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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

요한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877 추천 수 0 2010.03.21 23: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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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46-54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 

2002.10.27

벼룩은 근육이 발달하여 자신의 몸길이보다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벼룩을 잡아 유리 병에 넣고 유리병 중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으면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유리에 부딪치게 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실험을 하면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간의 유리 장벽을 없애도 벼룩은 예전 유리벽 전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벼룩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국한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으로 큰 수조(물을 담아두는 큰 통)를 만들어 물고기를 넣고 중간에 유리벽을 쳐놓으면 물고기 역시 중간에 막힌 유리에 머리가 계속 부딪치다 보면 나중에는 중간에 아무 것도 없는데도 중간을 넘어가기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장애물이 그곳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자신의 세계를 수족관 반으로 제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는 믿으려고 하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사람은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경험의 한계에 갖혀 새로운 세계로 가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유리 병 중간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왕의 신하로 아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을 통하여 예수님 만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생을 산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왕은 헤롯이기 때문에 헤롯의 신하인데 여기 신하는 왕자나, 왕의 경호를 맡아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든지, 왕을 육신처럼 돌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용된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복음 8장 3절을 보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이 아니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는 왕궁에 살던 사람이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아무리 많은 부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이 사는 곳에서 34KM나 되는 예수님 있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신이 낳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갖가지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사업문제로, 인간 관계문제로, 자식문제로, 경제 문제로 질병문제로 나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유리벽을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능력있는 신앙인으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먼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예수님을 만나 신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분이 변화되면 변화된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냅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판사가할 수 있는 있고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는 길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여 이루는 것입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그 때부터 하는 일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농부로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결혼으로 신분이 바꾸어 집니다. 대통령 아들하고 결혼하면 어느날 대통령의 며느리가 되어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아들이 질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만났습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나아가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헤롯만 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와 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걸레를 아무리 낙스로 세탁을 한다하여도 행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 능력있는 자로 살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 주라고 고백합니까? 뭐가 아쉬워 예수님께 나아가겠습니까? 그 한계 상황 때문에 더 겸손해 집니다. 그 한계 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습니다. 그 한계 상황 때문에 더욱 매어달립니다. 예수님께서 핑잔을 하는데도 그는 예수님께 매어 달리며 주라고 고백합니다. 왕만이 자신의 주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신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한계는 예수님의 초청장입니다. 예수님이 만나자고 보내는 초청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평탄함은 우리를 도태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환란의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브닌나가 있었기 때문에 한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가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위대해 지는 것이고 골이앗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성장을 시키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고난받음으로 겸손하게 되고 고난에 처함으로 감사를 감사로 알게 합니다. 사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고통없이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위대한 예술도 고통의 산물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그 뒤에는 피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좋아하고 일생을 통해 심혈을 기울이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그 아이들 고통의 산물입니다. 우리 교회 초대 반주자로 봉사하시다 결혼하여 미국에 가있는 혜경자매에게서 가끔 이메일이 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벌써 4개월이 되었다고 사진과 함께 이메일이 왔습니다.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낳기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습니까?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입덫하며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맛을 냄세 제대로 맡지 못하고 얼마나 고통을 겪습니까? 산고의 진통을 우리 남자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고통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랠만한 감동을 주는 곳곳에 그 위에 눈물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그 때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아름다운 인생 만들기 위해 진정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생을 만들기 위해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라고 사랑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인 가운데 미즈노 겐조라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11세 때 뇌성 소아마비로 성장이 멈추어서 그 때부터 자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뼈에 가만히 살만 덮어놓은 것 같은 그런 하반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장한 것은 얼굴밖에 없는데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고통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아니했을 것을..."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입니다. 오늘 이 시간 자녀 문제로 괴로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풀려고 해도 해결 되지 않는 인생의 숙제가 있습니까? 나만 왜 재수없이 이렇게 사냐고 원망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의 초청장일 수 있습니다. 손벌리고 기다리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아갈 미래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은혜의 경험이 나가올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큰 풍랑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오라는 축복의 신호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503장 2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는 주저하지 마시고 우리 주님 만나 주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 능력있는 인생을 사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조지 뮬러는 '기도는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최고의 방편'이라고 말했습니다. 뮬러는 기도를 통하여 불가능한 경험의 세계를 가능한 세계로 바꾸어낸 사람입니다. 히스기야왕도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매여달려 기도하므로 15년간 생명을 연장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내리는 불을 체험했습니다.

