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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청년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 류태영 박사
연기자의 수명은 배역을 얼마만큼 제대로 소화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누군가가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실제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맡는 역할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명배우란 설령 너무나 동떨어지고 감당키 어려운 역할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를 말한다.
“연기자가 대통령이라는 배역을 맡았을 때 비록 그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대통령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에 맞게 연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배우인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배역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훌륭히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은 결코 내가 잘나고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배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힘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촌 오지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게 굳이 맡겨진 배역을 따진다면 누가보더라도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을 맡은 떳떳한 명배우로 류태영 박사는 우리 앞에 서 있다.
인생의 설계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가난의 굴레, 그러나 신앙으로 생애를 살며 기도로 자녀들을 가르치신 어머니가 있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받은 은혜체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그를 교회로 이끌었던 이유였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교회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야 말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푸라기보다도 못한 것들을 들어 귀하게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어떤 역경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지혜였다. “움막같은 집에서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기거하던 좁은 단칸방. 모두가 잠든 후에 비로소 방 한구석에 앉은뱅이 책상을 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졸다가 관솔불에 앞 머리털이 산불처럼 타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동네 어귀에 있는 변전소에 찾아가 밤새도록 켜져 있는 전기불 밑에서 밤새워 공부하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배달원, 아이스케이크 행상, 빨랫비누 장사를 하며 열여덟이란 나이가 되서야 겨우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커다란 백지장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1주일을 고심한 끝에 인생의 설계도가 완성 되었습니다. 백지장을 펼쳐놓고 줄을 그어 가야할 고속도로를 그린 것입니다. 시간의 고속도로에는 대학입학, 결혼, 직업 등을 기재해 놓았습니다. 막막한 당시 형편에서 어느 하나도 보장되는 일이 없었지만 미래를 채워나갔습니다. 믿음이 있고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어디있겠는가 되새기며 작성한대로 실천하기를 맘먹었습니다.”
실천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일 반성하고 새다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용기가 솟구쳤다. 헐벗음과 굶주림이라는 밑바닥 인생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실 배역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님 귀하
서울에 올라와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유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대학생활에서도 유학이라는 말한마디가 언제고 어디에서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매일 기도를 했다. 그리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반드시 응답을 주시리라 믿었다. 그렇게 새벽기도 하기를 13년. 마침내 응답이 주어졌다. 우리나라 농촌에 대한 논문을 쓰라는 응답.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농촌을 잘살게 하겠노라 다짐했던 부분이고 그 꿈을 따라 지금까지 줄곧 한길만을 달려올 수 있었다.
덴마크의 국민운동에 관한 책을 대한 후 그는 불모의 땅을 비옥한 땅으로 일궈낸 덴마크를 직접 몸으로 느끼기를 소원했다. 갑자기 편지 한통을 썼다.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고 싶다고 그러니 나를 초청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디 누구에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어요. 백과사전을 펼쳐 현재 프레드릭9세가 국왕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적혀 있더군요. 바로 수취인에 ‘프레드릭9세 임금님 귀하’라고 써 넣었지요.”
그후 2주일 쯤 지나 편지가 날라왔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는 것. 국왕의 초청으로 덴마크의 선진 농업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계기는 이처럼 동화같이 이루어졌다. 덴마크 유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고 벤구리온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기도의 응답이었다. 결국 인생의 설계도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
해산의 기쁨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류태영 박사는 농촌학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강의와 농촌방문을 통해 실질적인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후 류 박사는 청와대 농촌발전 담당관실의 실무책임자로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저는 가난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많은 경험들을 토대로 한국 농촌의 유토피아를 꿈꿔온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농촌전문가로 조국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지금도 큰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여건을 가진 중국 등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가들에서 류 박사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어 강연과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자국에서 가장 큰 문제인 농촌 개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프로젝트를 일깨워 줄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국정부 관계자들 앞에서 행했던 강연 한 대목.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의식입니다. 어떻게 구두닦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길바닥에서 자도 항상 제 마음은 미래의 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서있는 자체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나에게 이런 혁명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고초와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인내를 주시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류 박사는 증거한다. 태어난 가정환경이나 사회정서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의 흐름과 같은 숙명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류 박사는 올해 일생을 몸담았던 교단을 떠나게 된다. 최근 류 박사는 또다시 도화지를 꺼냈다. 새로운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서다.
“제 스스로 미래의 꿈을 잉태하자고 외칩니다. 아기를 임신한 어머니는 반드시 아기를 낳습니다. 미래에 대한 크고 작은 꿈들을 잉태한 사람에게는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반드시 그 꿈을 해산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꿈꾸기 원하는 청년 류태영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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