말을 세 번 하라, 홧김에 나오는 말을 세 번 참아라, 칭찬하는 말을 세 번 하라, 잘못했다는 말을 세 번 하라, 세 번은 참고 꾸짖지 말아라, 세 번은 탐하지 말아라, 세 번만 헐뜯지 말아라 하는 일곱 교훈을 실천하기 위한 의기입니다.
얼마 전 춘성군 군청에서 공무원들에게 이런 쪽지를 돌렸다고 합니다. 열 가지 버려야 할 말이 있는데, 일 더 한다고 봉급 더 주나 하는 무사안일주의, 대충대충 하자는 적당주의, 다른 부서에서는 어떻게 하지 하는 소신 부족,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하는 주인 의 결여,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지 하는 권위주의, 똑똑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는 냉소주의, 출세하려면 줄을 잘 서야지 하는 기회주의,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책임 회피,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는 걸 하는 형식주의, 공무원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하는 패배주의를 버리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면 이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전혀 없습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그 아들이 오셔서 부조리한 생각이 팽배하던 어두운 땅 이스라엘에 비로서 신선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에 가면 칠레와 국경이 접한 곳에 안데스 산이 있는데, 그 산 위에 그리스도의 동상이 높이 서 있다고 합니다. 한 손에는 십자가, 다른 한 손에는 말씀이 들려 있는데, 그 말씀에는 "이 산이 무너져도 그리스도의 평화는 영원하리라"하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의 건널목이 되고, 하늘과 땅 사이에 단절의 벽을 없애 주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뜻을 만 분의 일이라도 생각해야 합니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처음으로 57초의 비행에 성공하고 이 소식을 누이의 집으로 알렸습니다. 누이는 이 소식을 받고 지방 신문사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조간 신문에 나온 기사는 우리 마을이 낳은 유명한 자전거 상인이 이번 성탄절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너무 바빴던 신문기자는 그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입니다. 알맹이는 빼 놓고 껍질만으로 기사를 쓴 것입니다.
연말연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두가 바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성탄의 기쁜 뜻, 예수 오신 진정한 뜻을 망각하지 맙시다. 주님 오신 성탄의 뜻을 왜곡하지 맙시다.
우리 성도들이 재림 예수의 제자들이 되어서 뜻깊은 연말연시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99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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