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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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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435 |
2007.12.23
처녀탄생 설화
오늘 우리는 아주 까다로운 성서말씀을 만났습니다. 남자와 동거하기 전인 한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했을 때의 나이가 그 당시 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대략 열서너 살 정도 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서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요셉은 마리아가 그렇게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런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파혼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남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드리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로 하라는 말까지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질문해보세요. 요셉은 지금 두 가지 사태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자기와 동거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임신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현실이며, 후자는 비현실입니다. 전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후자는 개인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최소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대개 전자에 무게를 두고 판단하겠지요.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후자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에 따라서 마리아와 파혼하지 않고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기 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묘사하고 있는 요셉은 인간적으로 덕이 많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믿음도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심한 배신감으로 마리아를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스캔들로 인정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걸 그냥 용서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마리아를 용서하고 조용하게 파혼하는 것으로 일을 정리해도 썩 괜찮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천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랐다는 건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 안 됩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마리아 사건으로 마음이 어수선해서 자기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좋은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요셉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셉의 인간성과 믿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처녀가 임신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냐,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천사가 나타난 꿈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즉시 23절에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7:14절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는 이미 18절에서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어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입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전체는 처녀 마리아의 임신 사건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마태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바르게 믿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질문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의 난자와 남자의 정자가 결합하지 않고도 생명체가 가능하다는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성탄절을 바로 앞에 둔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에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독교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하게 하는 게 저의 책임이니까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의 편지는 왜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을까요? 동정녀 탄생을 전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전체 탄생설화와 연관해서 한번만 언급할 뿐이지 그 이후로는 이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모든 성서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신경이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를 허물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말씀을 읽을 때 핵심과 형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시대에 육체적인 아버지 없이 태어난 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플라톤으로부터 알렉산더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인들이 그렇게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기자들도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성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인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말씀이지요.
복음서와 사도신경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진술의 핵심은 동정녀에 있는 게 아니라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공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서가 기록되던 초기 기독교에서 이 마리아 문제가 다루어진 이유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하려는 이단들이 나타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속하는 가현설론자들은,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신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들에게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은 어딘가 불편했던 것이지요. 교부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척결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갖고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신 분은 당연히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다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신경은 고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동정녀 탄생을 예수님의 탄생설화에 적용할 것뿐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동정녀이라는 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에 호기심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전체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사건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8절도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으며, 사도신경도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했는데, 이런 구절이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만 예수 사건, 즉 그의 탄생과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사건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 배타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마태복음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동정녀 탄생 표상을 단순히 빌려온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이 개입한 예수 사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은 천사의 입을 통해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남자 아기의 이름을 예수로 하게 했습니다.“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말로 바꾼 것으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또는 야훼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도 됩니다. 마태복음은 이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서 임마누엘이라는 뜻을 보충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두 단어 즉 구원자라는 예수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결합했습니다. 구원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구세주이십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전제합니다. 만약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예수님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은 ‘죄’에서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우리가 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원받아야 할 어떤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간혹 난치병을 고치시면서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료하기만 하신 게 아니라 그 당시 율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종교적 업적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결국 영적으로 병들게 했기 때문에 죄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탄생할 때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구원을 단지 병에서 놓여난다거나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구원입니다. 우리의 병이 치료되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병이 들고, 늙어서 죽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서 평화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우리는 다시 죄책감과 불안에 빠집니다. 구원은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징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병이 낫는다거나 살림살이가 좋아진다는 사실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수단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방식이 아니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자를 주듯이 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과자에 있는 게 아니지만 아이가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과자를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구원이라는 말을 우리는 훨씬 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고, 공생애 동안 메시아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몰트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말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탄이 다가오면 평화롭고 감미로운 성탄 찬송을 부릅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 모습에서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동시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앞의 모습에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고, 뒤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마리아의 품이나 십자가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장소입니다.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만이 아니라 극한의 불안과 슬픔이 있는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에 겨워할만한 형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공허한 일일까요?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살만한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틴 루터가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기는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때가 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2천 년 전 마태가 전하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읽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일어난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실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의 날이 기대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말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그 온전한 구원의 날이 더욱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앞둔 신랑과 신부처럼 바로 여기 이 순간에 임마누엘의 예수를 노래합시다. 아멘!
