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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5: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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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392 |
2007.11.25.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
우리는 오늘 제3 이사야에서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그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50-70년에 이르는 바벨론 포로시기를 보냈습니다. 근동의 패권을 새로 장악한 페르시아에 의해서 다른 속국들과 더불어 해방을 맞이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도시를 복구하는 등, 나름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모든 일들이 노력한 것만큼 잘되지 못했습니다. 국제정세도 좋지 않았습니다. 일명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로 유명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으로 인해 페르시아에 세금을 바쳐야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알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원전 5세기의 이스라엘은 내우외환에 시달려 민중들의 삶이 피폐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사실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 세상이 오면 지금 세상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 중에서 몇 대목을 추려보겠습니다. 19b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가 나지 않겠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거꾸로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울음소리가 많고 부르짖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는 뜻입니다. 끼니가 없으면 어른들이야 참고 지낸다지만 아이들은 울면서 보챕니다. 더 이상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형편이 안 될 때 아이들을 다른 집으로 보내거나 심지어는 팔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를 보낸 뒤 온가족이 울부짖겠지요. 20절은 사람들이 수명을 다한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21절에서 집을 지어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이, 포도원을 경작해도 남의 손에 넘겨지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살고 있던 그 삶은 인간이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군,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사야의 말은 오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또는 방글라데시나 북한 주민들에게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매일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자식들에게 호화로운 걸 모두 제공해주지는 못하지만 종으로 팔지는 않습니다. 세계에서 자랑할 만큼 신생아 사망률도 아주 낮고, 고령사회를 걱정할 정도로 평균 수명도 많이 늘었습니다. 거꾸로 사는 형편이 매우 열악한 분들도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습니다. 제가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습니다만, 극빈층의 삶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3 이사야가 살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일부라고 하더라도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이사야의 이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그것은 곧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데, 우리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연관됩니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도덕심이나 인간애 같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생명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 훼손당하는 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왜곡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을 잊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는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변화의 주체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 사회가 정의로워지도록 싸우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나 오늘이나 울음소리, 부르짖음, 억울한 죽음,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정의 실현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은 옳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늘 그런 세상을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1:4) 아모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요단 강가에서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말씀은 흡사 사회 혁명가들의 발언을 방불케 합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노동법을 정의롭게 바꾸고, 제도를 바꿔나갈 수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과 대학교 졸업생들 사이에 임금격차를 가능한대로 축소해나간다면 우리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워지겠지요.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사회봉사를 통해서 이 세상의 변화를 모색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집, 또는 겨울철 땔감을 제공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기도하고 의료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가 북한을 돕는 모든 일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의 방법이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윤리라고 한다면, 이 방법은 개인의 삶을 바꿔나감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개인윤리이겠지요. 사회와 개인, 또는 제도와 의식은 마차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두 요소가 같이 굴러가야만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실현이 가능하겠지요.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에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많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 새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노력만으로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지상낙원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제도와 의식을 바꿔나가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도 모두 그런 노력의 한 방식들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아무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바람직한 공동체인가요, EU인가요, 일본인가요, 대한민국인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게 길이다.” 하고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눈물과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인 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적인 변화를 외쳐봐야 헛수고야, 하고 비아냥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역사를 끌어가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이 세상과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최대한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법을 바꿀 건 바꾸고 생각을 바꿀 건 바꿔야 합니다. 돈이 부정한 방법으로 잘못 흘러가지 않도록 감시할 건 감시해야 합니다. 깨어있는 시민들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당연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개혁 운동으로 끝난다면 기독교는 와이엠씨에이, 흥사단, 경실련처럼 시민운동에 떨어지고 말겠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어떤 새로운 세상을 일으켜보자는 사회운동이나 이념투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 세상과 역사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세상일을 팽개쳐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를 정의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5백 년 전의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을 읽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전적인 새로움
이사야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여러분은 더 깊이 있게 이해해야합니다.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하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요즘에도 많은 것처럼, 이사야도 악하고 불의한 세상 앞에서, 그리고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 당시 민중들의 평범한 일상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국들은 작은 나라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만 하고, 귀족들도 자기 욕심에만 취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일까요? ‘새롭다’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실 세상은 옛 것의 반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 것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과거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당한 슬픔과 분노도 망각됩니다. 지난날 자랑하던 것을 계속 자랑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지난날 부끄럽게 생각하던 것을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랑하던 것이 무엇인가요? 이사야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이 자랑거리입니다. 외고와 특목고의 입시 시험지가 특정 학원에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끌어 모아 명문대에 많이 보내는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합니다.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는 자기 자식들을 자기 회사에 위장 취업시켜서 수천만의 탈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돈만 많으면 그것으로 자랑합니다. 이런 방식의 자랑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세상의 마이너리티로 사는 게 그렇겠지요. 한국사회에서는 명문대학을 못 나오거나 재산을 늘리지 못하면, 또 장애나 성적 소수자로 살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런 부끄러움을 더 이상 부끄러움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세상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잘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가 일등하나, 누가 잘났나, 하는 기준으로 교육을 받고 그렇게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랑거리와 부끄러움이 없는 세상이 어떤 건지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늘나라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할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끄럽게 겨우 구원만 받는 사람이 있고, 풍성한 상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막살이가 있고 호화로운 저택이 있다고 선전합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의 천당보고서나 복음서의 ‘달란트 비유’를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다, 나쁘다 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입니다.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건들이 세상에 나오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새롭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25절에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이 문장에서 핵심은 두 동물이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늑대와 어린 양, 사자와 소가 대비됩니다. 이 세상에서 늑대는 호시탐탐 어린 양을 먹잇감으로 노리며, 사자도 역시 소를 노립니다. 이사야의 묵시적 상상력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짐승들이 친구처럼 함께 풀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습니다.
