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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5: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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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소유를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각각 부르십니다. 어떤 이는 아침 9시에 부르시고, 어떤 이는 11시에, 어떤 이는 오후 2시에, 어떤 이는 해 넘어가는 인생의 석양 오후 5시에 부를 수도 있습니다.
각각 부르셔서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쓰고 가지고 소유하고 있는 동산, 부동산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의 소유를 우리가 잠시 위임받은 것뿐입니다.
자기 소유를 그 종들에게 각각 차등 있게 맡겼습니다. 재능대로 맡겼다고 했습니다. 각 개인의 성품대로 맡깁니다. 노래 잘 하는 이는 성가 대원으로, 가르치기 잘하는 이는 교사로 일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노래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기도합시다.
남은 가지지 못한 작은 재능이 내게 있음을 발견합시다. 그것을 통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가르치는 데 능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은사가 있습니다. 그 은사를 활용하기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떠났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각각 소유를 맡기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유의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떠났어도 여전히 있는 것처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일을 안 했습니다. 땅에 파묻어 놓았습니다. 이 점이 다릅니다.
가끔 외부 강사 모셔 두고 헌신 예배드릴 때 강사님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사를 위하여 기도하기 앞서 본 교회 당회장 목사를 위하여 먼저 기도하셔야 합니다. 구역 예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밤 예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교회 당회장이 있으나 없으나 있는 것처럼 기도하셔야 합니다.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열심으로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구역장님들도 구역을 돌보는 데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이 채근하든 안 하든 열심으로 구역을 돌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주인이 주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대목을 금년 신앙 생활에 꼭 명심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16절에 보면 머뭇거리지 아니했습니다.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즉각 활동한 것입니다. 장사해서 갑절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라는 말이 없습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즉각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즉시 기도하고, 감동이 오는 즉시 실천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가지고 주님 주신 재능과 물질과 시간과 공간을 바쳐야 합니다.
17절에 보면 "그같이 하여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그같이 하여"라고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에 '또'가 붙었고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또'가 붙었습니다. '또또'의 신앙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또'가 없습니다. 즉 남긴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같이 하여'라는 말이 집고 넘어가야 할 대목입니다. '그같이 하여' 라는 말은 자기 독단이나 자기 생각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그같이 하여'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한 그대로 한 것입니다. 배워서 한 것입니다.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형과 아우의 관계입니다. 선배와 후배의 관계입니다. 고참과 신참의 관계입니다. 그같이 해야 합니다.
그같이 하여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하는 그대로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전도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했는데 십일조 생활을 안 합니다. 그 사람에게 맨 처음 전도했던 사람이 십일조 생활을 안 했던 것입니다. 항상 늦게 오는 이가 있었습니다. 보니 전도한 이가 항상 늦게 오는 습관이 있어 전도 받은 사람도 늦게 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받은 이에게 좇은 교훈을 남긴 겁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누구든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주고 난 한 달란트만 주는구나' 하는 상대적 빈곤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땅 속에 파묻어 두고 하루하루 게으름 피우고 살았던 것입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먼저 시장 조사를 정확하게 진행하는 사람만이 성공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그같이 하여서 그 다음 사람도 성공하는 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어떤 분을 보면 신앙 생활에 있어 단걸 선수는 될지언정 장거리 선수는 되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사 가서 교회에 등록하고 금방 교인들과 교제하고 쾌활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1년이 못 되어 남의 돈 빌려 쓰고 이렇게 저렇게 신용 떨어지고 거기 있을 수 없으니 다른 데로 이사를 갑니다.
