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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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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2: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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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575 |
2008.3.16.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똑같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즉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유대교는 믿음이 없고,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 질문을 간단히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에 걸맞은 증거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그들에게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증거는 이 세상이 실제로 구원받은 상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이 세상은 큰 변화가 없습니다. 남을 속이면서 잘 사는 사람들은 여전하고, 어린이 유괴범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합니다. 예수님이 명실상부하게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실제로 변화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런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증거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거나, 사업이 잘된다는 말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건 참으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도 역시 비슷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아,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詩)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는 시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건 증명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유일한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신서의 말씀으로 읽은 빌립보서 2:6-11절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본문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부른 그리스도 찬가, 즉 송영(doxology)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송영은 지금의 찬송가처럼 복잡한 멜로디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레고리안 찬트보다 더 단순한 가락으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이 송영을 인용했습니다. 이 송영을 ‘케노시스’라고 부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을 가리킵니다.
낮추신 하나님
본문 6,7절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는 표현의 그 ‘본질’과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고 할 때의 ‘신분’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모르페 데우’이고, 종의 신분은 ‘모르페 둘루’입니다. 본질이나 신분이 모두 헬라어 ‘모르페’입니다. 이 단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주 사용한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이 단어는 외형, 모습, 특징 등의 의미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질료적 체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구약 히브리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드물게 나오는데, 모습, 상(像), 표정 등을 가리킵니다. 어떤 신학자는 본문의 모르페를 신적 존재 양식의 가시적인 모습으로 보고, 영광(독사)와 똑같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신학자는 모르페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모습이나 신분, 지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그것은 존재를 그 본질로부터 규정하는 현존 방식으로서 본성에 보다 가까우나 본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개념이다.”(G. Gnilka, 국제성서주석 39, 필립비, 193) 이 찬가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르페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사변적인 정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선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생각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위의 설명은 신학적으로 너무 까다롭기 때문에 여러분이 따가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저의 설명이 어설퍼서 이해하기 힘든 거지 실제로는 명백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모르페 데우, 즉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모르페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그 어떤 실질을 모르페라는 헬라어 단어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대신 모르페 둘루, 즉 종의 신분이 무엇인지 압니다. 역사적으로 생존하셨던 바로 그분의 모습, 그분의 본질, 그분의 존재가 종의 모르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7a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르페가 종의 모르페를 취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vere homo, vere Deus”, 즉 참 인간,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을 다른 종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런 가시적인 세계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은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사셨습니다. 그는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포도주도 마시면서 재미있게 사셨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철저하게 의존해서 사셨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삶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고발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하나님 자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이는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근거를 대라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이 시가 시인들에게 절대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려면 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언어가 말을 한다.”는 하이덱거의 언어존재론을 이해하려면 그 존재 개념을 이해해야하는 것이나, 또는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 음악의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앞서 드린 말씀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찬가에 참여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은 바로 자기를 종의 모습으로 낮추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늘 고상하고 초월적인 하늘에 고고하게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모르페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셨던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올리우신 그리스도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온전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의 그리스도 찬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 올리셨다고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높이 올리셨다는 말을 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부활과 승천은 원래 똑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참된 생명으로의 변화야말로 높이 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높이 올림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단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재림주로 믿는 우리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결국은 마지막 심판을 거쳐서 그렇게 올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높이 올림을 받는다는 의미의 부활생명을 현재 생명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듯이 부활의 생명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올림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지상천국을 만들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 지상천국은 차츰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연과학이 최고조로 발전하면 수명도 1천년으로 늘고, 모든 굶주림을 해결하고, 태양을 이용해서 에너지 문제 자체를 해결할 날도 올 것입니다. 각자의 세포를 이용해서 후손을 무한정으로 만들어낸 날이 오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미남미녀가 될 수도 있겠지요. 성서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높이 올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미 그곳으로 올림을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찬송을 부르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가장 저주스럽고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이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았다면, 이제 그분의 지위는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십자가를 수치와 저주와 무능력의 표본이라고 한다면, 높이 올리우심은 자랑과 영광과 권능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노래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세계가 하늘과 땅과 지하로 구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는 영적인 존재들이, 땅에는 인간들이, 지하에는 죽은 자들 악한 세력이 있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찬가가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하늘과 지하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이 세상은 예수를 거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힘은 미국 같은 강대국이나 세계 유수한 초국가 기업들에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힘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기보다는 더 심하게 폭력과 불의가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는다고 노래를 부르다니, 아주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온 세계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입니다. 아직은 악이 준동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오면 모든 것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의 주인으로 오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때 이 우주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편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고, 양과 염소가 구분되며, 진리와 거짓이 판명 납니다. 이 마지막 때 모든 세력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둘째, 그것은 종말에 완성되지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눈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 돌팔이처럼 여러분에게 허황된 것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악은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삶의 절망과 무의미는 넘어가는 황혼의 햇살처럼 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것들이 강력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은 한 가지입니다. 11절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책임과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 찬가를 올렸던 초기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오늘 우리도 영혼을 다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똑같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즉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유대교는 믿음이 없고,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 질문을 간단히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에 걸맞은 증거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그들에게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증거는 이 세상이 실제로 구원받은 상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이 세상은 큰 변화가 없습니다. 남을 속이면서 잘 사는 사람들은 여전하고, 어린이 유괴범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합니다. 예수님이 명실상부하게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실제로 변화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런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증거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거나, 사업이 잘된다는 말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건 참으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도 역시 비슷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아,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詩)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는 시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건 증명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유일한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신서의 말씀으로 읽은 빌립보서 2:6-11절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본문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부른 그리스도 찬가, 즉 송영(doxology)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송영은 지금의 찬송가처럼 복잡한 멜로디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레고리안 찬트보다 더 단순한 가락으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이 송영을 인용했습니다. 이 송영을 ‘케노시스’라고 부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을 가리킵니다.