지난 과거의 역사에서 늑대와 어린 양이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서로 잡아먹히느냐, 잡아먹느냐 하는 생존경쟁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이런 룰에서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두 식당이 길을 마주보고 있다고 합시다. 이쪽은 예수쟁이 식당이고, 저쪽은 불신자 집입니다. 예수 믿는 식당이 자기보다 남이 잘돼야 한다는 심정으로 손님들을 저쪽 식당으로 보내줄까요? 기껏해야 선의의 경쟁을 하면 양심적인 신자라라고 하겠지요. 교회끼리도 노골적으로 경쟁하고 있는 마당에 먹고 사는 문제에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상살이에서만이 아니라 가족끼리도 우리는 경쟁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자존심이 강한가, 상대방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릴 때가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까지 나왔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사나, 왜 이렇게 베풀지 못하나 하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경쟁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늑대를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기회가 되면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우리의 이기심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만이 살 길이다, 하고 자신의 부도덕성과 잘못을 합리화하지 마세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대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이 세상과 역사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건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친구처럼 풀을 뜯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세상입니까? 바로 그 세상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생명인 부활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고 이 사실에 온 영혼을 걸고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안주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기다릴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
우리는 오늘 제3 이사야에서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그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50-70년에 이르는 바벨론 포로시기를 보냈습니다. 근동의 패권을 새로 장악한 페르시아에 의해서 다른 속국들과 더불어 해방을 맞이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도시를 복구하는 등, 나름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모든 일들이 노력한 것만큼 잘되지 못했습니다. 국제정세도 좋지 않았습니다. 일명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로 유명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으로 인해 페르시아에 세금을 바쳐야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알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원전 5세기의 이스라엘은 내우외환에 시달려 민중들의 삶이 피폐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사실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 세상이 오면 지금 세상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 중에서 몇 대목을 추려보겠습니다. 19b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가 나지 않겠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거꾸로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울음소리가 많고 부르짖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는 뜻입니다. 끼니가 없으면 어른들이야 참고 지낸다지만 아이들은 울면서 보챕니다. 더 이상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형편이 안 될 때 아이들을 다른 집으로 보내거나 심지어는 팔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를 보낸 뒤 온가족이 울부짖겠지요. 20절은 사람들이 수명을 다한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21절에서 집을 지어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이, 포도원을 경작해도 남의 손에 넘겨지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살고 있던 그 삶은 인간이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군,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사야의 말은 오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또는 방글라데시나 북한 주민들에게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매일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자식들에게 호화로운 걸 모두 제공해주지는 못하지만 종으로 팔지는 않습니다. 세계에서 자랑할 만큼 신생아 사망률도 아주 낮고, 고령사회를 걱정할 정도로 평균 수명도 많이 늘었습니다. 거꾸로 사는 형편이 매우 열악한 분들도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습니다. 제가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습니다만, 극빈층의 삶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3 이사야가 살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일부라고 하더라도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이사야의 이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그것은 곧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데, 우리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연관됩니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도덕심이나 인간애 같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생명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 훼손당하는 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왜곡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을 잊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는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변화의 주체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 사회가 정의로워지도록 싸우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나 오늘이나 울음소리, 부르짖음, 억울한 죽음,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정의 실현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은 옳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늘 그런 세상을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1:4) 아모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요단 강가에서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말씀은 흡사 사회 혁명가들의 발언을 방불케 합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노동법을 정의롭게 바꾸고, 제도를 바꿔나갈 수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과 대학교 졸업생들 사이에 임금격차를 가능한대로 축소해나간다면 우리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워지겠지요.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사회봉사를 통해서 이 세상의 변화를 모색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집, 또는 겨울철 땔감을 제공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기도하고 의료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가 북한을 돕는 모든 일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의 방법이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윤리라고 한다면, 이 방법은 개인의 삶을 바꿔나감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개인윤리이겠지요. 사회와 개인, 또는 제도와 의식은 마차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두 요소가 같이 굴러가야만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실현이 가능하겠지요.