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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렘18: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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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1992. 9. 6
어느 날 선지자 에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언,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토기장이는 녹로에 그릇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녹로라고 하는 것은 한 축을 중심으로 아래 것은 무겁고 위의 것은 가벼운 두 돌바퀴로, 도공이 아래 바퀴를 발로 굴리면 진흙을 얹은 윗바퀴가 회전하며 그 진흙을 부풀어오르게 하는 그릇을 만드는 기구입니다. 어떤 그릇은 긴 병으로, 어떤 그릇은 넓은 항아리로 땀을 흘리며 열심히 그릇을 만들다가 또 어떤 그릇은 망치로 깨뜨려 버립니다.
에레미야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에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일하는 것을 봐라. 너도 저렇게 할 수 있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다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레미야에게 절대 주권과 창조의 권리를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화장대 앞에 짜증스럽게 앉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아무개는 쌍꺼풀이 있는데 나는 쌍꺼풀도 없고, 눈썹 화장도 잘 안 되고, 볼우물도 없고, 입 모습은 두툼한 게 왜 모양입니까? 왜 이렇게 못 생기게 만드셨습니까?"
목욕탕에 가서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난 몸뚱이가 왜 이렇게 새카맣습니까? 난 왜 이렇게 꺽다리처럼 키만 멀쑥하니 큽니까? 나는 왜 짜리 몽땅 합니까? 나는 왜 체중이 안 나갑니까? 나는 왜 이렇게 호박처럼 됐습니까? 닭살처럼 되었습니까?" 하고 짜증스럽게 부모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감히 누구에게 힐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물건을 만든 자에게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또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겠느냐"
오는 우리는 함께 토기장이의 집으로 에레미야처럼 가서, 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다가 깨뜨리는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듭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다른 무엇으로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진흙을 빚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진흙입니다. 흙으로 왔기에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흙덩어리 인생임을 꼭 알아야 합니다.
피조된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께 향하여 항의할 권한이 없습니다.
둘째,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대개 이 도자기 만드는 것은 전 품목이 모두 그릇입니다. 그릇 속에 들어가는 쌀이나 돈, 물, 음식, 빵을 만들지 않고 다만 그것들은 담는 그릇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혼이라는 귀한 보물을 담는 그릇으로 우리들을 창조하셨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걸작품인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빛이나 궁창처럼 하나님께서 있으라, 나뉘어라 하고 말씀하셔서 생긴 경우가 있고, 식물이나 짐승들처럼 땅에게 내라고 명령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특별한 방법으로 지으셨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손수지으셨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성령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다 같지 않습니다. 혹 쌍둥이, 세 쌍둥이, 네 쌍둥이라고 해도 닮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전혀 같지는 아니합니다.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기계에다 넣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하나님의 수제품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이 주안에서 하는 일인가를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해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뜻하신 대로 쓰고자 만든 제품이니,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8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일' 입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라고 해서 먹자 하고 이것저것 마구 먹어서는 안 됩니다. 못 먹을 음식이 있습니다. 봐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이, 만져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만지는 것쯤이야, 선악과를 보는 것쯤이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음식이로되 먹어서는 안 될 음식입니다. 이것을 분별하고 관리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만드신 질그릇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게 지음 받은 인간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허송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 향락에 빠져 세상 사람들이나 부러워하고, 그저 땅에 있는 것이나 욕심내고, 선악과나 따먹을 생각을 하니까 다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분별을 할 수 있었으면 따먹을 생각도 안 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마귀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하고, 보지말고, 먹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아니하면 파상해 버립니다. 이 파상이란 말은 깨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깨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릇이라 하였으니, 깨어지는 원리도 이와 꼭 같습니다.
조선조 전기의 대표적 도기는 분청 사기입니다. 고려 청자나 이조 백자가 귀족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라면 분청 사기는 구수하고 소박한 질그릇에 속합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청 사기의 명인으로, 일본에서 수십 번 전시회를 가진 바 잇고 그 전시된 그릇들이 비싼 값으로 몽땅 팔리는 분이 있습니다.
대토라 일컫는 고령토를 반죽하여 잘 이긴 다음, 그것을 물레에 돌려 그릇 형태로 만듭니다. 다섯 시간 정도 그늘에서 말린 후 다시 물레 위에 얹어 완전한 그릇 모양이 되도록 깎습니다. 또 그것을 하루 이상 말립니다. 그리고 500 가량의 불길에 일곱 시간 정도의 초벌구이를 마치고, 다시 하루 정도 가마 안의 열기를 식혀 줍니다. 초벌구이 그릇들을 꺼내 거기에 드디어 유약을 바릅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1,200 3000 의 고열에서 본 구이를 함으로써 하나의 그릇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으니, 완성된 그릇들이 그의 마음에 흡족하여야 하는 심사 과정입니다. 통상 그는 한 번 작업에 백 점 정도를 굽게 되는데, 서너 점만 추리고 모두 깨어 파상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완성된 도자기 하나 하나에는 그 도예 가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는 미련 없이 깨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도자기에는 그 사람의 정성과 혼이 들어 있습니다.
왜 파상합니까? 흙이 너무 굳어 있을 때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파상합니까? 흙에 돌이나 불순물 같은 이 물질이 들어 있을 때 깨어집니다. 왜 파상합니까? 주인의 의도대로 빚어지지 않을 때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린 다음에 선하신 뜻대로 마음에 들게 다시 만든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과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파상하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선인의 종이 바로 그릇과 같아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니 깨뜨리고 다시 모아서 다른 그릇으로 재창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얻어맞을 때가 있습니다. 파상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돈이, 혹은 건강이, 혹은 명예가 실추되고 깨어지고 여지없이 납작하게 깔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깨어지는 것은 오히려 큰 축복을 주시는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만들면 마음에 드는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들어진 그릇 속에 무엇을 담습니까? 하루 일과를 새벽 제단에서 시작하십시오. 집에 가서 다른 것 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고, 그리고 좋은 복음 찬송을 틀어 보십시오.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 일과가 잘 진행됩니다.
젖소나 혹은 닭도 좋은 음악을 틀어 주면 좋은 젖, 좋은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은혜스러우면 그 생각이 좋고, 하는 행동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다 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지만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면 금 그릇이요, 개밥 그릇은 천한 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어느 곳에 놓여지느냐,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대우와 신분이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각각 그릇을 만들어 주셨지만, 우리가 품는 생각과 담는 행동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천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가 런던에서 집회를 인도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그 부흥회에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옆에 와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도무지 예수를 믿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안절부절하고 투덜거리고 합니다.
잠시 후 그 사람의 친구가 되는 듯한 남자가 와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의 흉을 보면서 자기는 구경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대단히 섭섭한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목사님의 설교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다 마치고 찬송하면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부터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일어나서 이 강단 앞으로 나오시오" 라고 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강단 앞으로 나아갔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강단으로 나가려다가 그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고서 말했습니다.
"자,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당신 같이 나갈 생각 없소?"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그 옆 사람이 좀 우물쭈물하다가 "같이 나가지요" 하면서 성큼 일어나더니, 호주머니에서 손 지갑을 꺼내 이 사모님에게 주면서 "당신 거지요, 받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훔친 사모님의 돈지갑이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나갈 수 없어서 먼저 돌려주고 앞으로 나가 회개한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을 통해서 도적놈의 그릇이 파상되고 다시 좋은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용기 있게 파상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선하신 뜻대로 재창조 받으시고,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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