2.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저절로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자신의 한계를 믿음으로 뛰어 넘습니다. 48절 보니 그는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낱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번 기적을 베푼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46).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소문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고치고자하는 열망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이 없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왕의 신하입니다. 당시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메어 달립니다. 49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아직 온전하지는 못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의 씨를 보신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 중심적인 믿음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아직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문제만 해결받으려는 조금은 이기적인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바로 이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만 가야 나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큰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아들이 낳게 됩니다. 한계 상황을 극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낳게 된 것을 경험하게 되어 말씀을 믿는 믿음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가복은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보십시오. 친구들이 그 환자를 낳게 하기 위해 갑니다. 그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리고 갔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지붕을 뚫습니다. 그리고 침상을 내립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막2:5절을 보십시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남의 집을 뜯었다고 상식에 맞지 않다고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윤리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혈루병 앓은 여인-"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2)"
두 소경-"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9)"
믿음없는 베드로-"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1)"
가나안 여자의 딸-"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음식없어 고민하는 제자 향해-"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 16:8)"
이 시대를 보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마 17:17)"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사람은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멀리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자 망원경으로 보면 은하계에서 약 2000억 개의 별을 볼 수 있지만 육안으로 약 10만개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너무 미세한 것도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일 지라도 모든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중년 남자가 병원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 몸이 좀 이상해요. 어딘가 아픈 것 같은데…”“그래요? 우전 진찰부터 해봅시다.”진찰을 마친 의사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고 합니다. “별로 나쁜 곳은 없습니다. 단지 운동부족인 것 같으니까 하루에 1㎞라도 걷도록 하세요.”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네? 저 보고 걸으라고요?”“전…집배원인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왕의 신하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능력의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한계 상황을 만날 때 믿음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위의 베드로는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적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칭찬한 말만 믿음이 되어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있는 종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빌 4:13)고 고백하였다.
헌터는 [하나님을 제한한지 말라]는 책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비
전과 꿈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불신앙, 불순종, 이기심, 나태, 두려움 등이 그것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큰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말씀을 믿음으로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는 세계는 한계가 있습니다. 앎이란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편견이 생기고 선입견이 생깁니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그 당시 배울 만큼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자신의 아들도 살 수 있다는 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48) 기적을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변인지 된장인지 맛을 보아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 와서 무엇인가 해 주어야 낳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0절에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황당합니다. 살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가서 고쳐 주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두말하지 않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52절을 보십시오. 그 시간에 아이가 낳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너무 자기 경험 중심, 자기 인식 중심, 내가 복음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자기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에게 의논하였다. “신부님,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내가 계속 성당에 나간다면 남편이 저를 죽이겠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 가엽게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가 계속 기도를 하겠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그 다음 주일에 그 부인은,
“오 신부님, 아직까지는 무사합니다. 그러나....” “또 무슨 일이지요?”“어제는 남편이 다른 말을 했어요. 만약 내가 성당에 계속 다닌다면 신부님을 죽이겠다고 말했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마을 저편에 있는 교회에 가보세요.”
말씀 중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자기 스타일과 편견 아집 고정관념에 따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을 통해 내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을 믿으면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습니다.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 그의 마음을 고쳐 주시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51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고침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믿는 믿음이 그대로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53절을 믿음의 조그마한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활활 타는 불꽃은 그 불꽃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웃 장작까지 불을 붙여 줍니다. 처음 믿음은 불신과 섞인 믿음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그 믿음과 혼재된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치료받고 온 가족에게 믿음을 불을 붙이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8년된 병자-베뎃스다
유라굴라 광풍 만난 바울 선장과 자기를 호송하는 백부장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주께서 지난 밤 나와 함께 하셨다. 바울아, 네가 두려워 말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 서야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사도행전 27장 25절을 통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구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눈앞에 나타난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에 불과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고 약속을 믿고 갑니다. 아들을 바칩니다. 여호와 이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증거로 주신 그 약속만 붙잡고 달려갔지, 그 약속의 성취를 그들의 생애에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되도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 23:19)"
사람은 아는 만큼 행하고 자기 지식이 자기 세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기 인식의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자기의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자기를 스스로 작은 자기 동굴 속에 갇혀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전문가의 말이라면 잘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현상에서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해 보십시오.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말씀에 의지 하여 용서해 보십시오. 그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그는 가면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환희의 송가를 들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머지않아 가는 길에 환희의 송가가 들려 올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요한복음4:46-54/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200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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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6 창세기 우리는 기다림에 지치지 않습니다. 창21:1-7  김필곤 목사  2010-03-21 2698
3155 마태복음 우 리는 핵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마28:18-20  김필곤 목사  2010-03-21 2450
3154 누가복음 우리는 은혜로 누립니다. 눅15:25-32  김필곤 목사  2010-03-21 2735
3153 요한복음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13:34-35  김필곤 목사  2010-03-21 2700
3152 이사야 우리는 사명으로 삽니다. 사6:1-8  김필곤 목사  2010-03-21 2890
3151 출애굽기 우리는 소망을 말합니다 출17:1-7  김필곤 목사  2010-03-21 2342
3150 이사야 일어나 빛을 발하라 사60:1-9  김필곤 목사  2010-03-21 3191
3149 누가복음 나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눅12:13-21  김필곤 목사  2010-03-21 2302
3148 이사야 성탄절의 의미 사61:1-3  김필곤 목사  2010-03-21 2601
3147 사무엘상 성공한 지도자와 실패한 지도자 삼상18:6-16  김필곤 목사  2010-03-21 2613
3146 역대상 참여자와 예외자 대상15:25-29  김필곤 목사  2010-03-21 2160
3145 누가복음 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눅7:11-17  김필곤 목사  2010-03-21 2577
3144 출애굽기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출4:10-17  김필곤 목사  2010-03-21 2914
» 요한복음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 요4:46-54  김필곤 목사  2010-03-21 2877
3142 창세기 좋은 선택의 원리 창13:1-13  김필곤 목사  2010-03-21 2551
3141 로마서 하나님 영의 인도를 받자 롬8:13-17  강종수 목사  2010-03-21 2202
3140 열왕기하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왕하 5: 1 -14  이정수 목사  2010-03-20 2412
3139 히브리서 눈물의 메시야 히5:7  이정수 목사  2010-03-20 2083
3138 창세기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가 ? 창12, 15, 22 장  이정수 목사  2010-03-20 2543
3137 창세기 사람을 찾습니다 창37:1-20  이정수 목사  2010-03-20 1844
3136 마가복음 지붕을 뚫고서라도 막2:1-12  이정수 목사  2010-03-20 2634
3135 갈라디아 교회를 떠받치는 아름다운 기둥 갈2:1-10, 계3:12  이정수 목사  2010-03-20 2539
3134 빌립보서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세 가지 신앙 원칙 빌1:20  이정수 목사  2010-03-20 2392
3133 시편 삶 자체를 여호와께 맡기고 살자 ! 시37:5-6  이정수 목사  2010-03-2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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