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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1: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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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369 |
2007.11.11.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샘터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 세상살이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기만 하면 되지 굳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히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참된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건 예배가 잘못이 아니라 예배를 향한 자기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배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가장 귀중한 통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이 예배, 즉 제사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동이 가능한 성막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가나안 정복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입을 옷,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 제사 드리는 절기와 방법 등등, 제사에 관한 수많은 규정이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제사를 향한 그들의 열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제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크게 패해 나라를 잃었을 때는 물론 제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나라를 회복하기만 하면 가장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제사 행위에 놓였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거짓 예배
그러나 아무리 귀한 제사, 즉 예배행위라 하더라도 본질을 잃고 형식에 떨어지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깨끗한 것은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더러워집니다. 거룩한 행위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추해집니다. 이사야가 살던 기원전 8세기의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행위가 바로 그랬습니다.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소돔 관원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10절)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파괴된 도시입니다. 그들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기자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소돔이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사야는 11절 말씀부터 예루살렘 주민이 자랑하고 있는 제사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절에서도 야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제사행위가 귀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들의 예배를 귀찮아 하셨는지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황소와 숫염소의 피, 그리고 제물의 타는 냄새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이 근동 지방의 이방 신들에게 드려지는 그런 제사를 흉내 내서 드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본문에 열거된 모든 내용들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늘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 행위자체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지 예배를 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그걸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는 1:2절 이하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떠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섰구나.” 이사야의 이런 지적을 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백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이렇게 반론을 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문제가 많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화려하게 잘 드리고 있으니 괜찮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모범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등등, 많은 종교절기를 그들은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무 흠도 없고 깨끗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 짐승은 부위에 따라서 제사장의 몫도 있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도 있습니다. 최선으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게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도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둘째 치고 그런 노력만으로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온전하게 정의로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과 원칙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순식간에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업적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살린다는 신앙의 본질이 신앙 편이주의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가볍게 여겨야 하는지,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 세상의 고난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일구어가야 하는지와 연관됩니다.
지금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예루살렘 고관들과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종교행위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문 10절에서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보라라, 하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제사를 화려하게 드렸지만 말씀은 외면했습니다.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은 외면했습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 시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한 며느리가 있습니다. 이 며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명절마다 큰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시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시부모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이 이사야 당시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제사행위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래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데, 예배와 말씀이 분리된다는 게 무엇인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듣는 설교마저 하나의 종교적 형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배와 하나님 말씀이 단순히 종교적 자기만족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삶과 전혀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예배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속이 비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사야가 말하듯이 거짓 예배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거짓 예배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더 나아가 15절에서 이사야는 그들이 아무리 두 손을 모아 빌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참된 예배
이사야의 비판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거기에 참여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멋진 예배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기도했겠지요. 멋진 성가대의 찬양도 있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다는 말이 됩니다. 시부모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잔치를 베풀고 자신이 효부라는 걸 나타내는 며느리와 비슷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들으실까요? 우리처럼 지극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처럼 교회 행사가 많은 교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황소를 잡고 숫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듯이 우리처럼 많은 헌금을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처럼 기도를 열정적으로 많이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심지어 특별새벽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엽니다. 또는 서울 시청 앞에서 반공, 반김정일, 반핵 기도회를, 또는 사학법 반대 집회나 동성애자 차별반대법안 반대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실까요? 저는 이사야처럼 영적 경지가 높은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무리 뜨거운 예배를 드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소외된다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답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예배 형식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 즉 그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와 삶이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이사야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이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외쳤습니다.(15b) 그들을 향해서 몸을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말합니다.(16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바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바른 삶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17절)
여기서 억눌린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지제도가 없었던 고대사회는 가난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이 쉽게 파괴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린자식을 남에게 주기도 하고,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할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약간 다른 처지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장애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처지가 어땠을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삶을 사회가 책임지라고 외치는 중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의 삶을 책임지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단순히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를 기점으로 모든 성서가 말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그런 것을 외면한 채 황소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어찌 기쁘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완전히 정의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을 구제 하는 데 내어놓아야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일소하고 완전하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삶의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억눌린 자, 고아, 과부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눈을 뜨게 됩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으로 바른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이 역사를 향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야말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요 4:24)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샘터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 세상살이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기만 하면 되지 굳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히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참된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건 예배가 잘못이 아니라 예배를 향한 자기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배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가장 귀중한 통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이 예배, 즉 제사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동이 가능한 성막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가나안 정복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입을 옷,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 제사 드리는 절기와 방법 등등, 제사에 관한 수많은 규정이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제사를 향한 그들의 열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제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크게 패해 나라를 잃었을 때는 물론 제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나라를 회복하기만 하면 가장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제사 행위에 놓였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거짓 예배
