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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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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 권 개종과 모니카의 죽음 - 12.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 주었으며 내 가슴 속에서는 슬픔의 물결이
세차게 복받쳐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습니다.
나의 눈은 즉시 정신의 엄한 명령을 받고 눈물의 근원을 빨아 올려
말라 버리게 했으나 그 노력을 하기란 몹시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어린 아레오다투스는 울음을 터뜨렸으나
모두들 달래는 바람에 곧 울음을 그쳤습니다.
어린애 같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도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어른 다운 꿋꿋함으로 눌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머니의 장레를 비탄이나 눈물 또는
한숨 속에서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불쌍하거나
아주 소멸해 버리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지만
어머니는 불쌍하게 죽은 것도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상 생활의 행실과 꾸밈없는 신앙과
확실한 신념으로 인해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마음 속으로 고통스러워했을까요?
그것은 다만 지극한 사랑과 행복 속에서 같이 살아 오던 습관을
갑자기 빼앗겨서 생긴 새로운 상처에 불과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부드럽게 공양해 드린 것을 기억하여 임종의 순간까지도
나를 착한 아들이라고 부르고 내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나
부모의 말을 거역한 일이 없다고 칭찬하셨는데 그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여!
그런 하찮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어머니를 공양한 것과
어머니가 내게 베푸신 봉사를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처럼 어머니의 큰 위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혼은 상처를 입고
나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이 갈가리 찢어진 것입니다.
소년이 울음을 그치자, 에보디우스는 시편을 펴들고 그중 한 편을 노래했습니다.
그러지 온 집안 사람들이 거기에 맞추어
'주님이시여,당신의 자비와 심판을 당신에게 찬송합니다.'하고 따라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남녀 교우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장례를 맡은 사람들이 풍습대로 하는 동안 나는 한 구석으로 물러 앉아
나를 혼자 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 틈에 끼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그러한 진리의 진정제로 오직 당신만이 알고 계신 괴로움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내가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 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들을 수 없도록
당신의 귓전에 대고 감정의 나약함을 꾸짖고 슬픔의 눈물을 억제했습니다.
그리하여 슬픔을 얼마동안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슬픔이 복받쳐 올랐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 눌러둔 슬픔이 통곡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인간적인 것이 사물의 질서에 따라, 우리의 현 존재의 운명에 따라
한 번은 꼭 오고야 말 것이며 내가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므로
내 괴로움에 새로운 괴로움까지 배가되어 나에게 이중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유해가 묘지로 운반되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거기서 떠나올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지방의 풍속대로 무덤에 시체를 안치하고
어머니를 위해 속죄의 제물로 당신께 기도를 드릴 때
즉 당신을 위해 기도를 올릴 때에도 나는 울지 않았으나
온종일 그저 묵묵히 마음 속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란한 마음으로 이 슬픔을 낫게 해주십사고 기도했으나
당신은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습관의 유대라는 것이 정신에 대해서까지도
그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명심하자는 뜻인 듯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목욕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마음의 짐을 떨어 버리는 것을 '바르네이온(목욕)'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시여, 나는 그 일조차도 당신의 자비앞에 낱낱히 고백합니다.
목욕을 하긴 했지만 하기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슬픔의 쓰라림은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숨 자고 난 후에야 슬픔이 어느정도 가라앉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혼자 누워 암브로시우스의 그 진실에 넘치는 찬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모든 것의 창조자
온 하늘을 밝히옵니다.
밝은 빛으로 낮을 옷 입히시고
포근한 잠으로 밤을 옷입히시며
하늘을 다스리는 임
나른한 팔다리 쉬게 하시어
내일의 힘을 길러 주시고
피곤한 마음에 생기를 주시어
시름에 찬 고달픔을 잊게 하십니다.
그로부터 나는 점차로 당신의 여종을 기리게 되었고
당신에게는 경건하고 우리에게는 부드럽고 상냥하던 그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그녀와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와 나에 대해서 울고 싶었습니다.
억제했던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기 때문에 나는 쏟아지는 눈물 위에
마음이 자리를 펴고 거기 슬픈 마음을 뉘어 놓았습니다.
내가 이처럼 큰소리로 울어도 비방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당신의 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여! 지금 당신에게 그 사실을 글자로 써서 고백하오니
읽고 싶은 자는 읽고 멋대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면전에서 살 수 있도록 여러 해를 두고 나를 위해 울어 준
어머니에 대해 이처럼 약간의 눈물을 흘린다고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원대한 사랑이 있다면 모든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아버지인
당신 앞에서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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