낮추신 하나님
본문 6,7절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는 표현의 그 ‘본질’과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고 할 때의 ‘신분’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모르페 데우’이고, 종의 신분은 ‘모르페 둘루’입니다. 본질이나 신분이 모두 헬라어 ‘모르페’입니다. 이 단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주 사용한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이 단어는 외형, 모습, 특징 등의 의미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질료적 체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구약 히브리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드물게 나오는데, 모습, 상(像), 표정 등을 가리킵니다. 어떤 신학자는 본문의 모르페를 신적 존재 양식의 가시적인 모습으로 보고, 영광(독사)와 똑같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신학자는 모르페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모습이나 신분, 지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그것은 존재를 그 본질로부터 규정하는 현존 방식으로서 본성에 보다 가까우나 본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개념이다.”(G. Gnilka, 국제성서주석 39, 필립비, 193) 이 찬가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르페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사변적인 정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선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생각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위의 설명은 신학적으로 너무 까다롭기 때문에 여러분이 따가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저의 설명이 어설퍼서 이해하기 힘든 거지 실제로는 명백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모르페 데우, 즉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모르페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그 어떤 실질을 모르페라는 헬라어 단어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대신 모르페 둘루, 즉 종의 신분이 무엇인지 압니다. 역사적으로 생존하셨던 바로 그분의 모습, 그분의 본질, 그분의 존재가 종의 모르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7a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르페가 종의 모르페를 취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vere homo, vere Deus”, 즉 참 인간,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을 다른 종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런 가시적인 세계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은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사셨습니다. 그는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포도주도 마시면서 재미있게 사셨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철저하게 의존해서 사셨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삶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고발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하나님 자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이는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근거를 대라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이 시가 시인들에게 절대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려면 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언어가 말을 한다.”는 하이덱거의 언어존재론을 이해하려면 그 존재 개념을 이해해야하는 것이나, 또는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 음악의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앞서 드린 말씀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찬가에 참여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은 바로 자기를 종의 모습으로 낮추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늘 고상하고 초월적인 하늘에 고고하게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모르페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셨던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올리우신 그리스도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온전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의 그리스도 찬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 올리셨다고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높이 올리셨다는 말을 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부활과 승천은 원래 똑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참된 생명으로의 변화야말로 높이 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높이 올림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단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재림주로 믿는 우리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결국은 마지막 심판을 거쳐서 그렇게 올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높이 올림을 받는다는 의미의 부활생명을 현재 생명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듯이 부활의 생명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올림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지상천국을 만들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 지상천국은 차츰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연과학이 최고조로 발전하면 수명도 1천년으로 늘고, 모든 굶주림을 해결하고, 태양을 이용해서 에너지 문제 자체를 해결할 날도 올 것입니다. 각자의 세포를 이용해서 후손을 무한정으로 만들어낸 날이 오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미남미녀가 될 수도 있겠지요. 성서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높이 올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미 그곳으로 올림을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찬송을 부르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가장 저주스럽고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이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았다면, 이제 그분의 지위는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십자가를 수치와 저주와 무능력의 표본이라고 한다면, 높이 올리우심은 자랑과 영광과 권능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노래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세계가 하늘과 땅과 지하로 구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는 영적인 존재들이, 땅에는 인간들이, 지하에는 죽은 자들 악한 세력이 있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찬가가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하늘과 지하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이 세상은 예수를 거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힘은 미국 같은 강대국이나 세계 유수한 초국가 기업들에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힘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기보다는 더 심하게 폭력과 불의가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는다고 노래를 부르다니, 아주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온 세계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입니다. 아직은 악이 준동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오면 모든 것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의 주인으로 오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때 이 우주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편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고, 양과 염소가 구분되며, 진리와 거짓이 판명 납니다. 이 마지막 때 모든 세력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둘째, 그것은 종말에 완성되지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눈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 돌팔이처럼 여러분에게 허황된 것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악은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삶의 절망과 무의미는 넘어가는 황혼의 햇살처럼 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것들이 강력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은 한 가지입니다. 11절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책임과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 찬가를 올렸던 초기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오늘 우리도 영혼을 다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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