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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4:3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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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397 |
2007.12.2.
그 날과 그 시간
우리는 세상을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뭔가를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접어두고 이 성경책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물론 작은 정보의 차원에서는 조금 압니다. 이 책은 인쇄소에서 인쇄해서 책방을 통해서 우리 손에 왔습니다. 그 전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 책을 만든 종이는 말레시아나 브라질의 원시림에서 채벌한 나무의 펄프로 만들어졌겠지요. 그 나무는 수백 년 동안 햇볕과 탄소와 물을 원료로 해서 살아왔습니다. 햇볕은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태양의 에너지입니다. 지구에는 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탄소와 물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탄소와 물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결국 나무는 없어질 것이며, 나무가 없어지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이 지구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렇게 생명체가 살아 있다가 생명의 조건들이 바뀌어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혹성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모든 비밀을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 우주에 관한 것은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더 나아가서 그런 건 모를수록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학문적으로 전문가들에게나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옳은 주장입니다. 우주에 관해서 우리보다 훨씬 모르는 게 많았던 고대인들과 선사시대 사람들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았습니다. 더구나 하루의 일상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세요. 아니 조금만 신앙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창조에는 우리 앞에 있는 하늘, 땅, 별, 강, 산, 곤충, 탄소, 물 등등,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아직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통을 겪고, 미워하며, 결국에는 죽습니다. 모든 게 유한합니다. 이런 세계와 삶을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연주회를 앞둔 리허설과 비슷하고, 연극 무대를 열기 전의 마지막 연습 장면과 비슷합니다. 연습 중에는 실수가 자주 발생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다툴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무대에 올라서면 한편의 완전한 연극이나 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리허설을 끝내고 실제 연극과 실제 연주처럼 무대에 올라갈 그 날과 그 시간은 언제인가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런 궁금증이 없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종말의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인이라면 그의 영혼이 이런 궁금증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겁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성서기자들도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즉 세상이 완성되는 그 날과 시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와 실제적으로 함께 하는 때입니다. 헬라어로 그 순간과 그 상태를 가리켜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단어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37절과 39절입니다. 이 파루시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가리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구원자라는 뜻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파루시아가 임하면 청소년들은 더 이상 입시 지옥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며, 불치병 환자들도 없을 것이며,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없을 것이고, 우울증이나 불안감, 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샬롬이 실현됩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놀면서 풀을 뜯고 있겠지요. 아무도 사람을 이용할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일체를 이룰 것입니다.
꿈 깨라,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아,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당신들의 주장은 종교적 몽상에 불과하다고 윽박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계속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사이의 적대감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걸 보면 이런 반론이 아주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참된 샬롬의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루시아를 기다립니다. 파루시아, 즉 메시아인 사람의 아들이 오면, 바로 그때 우리가 상상할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하루빨리 그때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더 이상 분노와 절망에 묶이지 않고 완전히 해방될 테니까요. 그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오늘 본문은 3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안타깝게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초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인 천사들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 말은 그때, 즉 파루시아가 시작되어야만 그 때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사건을 예로 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홍수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일상에 취해 있다가 모두 홍수에 휩쓸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노아에게서 대홍수가 일어나리라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왜 노아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말았을까요? 그들 중에는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과는 좀 다르겠지만 그들 중에는 나름으로 기상학자 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철학자와 물리학자들도 많았겠지요.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볼 때 대홍수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방을 손질하거나 지붕을 손보면서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홍수는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를 만나서 파멸 당했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이 대홍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오직 일상에만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태를 그들이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다고 묘사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식 투자하고, 대통령 선거했다는 말을 보충해야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소중한 일상들입니다. 이런 일상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만 파묻혀 있는 삶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상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경험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컨대 동네꼬마들이 집밖에서 놀 때는 오직 그 놀이만이 현실이 됩니다. 그들은 언젠가 집에서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도 노는 순간에는 그걸 완전히 잊습니다.