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에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많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 새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노력만으로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지상낙원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제도와 의식을 바꿔나가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도 모두 그런 노력의 한 방식들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아무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바람직한 공동체인가요, EU인가요, 일본인가요, 대한민국인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게 길이다.” 하고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눈물과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인 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적인 변화를 외쳐봐야 헛수고야, 하고 비아냥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역사를 끌어가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이 세상과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최대한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법을 바꿀 건 바꾸고 생각을 바꿀 건 바꿔야 합니다. 돈이 부정한 방법으로 잘못 흘러가지 않도록 감시할 건 감시해야 합니다. 깨어있는 시민들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당연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개혁 운동으로 끝난다면 기독교는 와이엠씨에이, 흥사단, 경실련처럼 시민운동에 떨어지고 말겠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어떤 새로운 세상을 일으켜보자는 사회운동이나 이념투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 세상과 역사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세상일을 팽개쳐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를 정의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5백 년 전의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을 읽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전적인 새로움
이사야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여러분은 더 깊이 있게 이해해야합니다.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하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요즘에도 많은 것처럼, 이사야도 악하고 불의한 세상 앞에서, 그리고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 당시 민중들의 평범한 일상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국들은 작은 나라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만 하고, 귀족들도 자기 욕심에만 취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일까요? ‘새롭다’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실 세상은 옛 것의 반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 것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과거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당한 슬픔과 분노도 망각됩니다. 지난날 자랑하던 것을 계속 자랑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지난날 부끄럽게 생각하던 것을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랑하던 것이 무엇인가요? 이사야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이 자랑거리입니다. 외고와 특목고의 입시 시험지가 특정 학원에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끌어 모아 명문대에 많이 보내는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합니다.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는 자기 자식들을 자기 회사에 위장 취업시켜서 수천만의 탈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돈만 많으면 그것으로 자랑합니다. 이런 방식의 자랑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세상의 마이너리티로 사는 게 그렇겠지요. 한국사회에서는 명문대학을 못 나오거나 재산을 늘리지 못하면, 또 장애나 성적 소수자로 살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런 부끄러움을 더 이상 부끄러움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세상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잘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가 일등하나, 누가 잘났나, 하는 기준으로 교육을 받고 그렇게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랑거리와 부끄러움이 없는 세상이 어떤 건지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늘나라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할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끄럽게 겨우 구원만 받는 사람이 있고, 풍성한 상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막살이가 있고 호화로운 저택이 있다고 선전합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의 천당보고서나 복음서의 ‘달란트 비유’를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다, 나쁘다 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입니다.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건들이 세상에 나오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새롭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25절에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이 문장에서 핵심은 두 동물이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늑대와 어린 양, 사자와 소가 대비됩니다. 이 세상에서 늑대는 호시탐탐 어린 양을 먹잇감으로 노리며, 사자도 역시 소를 노립니다. 이사야의 묵시적 상상력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짐승들이 친구처럼 함께 풀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습니다.
지난 과거의 역사에서 늑대와 어린 양이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서로 잡아먹히느냐, 잡아먹느냐 하는 생존경쟁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이런 룰에서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두 식당이 길을 마주보고 있다고 합시다. 이쪽은 예수쟁이 식당이고, 저쪽은 불신자 집입니다. 예수 믿는 식당이 자기보다 남이 잘돼야 한다는 심정으로 손님들을 저쪽 식당으로 보내줄까요? 기껏해야 선의의 경쟁을 하면 양심적인 신자라라고 하겠지요. 교회끼리도 노골적으로 경쟁하고 있는 마당에 먹고 사는 문제에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상살이에서만이 아니라 가족끼리도 우리는 경쟁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자존심이 강한가, 상대방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릴 때가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까지 나왔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사나, 왜 이렇게 베풀지 못하나 하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경쟁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늑대를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기회가 되면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우리의 이기심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만이 살 길이다, 하고 자신의 부도덕성과 잘못을 합리화하지 마세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대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이 세상과 역사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건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친구처럼 풀을 뜯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세상입니까? 바로 그 세상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생명인 부활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고 이 사실에 온 영혼을 걸고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안주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기다릴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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