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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17: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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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 |
2002년 9월 1일
지금부터 약 2870년 전 일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때입니다. 이 때 북쪽 이스라엘에 아주 악한 왕 아합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세벨이었는데 그 아내가 더 악락했습니다. 지금 북한처럼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왕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3년 6개월입니다. 온 통 나라가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북한도 먹을 것이 없어 인육식까지 한다고 하지 않아요. 이 때 지중해 연안 사르밧이란 마을에 홀로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이 일찍 죽었습니다. 이 여인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한끼 구어 먹을 가루와 기름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이것을 먹으면 이제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여인은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죽으려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이 때 동네 사람이 아니 낮선 사람을 만났습니다. 홀로 아합왕과 맞서 싸운 엘리야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나자 마자 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인은 참 마음의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물을 대접하기 위해 나무를 하다 말고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 때 이 낮선 사람은 물뿐이 아니라 떡 한 조각을 가져다라고 합니다. 여인은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끼 가루와 기름이 있는데 이 나무 주어다가 아들과 함께 한끼 식사를 하고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여인에게 말합니다. 13절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먼저 자기부터 먹을 것을 가져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넉넉하게 살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심방을 가서 이런 말을 우리 성도님들에게 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올 여름 유난히 비도 많고 더웠든데 목사님이 더위 먹었나?" 그렇겠습니까? 이 여인은 엘리야 말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5-16절을 읽어 보십시오. 넉넉하게 살았습니다.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우연히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 중에서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삶의 양식을 주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겠습니까? 저는 작은 것으로부터 넉넉한 삶을 살게 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지막 먹고 죽을 음식입니다. 두 식구 먹기도 부족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엘리야도 먹고 자기 식구도 먹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넉넉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늘 부족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식이 부족합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물질이 부족합니다. 건강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한 중에서도 넉넉히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1. 부족한 것, 즉 없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고 넉넉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인을 보십시오. 이제 한끼 음식이 남았습니다. 이 한끼 음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12절 보십시오.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한끼 음식 먹고 죽겠다고 합니다. 우리 두 식구 먹기도 부족하고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 먹고 기운 내는 것이 아니라 죽겠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으로 나를 대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통의 가루 다하지 않고 기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한끼 음식이지만 보는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여인은 이 작은 것 먹고 죽겠다고 하지만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넉넉히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보게 했을까요? 누가 정신 나간 사람입니까? 엘리야 아닙니까? 뭐가 한 참 돌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부족한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없는 것만 보며 불평하고 원망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지만 그 작은 것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야은 이미 그 기적을 체험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이미 거의 일년 반동안 까마귀를 통해 먹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까마귀가 먹을 것을 날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나그네가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는 너무 고통스러워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그네는 지친 친구를 위로하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때 부정적인 친구가 말합니다. "이제야 올 것이 왔군.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거야." 반면에 긍정적인 친구는 이렇게 말하며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는 희망의 징표가 아닐까?" 그리고 과연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드디어 쉬어갈 마을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똑같이 눈앞의 공동 묘지를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음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삶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없는 것(nothing)'보다 "있는 것(something)"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는 오천명이 있다고 해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면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히 먹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족한 것은 죄가 아니다. 없는 것 역시 죄가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꾸 부족한 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으며 인생을 빈궁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코가 낮은 것 죄가 아니어요. 눈이 작은 것 죄가 아닙니다. 자꾸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궁핍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기 하나 나면 다 들통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것 말고 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쓰임받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 박사는 말하기를 보통사람은 뇌의 10%를 사용하고 천재는 15~20%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80%의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뇌가 있느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공자와 실패자 모두 공통적으로 약점을 가지있지만 실패자는 약점을 고치는데 시간을 다 쓰고, 성공한 사람들은 약점은 놔두고 강점 개발에 극대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를 사용할 때 지팡이를 사용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무너뜨릴 때 그가 늘 가지고 있는 것 물멧돌, 돌맹이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란 자신에게 가장 능숙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없는 것 바라보며 궁핍하게 살지 마시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통해 넉넉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가 쓴 "미래 경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책을 보면서 교훈받은 것 중의 하나가 그가 책 서두에서 경영을 일곱 가지로 정의하면서 첫째로 "경영이란 인간에 관한 것이다. 경영의 과업은 서로 다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각자의 강점을 활용하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각자의 약점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개인마다에게 주어진 강점이 있습니다. 그것 사용하면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2. 부족한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삶이 아니라 부족한 것 때문에 진정 넉넉함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끼를 먹고 죽으려는 여인을 보십시오. 이제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한끼 음식이 먹고 죽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엘리야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되었습니다. 그 한끼 음식으로 엘리야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누구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부족한 가운데 넉넉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보십시오. 24절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고쳐주심으로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그녀는 목격하고 고백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의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넉넉합니다. 아무리 많이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넉넉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없는 인생은 욕심과 세상 풍속의 종이 되어 끝없는 욕심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 모시면 주어진 것으로 얼마든지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고 세상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의 복을 누리며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생명 거두어 가면 모든 것이 주어진다 해도 넉넉히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넉넉히 누릴 수 있는 것 많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많은 것이 넉넉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주보 표제글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큰 집 살아야 편안하고/ 많은 것 가져야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 사람들은 수렁처럼 깊고 깊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분주합니다. /진정 편안함과 넉넉함은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가장 가치있는 것은 쟁취하거나 /탈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간도, 땅도 주어지고, /생명도 하늘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 /이런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을 /쟁취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내 몸에 있는 어느 하나/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눈만 들으면 언제나 볼 수 있는 /하늘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있고/ 잘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나 주어지는 /공기가 있습니다./ 주어진 것을 누리면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살만하고 넉넉합니다.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게 값진 재물이 내겐 없지만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495장 1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495장 3절)"
정근모 박사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들 하비에게를 주보에 실었습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에서 나온 내용입닏. 뇌출혈로 아들이 혼수 상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면서 비행기에서 쓴 편지입니다. 자신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왼쪽 콩팥을 아들에게 이식시켜 주었습니다. 수술후 생명이 커져갔습니다. 3일 동안 철야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회복되었습니다. 15년 동안 생명이 연장되고 아들 딸을 낳았습니다. 그 후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목사님 말씀에 매달리고, 거듭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삶에 지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네 아들에게 감사해 본 적이 있느냐?" 자신이 지금껏 큰짐으로 생각해 왔던 아들을 통해 자신과 가족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를 위해 무거운 짐을 져야 했던 제 아들에게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하비야, 너는 그 작은 십자가를 평생 지고 다녔지. 그 십자가 때문에 아빠가 기도할 수 있었고, 우리의 간증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생명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라고 쓰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으로 인하여 더 나빠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 앞에 나가 진정 주님 만나면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넉넉함이 있습니다.