어머니가 집에서 부르는 일들을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각종 사고는 언제 어느 때 일어날지 모릅니다. 죽음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상을 불안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모두 포기하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일상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묶여 버리면 우리는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생명을 완성할 그 날과 그 시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의 일상이 계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젊음과 그 젊음에 근거한 모든 계획들이 마냥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단란한 가족관계도 계속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모두는 각자가 그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무덤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붙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될 그 날과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과 시간에 일어날 일은 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헤어지는 것이지 반만 헤어지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자기 아내나 남편과는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모든 걸 한꺼번에 잃으면 억울하니까 조금씩 잃게 해달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은 그 순간이 얼마나 과격한지를 그림처럼 설명합니다. 40절에는 밭에서 일하던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받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형제일지도 모르고, 이웃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평생 동안 품앗이로 농사일을 함께 한 사람이니,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날과 그 시간에 그들은 전혀 다른 길로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41절에는 맷돌을 갈고 있던 두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들은 자매이거나 모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영적 각성
그런데 더 엄중한 사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우리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일이 졸지에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뒤이어 나오는 몇몇 비유도 역시 그 날과 시간이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25:1-13절에 나오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올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모두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건 생리적 현상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았지만,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신랑이 오는 그 시간을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를 모른다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림의 불확실성에 대한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초기 기독교에서도 그런 문제로 인해서 논란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이들이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크게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곧 다시 오리라 약속하셨던 예수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다는 걸까요? 아니면 재림이 전혀 다른 뜻일까요?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재림이 실제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그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게 바로 예수님의 파루시아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 2천년의 신학논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왜 예수님이 아직 재림하지 않으시는가, 왜 아직 온전한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또는 재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게 좋겠군요.
이런 질문에 대답을 얻으려면 일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 지난 2천년을 굉장히 긴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고, 앞으로 지구는 그 정도의 시간을 더 지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긴 시간에 앞에서 2천년은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시간만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약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약속으로 신약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분이 속히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로부터 지금 우리까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100년 후일지, 1천년 후일지, 또는 10년 후인지, 1년 후일지, 바로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루빨리 재림이 일어나는 게 좋은지 조금 늦추어지는 게 좋은지 우리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창조와 종말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판단하시고,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살이를 일체 집어치우고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그저 일상의 세상살이에만 충실해야 할까요? 양쪽 모두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가르칩니다. 42절에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라고 말하고, 44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생각지 못할 때에 올 것이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하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걸 요즘의 신앙 용어로 바꾼다면 영적 각성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앞으로 오늘을 포함한 네 번의 주일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대림절 신앙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그 사실을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각성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 세상의 즐거움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세상의 걱정거리로 인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시는 놀라운 평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
우리는 세상을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뭔가를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접어두고 이 성경책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물론 작은 정보의 차원에서는 조금 압니다. 이 책은 인쇄소에서 인쇄해서 책방을 통해서 우리 손에 왔습니다. 그 전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 책을 만든 종이는 말레시아나 브라질의 원시림에서 채벌한 나무의 펄프로 만들어졌겠지요. 그 나무는 수백 년 동안 햇볕과 탄소와 물을 원료로 해서 살아왔습니다. 햇볕은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태양의 에너지입니다. 지구에는 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탄소와 물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탄소와 물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결국 나무는 없어질 것이며, 나무가 없어지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이 지구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렇게 생명체가 살아 있다가 생명의 조건들이 바뀌어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혹성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모든 비밀을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 우주에 관한 것은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더 나아가서 그런 건 모를수록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학문적으로 전문가들에게나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옳은 주장입니다. 우주에 관해서 우리보다 훨씬 모르는 게 많았던 고대인들과 선사시대 사람들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았습니다. 더구나 하루의 일상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세요. 아니 조금만 신앙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창조에는 우리 앞에 있는 하늘, 땅, 별, 강, 산, 곤충, 탄소, 물 등등,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아직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통을 겪고, 미워하며, 결국에는 죽습니다. 모든 게 유한합니다. 이런 세계와 삶을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연주회를 앞둔 리허설과 비슷하고, 연극 무대를 열기 전의 마지막 연습 장면과 비슷합니다. 연습 중에는 실수가 자주 발생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다툴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무대에 올라서면 한편의 완전한 연극이나 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리허설을 끝내고 실제 연극과 실제 연주처럼 무대에 올라갈 그 날과 그 시간은 언제인가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런 궁금증이 없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종말의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인이라면 그의 영혼이 이런 궁금증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겁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성서기자들도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즉 세상이 완성되는 그 날과 시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와 실제적으로 함께 하는 때입니다. 헬라어로 그 순간과 그 상태를 가리켜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단어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37절과 39절입니다. 이 파루시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가리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구원자라는 뜻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파루시아가 임하면 청소년들은 더 이상 입시 지옥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며, 불치병 환자들도 없을 것이며,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없을 것이고, 우울증이나 불안감, 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샬롬이 실현됩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놀면서 풀을 뜯고 있겠지요. 아무도 사람을 이용할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일체를 이룰 것입니다.