처녀탄생 설화
오늘 우리는 아주 까다로운 성서말씀을 만났습니다. 남자와 동거하기 전인 한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했을 때의 나이가 그 당시 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대략 열서너 살 정도 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서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요셉은 마리아가 그렇게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런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파혼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남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드리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로 하라는 말까지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질문해보세요. 요셉은 지금 두 가지 사태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자기와 동거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임신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현실이며, 후자는 비현실입니다. 전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후자는 개인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최소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대개 전자에 무게를 두고 판단하겠지요.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후자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에 따라서 마리아와 파혼하지 않고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기 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묘사하고 있는 요셉은 인간적으로 덕이 많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믿음도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심한 배신감으로 마리아를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스캔들로 인정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걸 그냥 용서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마리아를 용서하고 조용하게 파혼하는 것으로 일을 정리해도 썩 괜찮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천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랐다는 건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 안 됩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마리아 사건으로 마음이 어수선해서 자기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좋은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요셉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셉의 인간성과 믿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처녀가 임신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냐,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천사가 나타난 꿈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즉시 23절에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7:14절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는 이미 18절에서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어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입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전체는 처녀 마리아의 임신 사건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마태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바르게 믿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질문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의 난자와 남자의 정자가 결합하지 않고도 생명체가 가능하다는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성탄절을 바로 앞에 둔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에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독교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하게 하는 게 저의 책임이니까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의 편지는 왜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을까요? 동정녀 탄생을 전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전체 탄생설화와 연관해서 한번만 언급할 뿐이지 그 이후로는 이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모든 성서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신경이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를 허물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말씀을 읽을 때 핵심과 형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시대에 육체적인 아버지 없이 태어난 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플라톤으로부터 알렉산더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인들이 그렇게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기자들도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성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인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말씀이지요.
복음서와 사도신경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진술의 핵심은 동정녀에 있는 게 아니라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공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서가 기록되던 초기 기독교에서 이 마리아 문제가 다루어진 이유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하려는 이단들이 나타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속하는 가현설론자들은,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신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들에게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은 어딘가 불편했던 것이지요. 교부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척결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갖고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신 분은 당연히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다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신경은 고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동정녀 탄생을 예수님의 탄생설화에 적용할 것뿐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동정녀이라는 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에 호기심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전체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사건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8절도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으며, 사도신경도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했는데, 이런 구절이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만 예수 사건, 즉 그의 탄생과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사건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 배타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마태복음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동정녀 탄생 표상을 단순히 빌려온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이 개입한 예수 사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은 천사의 입을 통해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남자 아기의 이름을 예수로 하게 했습니다.“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말로 바꾼 것으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또는 야훼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도 됩니다. 마태복음은 이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서 임마누엘이라는 뜻을 보충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두 단어 즉 구원자라는 예수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결합했습니다. 구원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구세주이십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전제합니다. 만약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예수님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은 ‘죄’에서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우리가 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원받아야 할 어떤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간혹 난치병을 고치시면서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료하기만 하신 게 아니라 그 당시 율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종교적 업적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결국 영적으로 병들게 했기 때문에 죄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탄생할 때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구원을 단지 병에서 놓여난다거나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구원입니다. 우리의 병이 치료되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병이 들고, 늙어서 죽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서 평화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우리는 다시 죄책감과 불안에 빠집니다. 구원은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징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병이 낫는다거나 살림살이가 좋아진다는 사실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수단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방식이 아니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자를 주듯이 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과자에 있는 게 아니지만 아이가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과자를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구원이라는 말을 우리는 훨씬 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고, 공생애 동안 메시아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몰트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말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탄이 다가오면 평화롭고 감미로운 성탄 찬송을 부릅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 모습에서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동시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앞의 모습에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고, 뒤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마리아의 품이나 십자가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장소입니다.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만이 아니라 극한의 불안과 슬픔이 있는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에 겨워할만한 형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공허한 일일까요?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살만한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틴 루터가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기는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때가 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2천 년 전 마태가 전하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읽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일어난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실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의 날이 기대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말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그 온전한 구원의 날이 더욱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앞둔 신랑과 신부처럼 바로 여기 이 순간에 임마누엘의 예수를 노래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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