그러나 아무리 귀한 제사, 즉 예배행위라 하더라도 본질을 잃고 형식에 떨어지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깨끗한 것은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더러워집니다. 거룩한 행위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추해집니다. 이사야가 살던 기원전 8세기의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행위가 바로 그랬습니다.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소돔 관원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10절)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파괴된 도시입니다. 그들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기자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소돔이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사야는 11절 말씀부터 예루살렘 주민이 자랑하고 있는 제사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절에서도 야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제사행위가 귀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들의 예배를 귀찮아 하셨는지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황소와 숫염소의 피, 그리고 제물의 타는 냄새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이 근동 지방의 이방 신들에게 드려지는 그런 제사를 흉내 내서 드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본문에 열거된 모든 내용들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늘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 행위자체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지 예배를 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그걸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는 1:2절 이하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떠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섰구나.” 이사야의 이런 지적을 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백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이렇게 반론을 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문제가 많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화려하게 잘 드리고 있으니 괜찮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모범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등등, 많은 종교절기를 그들은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무 흠도 없고 깨끗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 짐승은 부위에 따라서 제사장의 몫도 있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도 있습니다. 최선으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게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도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둘째 치고 그런 노력만으로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온전하게 정의로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과 원칙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순식간에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업적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살린다는 신앙의 본질이 신앙 편이주의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가볍게 여겨야 하는지,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 세상의 고난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일구어가야 하는지와 연관됩니다.
지금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예루살렘 고관들과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종교행위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문 10절에서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보라라, 하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제사를 화려하게 드렸지만 말씀은 외면했습니다.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은 외면했습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 시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한 며느리가 있습니다. 이 며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명절마다 큰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시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시부모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이 이사야 당시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제사행위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래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데, 예배와 말씀이 분리된다는 게 무엇인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듣는 설교마저 하나의 종교적 형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배와 하나님 말씀이 단순히 종교적 자기만족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삶과 전혀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예배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속이 비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사야가 말하듯이 거짓 예배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거짓 예배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더 나아가 15절에서 이사야는 그들이 아무리 두 손을 모아 빌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참된 예배
이사야의 비판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거기에 참여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멋진 예배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기도했겠지요. 멋진 성가대의 찬양도 있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다는 말이 됩니다. 시부모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잔치를 베풀고 자신이 효부라는 걸 나타내는 며느리와 비슷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들으실까요? 우리처럼 지극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처럼 교회 행사가 많은 교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황소를 잡고 숫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듯이 우리처럼 많은 헌금을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처럼 기도를 열정적으로 많이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심지어 특별새벽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엽니다. 또는 서울 시청 앞에서 반공, 반김정일, 반핵 기도회를, 또는 사학법 반대 집회나 동성애자 차별반대법안 반대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실까요? 저는 이사야처럼 영적 경지가 높은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무리 뜨거운 예배를 드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소외된다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답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예배 형식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 즉 그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와 삶이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이사야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이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외쳤습니다.(15b) 그들을 향해서 몸을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말합니다.(16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바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바른 삶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17절)
여기서 억눌린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지제도가 없었던 고대사회는 가난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이 쉽게 파괴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린자식을 남에게 주기도 하고,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할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약간 다른 처지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장애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처지가 어땠을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삶을 사회가 책임지라고 외치는 중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의 삶을 책임지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단순히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를 기점으로 모든 성서가 말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그런 것을 외면한 채 황소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어찌 기쁘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완전히 정의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을 구제 하는 데 내어놓아야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일소하고 완전하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삶의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억눌린 자, 고아, 과부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눈을 뜨게 됩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으로 바른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이 역사를 향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야말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요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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