꿈 깨라,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아,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당신들의 주장은 종교적 몽상에 불과하다고 윽박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계속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사이의 적대감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걸 보면 이런 반론이 아주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참된 샬롬의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루시아를 기다립니다. 파루시아, 즉 메시아인 사람의 아들이 오면, 바로 그때 우리가 상상할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하루빨리 그때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더 이상 분노와 절망에 묶이지 않고 완전히 해방될 테니까요. 그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오늘 본문은 3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안타깝게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초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인 천사들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 말은 그때, 즉 파루시아가 시작되어야만 그 때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사건을 예로 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홍수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일상에 취해 있다가 모두 홍수에 휩쓸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노아에게서 대홍수가 일어나리라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왜 노아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말았을까요? 그들 중에는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과는 좀 다르겠지만 그들 중에는 나름으로 기상학자 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철학자와 물리학자들도 많았겠지요.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볼 때 대홍수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방을 손질하거나 지붕을 손보면서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홍수는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를 만나서 파멸 당했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이 대홍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오직 일상에만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태를 그들이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다고 묘사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식 투자하고, 대통령 선거했다는 말을 보충해야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소중한 일상들입니다. 이런 일상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만 파묻혀 있는 삶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상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경험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컨대 동네꼬마들이 집밖에서 놀 때는 오직 그 놀이만이 현실이 됩니다. 그들은 언젠가 집에서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도 노는 순간에는 그걸 완전히 잊습니다.
어머니가 집에서 부르는 일들을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각종 사고는 언제 어느 때 일어날지 모릅니다. 죽음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상을 불안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모두 포기하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일상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묶여 버리면 우리는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생명을 완성할 그 날과 그 시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의 일상이 계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젊음과 그 젊음에 근거한 모든 계획들이 마냥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단란한 가족관계도 계속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모두는 각자가 그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무덤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붙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될 그 날과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과 시간에 일어날 일은 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헤어지는 것이지 반만 헤어지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자기 아내나 남편과는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모든 걸 한꺼번에 잃으면 억울하니까 조금씩 잃게 해달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은 그 순간이 얼마나 과격한지를 그림처럼 설명합니다. 40절에는 밭에서 일하던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받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형제일지도 모르고, 이웃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평생 동안 품앗이로 농사일을 함께 한 사람이니,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날과 그 시간에 그들은 전혀 다른 길로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41절에는 맷돌을 갈고 있던 두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들은 자매이거나 모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영적 각성
그런데 더 엄중한 사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우리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일이 졸지에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뒤이어 나오는 몇몇 비유도 역시 그 날과 시간이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25:1-13절에 나오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올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모두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건 생리적 현상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았지만,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신랑이 오는 그 시간을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를 모른다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림의 불확실성에 대한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초기 기독교에서도 그런 문제로 인해서 논란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이들이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크게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곧 다시 오리라 약속하셨던 예수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다는 걸까요? 아니면 재림이 전혀 다른 뜻일까요?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재림이 실제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그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게 바로 예수님의 파루시아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 2천년의 신학논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왜 예수님이 아직 재림하지 않으시는가, 왜 아직 온전한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또는 재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게 좋겠군요.
이런 질문에 대답을 얻으려면 일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 지난 2천년을 굉장히 긴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고, 앞으로 지구는 그 정도의 시간을 더 지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긴 시간에 앞에서 2천년은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시간만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약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약속으로 신약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분이 속히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로부터 지금 우리까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100년 후일지, 1천년 후일지, 또는 10년 후인지, 1년 후일지, 바로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루빨리 재림이 일어나는 게 좋은지 조금 늦추어지는 게 좋은지 우리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창조와 종말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판단하시고,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살이를 일체 집어치우고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그저 일상의 세상살이에만 충실해야 할까요? 양쪽 모두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가르칩니다. 42절에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라고 말하고, 44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생각지 못할 때에 올 것이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하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걸 요즘의 신앙 용어로 바꾼다면 영적 각성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앞으로 오늘을 포함한 네 번의 주일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대림절 신앙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그 사실을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각성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 세상의 즐거움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세상의 걱정거리로 인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시는 놀라운 평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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