3. 부족한 것으로 나만 먹고 죽으려 하지말고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나누는 삶을 살면 부족한 것일지라도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한끼 음식이기 때문에 자기 먹고 죽기에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니다 나하고 나누어 먹자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읽어 보십시오. 나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너희들 먹으라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해 줍니다. 그렇게 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움켜쥐는 것에 집착하면 아무리 움켜 쥐어도 넉넉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비록 이성에 맞지 않고 논리와 계산에 맞지 않는 것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 우리는 부족한 중에서도 넉넉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넉넉하게 함께 어울어져 살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니야 교회를 보십시오. 많은 환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이 있었습니다(고후8:2).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하여 도와 줍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가 함께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농촌교회 피패해졌습니다. 도시 교회는 거대해졌습니다. 신도시에 교회 지어놓고 수평 이동한 교회 교인들 받아들입니다. 4개월에 2000명 되었다는 교회도 있습니다. 자랑합니다. 교육관 짓습니다. 기도원 삽니다. 공동 묘지 만듭니다. 실컷 먹고 쓰고 합니다. 이것 죄짓는 것입니다. 농어촌 교회 어려운 교회와 나누어야 합니다. 더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부의 불균형은 심각합니다. 세계 은해의 조사에 의하면 하루 1달러 미만 생활자가 12억명에 달하고 상위 20개 부국의 평균 소득이 20개 최빈국 평균의 37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1%의 상류층이 38%의 부를 거머 쥐고 있다고 합니다. 갖은 사람들이 너 갖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50대 변호사와 의사 부부가 4년 소득 3300만원을 신고했는데 재건축 아파트 10채를 가지고 있고, 50대 주부는 최근 3년 동안 17채의 아파트를 구입 총 26채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60대 의사는 아파트 5채 상가 2채를 사들였지만 연간 소득은 3000만원으로 신고하였고 50대 사업가는 재건축 아파트 7채를 사들였지만 사업소득은 1900만으로 신고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을 보십시오. 대통령의 아들들의 집, 모 대통령 후보의 빌라,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불법취득 등등 갖은 자의 도덕 불감증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듯합니다. 사회가 극단화되면 자본주의 역시 오래 가지 못합니다. 1780년 경 프랑스 인구는 2500만이었는데 1%도 되지 않은 성직자와 귀족이 나라의 중요한 기관과 자리를 독차지했습니다. 1%가 가진 땅이 프랑스 전 국토의 40%가 되었습니다. 결국 혁명으로 귀족들은 80% 이상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니얼 퍼거슨 옥스퍼드 대학 교수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현 미국의 상황을 보니 '계급간 갈등' '자본주의 역사는 착취와 부 집중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수리 철학자로 불리어진 피타고라스(BC 5세기 인물)는 "앞으로 오는 시대의 지배적인 신은 숫자의 신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숫자의 군대, 더 많은 숫자의 무기, 더 많은 숫자의 황금을 준비한 나라만이 세계의 패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숫자의 힘을 신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나라를 잘 살게 하고 가정을 넉넉하게 살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넉넉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말씀 대로 사용되면 그곳에 넉넉한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무엇이든 올려지기만 하면 거기에서 함께 넉넉히 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바친 것은 한끼 분의 초라한 식사입니다만 그곳에서 3년 6개월 동안 넉넉히 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사무엘을 바치니까 다섯 남매를 더 얻고 사무엘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인간 보기에 아무리 부족하고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손에 들어가면 크고 넉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무를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숲을 봅니다. 나는 오늘만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내일도 보십니다. 나는 일시적인 것만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나는 겨울만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봄과 가을도 보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한 것으로 비구름을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부족한 것으로 만들 눈부신 햇살을 보게 합니다.
부족하다고 느낄 때
부족한 것, 즉 없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넉넉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부족한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삶이 아니라 부족한 것 때문에 진정 넉넉함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으로 나만 먹고 죽으려 하지말고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나누는 삶으로 부족한 것일지라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넉넉하게 살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기 바랍니다.
작은 것으로 넉넉히 사는 삶의 원리/열왕기상17:8-16/2002년 9월 1일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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