어떤 이는 한편 말 수가 적어서 저분이 무엇을 할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사귀다 보면 믿음직하고 튼튼하여 가까이하고 싶어집니다. 또 어떤 분은 멀리서 오는 분이 있습니다. 저분이 얼마나 오래 다니려나, 괜히 교적부에 올려놓고 일거리만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한 달 두 달 일년 이년 꾸준하게 참석합니다. 이것이 장거리 선수 신앙입니다. 우리 믿음도 이렇게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21절에 결산이 나오는데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작은 일' 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건강한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요즈음 하루 일당을 이만 원으로 생각해 봅시다. 한 달란트라고 하는 돈을 계산하면 바로 1억 2천만 원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2억 4천만 원,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6억 원입니다. 그런데 2억 4천만 원 받은 종은 이것으로 장사해서 4억 8천만 원을 만들었고 6억 원 받은 종은 장사해서 12억 원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작은 일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크다고 목에 힘 주고 말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지극히 작은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6억 재산을 가지고 12억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작다 하고 진짜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과 종과의 신뢰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관계로 신분이 격상된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나를 믿고 그렇게 많은 것을 맡겨 주시고 나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이러한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각각 다른 환경과 처지에서 각각 다른 재능을 가지고 일했을지라도 천국에서는 동등하게 영생과 축복을 누립니다. 수백만 명을 구원시킨 대전도사 빌리 그레함이나 시골 교회를 걸레질하는 노인이나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동등합니다.
그러나 산해진미를 먹으며 순간적으로 느끼는 즐거움과 기도 응답 받았을 때 찬송 부르는 기쁨이 같습니까? 두 즐거움인 같지 않습니다. 주의 응답을 받고 찬송드릴 때 느끼는 눈물의 감격은 오래 갑니다. 음식은 아무리 좋더라도 배 꺼지면 그만입니다. 배 꺼지면 금방 음식값이 아깝다 하지만 찬송 불렀을 때의 잔잔한 기쁨은 오래 갑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닫는 기쁨도 오래 갑니다. 이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불평을 합니다. 무익한 종은 말이 많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읍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것은 노랭이, 구두쇠, 깍쟁이, 수전노, 자린고비라는 말입니다. 종은 자기를 먹이고 입히고 재운 주인을 가리켜 굳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불평을 들어 보면, 그 불평은 사실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 안 하는 사람 치고 불평은 사실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 안 하는 사람 치고 불평 많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그 불평은 자기가 들어야 할 불평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욕했습니다. 심지 않고 헤치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말은 불로소득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시작하면 안 됩니다. 감사와 감격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쁜 일을 안 하는 것만이 장한 것이 아닙니다. 사고 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선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땅 속에 묻어 두면 본전일 뿐입니다. 본전에서 이자가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초신자 때와 집사가 되었을 때에는 성경 읽는 장 수가 달라야 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달라야 합니다. 헌금하는 액수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신앙의 연 수가 오래 갈수록 이자가 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는 본전까지 팔아먹는 신자가 있습니다. 본전에는 이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로 구성된 유명한 영국의 관현악단이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위해 마지막 리허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구경꾼이 마지막 리허설을 관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지휘자의 지휘가 시작되고 모든 악기들을 동원해서 음악이 나오는데 청중의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지나갔는데 갑자기 그 지휘자가 '그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연주하던 모든 악기가 중단됐습니다. 그런데 그 지휘자가 어느 한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당신 왜 가만있소?"
그 사람은 피콜로 연주자였습니다. 피콜로는 아주 작은 악기입니다. 피콜로 연주자는 어느 구석에 끼여 있었습니다. 자기 얼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야 안 불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감기 기운이 있고 해서 부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지휘자가 지적한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이 판을 깼다고 다시 연습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던지 음악회가 생기고 그같이 많은 기립 박수를 받았던 적은 없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아주 작고 이름 없는 사람의 피콜로 소리가 감동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히브리 속담에 '하나님은 명사보다 부사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명사는 이름씨요, 부사는 토씨입니다. 토씨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토씨가 하는 역할은 굉장히 큽니다. 한국 사람의 속담에도 나간 사람의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의 몫은 없다고 했습니다.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몫은 남겨 두지만 자고 있는 사람의 몫은 없습니다.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깁시다. 자신의 신앙 생활이 미미하고 적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 일의 지름길이요 큰 일이 되는 기초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99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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